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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3일 11시 29분 등록

사기열전

10기 김정은

 

사기열전1, 사마천 지음,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 (기원전 145?~90?)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며, 중국에서 '역사의 아버지' 라 불린다.

 

사마천 연보

 

1(145) 사마천 하양현(현 섬서성 한성시 남쪽)의 농촌에서 태어나다.

4(142) 사마천, 아버지를 따라 서원에서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다.

8(138) 사마담, 태사령이 되자 장안에서 천문, 역법을 주관하다.

10(136) 사마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다

11(135) 무제(22), 유가사상에 입각한 정치 시작.

13(133) 사마담과 사마천 황하· 위수 일대를 다니며 자료 수집. (사마천의 현장답사가 시작됨)

14(132) 무제,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는 치수사업을 벌이고, 1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를 막다.

17~18(129~128) 사마천, 동중서에게 「공양춘추」를 배우고, 공안국에게「고문상서」를 배우다. (이때의 교육은 훗날 사기저술에 든든한 기초가 된다)

19(127) 무제, 봉건체제 강화를 위해 부보언의 건의에 따라 지방호족과 부호들을 무릉으로 강제 이주시키다. 이 무렵 이름난 유협 곽해가 유가파들의 박해를 받아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사마천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아 「유협열전」을 쓰다. 사마천 장안으로 오다.

20(126) 사마천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시작하다. 실지 답사는 약 2년으로 훗날 「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다.

21(125) 흉노 칩입하다. 사마담, 무제를 수행해서 감천(甘泉)에 가다.

22(124) 사마천, 낭중이 되어 처음 벼슬살이에 나서다.

24(122) 사마천, 아버지와 함께 무제를 수행하여 옹()에 가서 제사를 지내다.

33(113) 무제, 지방 순시에 나서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순시에 동행하여 각지의 민정과 풍속을 살피는 계기를 가지다.

35(111) 무제의 명을 받아 서남지방 문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다. 이 경험은 「화식열전」의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36(110) 무제, 안정기반을 구축한 후 봉선(封禪)대제를 결심하다. 사마천, 봉선대제를 위해 지방으로 가던 중 아버지의 위독전갈을 받고 낙양으로 되돌아 오다. 아버지 담은 태사령이 되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뜨다. 천은 다시 봉선에 참관하다.

37(109) 무제, 치수사업을 벌이고, 천은 역대 치수사업을 개괄한 「하거서」를 쓰다.

38(108) 아버지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다. 이로써 필생의 저작 사기를 편찬하는 기점이 마련되다.

42(104) 사마천 주도하에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歷)을 완성하다. 사마천은 역법개정을 게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이릉의 화」가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다.

47(99) 흉노외의 전투에서 패한 이릉을 보호하다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사형선고를 받다.

48(98) 사마천, 태사령직에서 파면되고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이 확정되다.

49(97) 사마천,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자청하여 죽음을 면하다.

50(96) 무제, 연호를 태시(太始)로 바꾸다. 사마천은 사면되어 중서령의 직을 받다. 사기완성을 위해 온힘을 쏟다.

51~54(95~92) 사마천, 무제를 수행하여 지방 여러 곳을 순시하고 돌아오다.

55(91) 사마천,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서한문 「보임소경서」를 보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심의 힘을 쏟은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다. (이 편지로 보아 이 무렵 사기가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임) 편지 중'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여행자 시선

13세 황하 위수 일대를 다니며 자료 수집. (사마천의 현장답사가 시작됨)

202년 천하 답사 훗날 「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다.

33세 지방 순시 각지의 민정과 풍속을 살피는 계기를 가지다.

35세 서남지방 문물을 관찰. 이 경험은 「화식열전」의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51~54세 사마천, 무제를 수행하여 지방 여러 곳을 순시하고 돌아오다.

 

사마천의 연보를 보면서 그가 여행한 기록만 발췌해 보았다. 그는 54세에 일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도 여행과 함께 한 삶을 살았다. 10대 아버지 사마담과 현장답사 여행을 시작으로 20 2년간 천하를 답사한 것은 <사기>를 쓰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30대 이후에는 민정과 풍속을 살피는 여행을 했다. 그의 사관은 여행자 시선에서 시작하여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음 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사기>를 짓는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 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쫒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촤천되어 세상에 <여람>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 <고분> 두 편을 남겼다. <>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사기열전 2권의 70 태사공 자서에는 위의 구절이 나온다. 사마천의 기록의 힘은 울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5

세계인의 고전 사기는 사마천이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르고자 궁형의 치욕을 딛고 저술한 통사체 역사서로서 전설의 황제시대로부터 한 무제 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고 있다. 사기 중에서도 열전 70권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 칠웅(, , , , , , )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6

예나 지금이나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필요악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는 구 누구도 먼저 평화를 주창할 수 없었다. 모두들 강한 군대를 양성해 부국강병을 꾀하는데 골몰했다. 법가인 상군은 진나라의 효공을 도와 변법을 성공적으로 단행하고 부국강병을 주창하면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없애는 이전거전의 이론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초나라와 위나라는 현장을 중시한 용병가 오기를 등용했고, 제나라는 사마 양저와 손빈 등을 등용하여 세력확장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편에 선 자들도 있었다. 왕도 정치를 주장한 맹자를 비롯하여 유가로 대변되는 공자의 제자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성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자는 주장을 폈다. 묵자는 전쟁대비용 성을 구축하여 전비를 절감하자고 외친 평화주의자였다. 한 술 더 떠서 도가 일파는 전쟁을 반대하고 무위자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에는 시대가 각박했고, 혼돈에 차 있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펴는 두 진영이 말이나 글을 통해 다투는 흥미진진한 광경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다.

 

11

사기 130편은 상고 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본기 12, 10, 8, 세가 30,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더러는 유사한 내용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본기는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표는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표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서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 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공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만에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13. 사기 이전의 중국의 역사서는 매년 매달 매일의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으니 춘추나 서경 등 거의 모든 역사서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마천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시대의 사회 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 인물과 사건 및 제도 등 그 사회가 가진 제반 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통사를 쓰면서도 자신의 시대인 한 대를 다루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료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의 발전적 흐름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주었기에,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지혜로운 삶의 지침서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16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전서의 서문 격으로 사기 열전의 맨 마지막에 둔 태사공 자서에 마련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이러하다. 첫째, 발분의식의 소산이다.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이열전에서 천도시비의 질문을 제시한 것은 백이와 숙제의 입장이 마치 자신과 비슷하다는 데서 오는 동류의식을 반영한다. 또는 치욕을 견디고 세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관중이나 오자서, 경포 등에게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의 전기를 따로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과 직서이다. 이는 그의 태사공 자서에서도 드러나지만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마천의 생각은 부친 사마담의 견해와 일치되는 것이며,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난 당시에 공자의 사상을 누군가가 계승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되었다.

 

이 밖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한다. 태사령이란 본래 궁중의 예의 제도를 관장하고, 천문 역법에 따라 해가 끝나면 새 역법을 바치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길일과 기일을 가려 올리는 직책이다. 따지고 보면 이 직책은 역사 기록과 별반 관련이 없으므로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궁궐에 소장된 모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자료 수집을 위해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취재할 기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21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24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25

사기는 세상에 나오고도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27

사마천의 기술방식이나 자료 선정 방법 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볼 때, 정말 이 정도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역사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게 된다. 요컨대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사의 필두로 거론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도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의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 백이열전

64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제가 일흔 명 중에서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었다. 잔인한 잣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데 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66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2. , 안 열전

 

71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 주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께 규를 도운) 소흘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런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십여 대 동안 가졌으며 늘 이름 있는 대부의 집안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73

관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이 굳게 결속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 즉 예의, 정의, 깨끗함, 부끄러움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망한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관중은 정치를 하면서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일도 돌이켜 성공으로 이끌었다.

 

74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안영은 제나라 재상이 된 두에는 밥상에 고기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고 첩에게는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또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이 물으면 바르고 신중하게 대답하고, 묻지 않을 때에는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그 명령을 따르지만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3. 노자, 한비 열전

 

81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노자는 도와 덕을 알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데 힘썼다.

 

83

노자는 하지 않은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84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초나라 위왕은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이지요. 그대는 어찌 교제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오?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어.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리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85.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군주는 나라라 평안할 때에는 이름 있는 유학자를 아끼고, 위급할 때에는 갑옷 입고 투구 슨 무사를 등용한다.

 

86

한비는 세난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때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87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신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 서는 안 된다. 

 

88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마, 양저 열전

 

99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내일 정오에 군문에서 만납시다.”

이튿날 양저는 수레를 빨리 달려 먼저 군영으로 가서 해시계와 물시계를 마련해 놓고 장고를 기다렸다. 원래 장고는 교만한 사람으로 장군이 이미 군영에 가 있으니 감군인 자신은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양저가 말했다.

“어재서 약속 시간보다 늦었습니까?”

장고는 사과하며 말했다.

“대부들과 친지들이 송별연을 열어주어 지체되었소.”

 

그러고 나서 군정을 불러 물었다.

“군법에는 약속 시간에 대지 못하면 어떻게 하도록 되어 있소?”

군정이 대답했다.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장고는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급히 경공에게 이 일을 알리고 사면을 요청하였다. 양자는 경공에게 갔던 사람이 돌아오기도 전에 장고의 목을 베어 전군에 돌려 본보기로 삼았다. 한참 뒤 사자가 장고를 사면하라는 부절을 가지고 말을 달려 군영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러자 양저가 말했다.

“장수가 군영에 있을 때에는 왕의 명령도 받들지 않을 수 있소.”

그리고는 군정에게 물었다.

“군영 안에서 말을 달리면 군법에는 어떻게 처리하도록 되어 있소?”

군정이 말했다.

“목을 베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자는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양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왕의 사자이니 죽일 수는 없소.”

그러고는 그의 마부와 수레 왼쪽의 곁 나무와 왼쪽 곁 말의 목을 베어 전군에 본보기로 삼았다. 양저는 사자를 보내 왕에게 다시 보고하게 한 뒤 싸움터로 나갔다.

 

5. 손자, 오기 열전

 

115

나라의 보배는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임금의 덕행이다.

오기는 장수가 되자 신분이 가장 낮은 병사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깔지 못하게 하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가 먹을 식량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등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한번은 종기 난 병사가 있는데 오기가 그 병사를 위해 고름을 빨아주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예전에 오공께서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공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리 내어 웁니다.”

 

118

“이 세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보다 못한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요?”

전문이 대답했다.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백성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잇고. 이런 때에 재상자리를 당신에게 맡기겠소. 아니면 내게 맡기겠소?”

오기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맡기겠소.”

전문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있는 까닭이오.”

 

7. 중니 제자 열전

 

148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자기로 즐거워하는 안회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이며 공자보다 서른 살이 적었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바른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자는 또 안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질구나. 회여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 텐데 안회는 자기가 즐겨 하는 바를 바꾸지 않는구나.”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안회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구나.”

“벼슬에 나가게 되면 토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와 나뿐이구나.”

안회는 스물아홉 살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니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는 제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소리 내어 울면서 탄식했다.

“내게 안회가 있은 뒤부터 제자들이 나와 더욱 친숙해졌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150

덕행은 훌륭하나 몹쓸 병에 걸린 역경

염겸은 자가 백우이다. 공자는 그의 덕행을 칭찬했다. 백우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 공자는 문병을 갔다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으며 탄식했다.

“하늘의 운명이구나. 이 사람이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운명이구나.”

 

157

자식은 태어난 지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재여는 자가 자아이며 말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이렇게 물었다.

“부모의 상을 삼 년이나 치르는 것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군자가 삼 년간 예를 닦지 않는다면 반드시 예는 무너질 것이며, 삼 년 동안 음악을 팽개친다면 음악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일 년이 지나면 묵은 곡식은 다 없어지고 햇곡식이 익고, 나무를 비며 얻던 불씨도 한 해에 한 번씩 바꿉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상도 일 년이면 됩니다.”

그것이 편하면 너는 그렇게 해라. 군자는 부모의 상을 입는 동안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재여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 상은 세상의 합의된 예의이다.”

 

164

용맹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다른 나라의 후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의를 세웁니다.

 

170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공이 물었다.

“자와 상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는 지나친 데가 있고, 상은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

자공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는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자식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여 소리 높여 울다가 눈이 멀었다.

 

171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전손사는 진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장이며 공자보다 마흔여덟 살 아래다. 자장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듣고 그 중에서 의심 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 중에서 의심 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훗날 자장이 공자를 따라다니다가 진나라와 채 나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세상에서 행세할 수 있는 도리를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장을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자기 허리띠에 적어두었다.

 

179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똑같다.

안무요는 자가 노이며 안회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찍이 각각 때를 달리하여 공자를 섬겼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는 집이 가난하니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제사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잘났든 못났든 저마다 제 자식을 위한다. 그러나 내 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도 내관만 쓰고 외곽은 쓰지 못했다. 내가 수레를 팔아서 아들의 외곽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부가 되어 수레 없이 걸어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187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무마시가 이 말을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가 말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의이다.”

 

8. 상군 열전

 

206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조량이 대답했다.

“천 마리의 양 가죽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아부는 한 사람의 올바른 직언만 못합니다. 주나라 문왕은 신하들의 올바른 직언으로 일어났고, 은나라 주왕은 신하들이 입을 다물어 망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무왕을 잘못됐다고 나무라지 않는다면 제가 온종일 솔직하게 말씀 드려도 죽이지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까?”

상군이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선생께서 진정으로 하루 종일 바른 말씀을 해 주실 수만 있다면 나에게 약이 될 것입니다. 나는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 하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사양하려 하십니까?”

 

210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인심을 얻을만한 행위가 못 됩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갈 때는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레 수십 대가 뒤따릅니다. 수레에는 힘세고 신체 건강한 장사가 옆에 타서 수행하며 창을 가진 병사가 양쪽 옆에서 수레와 함께 달립니다. 시경에서는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9. 소진 열전

 

220

신이 생각하기에 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일을 만들어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근본적인 계책은 친하게 사귈 만한 나라를 고르는데 있습니다.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알맞게 고르면 백성은 안정될 수 있고,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잘못 고르면 백성은 안정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238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다. 소진은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가 되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였다. 소진은 북쪽으로 조나라 왕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러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기마와 짐을 실은 수레를 비롯하여 제후들마다 소진을 모실 사자를 보내 주어 전송하는 자가 매우 많이 국왕의 행차에 견줄 만 하였다. 주나라 현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이 지나가는 길을 쓸도록 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맞아 위로하게 하였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가 곁눈으로 볼 뿐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하니 소진이 웃으면서 형수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합니까?”

형수는 몸을 굽혀 기어 나와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하며 말했다.

“제자의 지위가 귀하고 재물이 매우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여섯 나라의 재상의 인수를 찬 수 있었을까?”

당시 소진은 천 금을 풀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에 소진은 연나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백 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부귀해지자 백 금으로 갚았으며, 전날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보답하였다. 그 하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소진 앞으로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니 소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았다. 너는 나를 따라 연나라로 갔을 때 역수 가에서 여러 차례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곤란한 처지라서 나를 깊이 원망했다. 그래서 너에 대한 보답을 맨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너에게도 이제 보답하겠다.”

소진이 여섯 나라와 합종의 약속을 맺고 조나라로 돌아오자 조나라 숙후는 그를 무안군으로 봉하고 곧 합종 약속 문서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러부터 진나라 군대는 십오 년 동안 감히 함곡관 밖을 넘보지 못했다.

 

252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14. 맹자, 순경 열전

 

362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두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유가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맹자는 공자 학설의 단순한 계승자라기 보다는 유가 사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가사상을 더욱 드러내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사람으로 맹자를 이어 유가사상을 더욱 체계화시킨 대표 인물이지만 맹자의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순자가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를 기초로 해서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묵자는 유학을 배웠지만 유가학설이 귀족들의 예, , , 장을 옹호하며 백성을 상하게 한다고 보고 유가의 반대파에 서게 되었다. 묵자가 유가를 집중 공격한 것은 그가 유가의 한 이단적 지파를 대표함을 시사하지만, 그가 논리학에 가지는 관심은 명가를 생겨나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5. 맹상군열전

 

381

하루는 맹상군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참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불빛을 가린 탓에 방안이 어두웠다. 손님은 자신의 음식이 맹상군의 것과 다른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어둡게 한 줄 알고 기분이 상해서 식사를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맹상군이 일어서서 몸소 자신의 밥그릇을 손님의 것과 비교해 보이자 손님은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 때문에 선비들이 맹상군에게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이 손님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 대우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맹상군과 친하다고 생각했다.

 

386

맹상군이 제나라 재상일 때, 그의 가신 위자가 맹상군 대신 봉읍의 조세를 거두었다. 위자는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오고 갔지만 그 해의 조세 수입을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다. 맹상군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진 사람이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맹상군은 화가 나서 위자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떤 사람이 제나라 민왕에게 맹상군을 이렇게 헐뜯었다.

“맹상군이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마침 전갑이 민왕을 위협하자 민왕은 속으로 맹상군을 의심했다. 이를 안 맹상군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전에 위자에게 조세를 빌린 어진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민왕에게 글을 올렸다.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몸을 바쳐 맹세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궁궐 문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맹상군이 결백함을 밝히려 하였다. 민왕이 깜짝 놀라 맹상군의 행적을 조사해보니 정말로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민왕이 다시 맹상군을 불렀지만 맹상군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설 땅에서 조용히 살고자 하였다. 민왕은 이를 허락했다.

 

391

맹상군은 풍환을 불러 이일을 부탁했다. “빈객들은 내 어리석음을 모르고 다행히 몸을 맡긴 분이 3000명이나 됩니다. 봉읍의 조세 수입만으로는 도저히 빈객을 대접할 수 없어서 설 땅 사람들에게 이자를 얻으려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설 땅에서는 해마다 조세가 들어오지 않고 백성 대부분이 이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빈객들에게 식사마저 접대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책임지고 돈을 받아주십시오.”

 

393

술과 소를 많이 마련하지 않고는 돈 빌린 사람을 다 모이게 할 수 없고,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알 수 없습니다. 여유 있는 자에게는 갚을 날짜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차용증서를 십 년 동안 가지고 있어도 이자만 더욱 쌓여갈 분이라 성급하게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성급하게 재촉하여 돌려받지 못한다면 위로는 군주가 이익에 눈멀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꼴이 되고, 아래로는 백성이 빚을 갚지 않으려 군주를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을 격려하고 군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쓸모 없는 차용증서를 불살라 받을 수 없는 빚을 없애 설 땅의 백성이 군주를 가까이하고 군주의 이름을 칭송하게 하려고 한 일입니다.

 

397

나는 언제나 빈객들을 좋아하여 그들을 대접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힘썼소. 빈객이 3000명이나 있었음은 선생도 아는 바요. 그러나 빈객들은 내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자 하루아침에 나를 버리고 떠나가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소. 이제 선생의 힘으로 다시 재상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다른 빈객들은 무슨 낯으로 다시 나를 볼 수 있겠소. 만약 다시 나를 만나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을 보이겠소.”

풍환은 이 말을 듣고 말고삐를 매어 놓고 수레에서 내려와 절을 했다. 맹상군도 수레에서 내려와 마주 절하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오?”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선생은 이런 원리를 아십니까? 살아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16. 평원군, 우경 열전

 

406

평원군이 말했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빈객으로 삼 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410

“한단의 백성은 땔감이 없어서 죽은 사람의 뼈를 때고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 먹고 있으니 위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후궁은 백여 명을 헤아리고 노비들까지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으며 쌀겨나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백성은 가난한데다가 무기까지 바닥나서 나무를 깎아서 창과 화살을 만듭니다. 그런데 당신의 기물과 종, 경 같은 악기는 그대로입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무너뜨린다면 당신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부인과 아래 사람들을 사졸 사이에 끼워 넣어 같이 일하게 하고 가진 것을 다 푸어 사졸들을 먹이면 위태롭고 고통스런 처지에 놓인 사졸들은 군주의 은혜에 쉽게 감격할 것입니다.”

 

417

“공보문백이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병들어 죽자 그 죽음을 슬퍼하여 규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가 둘 있었습니다. 문백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문백의 유모가 아들이 죽었는데 소리 내어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하니 어머니는 공자는 어진 사람인데 노나라에서 쫓겨났을 때 내 아들은 쫓겨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아들이 죽으니 그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가 둘이나 있소 이와 같이 된 것은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는 정을 주지 않고 부인들에게는 다정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면 어진 어머니라고 하겠지만, 아내의 입에서 나오면 반드시 질투심이 많은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같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의 마음도 바뀝니다.

 

421

태사공이 말한다. “평원군은 새가 하늘 높이 날 듯이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재능과 지혜가 있는 공자였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 속담에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은 풍정의 그릇된 말에 빠져 조나라 장평의 사십여만 병사를 산 채로 매장되게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 했다. 우경이 사태를 헤아리고 상황을 추측하여 조나라를 위해 꾀한 계획들은 얼마나 주도면밀 했던가? 그러나 위제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 결국 대량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우경에게 고통과 근심이 없었다면 책을 지어 후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20. 악의 열전

 

513

신이 듣기에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가깝다는 이유로 봉록을 주지 않고 공로가 많은 자에게 상을 주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일을 맡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재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이는 공적을 이루는 군주이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사귀는 이는 이름을 남기는 선비입니다.

 

515

신이 듣건대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이 남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후세까지 칭송을 받는다고 합니다. 

 

21. 염파, 인상여 열전

 

535

길은 멀고 험한 데다 지역이 좁으므로 그곳에서 싸운다는 것은 쥐 두 마리가 쥐구멍 속에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용감한 장군이 이길 것입니다.

 

545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24. 굴원, 가생 열전

 

586

이소란 걱정스러운 일을 만난다라는 뜻이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자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591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굴원은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꾀죄죄하고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어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소

어부가 물었다.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 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쫓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겠소?”

 

598

가생은 인사하고 길을 나섰는데 장사라는 곳은 지형이 낮고 습기가 많다는 말을 듣고 자기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좌천되어 떠나가는 중이므로 마음이 우울하였다. 가생은 상수를 건널 때 부를 지어 굴원을 조문하였는데 그 문장은 이러하다.

 

25. 여불위 열전

 

616

여불위는 한단의 여러 첩 가우데 외모가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았는데 그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초는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일어나 여불위의 장수를 축하하면서 그녀를 달라고 했다. 여불위는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자기 집 재산을 다 기울여 자초를 위해 힘쓰고 있는 까닭은 진기한 재물을 낚으려는 것임을 떠올리고 마침내 그 여자를 바쳤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몸임을 숨기고 만삭이 되어 정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자초는 마침내 그 여자를 부인으로 세웠다.

 

616

진나라 왕이 즉위한 지 일년 만에 죽자 시호를 효문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태자 자초가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장양왕이다. 장양왕은 양어머니 화양 부인을 화양 태후라 하고 생모 하희를 높여서 하 태후라 하였다.

 

618

장양왕이 즉위한 지 삼 년 만에 죽자 태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정은 여불위를 존중하여 상국으로 삼고 중부라고 불렀다. 진나라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태후가 때때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불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26 자객 열전

 

649

장군의 목을 얻어 진나라 왕에게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진나라 왕은 반드시 기뻐하여 저를 만나 줄 것입니다. 그때 제가 왼손으로는 그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찌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가 업신여김을 당한 것도 씻을 수 있습니다. 장군은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번오기가 한쪽 어깨를 드렁내고 한 손으로 팔을 움켜주니 채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가슴을 치며 고대하던 일입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655

진시황은 고점리가 축을 뛰어나게 잘 타는 솜씨를 아까워하여 용서하는 대신 눈을 멀게 했다. 그러고 나서 고점리에게 축을 타게 하였는데 그 소리를 칭찬하지 않는 적은 없었다. 고점리는 축 속에 납덩어리를 감추어 넣었다가 진시황 곁으로 가까이 갔을 때 축을 들어 진시황을 향해 내리쳤지만 맞지 않았다. 진시황은 결국 고점리를 죽였다. 이 일로 인해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제후국에서 온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27. 이사 열전

 

661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696 이사가 죽고 2세 황제가 조고를 중승상으로 삼자, 크든 작든 모든 일은 조고가 결정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무거운 줄을 알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사슴이지?”

좌우에 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입니다.”

2세 황제는 놀라서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태복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그러자 태복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봄가을로 교사 지낼 때 종묘 귀신을 모시면서 재계가 석연치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덕을 많이 쌓아 재계를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2세 황제는 상림원으로 들어가 재계하는 척하고는 실제로는 날마다 새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면서 놀았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상림원으로 들어오자 2세 황제가 활을 쏘아 그를 죽였다. 

 

 

 

 

 

3. 내가 저자라면

 

“6월 첫 주, 사기열전 두 번 읽기에서 미진한 부분을 메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사마천이라면, 궁형에 처해지는 위협이 있어도 <사기>를 썼을까? 

 

마음 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사기>를 짓는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 없게 되었구나.”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나는 <사기>를 읽는 것보다, 몸이 망가져 다른 일을 못하게 되어서 쓴 것인지, 쓰기 위해 몸이 망가짐을 감수한 것인지, 토로하고 싶은 마음 속 울분은 무엇인지 인간 사마천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 가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사기열전>을 읽으면서, 그의 사관이 마음에 들었다. 직장인으로 정신 없이 살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꿈꾸었던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그 관점이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렇다 보니, 나는 소위 진보주의적인 사관으로 현상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관점을 넓히고자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한국사를 접하면서 승자의 성공 스토리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처에 널린 성공 스토리는 나에겐 식상했다. 나는 그저 fact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fact를 볼 수 있는 눈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쫓기듯 읽어서, 제대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그 fact를 전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역사서였다. fact, 즉 날 것을 접하면서 나는 내 관점을 만들어가는 연습을 해 보기에 좋은 텍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6월 초,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한 번 더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일단 사마천을 먼저 파 보고 싶다. 그리고, 사기열전을 꼼꼼히 읽으면서 현재로선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내 관점을 시험해 보고 싶다. 내 관점에 객관성을 부여하는 좋은 시도가 될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쓸 책을 어떤 관점에서 쓸 것인지 상상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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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7 21:40:03 *.160.136.18

마음 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사기>를 짓는다.

 

사마천은 울분,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마음속의 한을 토로하며 글을 세상에 뱉어 놓았다.

그것이 그 속마음의 전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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