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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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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2일 01시 33분 등록

사기열전 1 (두 번 읽기)

사마천 지음, 원중 옮김, 민음사(1 2)

 

1.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 기원전 145?~90?

전한의 역사학자.

자는 자장이며 섬서성 용문 출신으로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때 태사령이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에 와서 동중서와 공안국에게 학문을 배웠다. 20세때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 전역을 두루 돌아온 후에는 낭중에 올랐다.

 

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그에게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108년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했으며 천제에 제사를 드리는 봉선에 참여하고 역법을 개정했다.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 금궤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했다. 기원전 104년 정식으로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

 

기원전 99년 이릉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사마천은 홀로 무제 앞에 나아가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옥에 갇힌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에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졌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이었다.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어 했으나 귀족이 아니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기원전 93년 사마천은 그의 친구 임안의 추천을 받아 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 이때는 사기의 집필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 만이었다.

 

주공에서 공자까지를 500, 공자 사후부터 그때까지를 500년이라 하고 자기는 주공과 공자의 도를 이은 자라는 태도로 고금의 명저 사기(史記) 130권을 저술하였다.

 

à (두 번 읽기 중에 추가된 내용 푸른 글씨로 적음)

사마천은 천도에 대해 회의적인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사상은 사마천 자신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피로서 얻은 것이다. 사마천은 한왕조가 천명을 얻어 왕조를 세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하나의 위대한 왕도정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 자신이 50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행운을 한 몸에 안았다고 굳게 믿으면서 제2의 공자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빈객을 사절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면서 천자의 총애를 받으려고 애썼다. 이릉을 위해 변명한 것도 한무제를 위로하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은 보답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궁형이라는 참형을 당하게 되며 상상하기 어려운 굴욕과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피의 교훈은 사마천의 천명관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로 하여금 천도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린다는 전통적인 신념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하였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쌓였던 회의와 고민의 정서는, 백이와 숙제가 인덕을 쌓고 선행을 하였지만 결국 굶어 죽어간 사실을 서술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었다. 사마천은 백이의 참사에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서 선악과 인과응보가 전도된 무수한 사례들을 연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하늘에 따지려는’(問天)강렬한 충동이 생겼고, 이성의 광명이 천명사상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백이열전』의 내용은 단지 천도에 대한 회의에 그쳤을 뿐, 『사기』천도관의 전체적 체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상은 『사기』에서 잠깐 등장했을 뿐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으며, 천인감응의 우주관은 『사기』에서 여전히 굳건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의 첫 권을정신의 귀족을 대변하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로 출발한다. 그리고 『태사공 자서』를 제외한 『사기』130권의 마지막 권인 129권을현실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장사꾼들의 이야기인 『화식열전』으로 마무리하는 절묘한 안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둘을 대비하며 인간과 인생에 대한 심오한 철리를 터득함과 동시에 유익한 균형감각을 얻게 된다.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 첨부 참조

 

3. 내가 저자라면

 

사기열전을 두번째 읽었다. 이번에는 사기열전 2’도 훑어 보았다. 첫 번째 볼 때 보다 이번 두 번째 읽기를 통해 좀더 사마천의 생각에 접근한 느낌이다. 그만큼 사기열전 어려운 책일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장을 꼽아 보았다.

 

1)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에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 (p 67)

 

2)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게 정치의 비책라는 말이 생겨났다. (p 74)

 

3)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다만 이것뿐이오. (p 81)

 

4)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p 84)

 

5)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 서는 안 된다. (p 88)

 

6) 이웃집 사람과 관기사가 한 말은 모두 옳으나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고 가벼운 경우는 의심을 받았다. 이는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p 90)

 

7)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 91)

 

8) 예전에 오공께서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공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리 내여 우는 것입니다. (p 116)

 

이정도로 마음에 크게 와 닿은 명문장을 간추려 보았다. 이제부터는 사마천의 역사 서술방식의 아쉬움을 써 보겠다. 사마천은 노자의 道民을 최고의 경지로 말하면서 차츰 하위 통치철학으로서 利民(상가), 敎民(유가), 齊民(법가), 그리고 가장 최하의 통치술로 爭民(병가)의 통치를 이야기한다. 상가는 관중을 효시로 한 제자백가를 의미하는데, 일찍이 관자는 상업을 경험하면서 민중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키웠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장자를 좀더 부각시켰을 것이다. 사마천이 장자를 노자의 계통을 잇는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후대에 장자를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오류가 생겨났다. 노자는 제국이 궁극적 통치술을 이야기하는 방향이라면, 장자는 철저하게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자였다. 더 나아가 장자의 관심은 통치자가 아니었다. 목수나 백정 등 하찮게 여겨지는 보통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도 통치자처럼 똑같이 소중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을 강조하는 철학을 이야기 하고 있다. 통치자와 귀족의 도덕심을 강조했던 공자와 달리 장자야 말로 궁극적 소통의 원리를 찾아낸 현자였다. 마음의 수양을 버리고 비우는 데에서 인간은 타자와 소통이 가능한 상태로 나아간다는 원리를 각종 우화로 이야기한 철학자가 바로 장자였다. 이 부분이 소홀히 다루어지면서, 장자의 책에 노자를 크게 높인 점만이 강조되었다. 이 점이 크게 아쉽다.

 

둘째, 하늘이 공명정대한가라는 질문을 좀더 발전 시켰을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같이 이가 궁형을 당하는 것을 보아도, 백이 숙제 같은 고결한 성인들이 굶주려 죽는 최후를 볼 때, 과연 하늘은 공명정대한 역사를 집행하는 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이 때 뿐이고, 사기열전에 흐르는 기본적 방향은 정의는 결국 빛을 발하고,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못된 인간은 자신의 저지른 죄값을 결국 받게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요컨대 역사와 인간 운명의 논리를 여전히 공명정대하며 비록 그 순간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국 공명정대하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논리 정도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사마천이 최고의 경지로 떠 받다는 노자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 오히려 공자의 유학이라면 이해 가기도 한다. 노자는 순환론적 사고 방식의 소유자였다. 이분법적 사고방식도 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화를 피하고 제 명대로 살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선악의 분명한 사마천의 역사관과는 분명 다른 시각이다. 내가 저자라면 바로 이 점을 좀더 분명하게 따져 쟁점을 정리하는 관점을 기술했을 것이다.

 

 

2013-07-22

坡州 雲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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