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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3일 11시 08분 등록

사기열전_구달리뷰#5 (2014.5.13.)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I.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 司馬遷, (BC 145~ BC 86) / 고향은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이며, 자는 子長 이다. 사마천은 서한 시기의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이며 여행가이다. 사마천의 조상 사마씨는 하늘과 땅에 관련된 신성한 관직을 맡아오다가 오로지 역사 기록만을 취급하는 사관으로 바뀌었지만, 일족 가운데 선조의 업을 면면히 계승해오면서 이를 부활시킨 인물이 바로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다.  사마담(司馬談)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사관이 가져오는 문서나 기타 기록을 정리 보존하는 태사령이었다. 태사령인 아버지 사마담을 따라 장안으로 와서 당대의 대유학자인 동중서와 공안국에게서 옛글을 배웠다.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을 역사가로 만들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역사가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질은 문헌을 읽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사마천이 열 살 때부터 고문(한대 이전의 문자)으로 쓴 문헌과 기록을 읽는 훈련을 시킨다. 이렇게 10년을 훈련한 뒤 사마천은 어떠한 문헌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역사가가 아무리 문헌을 잘 읽는다 해도 거기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마담은 이미 성인이 된 사마천을 역사가 전개된 장소의 실지검증, 곧 현지조사에 착수하도록 했다. B.C. 126. 20세가 된 사마천은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사마천은2년 남짓한 세월동안 여행하면서 각지의 역사 유적을 조사하고 옛 기록을 수집했다.

향사와 같이 당시까지 남아 있던 옛 의례를 살펴보고 또 구전하는 전설과 설화를 채집했다.

후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 현장답사하고 면밀하게 조사해서 얻은 압도적인 현장감을 가질 수 있었다. 사마천의 이러한 안목은 먼 과거의 사건과 역사 인물을 ‘지금 여기’의 사건과 인물로 그려낼 수 있었다.

 

<사기>를 읽다 보면, 여행할 때 보고 들었던 지식을 자연스럽게 삽입하여 역사적 과거에 현재가 겹쳐지도록 서술한 장면을 접할 것이다. 이러한 사마천의 어조는 먼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되살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위세가,44)에서 전국 칠웅의 하나로 열거되는 위나라의 흥망을 묘사한 뒤, 사마천은 이렇게 비평을 덧붙였다.

<내가 위나라의 옛 도읍지 대량의 폐허에 들렀을 때 그곳 사람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대량을 함락시켰을 때, 하구의 물을 대량으로 흘려보내 3개월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항복을 빌었지만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고 했다. 폐허와 그것이 내포하는 역사적 시간의 연쇄, 폐허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은 내가 사기를 서술할 때, 현장에서 본 유적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2년여의 여행을 마친 사마천은 스물 두 살에 낭중에 임명되었다. 35살 때 (B.C. 111)때 무제의 명을 받고 파, 촉으로 원정하고 서남쪽으로 더 내려가 공,, 곤명등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공략하는데 참가했다. 이는 서남 이민족을 평정하기 위해 무제가 파견한 군대를 따라가는 공적인 여행이어서 자유로이 각지를 편력한 첫 번째 여행과 분명히 질이 달랐다. 사마천은 이 기회에 첫 번째 여행 때 가보지 못했던 중국 서남부를 주파하고서 더욱더 견문을 넓혔다.

 

죽음에 이른 아버지를 만나 본 다음, 사마천은 그대로 태산으로 향해 아버지 대신 봉선 의식에 참가했다. 그 뒤 무제는 곧바로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선 동쪽으로 황해 연안(산동성)으로 갔다가 이어서 북쪽으로 올라가 멀리 만리장성의 북동쪽 갈속 요녕성에 이르고, 거기서 서쪽으로 나아가 구원(내몽고자치구)까지 갔다가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장안으로 돌아오는 대장정을 감행하였다. 이때 무제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 사마천은 북대지대도 주파하게 되었다. 세 차례에 걸쳐서 동서남북 중국 대륙을 구석구석까지 돌아본 사마천은 역사가이기 이전에 행동하는 대여행가였다.

 

사마천이 36세 되던 해, 무제의 봉선의식에 참석하지 못해 화병으로 죽은 부친이 유언을 남긴다.‘너는 반드시, 춘추 春秋 이래 공백으로 남아있는 4백 년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서 정리하는 대업을 완수해라. 역사서를 집필하라’

 

궁형의 치욕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사명(使命)이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게 된 이른바‘이릉의 화’는 사마천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생의 재앙이었다. 불과 5천의 병사로 흉노 10만의 기병을 상대하여, 1만명을 살상했으나 흉노에게 포로가 되어 투항한 이릉. 평소 이릉을 뛰어난 장수로 여기던 사마천은 홀로 나서 이릉을 변호하였다.

왜 사마천은 거리낌없이 이릉을 변호했을까? 그 까닭은 사마천이 그때까지 사람의 심리를 읽고, 어둡고 끔찍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슬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사령 사마담의 아들로서 유소년 시절부터 역사가가 되기 위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자라서는 각지를 여행했으며, 아버지를 여윈 다음에는 뒤를 이어서 수월하게 태사령이 되었다. 사마천의 인생은 47세 이릉의 사건에 연루되기까지 권력지향과 인연이 없는 역사라고서 극히 순조롭고 심각한 좌절과는 무관했다.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입신출세와 보신을 꾀하는 조정의 교활한 정치 관료, 문화 관료와는 근본부터 다른, 좌절을 모르는 사람의 무방비가 도리어 사마천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이릉이 흉노에게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화가 난 한무제는 먼저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켰다. 그 다음, 이릉을 변호한 괘씸죄에 걸린 사마천은 형벌을 선택해야 할 운명이다.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번째 방법은 목숨 값으로 50만 전을 내는 방안. 일명 속전(贖錢)이 있었다. 두번째 방법은 궁형, 한마디로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선택해야만 했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사기를 써야한다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마천은 5년 뒤에 사기를 탈고했다. 사기는 사마천의 <>로 쓴 책이다.

 

사마천의 나이 51세 때 쓴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가 당시 얼마나 치욕감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묘소를 참배할 수 있을지, 하루에도 아홉 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가만히 집에 앉아 있으면 멍하니 무엇인가를 잊은 듯 어처구니가 없고 자꾸만 부끄러워져 언제나 등골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신다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 아홉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다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날 사서를 쓰겠다는 결심이 ‘대장부의 태산과 같은 선택‘이었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 속에서도 자결하지 않고, <사기(史記)>에 매달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사마천이 언급한 저작들은 한결같이 저자들이 불우한 시기에 완결시킨 이른바 ‘발분(發憤)의 저작’들이다. 그는 이를 두고 “저자들이 마음 속의 울분을 시원하게 풀 방법을 찾은 것”이라 했다.

<시경>에 수록된 시 300편의 대부분도 성인, 현인이 분노를 터뜨려서 지은 것이다.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 것입니다.(故述往事 思來者),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태사공자서’, ‘사마천전·보임안서’)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마천이 불후의 역사서를 쓴 까닭이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결국 미래에 대비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것. 이는 역사라는 것이 과거사일 뿐인데, 과거에 집착할 까닭이 있느냐는 야유에 대한 대답이다.

 

역사 기록을 취급하는 태사령의 직을 잃은 사마천은 중서령의 직을 수행하면서 묵묵히 사가판 역사서인 사기를 계속해서 써나갔다. 그리하여 B.C. 90. 56세에 드디어 탈고하고 4년 뒤 B.C. 86. 60세에 사마천은 세상을 달리했다. 그의 숙적 무제가 죽은 이듬해의 일이었다.

사마천의 선택을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명을 생각해 본다. 사명(使命)이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 즉 생명(生命)을 사용(使用)하는 지침을 말하는 것 아닌가? 사마천은 선친으로부터 자신에 이르는 동안 모든 삶을 바쳤던 역사서의 완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선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궁형을 자청한 이유가 된다. 사마천의 인생 사용설명서에는 오직‘역사서를 집필하라’고 씌여 있는 것이다. 모든 치욕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감수되었고, 이 사건은 그의 삶뿐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의 비극은 130권의 역사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자신의 울분을 누르고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 운명의 비극을 통찰함으로써 불멸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해낸다.

 

2. 내가 저자라면

 

<사기>에서 사마천의 업적은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 복잡함을 단순하게, 어려운 것을 쉽게, 꼬인 것을 풀었다. 사마천의 사기는 다루고 있는 시대가 다른 역사가의 정사보다 길다. 수집 자료도 다양하다. 사기는 생색내기 위해서 만든 작업물이 아니다. 진심으로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기술했다. 그만큼 서술이 방대하고, 사건과 인물에 대한 각도 또한 다양하다.

 

편집이 잘되었다. 각 열전앞에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제시해주고, 시대상을 설명했다. 각 열전에 독자가 글의 전체 내용에 대한 주제를 소제목으로 했다. 그러한 점이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책속에 있는 주제와 핵심 문장을 각 꼭지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점이다.

우선 기술연대를 보면, 삼황오제 때부터 한 무제 때까지, 2500년에서 3000년 정도 되는 역사를 52 6 5백자로 압축했다.

이 중에서 열전 편은 사기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사마천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역사를 왕조 중심의 연대기로만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특징적인 삶을 적극적인 논평과 함께 입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책은 주류 역사에 포함되기 힘든 자객, 글쟁이, 총신, 익살꾼, 점쟁이, 장사꾼, 변방의 이민족 등과 같은 주변부 사람들의 삶까지 적극 역사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중국 고대 2500년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전한다.

사기는 역대 천자들의 역사를 다룬 본기 12, 중요한 연표를 다룬 표 10, 정책과 문물의 발전을 다룬 서 8, 제후들의 역사를 다룬 세가 30, 역사의 영웅들이나 보통 사람들의 활약상을 다룬 대서사지 열전70편으로 나뉜다. 전체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로 씌어진 최초의 역사서이다. 기존에는 편년체(編年體),즉 발생사건을 연대 순으로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전체는 편년체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시각의 다양성까지를 표현할 수 있는 진일보한 역사 서술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사기]가 기전체로 쓰여진 이유는 사마천이 역사를 통해서 인간을 묘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서술을 위해, 수많은 분량의 자료를 처리하는 기본으로써‘기전체’라는 구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사기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란 점이다. 보통 사람들의 활약상들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작용이 역사를 움직인다 라는 걸 직접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기득권자,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의 것이었는데 사기는 일반 인간 중심으로 쓰여졌다. 사기에 나온 인물수도 4,000여명이나 되며, 직업도 100여가지 이상이다. 당시 사람들은 생사관이 뚜렷해서 자살도 삶과 죽음의 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모반과 배신, 암투, 서로 죽이고 죽는 모든 극적인 이야기가 다 나온다.

다음은, 처세술, 리더쉽, 인생을 이끌어줄 수 있는 멘토 역할을 하는데생사관이 가장 뚜렷한 역할이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던진다.

사마천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력으로 머리말을 썼다. 따라서 이러한 사마천의 입장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배움을 얻는다. 어떻게 하면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공을 세우고, 위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시대에 올바르게 적응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것인지, 귀한 배움을 얻는다. 그러나 읽고 나니 또한 혼란스럽고 갈증이 난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정답이 없다는 것, 또한‘사기’로부터 배우게 되니 말이다.

 

역사의 묘미는 과거에서 교훈을 찾고, 미래를 배우는 것이라 들었다. 자신을 먼저 찾고, 자신을 찾았으면, 좌우 눈치보지 말고, 묵묵히, 힘껏,‘자신의 길을 걸어가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시련과 고통속에서 꽃 핀다고 하더니,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이겨내고 이뤄낸 [사기열전] 이라는 작품을 감탄이었다.

 

* 가장 감동적인 귀절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 아홉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다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183

번지가 인仁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또 지智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사람을 아는 것이다.

 

417

옛말에‘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앉아서 진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면 진나라 군사는 애쓰지 않고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조나라를 약하게 만듭니다. 더욱더 강해지는 진나라가 더욱 더 약해지는 조나라 땅을 떼어 받는 일이니 진나라의 요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왕의 땅은 끝이 있지만 진나라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한정된 땅을 가지고 끝없는 요구에 응하면 그 결과는 조나라의 멸망뿐입니다.

 

533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오.

 

586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이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마음의 장절  (첨부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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