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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일 23시 17분 등록

늦게 제출하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읽는 것, 이해하는 것 또 정리하는 부분에서 애로사항이 좀 많았네요 ^^;

앞으로는 제출 시간 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기열전 1

사마천 지음/김원증 옮김/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사마천 司馬遷 (BC 145~90?)

 

사기열전의 저자 사마천은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중국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서 중국 한나라의 전성기였던 한 무제 때 활동했던 역사가이자 문학자이다.

사마천.jpg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경 지금의 중국 섬서성 한성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의 집안은 대대로 주의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으로서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 때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하는 직인 태사령직을 역임했다. 태사령직을 수행하면서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천시되고 기술직으로 전락하고 옛 기록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깊은 비애를 느끼며 사서편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마담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훗날 사마천으로 하여금 [사기]를 집필하도록 하는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태사령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벼슬

도가와 주역 및 음양의 원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사마천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이러한 황로사상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사마천은 어릴적부터 역사와 자연스럽게 친숙해졌으며 그의 아버지의 의도에 따라 역사가로써 소양을 갖추게 된다. 

,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직접 현장 답사하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 후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고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마천은 10세 무렵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에서 당시 경학대사인 동주서와 공안국에게 고문을 배우고 20세 때부터 약 3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고적을 직접 답사하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을 채록하는 등 주요 사적지를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기원전 110년경 사마천의 나이 36세 되던 해, 아버지 사마담이 낙수에서 병으로 쓰러지면서 사마천에게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고 당부한 뒤 사망한다. 이에 사마천은 평생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역사서 집필을 자신의 소명으로 간직하고 평생을 역사서(史記)집필에 매진한다.

아버지 사마담이 세상을 떠난 후 사마천은 원봉 3(기원전 108), 그의 나이 38세 때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사령에 봉해진다. 사마천이 태사령이 된 지 5년 후 한 문제는 태초력이라는 새로운 역법을 발표하고 연호를 바꾸는 봉선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대략 이 무렵 부터 사마천이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사기]를 온전히 혼자 힘으로 저술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아버지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사기]의 체계를 세워두었고, 사기의 일부분은 어느 정도 완성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중 천한 2(기원전 99)에 사마천은 일생 일대의 비극적인 시련과 마주하게 된다. 당시 한나라의 장수 이릉이 흉노와 싸우던 중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두고 무제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은 이릉을 역노로 간주하고 지탄했지만 사마천만이 이릉의 투항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그를 변호하는 바람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 갇힌 사마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오십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택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던 사마천은 어쩔 수 없이 궁형을 선택하게 된다. 사마천의 나이 48세 되던 해에 그는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후 2년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다시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황제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으로서 환관으로서의 최고직인 중서령에 오른다.

사마천이 어찌보면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유지였던 역사서 집필을 끝마치고자 하는 소명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의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함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서를 집필하게 되고, 사마천의 [사기]가 바탕이 되어 중국인들은 그들의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써서 후세에 남기는 작업을 이후 2,000년간 계속해왔다.

[사기]를 집필하면서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생각을 담으려는 노력을 했다. [사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한 책을 넘어 당시 사회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생각과 평가를 담은 역사서이다. 주관적이지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통해 사마천은 자신의 의식과 이상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개진하는 것이 아마도 사마천의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흉노에 투항한 이릉 장군을 지탄할 때에도 그를 변호하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그 집필이 완성된 후 현재까지 역사가들에게는 필독서이자 고전으로서 중국인을 넘어 널리 읽히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서문

<6> 춘추 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필요악이었다.

 

<7> [사기 열전]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온갖 인물 군상의 결정체

 

<8> 편작의 명언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사람을 살려낼 뿐이다.” 라든지 질병은 징후가 나타날 때 고쳐야 한다.” 혹은 사람들은 다병을 걱정하고, 의사는 의술이 적음을 걱정한다.” 등은 오늘의 의학도들에게도 소중한 교훈일 것이다.

 

<9>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은 원전의 뜻을 자구 하나하나 따져 가며 번역하고 난 다음 그에 수반되는 전고나 논의의 근거를 찾아 다시 그것을 원전의 문맥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주는 독자가 원전을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원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à 번역자로서의 자세

 

해제

<11-12> [사기] [본기本紀] 12, [] 10, [] 8, [세가 世家]30,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는 오제五帝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는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칸의 맨 앞에는 연원을 기록하고, 그 아래 칸에 내용을 다룬다.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13> [사기] 이전의 중국의 역사서는 매년 매달 매일의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으니, [춘추] [서경] 등 거의 모든 역사서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마천은 사료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의 발전적 흐름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주었기에,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지혜로운 삶의 지침서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14>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니다.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뒤 [태사공서] 또는 [태사공기]로 불렸는데, [태사공기]의 약칭이 바로 [사기]이다. 위나라 건안 연간에 순열이 지은 [한기]라는 책의 권 30태사공사마천사기라는 말이 나와 정식으로 사기라는 말이 태사공서라는 명칭을 대체하게 되었다.

 

<15> 사마천이 낙양에서 아버지와 만났을 때,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서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고 당부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에서 수 많은 자료를 정리가호 수집하면서 4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끝에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에 정식으로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20> 사마천은 전기를 개인의 역사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이렇듯 사마천 [열전]에서 인물에 대해 나열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기 보다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21> 사마천은 인물들의 개별적인 유형에 입각해서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를 움직인 인물들을 재구성하고, 그런 근거를 그 이전의 경서와 제자서들 뿐 아니라 민간의 구전에서도 취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24> [사기 열전]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준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24-25> [사기 열전]은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생관 위에 개인적인 비극을 역사 의식으로 승화시켜,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을 조망해 나갔기 때문이다.

 

<25> [사기]는 세상에 나오고도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더욱이 한 문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아버지 경제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두고 매우 노여워하며 이 두 본기를 폐기하도록 했다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무제의 영토 확장 정책에 대한 사마천의 신랄한 비판은 [사기] [봉선서], [평준서] 등을 비롯하여 열전 곳곳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게다가 [사기]가 구십 년 늦게 나온 반고의 [한서]와 달리, 도가와 병가, 잡가 등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한나라의 국가 이념인 유학에 배치된다는 점도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배척되는 요인이 되었다.

 

<27>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사의 필두로 거론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또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의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     백이열전

<59>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진 게 공자의 칭찬에 의한 것임을 언급

천도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면서 인간사의 불공정한 여러 형태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60> 사마천이 단순히 수양신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적었다기 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총괄적인 입장을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       왜 유가 경전에는 허유와 무광 등의 사적이 없을까?

-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64>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       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 길을 갈 수 있다.

<65>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뜻을 좇아서 행한다는 말이다.

 

<66>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세상이 다 흐려졌을 때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 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는 이름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서민은 그날그날의 삶에 매달린다..”

 

<중략>  첨부 파일 참조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사기열전.jpg  

사마천의 [사기]는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중 <열전>은 총 70권으로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중 민음사의 사기열전(김원중 옮김) 1()에서는 [백이 열전]부터 [žžž관 열전]까지의 35권을 다루고 있다.

역자인 김원중(건양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은 번역에 있어 원전의 뜻을 자구 하나하나 따져가면 번역하고 난 다음 그에 수반되는 전고나 논의의 근거를 찾아 다시 그것을 원전의 문맥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번역에 임했다고 한다. 역자는 열전의 매 권마다 해제를 두어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소제목을 두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전체적인 내용의 구성은 역자가 머리말 부분의 [해제]에서 소개한 내용을 옮기도록 하겠다.

[열전]이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사기 열전에서는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도 포진되어 있다.

[사기] 이전의 중국의 역사서는 매년 매달 매일의 역사적 사건을 연대식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으나 [사기]는 이러한 방식에서 벗어나 기전체를 채택했고 [사기]는 기전체의 효시가 된다. 기전체(紀傳體)는 기()·전()·지()·표() 등으로 구성하여 서술하는 역사 서술 체재(體裁)로서 가장 중요한 기()·전()의 이름을 따서 기전체(紀傳體)라고 한다

*기전체: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本紀)·열전(列傳)·지()·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되어 중국·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정사(正史) 서술의 기본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또한 사마천의 각 권의 끝 부분에 태사공은 말한다(태사공왈)”라고 각 권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의견과 평을 가미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본서를 읽으면서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옳은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그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거나 상대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는 역적이 될 수 있으며, 타이밍이 잘 맞으면 역경 속에서도 일어나 빛을 볼 수 있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충직과 굳은 절개로 살아간 굴원과 가생의 이야기나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예양의 이야기에서 가슴깊이 새기고 살아가야 할 귀감이 되는 교훈을 얻는다.

 

<397>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선생은 이런 원리를 아십니까?”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431> 태사공왈: 속담에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461> 태사공왈: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라고 하였다.

 

<515-516> “일을 잘 꾸민다 해서 반드시 일을 잘 이루는 것은 아니며, 시작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무리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à 지조와 절개의 덕목

 

<545> 태사공왈: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à 자신의 경험담에서 나오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586> 굴원은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군주를 섬겼지만 헐뜯는 사람의 이간질로 곤궁해졌다고 할 수 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원이 [이소]를 지은 것은 이처럼 분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스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겠소!” à 굴원의 굳은 신념과 지조를 보여주고 있음

[보완점]

수 십 년간의 자료의 수집과 또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최대의 치욕을 무릅쓰고 소명의식을 갖고집필한 역사서이기에 그 내용이나 전개방식에 대해서 감히 평할 만한 엄두가 안 난다. 아직은 사기에 대한 이해도가 미미한 수준인 것 같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은 기존의 역사서 집필 방식이 아닌 기전체라는 방식을 택하였다는 점이다.

열전의 경우 [인물] 중심으로 펼쳐나간 것이 인상적이다. 다만 왜 특정한 인물로 각 권을 구성하고 순서를 배열했는지에 대한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만약 내가 본 서를 집필한다면 비슷한 시사점을 주는 인물끼리 함께 배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일부 유사한 인물끼리 함께 배치한 부분도 있으나 (굴원/가생 열전이나 자격열전 등) 어떤 경우 왜 그 열전에 상이한 특성의 인물들이 함께 들어가 있는지 의문이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태사공 왈부분을 보면 일면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추후 두 번 읽기 부분에서 이 부분에 보다 중점을 두어 구성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본 서는 2003<조선일보> 선정 대학 교수 추천 베스트 선정 도서 10에 올랐고 최고의 사기 번역서로 선정되는 영광도 누렸다고 하는데, 그만큼 역자가 번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돋보인다. 기존의 다른 번역서와 비교해볼 때 그 충실도가 탁월한 것 같다. 특히, [해제]를 두어 독자의 이해도를 돕기 위한 노력에 감사한 마음이다.

 

 

IP *.35.2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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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3 08:23:23 *.152.83.4

처음 사기열전을 읽었을 땐 뭐가 뭔지 너무 혼란스러웠던 느낌이었어요.

사실 중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알길이 묘한 법이니까^^

그후 몇년에 걸쳐 중국연대별 나라와 사건,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인물들이 다시 배치되면서

사기의 제대로 된 재미를 느꼈습니다.

인간사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좋은 서평, 진희씨에게 큰 자산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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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3 10:12:00 *.91.142.58

선배님,

 

바쁘신 와중에서 관심갖고 피드백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북리뷰 부분이 만만치가 않네요.

더더욱 용맹정진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만간 일전에 순연되었던 넘버 3 모임 추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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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09:16:43 *.131.89.170

사기열전에 한 인물이 어느 편에서는 주요 인물로 나오고, 다른 편에서는 엑스트라쯤으로 등장하는 것을 왜 그걸까 궁금해 하다보면 사마천이 직접적으로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쓴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그 인물을 열전에 포함시켰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워낙 다양하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니 의문이 휘드라 머리만큼 많아집니다. 전 인물들에 반하고, 혹은 욕하고 하다보니 정신이 없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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