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앨리스
  • 조회 수 2114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6월 2일 11시 57분 등록

사기열전 (두 번 읽기)

10기 김정은


 

사기열전1, 사마천 지음,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 (기원전 145?~90?)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며, 중국에서 '역사의 아버지' 라 불린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스무 살의 사마천은 한나라 국토 대 순례를 다녀오게 된다. 그 시기 사마담은 태사령을 지낸 지 10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역사를 집필하는 것이 천복이라 여겼던 사마담은 그 동안 궁중에 모아둔 책과 공식 문서들도 대충 훑어보았고, 쓰고자 했던 역사책의 윤곽도 어느 정도 잡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글자로 된 자료만으로 역사책을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관직에 몸담아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사마담은 성인이 된 아들 사마천에게 현장 답사가 목적인 국토 대 순례를 맡긴 것이다. 사마천은 약 2년에 걸친 기간 동안 현장 답사를 하며, 지역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노인들의 경험담,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지방 사람들의 평가와 같이, 현장에 가지 않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산 경험이 2000년을 이어오는 <사기>에 생생한 생명력을 불러 넣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마담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해인 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정식으로 태사령이 되었다. 이 때가 바로 <사기> 집필을 시작하던 시점이다. “사마천이 태사령이 되어 문서를 관리하지 않았다면 고금의 역사를 꿰뚫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환담의 말이다. 태사령은 역사, 천문, 역법에 관한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앉을 수 있었는데 가학을 전수받은 사마천이 바로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최적임자였다. 사마천은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자신이 맡은 직무에만 매달렸다. 그는 거의 모든 왕래와 사귐을 끊는 것은 물론이고 집안일조차 돌보지 않았다. 밤낮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모든 재능과 지혜를 짜낼 수 있는 지를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이 맡은 직무에 몰두하며 무제의 환심과 신임을 얻고자 노력했다.


저술을 완성하라는 사마담의 유지는 분명 사마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마천은 주로 역사 인물을 중심으로 책을 써내려 갔는데, 특히 한나라가 일어난 100년 간의 근대사 인물을 중요시했다.


궁형을 감수하고


사마천을 떠올리면 절대 권력 앞에서도 양심을 굽히지 않은 죄로 치욕스런 궁형에 처해진 그의 비극적인 삶에 가슴이 아파오는 동시에, 그 참을 수 없는 내적 고통과 깊은 영혼의 상처를 <사기> 저술로 승화시킨 발분의 노력에 감탄하게 된다.


사마천은 이릉 사건과 관련하여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감옥에 갇혔고, “집이 가난하고 재산이 없어서 속죄금을 내고 풀려날 수 없었기에 치욕의 궁형을 받았다. 그 역시 봉건통치자가 제정한, 오직 돈과 세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잔혹한 형벌을 경험한 것이다. 이후 환관 신분으로 중서령이 되어 사마천은 내정에서 무제를 더욱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겉으로는 존경과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사마천이 한 일은 왕의 잠자리를 돌보거나 소제하는 환관에 지나지 않았다.


<사마천 평전(지전화이 지음)>은 사마천의 치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은 저술을 계속하겠다는 의지 외에 조정 안팎의 모든 사무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가끔 정신이 희미해져 집안에 있으면서도 망연자실하며 무엇을 잃은 듯하고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고통스러웠고 수시로 일어나는 분노를 참아야만 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줄기를 흘러내려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음 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사기>를 짓는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 없게 되었구나.”

사마천은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사기열전 2권의 70 태사공 자서에는 위의 구절이 나온다.

“대체로 <시경>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쫒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촤천되어 세상에 <여람>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 <고분> 두 편을 남겼다. <>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역사상 이런 인물들도 모두 불행을 겪고 난 후 저술에 분발하여 세상과 후세에 불공평함을 호소했던 것이다. 결국 봉건 통치의 시스템 밖에서 자신의 활로를 발견한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뎌내고 그의 이상인 저술을 완성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기원전 104년 한 무제는 개제를 선포하는데, 이는 천명을 받은 왕이 전 왕조와는 다른, 그 자신이 진정한 제왕임을 보여주기 위한 우상화의 일환이었다. 제도 개혁이 마무리되고 정세가 태평 성세해지자 사마천은 공자의 계승자로서 <춘추>와 같은 책을 저술해야 할 때가 이미 왔음을 자각하게 된다. 때는 한나라가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나 통일된 봉건왕조의 출현으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이루어졌을 무렵이다. 또한 동시에 백성들에 대한 봉건 통치계급의 압박과 착취는 날로 더해지고 잔혹해졌으며, 계급 간의 갈등과 통치 계급 내부의 알력다툼 또한 계속해서 깊어지고 복잡해졌다.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아울러 진한 이후의 근대사를 기록하는 것은 당시 봉건 통치 계급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마담의 뜻은 주공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나 공자가 태어났고, 공자가 죽고 나서 지금까지 또 500년이 지났으므로 마땅히 또 누군가가 나타나 공자를 이어받아 옛 문헌을 정리하고 저술하는 사업을 한 차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이 사업을 맡을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기>의 완성


<사기>는 관찬사서(임금의 명령으로 만든 역사책)가 아니다. 사찬사서(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관찬사서에 비해 사찬사서는 역사책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한 것과 자료를 모으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하지만 사찬사서인 <사기>가 중국의 공식 역사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사기>에 쓰인 자료가 제대로 된 것들이었고, 그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생생한 역사를 그려낼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게다가 <사기>는 사찬사서로서의 장점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사기열전>의 각 장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태사공은 말한다라고 시작하는 부분에 그 내용은 잘 반영되어 있다.


사마천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해 봉건사회의 정치, 도덕 등의 이상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봉건 사회의 정치적 도덕이 되는 총서를 엮었다. 각양각계의 인물은 사회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역사적 사실을 일으키고 발전시킨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사마천이 인물중심으로 그의 저작을 일구어나간 것은 그의 위대한 이상에 완전히 충실한 것일 뿐 아니라, 역사적 객관성에도 어는 정도 부합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이상은 대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서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 이른바 천도’, ‘왕도및 시비, 선악 등을 표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기>에 반영된 것은 달랐다. 오히려 작자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천도가 신빙성이 없고 왕도는 무너졌다는 사실을 드러냈고, 일반적인 시비 선악의 관념과 대비되는, 수많은 억압받는 백성의 시비와 선악의 관념을 발견한 것이다. 사마천이 시비와 선악의 또 다른 관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객관적 사실을 존중하고 이를 충실하게 기록한 데 있다. 객관적 사실은 언제나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봉건사회에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억압받는 수많은 백성의 생활과 사상을 포함한다. 사마천이 충실하게 객관적 사실을 기록했고, 객관적 사식을 왜곡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억압받는 수많은 백성의 힘이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생의 고난의 경험과 불행의 처지가 바로 그가 억압받는 수많은 백성을 보면서 현실을 깊게 인식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직접적인 원인이 그가 <사기>를 저술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마천 연보


1(145) 사마천 하양현(현 섬서성 한성시 남쪽)의 농촌에서 태어나다.

4(142) 사마천, 아버지를 따라 서원에서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다.

8(138) 사마담, 태사령이 되자 장안에서 천문, 역법을 주관하다.

10(136) 사마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다

11(135) 무제(22), 유가사상에 입각한 정치 시작.

13(133) 사마담과 사마천 황하· 위수 일대를 다니며 자료 수집. (사마천의 현장답사가 시작됨)

14(132) 무제,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는 치수사업을 벌이고, 1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를 막다.

17~18(129~128) 사마천, 동중서에게 「공양춘추」를 배우고, 공안국에게「고문상서」를 배우다. (이때의 교육은 훗날 사기저술에 든든한 기초가 된다)

19(127) 무제, 봉건체제 강화를 위해 부보언의 건의에 따라 지방호족과 부호들을 무릉으로 강제 이주시키다. 이 무렵 이름난 유협 곽해가 유가파들의 박해를 받아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사마천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아 「유협열전」을 쓰다. 사마천 장안으로 오다.

20(126) 사마천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시작하다. 실지 답사는 약 2년으로 훗날 「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다.

21(125) 흉노 칩입하다. 사마담, 무제를 수행해서 감천(甘泉)에 가다.

22(124) 사마천, 낭중이 되어 처음 벼슬살이에 나서다.

24(122) 사마천, 아버지와 함께 무제를 수행하여 옹()에 가서 제사를 지내다.

33(113) 무제, 지방 순시에 나서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순시에 동행하여 각지의 민정과 풍속을 살피는 계기를 가지다.

35(111) 무제의 명을 받아 서남지방 문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다. 이 경험은 「화식열전」의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36(110) 무제, 안정기반을 구축한 후 봉선(封禪)대제를 결심하다. 사마천, 봉선대제를 위해 지방으로 가던 중 아버지의 위독전갈을 받고 낙양으로 되돌아 오다. 아버지 담은 태사령이 되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뜨다. 천은 다시 봉선에 참관하다.

37(109) 무제, 치수사업을 벌이고, 천은 역대 치수사업을 개괄한 「하거서」를 쓰다.

38(108) 아버지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다. 이로써 필생의 저작 사기를 편찬하는 기점이 마련되다.

42(104) 사마천 주도하에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歷)을 완성하다. 사마천은 역법개정을 게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이릉의 화」가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다.

47(99) 흉노외의 전투에서 패한 이릉을 보호하다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사형선고를 받다.

48(98) 사마천, 태사령직에서 파면되고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이 확정되다.

49(97) 사마천,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자청하여 죽음을 면하다.

50(96) 무제, 연호를 태시(太始)로 바꾸다. 사마천은 사면되어 중서령의 직을 받다. 사기완성을 위해 온힘을 쏟다.

51~54(95~92) 사마천, 무제를 수행하여 지방 여러 곳을 순시하고 돌아오다.

55(91) 사마천,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서한문 「보임소경서」를 보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심의 힘을 쏟은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다. (이 편지로 보아 이 무렵 사기가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임) 편지 중'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여행자 시선


13세 황하 위수 일대를 다니며 자료 수집. (사마천의 현장답사가 시작됨)

202년 천하 답사 훗날 「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다.

33세 지방 순시 각지의 민정과 풍속을 살피는 계기를 가지다.

35세 서남지방 문물을 관찰. 이 경험은 「화식열전」의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51~54세 사마천, 무제를 수행하여 지방 여러 곳을 순시하고 돌아오다.


사마천의 연보를 보면서 그가 여행한 기록만 발췌해 보았다. 그는 54세에 일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도 여행과 함께 한 삶을 살았다. 10대 아버지 사마담과 현장답사 여행을 시작으로 20 2년간 천하를 답사한 것은 <사기>를 쓰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30대 이후에는 민정과 풍속을 살피는 여행을 했다. 그의 사관은 여행자 시선에서 시작하여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5

세계인의 고전 사기는 사마천이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르고자 궁형의 치욕을 딛고 저술한 통사체 역사서로서 전설의 황제시대로부터 한 무제 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고 있다. 사기 중에서도 열전 70권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 칠웅(, , , , , , )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저술을 완성하라는 사마담의 유지는 분명 사마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마천은 주로 역사 인물을 중심으로 책을 써내려 갔는데, 특히 한나라가 일어난 100년 간의 근대사 인물을 중요시했다.

 

6

예나 지금이나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필요악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는 구 누구도 먼저 평화를 주창할 수 없었다. 모두들 강한 군대를 양성해 부국강병을 꾀하는데 골몰했다. 법가인 상군은 진나라의 효공을 도와 변법을 성공적으로 단행하고 부국강병을 주창하면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없애는 이전거전의 이론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초나라와 위나라는 현장을 중시한 용병가 오기를 등용했고, 제나라는 사마양저와 손빈 등을 등용하여 세력확장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편에 선 자들도 있었다. 왕도 정치를 주장한 맹자를 비롯하여 유가로 대변되는 공자의 제자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성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자는 주장을 폈다. 묵자는 전쟁대비용 성을 구축하여 전비를 절감하자고 외친 평화주의자였다. 한 술 더 떠서 도가 일파는 전쟁을 반대하고 무위자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에는 시대가 각박했고, 혼돈에 차 있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펴는 두 진영이 말이나 글을 통해 다투는 흥미진진한 광경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논란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전쟁과 평화,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평화를 선택할 것이다.

 

11

사기 130편은 상고 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본기 12, 10, 8, 세가 30,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더러는 유사한 내용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본기는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표는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표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서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 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공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만에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사마천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해 봉건사회의 정치, 도덕 등의 이상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봉건 사회의 정치적 도덕이 되는 총서를 엮었다. 각양각계의 인물은 사회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역사적 사실을 일으키고 발전시킨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사마천이 인물 중심으로 그의 저작을 일구어나간 것은 그의 위대한 이상에 완전히 충실한 것일 뿐 아니라, 역사적 객관성에도 어는 정도 부합하는 것이다.

 

 

13. 사기 이전의 중국의 역사서는 매년 매달 매일의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으니 춘추나 서경 등 거의 모든 역사서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마천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시대의 사회 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 인물과 사건 및 제도 등 그 사회가 가진 제반 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통사를 쓰면서도 자신의 시대인 한 대를 다루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료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의 발전적 흐름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주었기에,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지혜로운 삶의 지침서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스무 살의 사마천은 한나라 국토 대순례를 다녀오게 된다. 그 시기 사마담은 태사령을 지낸 지 10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역사를 집필하는 것이 천복이라 여겼던 사마담은 그 동안 궁중에 모아둔 책과 공식 문서들도 대충 훑어보았고, 쓰고자 했던 역사책의 윤곽도 어느 정도 잡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글자로 된 자료만으로 역사책을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관직에 몸담아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사마담은 성인이 된 아들 사마천에게 현장 답사가 목적인 국토 대순례를 맡긴 것이다. 지역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노인들의 경험담,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지방 사람들의 평가와 같이, 현장에 가지 않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산 경험이 2000년을 이어오는 <사기>에 생생한 생명력을 불러 넣었다고 할 수 있다.

 

16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전서의 서문 격으로 사기 열전의 맨 마지막에 둔 태사공 자서에 마련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이러하다. 첫째, 발분의식의 소산이다.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이열전에서 천도시비의 질문을 제시한 것은 백이와 숙제의 입장이 마치 자신과 비슷하다는 데서 오는 동류의식을 반영한다. 또는 치욕을 견디고 세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관중이나 오자서, 경포 등에게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의 전기를 따로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과 직서이다. 이는 그의 태사공 자서에서도 드러나지만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마천의 생각은 부친 사마담의 견해와 일치되는 것이며,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난 당시에 공자의 사상을 누군가가 계승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되었다.

 

이 밖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태사령이란 본래 궁중의 예의 제도를 관장하고, 천문 역법에 따라 해가 끝나면 새 역법을 바치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길일과 기일을 가려 올리는 직책이다. 따지고 보면 이 직책은 역사 기록과 별반 관련이 없으므로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궁궐에 소장된 모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자료 수집을 위해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취재할 기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전 104년 한 무제는 개제를 선포하는데, 이는 천명을 받은 왕이 전 왕조의 제도와 다르고 그 자신이 전 왕조를 대체한 진정한 제왕임을 보여주기 위한 우상화의 일환이었다. 제도 개혁이 마무리되고 태평 성세한 분위기는 사마천으로 하여금 공자의 계승자로서 <춘추>와 같은 책을 저술해야 할 때가 이미 왔음을 자각하게 했다. 이 때 한나라가 일어난 지 이미 100년이 지났고 통일된 봉건왕조의 출현으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백성들에 대한 봉건 통치계급의 압박과 착취는 날로 더해지고 잔혹해졌으며 계급 간의 갈등과 통치 계급 내부의 알력다툼 또한 계속해서 깊어지고 복잡해졌다.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아울러 진한 이후의 근대사를 기록하는 것은 당시 봉건 통치 계급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을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뜻은 주공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나 공자가 태어났고, 공자가 죽고 나서 지금까지 또 500년이 지났으므로 마땅히 또 누군가가 나타나 공자를 이어받아 옛 문헌을 정리하고 저술하는 사업을 한 차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이 사업을 맡을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21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사기>는 관찬사서(임금의 명령으로 만든 역사책)가 아니다. 사찬사서(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관찬사서에 비해 사찬사서는 역사책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한 것과 자료를 모으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하지만 사찬사서인 <사기>가 중국의 공식 역사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사기>에 쓰인 자료가 제대로 된 것들이었고, 그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생생한 역사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기>는 사찬사서로서의 장점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 장 태사공저서에 그 내용은 잘 반영되어 있다.

 

24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인물과 그 인물이 겪은 사건 중심으로 기록한 통사이기 때문에 보는 이가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25

사기는 세상에 나오고도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그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통치세력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27

사마천의 기술방식이나 자료 선정 방법 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볼 때, 정말 이 정도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역사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게 된다. 요컨대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사의 필두로 거론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도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의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사마천의 이상은 대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서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 이른바 천도’, ‘왕도및 시비, 선악 등을 표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기>에 반영된 것은 달랐다. 오히려 작자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천도가 신빙성이 없고 왕도는 무너졌다는 사실을 드러냈고, 일반적인 시비 선악의 관념과 대비되는, 수많은 억압받는 백성의 시비와 선악의 관념을 발견한 것이다. 사마천이 시비와 선악의 또 다른 관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객관적 사실을 존중하고 이를 충실하게 기록한 데 있다. 객관적 사실은 언제나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봉건사회에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억압받는 수많은 백성의 생활과 사상을 포함한다. 사마천이 충실하게 객관적 사실을 기록했고, 객관적 사식을 왜곡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억압받는 수많은 백성의 힘이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생의 고난의 경험과 불행의 처지가 바로 그가 억압받는 수많은 백성을 보면서 현실을 깊게 인식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직접적인 원인이 그가 <사기>를 저술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 백이열전

64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제가 일흔 명 중에서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었다. 잔인한 잣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데 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백이와 숙제 형제의 행동은 과연 의로운 행동인가? 그들의 행동에 나는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내 눈에는 지킬 것과 지키지 않을 것의 구분을 못하는 이들로 보인다. 선왕의 뜻을 받들어 두 형제가 나라를 잘 다스렸으면 되었다. 자신이 행하여 할 의무를 저버리고 의리만 지키는 것은 도가 아닌 것 같다.

 

66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인의 말 한마디는 이토록 중요하다.

 

2. , 안 열전

 

71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 주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께 규를 도운) 소흘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런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십여 대 동안 가졌으며 늘 이름 있는 대부의 집안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사람은 평가하는 사람에 의해 바뀐다. 이런 점에서 교육보다 좋은 평가가 한 사람을 바꾸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 사람이 좋은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면 좋은 평가를 하자. 반대로 나쁜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면 지속적으로 나쁜 평가를 내리면 된다. 하지만 사마천과 같은 인물은 나쁜 평가에도 불구하고 후세 2000년 후에도 도움이 되는 역작을 남겼다. 그가 위대한 이유이다.

 

73

관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이 굳게 결속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 즉 예의, 정의, 깨끗함, 부끄러움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망한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관중은 정치를 하면서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일도 돌이켜 성공으로 이끌었다.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는 말했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하지 말라. 그렇다. 배고프고 추운 이들에게 예의는 그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가진자들이 예의를 갖추지 못한다면 이것은 치욕이 된다.

 

74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안영은 제나라 재상이 된 두에는 밥상에 고기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고 첩에게는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또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이 물으면 바르고 신중하게 대답하고, 묻지 않을 때에는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그 명령을 따르지만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그 명령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거나 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에 있다. 임금이 올바르지 않게 다스리거나 선생이 올바르지 않게 가르친다면 나는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된다.

 

3. 노자, 한비 열전

 

81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노자는 도와 덕을 알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데 힘썼다.

 

83

노자는 하지 않은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공자도 노자를 높이 평가하고, 히틀러 치하 브레히트도 노자의 사상에 심취한 적이 있다. 노자를 한번 파보고 싶다.

 

84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초나라 위왕은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이지요. 그대는 어찌 교제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오?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어.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리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사기열전>을 통털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노자와 장자를 파보고 싶다.

 

85.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군주는 나라라 평안할 때에는 이름 있는 유학자를 아끼고, 위급할 때에는 갑옷 입고 투구 슨 무사를 등용한다.

 

86

한비는 세난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때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한비는 유학자는 글로 나라의 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협객은 힘으로 나라의 금령을 어긴다고 생각하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극심한 전쟁을 겪으면서 트라우마가 생겼나? 한비는 법규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일을 결단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였지만 너무나 가혹하였다. 뜻을 세우기에 앞서 자신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상처가 있으면 그것부터 치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상처가 언젠가 올라와 자신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 모두를 헤칠 수 있다.

 

87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신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 서는 안 된다. 

 

88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마양저 열전

 

99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내일 정오에 군문에서 만납시다.”

이튿날 양저는 수레를 빨리 달려 먼저 군영으로 가서 해시계와 물시계를 마련해 놓고 장고를 기다렸다. 원래 장고는 교만한 사람으로 장군이 이미 군영에 가 있으니 감군인 자신은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양저가 말했다.

“어째서 약속 시간보다 늦었습니까?”

장고는 사과하며 말했다.

“대부들과 친지들이 송별연을 열어주어 지체되었소.”

 

그러고 나서 군정을 불러 물었다.

“군법에는 약속 시간에 대지 못하면 어떻게 하도록 되어 있소?”

군정이 대답했다.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장고는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급히 경공에게 이 일을 알리고 사면을 요청하였다. 양자는 경공에게 갔던 사람이 돌아오기도 전에 장고의 목을 베어 전군에 돌려 본보기로 삼았다. 한참 뒤 사자가 장고를 사면하라는 부절을 가지고 말을 달려 군영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러자 양저가 말했다.

“장수가 군영에 있을 때에는 왕의 명령도 받들지 않을 수 있소.”

그리고는 군정에게 물었다.

“군영 안에서 말을 달리면 군법에는 어떻게 처리하도록 되어 있소?”

군정이 말했다.

“목을 베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자는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양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왕의 사자이니 죽일 수는 없소.”

그러고는 그의 마부와 수레 왼쪽의 곁 나무와 왼쪽 곁 말의 목을 베어 전군에 본보기로 삼았다. 양저는 사자를 보내 왕에게 다시 보고하게 한 뒤 싸움터로 나갔다.

 

융통성 없는 사마양저, 본보기로 삼는다며 약속을 생명처럼 지킨 그는 제나라의 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는다. 하지만 그의 출세를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한 모함으로 벼슬을 빼앗기고 내쫓김을 당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사마양저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약속은 중요하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 손자 오기 열전

 

115

나라의 보배는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임금의 덕행이다.

오기는 장수가 되자 신분이 가장 낮은 병사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깔지 못하게 하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가 먹을 식량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등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한번은 종기 난 병사가 있는데 오기가 그 병사를 위해 고름을 빨아주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예전에 오공께서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공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리 내어 웁니다.”

 

장수가 종기를 빨아 줄 정도의 공을 보인다면 전쟁터에서 죽을 만큼 열심히 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118

“이 세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보다 못한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요?”

전문이 대답했다.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백성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잇고. 이런 때에 재상자리를 당신에게 맡기겠소. 아니면 내게 맡기겠소?”

오기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맡기겠소.”

전문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있는 까닭이오.”

 

오기는 병법에 있어서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에 이름 나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이 또한 그가 죽임을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7. 중니 제자 열전

 

148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자기로 즐거워하는 안회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이며 공자보다 서른 살이 적었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바른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자는 또 안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질구나. 회여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 텐데 안회는 자기가 즐겨 하는 바를 바꾸지 않는구나.”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안회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구나.”

“벼슬에 나가게 되면 토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와 나뿐이구나.”

안회는 스물아홉 살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니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는 제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소리 내어 울면서 탄식했다.

“내게 안회가 있은 뒤부터 제자들이 나와 더욱 친숙해졌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안회는 바보가 아니다. 세상이 자기를 필요로 할 때에 도를 그대로 행하고, 세상이 자기를 저버릴 때에 조용히 도를 지키는 것은 오로지 안회 만이 할 수 있다. 세상이 어떻든 도를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이기도 하다.

 

150

덕행은 훌륭하나 몹쓸 병에 걸린 역경

염겸은 자가 백우이다. 공자는 그의 덕행을 칭찬했다. 백우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 공자는 문병을 갔다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으며 탄식했다.

“하늘의 운명이구나. 이 사람이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운명이구나.”

 

덕행이 훌륭한 사람이 몹쓸 병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157

자식은 태어난 지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재여는 자가 자아이며 말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이렇게 물었다.

“부모의 상을 삼 년이나 치르는 것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군자가 삼 년간 예를 닦지 않는다면 반드시 예는 무너질 것이며, 삼 년 동안 음악을 팽개친다면 음악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일 년이 지나면 묵은 곡식은 다 없어지고 햇곡식이 익고, 나무를 비며 얻던 불씨도 한 해에 한 번씩 바꿉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상도 일 년이면 됩니다.”

그것이 편하면 너는 그렇게 해라. 군자는 부모의 상을 입는 동안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재여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 상은 세상의 합의된 예의이다.”

 

164

용맹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다른 나라의 후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의를 세웁니다.

 

170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공이 물었다.

“자와 상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는 지나친 데가 있고, 상은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

자공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는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자식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여 소리 높여 울다가 눈이 멀었다.

 

171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전손사는 진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장이며 공자보다 마흔여덟 살 아래다. 자장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듣고 그 중에서 의심 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 중에서 의심 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훗날 자장이 공자를 따라다니다가 진나라와 채 나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세상에서 행세할 수 있는 도리를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장을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자기 허리띠에 적어두었다.

 

179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똑같다.

안무요는 자가 노이며 안회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찍이 각각 때를 달리하여 공자를 섬겼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는 집이 가난하니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제사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잘났든 못났든 저마다 제 자식을 위한다. 그러나 내 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도 내관만 쓰고 외곽은 쓰지 못했다. 내가 수레를 팔아서 아들의 외곽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부가 되어 수레 없이 걸어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사기열전>을 통틀어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사람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을까?

 

187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무마시가 이 말을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가 말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의이다.”

 

8. 상군 열전

 

206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조량이 대답했다.

“천 마리의 양 가죽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아부는 한 사람의 올바른 직언만 못합니다. 주나라 문왕은 신하들의 올바른 직언으로 일어났고, 은나라 주왕은 신하들이 입을 다물어 망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무왕을 잘못됐다고 나무라지 않는다면 제가 온종일 솔직하게 말씀 드려도 죽이지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까?”

상군이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선생께서 진정으로 하루 종일 바른 말씀을 해 주실 수만 있다면 나에게 약이 될 것입니다. 나는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 하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사양하려 하십니까?”

 

210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인심을 얻을만한 행위가 못 됩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갈 때는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레 수십 대가 뒤따릅니다. 수레에는 힘세고 신체 건강한 장사가 옆에 타서 수행하며 창을 가진 병사가 양쪽 옆에서 수레와 함께 달립니다. 시경에서는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상군은 사람의 마음을 잃어 망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타고난 성품이 잔인하고 덕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벼슬을 얻기 위해서 갖은 수작을 부리고, 군주의 총애를 받기 위해 주변인들을 이용한다. 자리에 오른 뒤에는 결국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한다. 타고난 잔인한 성품과 부덕함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9. 소진 열전

 

220

신이 생각하기에 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일을 만들어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근본적인 계책은 친하게 사귈 만한 나라를 고르는데 있습니다.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알맞게 고르면 백성은 안정될 수 있고,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잘못 고르면 백성은 안정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238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다. 소진은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가 되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였다. 소진은 북쪽으로 조나라 왕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러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기마와 짐을 실은 수레를 비롯하여 제후들마다 소진을 모실 사자를 보내 주어 전송하는 자가 매우 많이 국왕의 행차에 견줄 만 하였다. 주나라 현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이 지나가는 길을 쓸도록 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맞아 위로하게 하였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가 곁눈으로 볼 뿐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하니 소진이 웃으면서 형수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합니까?”

형수는 몸을 굽혀 기어 나와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하며 말했다.

“제자의 지위가 귀하고 재물이 매우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여섯 나라의 재상의 인수를 찬 수 있었을까?”

당시 소진은 천 금을 풀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에 소진은 연나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백 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부귀해지자 백 금으로 갚았으며, 전날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보답하였다. 그 하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소진 앞으로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니 소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았다. 너는 나를 따라 연나라로 갔을 때 역수 가에서 여러 차례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곤란한 처지라서 나를 깊이 원망했다. 그래서 너에 대한 보답을 맨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너에게도 이제 보답하겠다.”

소진이 여섯 나라와 합종의 약속을 맺고 조나라로 돌아오자 조나라 숙후는 그를 무안군으로 봉하고 곧 합종 약속 문서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러부터 진나라 군대는 십오 년 동안 감히 함곡관 밖을 넘보지 못했다.

 

252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세 치 혀로 세상을 움직인 소진은 진나라에 대항하여 위,,,,,한의 6국의 동맹을 맺는 것에 성공한다. 그의 외교술은 그야말로 끝내준다. 덕분에 중국은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맞았고, 그 상태가 15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는 그의 외교술은 후대의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소진이 여섯 나라를 동맹하게 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말을 전하는 행동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14. 맹자 순경 열전

 

362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두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유가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맹자는 공자 학설의 단순한 계승자라기 보다는 유가 사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가사상을 더욱 드러내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사람으로 맹자를 이어 유가사상을 더욱 체계화시킨 대표 인물이지만 맹자의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순자가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를 기초로 해서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묵자는 유학을 배웠지만 유가학설이 귀족들의 예, , , 장을 옹호하며 백성을 상하게 한다고 보고 유가의 반대파에 서게 되었다. 묵자가 유가를 집중 공격한 것은 그가 유가의 한 이단적 지파를 대표함을 시사하지만, 그가 논리학에 가지는 관심은 명가를 생겨나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마천은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다.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는 나는 공자와 사마천의 뜻을 이어 이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도를 실행에 옮겨 보고 싶다.

 

15. 맹상군 열전

 

381

하루는 맹상군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참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불빛을 가린 탓에 방안이 어두웠다. 손님은 자신의 음식이 맹상군의 것과 다른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어둡게 한 줄 알고 기분이 상해서 식사를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맹상군이 일어서서 몸소 자신의 밥그릇을 손님의 것과 비교해 보이자 손님은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 때문에 선비들이 맹상군에게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이 손님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 대우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맹상군과 친하다고 생각했다.

 

386

맹상군이 제나라 재상일 때, 그의 가신 위자가 맹상군 대신 봉읍의 조세를 거두었다. 위자는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오고 갔지만 그 해의 조세 수입을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다. 맹상군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진 사람이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맹상군은 화가 나서 위자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떤 사람이 제나라 민왕에게 맹상군을 이렇게 헐뜯었다.

“맹상군이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마침 전갑이 민왕을 위협하자 민왕은 속으로 맹상군을 의심했다. 이를 안 맹상군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전에 위자에게 조세를 빌린 어진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민왕에게 글을 올렸다.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몸을 바쳐 맹세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궁궐 문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맹상군이 결백함을 밝히려 하였다. 민왕이 깜짝 놀라 맹상군의 행적을 조사해보니 정말로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민왕이 다시 맹상군을 불렀지만 맹상군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설 땅에서 조용히 살고자 하였다. 민왕은 이를 허락했다.

 

391

맹상군은 풍환을 불러 이 일을 부탁했다. “빈객들은 내 어리석음을 모르고 다행히 몸을 맡긴 분이 3000명이나 됩니다. 봉읍의 조세 수입만으로는 도저히 빈객을 대접할 수 없어서 설 땅 사람들에게 이자를 얻으려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설 땅에서는 해마다 조세가 들어오지 않고 백성 대부분이 이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빈객들에게 식사마저 접대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책임지고 돈을 받아주십시오.”

 

393

술과 소를 많이 마련하지 않고는 돈 빌린 사람을 다 모이게 할 수 없고,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알 수 없습니다. 여유 있는 자에게는 갚을 날짜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차용증서를 십 년 동안 가지고 있어도 이자만 더욱 쌓여갈 분이라 성급하게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성급하게 재촉하여 돌려받지 못한다면 위로는 군주가 이익에 눈멀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꼴이 되고, 아래로는 백성이 빚을 갚지 않으려 군주를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을 격려하고 군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쓸모 없는 차용증서를 불살라 받을 수 없는 빚을 없애 설 땅의 백성이 군주를 가까이하고 군주의 이름을 칭송하게 하려고 한 일입니다.

 

397

나는 언제나 빈객들을 좋아하여 그들을 대접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힘썼소. 빈객이 3000명이나 있었음은 선생도 아는 바요. 그러나 빈객들은 내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자 하루아침에 나를 버리고 떠나가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소. 이제 선생의 힘으로 다시 재상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다른 빈객들은 무슨 낯으로 다시 나를 볼 수 있겠소. 만약 다시 나를 만나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을 보이겠소.”

풍환은 이 말을 듣고 말고삐를 매어 놓고 수레에서 내려와 절을 했다. 맹상군도 수레에서 내려와 마주 절하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오?”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선생은 이런 원리를 아십니까? 살아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맹상군에게 손님을 제대로 접대하는 법을 배운다. 맹상군은 손님을 구분함없이 정성을 다해 손님을 접대했고 또한 그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자 손님이 뚝 끊기도 만다. 예나 지금이나 대접받을 것이 있어야 손님도 모여드나 보다. 손님들이 오고 감을 시장에 비유한 풍환의 지혜를 배울 만 하다.


16. 평원군 우경 열전


406

평원군이 말했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빈객으로 삼 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410

“한단의 백성은 땔감이 없어서 죽은 사람의 뼈를 때고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 먹고 있으니 위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후궁은 백여 명을 헤아리고 노비들까지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으며 쌀겨나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백성은 가난한데다가 무기까지 바닥나서 나무를 깎아서 창과 화살을 만듭니다. 그런데 당신의 기물과 종, 경 같은 악기는 그대로입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무너뜨린다면 당신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부인과 아래 사람들을 사졸 사이에 끼워 넣어 같이 일하게 하고 가진 것을 다 푸어 사졸들을 먹이면 위태롭고 고통스런 처지에 놓인 사졸들은 군주의 은혜에 쉽게 감격할 것입니다.”


417

“공보문백이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병들어 죽자 그 죽음을 슬퍼하여 규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가 둘 있었습니다. 문백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문백의 유모가 아들이 죽었는데 소리 내어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하니 어머니는 공자는 어진 사람인데 노나라에서 쫓겨났을 때 내 아들은 쫓겨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아들이 죽으니 그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가 둘이나 있소 이와 같이 된 것은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는 정을 주지 않고 부인들에게는 다정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면 어진 어머니라고 하겠지만, 아내의 입에서 나오면 반드시 질투심이 많은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같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의 마음도 바뀝니다.


421

태사공이 말한다. 평원군은 새가 하늘 높이 날 듯이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재능과 지혜가 있는 공자였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 속담에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은 풍정의 그릇된 말에 빠져 조나라 장평의 사십여만 병사를 산 채로 매장되게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 했다. 우경이 사태를 헤아리고 상황을 추측하여 조나라를 위해 꾀한 계획들은 얼마나 주도면밀 했던가? 그러나 위제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 결국 대량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우경에게 고통과 근심이 없었다면 책을 지어 후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평원군은 재능과 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는 알지 못했을까? 속담대로 이익에 사로잡혀 타고난 지혜가 흐려졌기 때문인가? 사마천이 평원군을 지혜가 흐려졌다고 말한 것은 사욕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타고난 지혜가 있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만큼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발견하는 자기 인식이다.


20. 악의 열전


513

신이 듣기에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가깝다는 이유로 봉록을 주지 않고 공로가 많은 자에게 상을 주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일을 맡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재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이는 공적을 이루는 군주이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사귀는 이는 이름을 남기는 선비입니다.


515

신이 듣건대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이 남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후세까지 칭송을 받는다고 합니다. 


악의 열전에서 현명한 지도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을 발견할 수 있다. 현명한 지도자는 사람을 씀에 있어서 현명해야 한다. 성스러운 군주와 밝은 눈을 가진 선비를 발탁할 수 있는 현명함이다.


21. 염파 인상여 열전


535

길은 멀고 험한 데다 지역이 좁으므로 그곳에서 싸운다는 것은 쥐 두 마리가 쥐구멍 속에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용감한 장군이 이길 것입니다.


545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씨벽 쟁탈전! 화씨벽을 둘러싼 강한 진나라와 약한 조나라의 이야기이다. 조나라에 인상여라는 똑똑하고 용감한 인재가 있었기에, 그리고 인상여의 의견을 신뢰한 조나라 혜문왕이 있었기에 조나라는 진나라에 화씨벽을 강탈당하지 않고, 진나라 성 열 다섯 개와 맞바꿀 수 있었다. 번뜩이는 지혜와 자신을 믿는 용기로써 강한 나라 진나라의 소왕의 강탈을 막은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24. 굴원 가생 열전


586

이소란 걱정스러운 일을 만난다라는 뜻이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자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591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굴원은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꾀죄죄하고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어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소


어부가 물었다.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 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쫓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겠소?”


598

가생은 인사하고 길을 나섰는데 장사라는 곳은 지형이 낮고 습기가 많다는 말을 듣고 자기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좌천되어 떠나가는 중이므로 마음이 우울하였다. 가생은 상수를 건널 때 부를 지어 굴원을 조문하였는데 그 문장은 이러하다.


602

만물은 변하여

진실로 쉼이 없다.

돌아 흘러서 옮겨 가고

또는 밀어서 돌아간다.

형체와 기운이 끊임없이 도니

변하고 진화하는 것 매미와 같네

그 깊은 이치 끝이 없는데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

재앙이란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이란 재앙이 숨어 있는 곳이라.

근심과 기쁨은 같은 문으로 모이고

길함과 흉함은 한곳에 있네.


604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을 낮추고 자기를 귀하다 하네

통달한 사람은 넓게 보고

무슨 물건이건 한결같이 보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하여 죽고

열사는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법

권세를 뽐내는 자는 권세 때문에 죽고

평범한 사람은 삶에만 매달리지.

이익에 유혹되고 가난에 쫓기는 무리는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네.

성인은 사물을 굽히지 않고

수많은 변화를 만나도 한결같다네.

세속 일에 구애 받는 사람은

우리 속에 갇힌 죄수 같도다.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만물을 버리고

홀로 도와 함께 하누나.


 

굴원은 초나라 왕족으로 초나라 회왕 때 사람이다. 굴원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정치를 잘 알며, 글도 잘 지었다. 항상 정직하고 공손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회왕의 신임을 받았다. 굴원을 시기한 근상이라는 자가 회왕과 굴원 사이를 이간함으로써 결국 굴원은 뱌슬을 물러나게 된다. 나라가 잘못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굴원은 근심한다는 뜻의 이소라는 시를 남기고 스스로 강에 바위를 안고 빠져 죽었다. 굴원이 죽은 뒤 초나라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 진나라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굴원의 시 이소전문을 찾아 남긴다. 사마천은 굴원이 죽음을 가볍게 본 것과, 벼슬에서 물러남을 가볍게 본 것으로, 그가 일생을 잘못 살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굴원이 이소를 남긴 것에 주목하고 싶다.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고 <사기>를 남긴 것처럼 굴원은 벼슬을 물러나 죽음을 선택했으나 죽기 전에 이소를 남겼다.


자신의 뜻을 세워 후대에 남겼다는 점에서 사마천과 굴원의 삶은 모두 위대하다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이소는 굴원의 일대기를 시로 표현한 것으로 <사기>를 통틀어 가장 문학적인 작품이라 생각된다.


帝高陽之苗裔兮                   전욱고양씨의 후손이신
朕皇考曰伯庸                     나의 아버지 함자는 백용
攝提貞於孟陬兮                   호랑이 해의 바로 정월
惟庚寅吾以降                     경인일에 나는 태어났다
皇覽揆余初度兮                   아버지는 태어난 날을 살피시고
肇錫余以嘉名                     나에게 좋은 이름 주셨지
名余曰正則兮                     나에게 정칙이라 이름 지어주고
字余曰靈均                       자는 령균이라 하셨지
紛吾旣有此內美兮                 나 이미 이런 아름다움 많은데
又重之以脩能                     다시 재주 겹쳐 받았네
扈江離與辟芷兮                   궁궁이와 구릿대를 입고
紉秋蘭以爲佩                     가을 난초를 엮어 허리장식 삼았네
汩余若將不及兮                   빠른 물살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恐年歲之不吾與                   나 세월과 함께 못할까 두렵네
朝搴阰之木蘭兮                   아침에는 비산에서 목련을 따고
夕攬洲之宿莽                     저녁에는 모래톱의 숙망을 뜯네
日月忽其不淹兮                   해와 달은 갑자기 잠기지 않고
春與秋其代序                     봄과 가을은 그렇게 교대한다
惟草木之零落兮                   초목이 말라감을 생각하면
恐美人之遲暮                     미인의 늙어감이 두렵네
不撫壯而棄穢兮                   어찌 덕을 닦고 더러움을 버리지 않는가
何不改此度                       어찌 이런 태도를 고치지 않는가
乘騏驥以馳騁兮                   천리마를 타고 달리자
來吾道夫先路                     오라 내가 저 앞길에서 안내하리라
昔三后之純粹兮                   옛날 우 탕 문왕의 순수함이여
固衆芳之所在                     여러 향기 있는 곳에서 굳게 자리했네
雜申椒與菌桂兮                   산초나무와 계수나무 섞여있는데
豈維紉夫蕙茝                     어찌 혜초와 어수리만 엮겠는가
彼堯舜之耿介兮                   저 요순의 바르고 강직함이여
旣遵道而得路                     이미 도를 쫒아 길을 얻었지만
何桀紂之猖披兮                   어찌 걸주의 창피함 뿐이랴
夫唯捷徑以窘步                   지름질만 찾다가 걸음이 막혔네
惟夫黨人之偷樂兮                 오로지 저 당인들이 안일함을 탐해
路幽昧以險隘                     길은 험한 장애에 막혀 어둡네
豈余身之憚殃兮                   어찌 내 몸의 재앙만 꺼릴까
恐皇輿之敗績                     임금의 수레가 뒤집힘을 걱정하네
忽奔走以先後兮                   앞뒤로 분주히 뛰어 다니며
及前王之踵武                     선왕의 발자취를 따라 잡으려 하지만
荃不察余之中情兮                 회왕은 나의 충정 살피지 않으시고
反信讒而齌怒                     도로 참소를 믿고 대노하네
余固知謇謇之爲患兮               나 직간이 화가 될 줄 잘 알고 있었지만
忍而不能舍也                     참고 버릴 수 없었네
指九天以爲正兮                   구천을 가리키며 증명하노니
夫唯靈脩之故也                   오직 임금을 위한 일일 뿐이었네
曰黃昏以爲期兮                   황혼에 만나기로 하고는
羌中道而改路                     아 중도에 길을 바꾸어 버렸네
初旣與余成言兮                   처음에 나와 약속하고는
後悔遁而有他                     후에 마음 바꿔 피하고는 다른 마음 가졌네
余旣不難夫離別兮                 나 이미 저 이별을 어려워하지는 않으나
傷靈脩之數化                     임금의 자주 변함에 상심하네
余旣滋蘭之九畹兮                 나 이미 난초를 넓은 밭에 기르고
又樹蕙之百畝                     또 혜초도 백무 밭에 심었네
畦留夷與揭車兮                   밭두둑에는 작약과 게차
雜杜衡與芳芷 ,                    두형과 구릿대도 섞어 심었지
冀枝葉之峻茂兮                   가지와 잎이 크고 무성하기 바라고
願竢時乎吾將刈                   때를 기다려 나 수확하려 했지
雖萎絕其亦何傷兮                 비록 시들어 죽어도 역시 상심하지 않으나
哀衆芳之蕪穢                     뭇 향초가 황폐해 더러워짐을 슬퍼할 뿐
衆皆競進以貪婪兮                 무리는 모두 다투어 재물을 탐하구나
憑不猒乎求索                     가득해도 물리지도 않고 찾고 있다
羌內恕己以量人兮                 아! 안으로는 자기를 용서하면서 다른 사람은 재단하고
各興心而嫉妒                     각기 마음을 세워 질투하네
忽馳騖以追逐兮                   부단히 뛰어다니며 각축하는 것은
非余心之所急                     내가 급히 해야 할 바는 아니다
老冉冉其將至兮                   늙음이 점점 다가오고
恐脩名之不立                     좋은 이름 세우지 못함이 두렵네
朝飲木蘭之墜露兮                 아침에는 목련의 이슬 마시고
夕餐秋菊之落英                   저녁에는 가을국화 떨어진 꽃 먹네
苟余情其信姱以練要兮             진실로 나의 정이 믿음직하고 아름답고 정련하다면
長顑頷亦何傷                     오랫동안 굶주려 부황이 들어도 어찌 상하리오
擥木根以結茝兮                   나무뿌리를 잡고 어수리를 엮고
貫薜荔之落蕊                     벽려의 꽃잎을 엮는다
矯菌桂以紉蕙兮                   계수나무를 잡고 혜초를 엮고
索胡繩之纚纚                     호승을 길고 매끈하게 새끼꼰다
謇吾法夫前脩兮                   아! 나는 선대의 현인을 따르고
非世俗之所服                     세속을 따르지 않으리
雖不周於今之人兮                 비록 오늘날의 사람들과 친하지 못해도
願依彭咸之遺則                   팽함이 남긴 법에 따라 살고 싶어라
長太息以掩涕兮                   긴 탄식에 눈물을 닦으며
哀民生之多艱                     백성의 삶에 고난이 많음을 슬퍼한다
余雖好脩姱以鞿羈兮               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 좋아해 받는 속박이여
謇朝誶而夕替                     아 아침에 간하고 저녁에 교체되네
旣替余以蕙纕兮                   나를 교체함은 혜초 띠 때문이라
又申之以攬茝                     또 어수리를 따기 때문에 그러하리
亦余心之所善兮                   역시 내 마음의 착한 바 있어
雖九死其猶未悔                   비록 아홉 번 죽어도 오히려 후회없네
怨靈脩之浩蕩兮                   임금의 호탕함이 원망스러워라
終不察夫民心                     마침내 민심을 살피지 않네
衆女嫉余之蛾眉兮                 뭇 여자들은 나의 아미를 질투하고
謠諑謂余以善淫                   헐뜯어 말하기를 내가 음란하다 하네  
固時俗之工巧兮                   풍속의 공교함이 굳었도다.
偭規矩而改錯                     법도를 어기고 마음대로 고친다
背繩墨以追曲兮                   먹줄을 배반하고 곡선을 따르며
競周容以爲度                     다투어 구차히 영합함을 법도로 여기네
忳鬱邑余侘傺兮                   나는 근심이 가득 차 낙망하고
吾獨窮困乎此時也                 나 홀로 이때에 곤궁하네
寧溘死以流亡兮                   차라리 갑자기 죽어 흘러가더라도
余不忍爲此態也                   나는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鷙烏之不羣兮                     사나운 새는 무리짓지 않으니
自前世而固然                     옛부터 진실로 그러했다
何方圜之能周兮                   어찌 네모와 원이 능히 합쳐질까
夫孰異道而相安                   누가 서로 길이 다른데 서로 편할 수 있단 말인가
屈心而抑志兮                     마음을 굽히고 뜻을 억누르고
忍尤而攘詬                       허물을 견디고 치욕을 참는다
伏清白以死直兮                   맑고 결백함에 굴복해 죽어도 정직한 것은
固前聖之所厚                     진실로 성인이 중시한 바로다
悔相道之不察兮                   도를 살핌에 철저하지 않음을 후회하며
延佇乎吾將反                     머뭇거리며 나 돌아가리라
回朕車以復路兮                   나의 수레를 돌려 도로 온 길로 돌아가야지
及行迷之未遠                     잘못된 길이 아직 멀지 않으니
步余馬於蘭臯兮                   내 말에게 난초 연못을 거닐게 하고
馳椒丘且焉止息                   산초 언덕을 달려 여기에 쉬게 하리
進不入以離尤兮                   조정에 나아갔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허물만 당함이여
退將復脩吾初服                   물러나 나의 초심을 다시 닦으리
製芰荷以爲衣兮                   마름과 연꽃으로 옷을 만들고
集芙蓉以爲裳                     연잎 모아 치마로 해야지
不吾知其亦已兮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 역시 그만이라
苟余情其信芳                     다만 나의 마음 진실하고 아름답다면
高余冠之岌岌兮                   나의 관 우뚝 높이는 것이고
長余佩之陸離                     나의 허리장식 화려하게 늘이는 것이지
芳與澤其雜糅兮                   향기와 악취 뒤섞여도
唯昭質其猶未虧                   오직 깨끗하고 맑은 성품 줄어들지 않으리
忽反顧以遊目兮                   문득 고개 돌려 멀리 보리라
將往觀乎四荒                     사방 먼 곳까지 가서 보리라
佩繽紛其繁飾兮                   패물이 많아 그 장식이 화려하고
芳菲菲其彌章                     향기 짙어 더욱 뚜렷하다
民生各有所樂兮                   사람들 삶에 각각 좋아하는 것 있지만
余獨好脩以爲常                   나는 홀로 수양함을 법도로 여긴다
雖體解吾猶未變兮                 비록 사지를 찢어도 나는 변하지 않으리
豈余心之可懲                     어찌 나의 마음을 그만 두게 할 수 있겠는가
女嬃之嬋媛兮                     누님의 연연함이여
申申其詈予                       거듭 거듭 나를 나무라며
曰鯀婞直以亡身兮                 곤이 지나치게 강직해 몸을 망쳐
終然殀乎羽之野                   마침내는 우산의 들판에서 죽었다 하니
汝何博謇而好脩兮                 너는 어찌해서 극단적으로 정직해 수양하는 것만 좋아하고
紛獨有此姱節                     홀로 이런 아름다운 절개만 많이 가지고 있는가
薋菉葹以盈室兮                   납가세, 조개풀, 도꼬마리 방에 가득차도
判獨離而不服                     너는 단연코 혼자만 떨어져 차지 않는다
衆不可戶說兮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말할 수 없고
孰云察余之中情                   누가 우리 마음을 살펴 말해 주겠는가
世並舉而好朋兮                   세상은 서로 밀어주고 패거리 짓기 좋아하는데
夫何煢獨而不予聽                대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을 어떻게 하려고 나의 말을 듣지 않는가
依前聖以節中兮                   성인에 의지해 중도를 지키며 살다가
喟憑心而歷玆                     분노에 탄식하며 여기까지 왔다.
濟沅湘以南征兮                   원수와 상수를 건너 남으로 가서
就重華而敶詞                     순임금에게 가서 말씀 아뢰리
啟九辯與九歌兮                   계는 구변과 구가를 지었는데
夏康娛以自縱                     하나라 태강이 즐기다 스스로 방종했다
不顧難以圖後兮                   어려움을 돌아보고 후일을 도모하지 않아
五子用失乎家衖                   다섯 아들 집을 잃었네
羿淫遊以佚畋兮                   예는 방탕하게 사냥했네
又好射夫封狐                     또 큰 여우를 쏘기를 좋아했네
固亂流其鮮終兮                   실로 어지러운 무리들은 좋은 종말 드물고
浞又貪夫厥家                     한착 또한 그 집을 탐했다네
澆身被服強圉兮                   한착의 아들 요는 강한 몸을 가져
縱欲而不忍                       욕망을 쫒아 참지 못했네
日康娛而自忘兮                   매일 편안히 즐기고 자신을 잊어
厥首用夫顛隕                     그 머리 떨어졌네
夏桀之常違兮                     하의 걸왕은 늘 도리를 어겨
乃遂焉而逢殃                     마침내 재앙을 만났다
后辛之菹醢兮                     주왕의 육장 담그는 형벌로
殷宗用而不長                     은나라의 종사는 결국 길지 않았다
湯禹儼而祗敬兮                   탕왕과 우왕은 근엄하고 공경스러웠다.
周論道而莫差                     주왕은 도리를 따져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舉賢而授能兮                     현인을 천거하고 유능한 자 받아들이고
循繩墨而不頗                     법도를 따라 치우치지 않았네
皇天無私阿兮                     하늘은 사사로이 편듦이 없어
覽民德焉錯輔                     백성의 덕을 보고 바로 도움을 준다
夫維聖哲以茂行兮                 다만 성인은 덕행이 높아
苟得用此下土                     진실로 이 세상에 적합하다.
瞻前而顧後兮                     앞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고
相觀民之計極                     관찰해 백성의 근본타산을 고려한다
夫孰非義而可用兮                 누가 의롭지 않은데 쓸 수 있으며
孰非善而可服                     누가 착하지 않은데 가질 수 있겠는가
阽余身而危死兮                   나의 몸이 위태롭고 죽음에 처해도
覽余初其猶未悔                   나의 초심을 돌아보고 오히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不量鑿而正枘兮                   도끼 구멍 헤아리지 않고 자루 맞추어
固前脩以菹醢                     진실로 옛 현인은 염장 당했다.
曾歔欷余鬱邑兮                   거듭 흐느끼고 울적해하며
哀朕時之不當                     나는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한다
攬茹蕙以掩涕兮                   부드러운 혜초를 가지고 눈물을 닦지만
霑余襟之浪浪                     눈물이 흘러 옷깃 젖네
跪敷衽以陳辭兮                   무릎 꿇고 옷깃을 펼치고 말씀 올리니
耿吾旣得此中正                   나 이미 환하게 정도를 얻었다
駟玉虯以乘鷖兮                   네마리 흰 규룡이 끄는 봉황 수레타고
溘埃風余上征                     갑자기 부는 회오리바람에 나는 하늘로 올라간다
朝發軔於蒼梧兮                   아침에 수레 쇄기를 빼고 창오에서 출발해
夕余至乎縣圃                     저녁에 나는 곤륜산 현포에 도착했다
欲少留此靈瑣兮                   잠시 이곳 영쇄에서 머물고자 하나
日忽忽其將暮                     해가 홀홀히 지려한다
吾令義和弭節兮                   나는 희화에게 천천히 가도록 명해
望崦嵫而勿迫                     엄자산을 바라보고 접근치 말도록 했다
路曼曼其脩遠兮                   길은 길게 늘어져 멀고
吾將上下而求索                   나는 오르내리며 찾는다
飲余馬於咸池兮                   함지에서 내 말 물 먹이고
總余轡乎扶桑                     부상에 말고삐 묶는다
折若木以拂日兮                   약목을 꺾어 해를 거스르고
聊逍遙以相羊                     편안히 거닐고 배회하네
前望舒使先驅兮                   달 신을 앞에서 달리게 하고
後飛廉使奔屬                     뒤에 바람 신은 따라오게 했다
鸞皇爲余先戒兮                   난새와 암봉황은 나를 위해 앞에서 미리 일러주고
雷師告余以未具                   번개신은 나에게 갖추어지지 못한 것을 고하네
吾令鳳鳥飛騰兮                   나는 봉황새에게 날아 오르게 명하고
繼之以日夜                       밤낮으로 계속하게 했다
飄風屯其相離兮                   회오리바람 모였다가 흩어지더니
帥雲霓而來御                     구름과 무지개 몰고 와서 맞이하네
紛緫緫其離合兮                   모두 다 흩어졌다 모이고
斑陸離其上下                     아롱지며 아래 위로 뒤섞이네
吾令帝閽開關兮                   나는 천제의 문지기에게 문을 열라 명했으나
倚閶闔而望予                     문짝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네
時曖曖其將罷兮                   때는 어둑어둑해 장차 날이 지려하는데
結幽蘭而延佇                     그윽한 난초 묶어 우두커니 기다리네
世溷濁而不分兮                   세상은 혼탁하고 분별없어
好蔽美而嫉妒                     아름다움 덮고 질투하기 좋아하네
朝吾將濟於白水兮                 아침에 백수를 건너려고
登閬風而緤馬                     낭풍에 올라 말을 매었네
忽反顧以流涕兮                   문득 돌아보며 눈물 흘리며
哀高丘之無女                     높은 언덕에 여인 없음을 슬퍼한다
溘吾遊此春宮兮                   어느새 나는 이 춘궁에서 놀며
折瓊枝以繼佩                     옥가지를 꺾어 패물로 삼네
及榮華之未落兮                   화려한 꽃 떨어지기 전에
相下女之可詒                     전해줄 하녀를 골라야 겠네
吾令豐隆椉雲兮                   풍륭에게 구름을 타라고 말하고
求虙妃之所在                     복비의 소재를 찾게 했네
解佩纕以結言兮                   패띠를 풀어 약속하고
吾令蹇脩以爲理                   건수에게 조리있게 중매토록 명했네
紛緫緫其離合兮                   복잡하게 모두 흩어지고 모이고
忽緯繣其難遷                     갑자기 어그러져 옮기기가 어렵네
夕歸次於窮石兮                   저녁에 궁석산에 돌아와 머물고
朝濯髮乎洧盤                     아침에 유반에서 머리감는다
保厥美以驕傲兮                   그 아름다움을 가지고 교만하여
日康娛以淫遊                     날로 편히 즐기고 지나치게 논다
雖信美而無禮兮                   비록 믿음직하고 아름답지만 무례하니
來違棄而改求                     앞으로 버리고 다시 구하리
覽相觀於四極兮                   사방 끝까지 두루 자세히 보고
周流乎天余乃下                   하늘을 주류하다가 나 아래로 내려왔다
望瑤臺之偃蹇兮                   요대가 거만하게 높음을 바라보니
見有娀之佚女                     유융국의 미녀가 보이네
吾令鴆爲媒兮                     나 짐새에게 중매를 명했으나
鴆告余以不好                     짐새는 나를 나쁘게 말했네
雄鳩之鳴逝兮                     숫비둘기 울고 가나
余猶惡其佻巧                     나는 그 경박하고 교활함을 싫어하네
心猶豫而狐疑兮                   마음은 머뭇머뭇 의심 들고
欲自適而不可                     스스로 가려하나 갈 수 없네
鳳皇旣受詒兮                     봉황은 이미 예물을 받았으니
恐高辛之先我                     고신씨가 나보다 앞설까 두려워
欲遠集而無所止兮                 멀리 가기를 바라나 멈출 곳이 없어
聊浮遊以逍遙                     단지 떠다니며 노네
及少康之未家兮                   소강이 아직 장가가지 않았을 때
留有虞之二姚                     유우씨의 두 딸을 취하리
理弱而媒拙兮                     논리가 약하고 중매가 서툴러
恐導言之不固                     소개말이 확실치 못할까 두렵네
世溷濁而嫉賢兮                   세상은 혼탁해 현자를 질투하고
好蔽美而稱惡                     아름다움을 덮고는 나쁘게 이야기 하는 것 좋아해
閨中旣以邃遠兮                   아녀자 머무는 곳 깊고 머니
哲王又不寤                       현명한 왕도 또한 알지 못하네
懷朕情而不發兮                   나는 정을 품고 펴지 못하니
余焉能忍與此終古                 어찌 이것을 참고 영원하겠는가
索藑茅以筳篿兮                   경모초를 찾고 댓점을 찾았네
命靈氛爲余占之                   영분에게 명해 나에게 점치라 했네
曰兩美其必合兮                   말하기를 두 아름다움 반드시 합쳐지지만
孰信脩而慕之                     누가 믿고 수양해 그를 사모하겠는가
思九州之博大兮                   구주가 광대한 것을 생각하면
豈唯是其有女                     어찌 이곳에만 여자가 있겠는가
曰勉遠逝而無狐疑兮               또 말하기를 멀리 가기를 힘쓰고 의심하지 마라
孰求美而釋女                     누가 미녀를 구하면서 그녀를 보내겠는가
何所獨無芳草兮                   어딘들 방초가 없는 곳이 있겠는가
爾何懷乎故宇                     너는 어찌 옛집만 생각하나
世幽昧以昡曜兮                   세상은 어둡고 사람을 현혹시키니
孰云察余之善惡                   누가 나의 옳고 그름을 살펴 말해줄까
民好惡其不同兮                   사람들의 좋아하고 싫어함은 차이가 있지만
惟此黨人其獨異                   유독 이 당인들만 특별히 다르네
戶服艾以盈要兮                   집집마다 쑥을 허리가득 차고는
謂幽蘭其不可佩                   유란은 찰 수 없다하네
覽察草木其猶未得兮               초목을 살펴보는 것도 못하면서
豈珵美之能當                     어찌 패옥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능히 할 수 있으랴
蘇糞壤㠯充幃兮                   똥 흙으로 향낭을 채우면서
謂申椒其不芳                     신초는 향기가 없다라고 하네
欲從靈氛之吉占兮                 영분의 길점을 따르고자 하나
心猶豫而狐疑                     마음은 주저하고 의심하네
巫咸將夕降兮                     무함이 저녁에 내려오려 하니
懷椒糈而要之                     산초와 정미 품고 그를 맞이해야겠네
百神翳其備降兮                   백신이 햇빛 가리며 내려오고
九疑繽其並迎                     구의산의 순임금 어지러이 맞이하네
皇剡剡其揚靈兮                   빛이 번쩍이며 신령함을 드러내고
告余以吉故                       나에게 길한 까닭을 알려주네
日勉陞降以上下兮                 말하기를 열심히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求榘矱之所同                     법도가 같은 자를 찾으시오
湯禹儼而求合兮                   탕왕과 우왕 근엄히 합치하는 자를 찾고
摯咎繇而能調                     지와 고요 능히 조화로웠소
苟中情其好脩兮                   진실로 마음에 수양을 좋아한다면
又何必用夫行媒                   왜 하필 중매에 힘쓰겠는가
說操築於傳巖兮                   대신 전설이 전암에서 흙담을 쌓고 있었는데
武丁用而不疑                     무정이 쓰면서 의심하지 않았소
呂望之鼓刀兮                     강태공이 백정으로 칼 두드려도
遭周文而得舉                     주 문왕을 만나 천거되었소
甯戚之謳歌兮                     영척의 노래여
齊桓聞以該輔                     제 환공이 듣고서 보필이 되었고
及年歲之未晏兮                   나이 늦지 않았고
時亦猶其未央                     시기 역시 끝나지 않았소
恐鵜鴃之先鳴兮                   두견새 먼저 울까 두려워라
使夫百草爲之不芳                 온갖 풀들 향기나지 않도록 하니까
何瓊佩之偃蹇兮                   경옥 패물 얼마나 대단한가
衆薆然而蔽之                     하지만 사람들이 무리지어 가리네
惟此黨人之不諒兮                 이 당인들을 믿지 못함이여
恐嫉妒而折之                     질투하여 꺾을까 두려워라
時繽紛其變易兮                   시절이 어지러이 흩날리고 바뀌니
又何可以淹留                     또 어찌 오래 머물수 있으리오
蘭芷變而不芳兮                   난초와 구릿대가 변하여 향기나지 않고
荃蕙化而爲茅                     전초와 혜초는 띠풀이 되었네
何昔日之芳草兮                   어찌 전날의 방초가
今直爲此蕭艾也                   오늘날 바로 쑥이 되었나
豈其有他故兮                     어찌 다른 이유가 있으리
莫好脩之害也                     수행을 좋아해 입은 해 아니겠는가
余以蘭爲何恃兮                   나는 난초가 믿을만하다 여겼는데
羌無實而容長                     아 내실 없이 외모만 좋구나
委厥美以從俗兮                   그 아름다움 내버리고 시속을 좇아
苟得列乎衆芳                     구차히 여러 방초 사이에 늘어서 있네
椒專佞以慢慆兮                   산초는 아첨에 전념해 방탕히 기뻐하고
樧又欲充夫佩幃                   수유는 저 향주머니를 채우려 하네
旣干進而務入兮                   이미 나아감을 구해 들어가려 힘쓰는데
又何芳之能祗                     어찌 그 향기가 능히 공손하리오
固時俗之流從兮                   진실로 시속을 좇아 따르면
又孰能無變化                     누가 능히 변화하지 않으리
覽椒蘭其若玆兮                   산초와 난초를 보아도 이와 같은데
又況揭車與江離                   하물며 게차와 궁궁이야 어떠리
惟玆佩之可貴兮                   오직 이 패물이 귀하건만
委厥美而歷玆                     그 아름다움을 버림받아 여기에 이르렀네.
芳菲菲而難虧兮                   향기 가득해 줄어들기 어려우니
芬至今猶未沫                     향기 지금에 이르러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和調度以自娛兮                   격조와 법도에 맞춰 스스로 즐기며
聊浮游而求女                     잠시 떠돌며 미인을 구하리라
及余飾之方壯兮                   나의 장식이 단정하고 장엄하므로
周流觀乎上下                     널리 떠돌며 위아래를 살펴 보리라
靈氛旣告余以吉占兮               영분이 이미 나에게 길한 점괘를 알렸으니
歷吉日乎吾將行                   좋은 날을 택해 나 가리라
折瓊枝以爲羞兮                   경옥 가지 꺾어 음식으로 올리고
精瓊爢以爲粻                     경옥을 찧고 도정해 양식으로 삼으리라
爲余駕飛龍兮                     날 위해 비룡에 멍에 매고
雜瑤象以爲車                     옥과 상아를 모아 수레로 하네
何離心之可同兮                   어찌 떠난 마음이 다시 합쳐질까
吾將遠逝以自疏                   나 장차 멀리 떠나 스스로 소원해지리라
邅吾道夫崑崙兮                   떠돌아다니다 곤륜산으로 향하니
路脩遠以周流                     길은 멀고멀어 두루 거쳐가네
揚雲霓之晻藹兮                   구름과 무지개 날리니 어두워지고
鳴玉鸞之啾啾                     옥으로 만든 난새 추추 하고 운다
朝發軔於天津兮                   아침에 하늘 나루터에서 수레 굄목을 뺐는데
夕余至乎西極                     저녁에 나는 서쪽 끝에 도착했다
鳳皇翼其承旂兮                   봉황의 날개가 깃발을 받들고
高翱翔之翼翼                     높이 빙빙 돌며 하늘 가득 정연하네
忽吾行此流沙兮                   갑자기 나는 모래 흐르는 사막을 지나고
遵赤水而容與                     적수를 따라가다 마음 편히 즐기네
麾蛟龍使梁津兮                   교룡을 불러 나루에 다리 놓게 하고
詔西皇使涉予                     소호 금천씨에게 고하고 나를 건너게 했다
路脩遠以多艱兮                   길이 멀고멀어 어려움 많으니
騰衆車使徑待                     여러 수레 타고 지름길에서 기다리게 하네
路不周以左轉兮                   불주산 가는 길에 왼쪽으로 돌아
指西海以爲期                     서해를 가리키며 만날 기약했네
屯余車其千乘兮                   내 수레 모으면 천 대인데
齊玉軑而並馳                     옥 바퀴축 덮개 나란히 달린다
駕八龍之婉婉兮                   여덟 마리 용의 꿈틀거림이여
載雲旗之委蛇                     구름 깃발 싣고 구불구불하구나
抑志而弭節兮                     뜻을 누르고 절개를 그치고자 해도
神高馳之邈邈                     정신은 아득히 높게 달린다
奏九歌而舞韶兮                   구가를 연주하고 소무춤을 추며
聊假日以媮樂                     잠시 날을 빌려 즐겁게 노세
陟陞皇之赫戲兮                   황천에 오르니 찬란히 빛나도다
忽臨睨夫舊鄉                     갑자기 옛 고향이 눈에 들어오네
僕夫悲余馬懷兮                   마부는 슬퍼하고 내 말은 그리워하네
蜷局顧而不行                     구부려 돌아보며 가지를 않네
亂曰                                난사에 이르기를
已矣哉                             말아라
國無人莫我知兮                   나라에 사람 없어 나를 알아주지 않는데
又何懷乎故都                     어찌 고향을 생각하리
旣莫足與爲美政兮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정치를 함께 할 수 없다면
吾將從彭咸之所居                 나는 장차 팽함이 사는 곳을 따르리


25. 여불위 열전


616

여불위는 한단의 여러 첩 가운데 외모가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았는데 그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초는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일어나 여불위의 장수를 축하하면서 그녀를 달라고 했다. 여불위는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자기 집 재산을 다 기울여 자초를 위해 힘쓰고 있는 까닭은 진기한 재물을 낚으려는 것임을 떠올리고 마침내 그 여자를 바쳤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몸임을 숨기고 만삭이 되어 정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자초는 마침내 그 여자를 부인으로 세웠다.


616

진나라 왕이 즉위한 지 일년 만에 죽자 시호를 효문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태자 자초가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장양왕이다. 장양왕은 양어머니 화양 부인을 화양 태후라 하고 생모 하희를 높여서 하 태후라 하였다.


618

장양왕이 즉위한 지 삼 년 만에 죽자 태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정은 여불위를 존중하여 상국으로 삼고 중부라고 불렀다. 진나라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태후가 때때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불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여불위 열전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기 아내도 팔아 먹는 남자, 자신의 아들도 팔아 먹는 남자이다.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된다. 그가 팔아먹은 아들은 진시황이 되어 중국 대륙을 통일한 황제가 되고, 그가 팔아 먹은 아내와 결국 조우한다. 결국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된다.


이런 이야기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속이 부글부글 기분 나쁘다.


26 자객 열전


649

장군의 목을 얻어 진나라 왕에게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진나라 왕은 반드시 기뻐하여 저를 만나 줄 것입니다. 그때 제가 왼손으로는 그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찌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가 업신여김을 당한 것도 씻을 수 있습니다. 장군은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번오기가 한쪽 어깨를 드렁내고 한 손으로 팔을 움켜주니 채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가슴을 치며 고대하던 일입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655

진시황은 고점리가 축을 뛰어나게 잘 타는 솜씨를 아까워하여 용서하는 대신 눈을 멀게 했다. 그러고 나서 고점리에게 축을 타게 하였는데 그 소리를 칭찬하지 않는 적은 없었다. 고점리는 축 속에 납덩어리를 감추어 넣었다가 진시황 곁으로 가까이 갔을 때 축을 들어 진시황을 향해 내리쳤지만 맞지 않았다. 진시황은 결국 고점리를 죽였다. 이 일로 인해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제후국에서 온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진시황을 죽이기로 결심한 자객들! 난 왜 그들을 응원하고 있나.


27. 이사 열전


661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696

이사가 죽고 2세 황제가 조고를 중승상으로 삼자, 크든 작든 모든 일은 조고가 결정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무거운 줄을 알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사슴이지?”

좌우에 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입니다.”

2세 황제는 놀라서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태복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그러자 태복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봄가을로 교사 지낼 때 종묘 귀신을 모시면서 재계가 석연치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덕을 많이 쌓아 재계를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2세 황제는 상림원으로 들어가 재계하는 척하고는 실제로는 날마다 새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면서 놀았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상림원으로 들어오자 2세 황제가 활을 쏘아 그를 죽였다. 


<사기열전>을 통털어 가장 얄미운 사람, 조고! 진시황이 죽어 거 참 고소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멋진 인물이 나와 진나라를 이어가길 바랬다. 하지만 조고의 등장으로 스토리는 꼬인다.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그저 한숨만 나왔다. 권력이란 그런 것인가? 사슴을 말이라 하면, 사슴이 말이 되는 것! 그런 것인가? 간사한 조고를 신임하는 황제는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인가? 부강함을 자랑했던 진나라는 권력에 눈 먼 간신 조고 때문에 약해질 대로 약해져 결국은 망하고 말았다.


29. 장이 진여 열전


716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킨 지 몇 해 지났을 때 장이와 진여가 위나라의 이름있는 선비라는 소문을 듣고 장이에게는 1000, 진여에게는 500금의 현상금을 걸어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장이와 진여는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함께 진으로 가서 어느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끼니를 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문을 지키고 있는데 마을의 관리가 진여에게 잘못이 있다고 매질을 하였다. 진여가 발끈하여 대들려고 하자 장이가 진여의 발을 밟아 그대로 매를 맞게 했다. 관리가 떠나자, 장이는 진여를 뽕나무 아래로 데려가 이렇게 꾸짖었다.

“처음에 나와 그대가 약속한 것이 무엇이오? 지금 하찮은 치욕 때문에 일개 마을관리의 손에 죽으려고 하시오?”

진여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진나라는 조서를 내려 돈을 걸고 이 두 사람을 찾았는데 두 사람은 오히려 문지기 신분으로 마을 안에 조서를 전달하였다.


722

무신은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조왕이 되었다. 그는 진여를 대장군으로 삼고, 장이를 우승상으로 삼았으며, 소소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723

진나라가 아직 망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등의 집안 사람을 모두 죽인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진나라가 생기는 꼴입니다. 그보다는 무신이 왕이 된 것을 축하해주고 하루빨리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치는 것이 좋습니다.


731

한나라 원년 2월에 항우는 제후들을 왕에 봉하였다. 장이는 평소 여러 곳을 다니며 교제의 폭을 넓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천하였고, 항우도 평소 장이가 현명한 인물이라고 들었으므로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장이를 상상왕으로 세워 신도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진여가 함곡관으로 들어올 때 자기를 따라오지 않았으므로 그가 남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남피 부근의 세 현을 봉읍으로 주었다.


738

장이와 진여는 어진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 졌으며 그들의 빈객과 종들까지도 천하의 준걸 아닌 이가 없어서 제각기 살고 있는 나라에서 경상의 자리를 얻었다.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빈궁할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켰으니, 어찌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를 멸망시켰다. 예전에는 서로 앙모하여 신뢰함에 성의를 다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반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권세와 이익만 쫓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록 명예가 높고 빈객이 많았다 해도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태백이나 연릉의 계자와는 상황이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32. 회음후 열전


775

한신이 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무명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 가운데 한 아낙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고 밥을 주었는데 빨래를 다할 때까지 수십 일 동안을 그렇게 했다. 한신이 기뻐하며 아낙에게 말했다.

“내 언젠가는 이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소.”

그랬더니 아낙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도 못하기에 내가 젊은이를 가엾게 여겨 밥을 드렸을 뿐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회음의 백성 중에서 한신을 업신여기는 한 젊은이가 한신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키는 커서 칼을 잘도 차고 다니지만 마음속으로는 겁쟁이일 것이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서 한신을 모욕하면 말했다.

“네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를 찌르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이때 한신은 그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갔다. 이 일로 해서 시장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779

왕께서는 본래 오만하여 예를 차리지 않으십니다. 지금 대장을 임명하는데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하시니 이것이 바로 한신을 떠나게 한 까닭입니다.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삼으시려면 좋은 날을 택하여 재계하고 단장을 설치하여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780

천하는 마음을 얻은 자의 몫이다.


783

싸움에 진 장수는 무용을 말하지 않는다.


789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미친

사람의 말도 가려서 듣는다. 


796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804

그러나 한신은 망설이면서 차마 한나라를 배반하지 못했다. 또 자신이 공이 많으니 한나라가 끝내 제나라를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괴통의 제안을 거절했다. 괴통은 한신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얼마 안 가서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었다.


804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훌륭한 활을 치운다.


809

한신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여후는 한신의 삼족을 멸하였다.


811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공, 소공, 태공망 등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했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33. 한신, 노관 열전

827

빈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변란의 조짐이다.


831

태사공은 말한다.


“한신과 노관은 본래 대대로 덕을 쌓고 착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의 권모술수로 벼슬을 얻고 간사함으로 공을 이루었다. 한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 만났으므로 땅을 갈라 받고 남쪽을 바라보며 고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 안으로는 지나치게 강해지고 커졌다는 의심을 받았고, 나라 밖으로는 흉노를 원조자로 믿고 기댔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조정과 멀어지고 자신들까지 위태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일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지혜가 다하자 흉노로 달아났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 진희는 양나라 사람으로 젊을 때는 위나라 공자 무기를 자주 칭찬하고 흠모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변방을 지킬 때도 빈객들을 불러 모으고 선비들에게 몸을 굽혀 겸손하게 행동했는데 그의 명성이 사실보다 지나쳤다. 그래서 주창이 그를 의심하여 심문까지 하게 되었고, 잘못이 자못 많이 드러났다. 진희는 그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까 봐 두려워 간사한 자의 말을 듣고 마침내 무도한 짓에 빠져들었다. 아 슬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과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


 

 3. 내가 저자라면

 

한마디로 사마천에 훅 갔다. 사마천의 인생에 훅 간 거다. 인간 사마천에 훅 간 것은, 한 무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을 피력한 점과 궁형이라는 남자에겐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극형을 감수하고 <사기>를 완성한 데 있다. <사기열전> <사기>중에서 사마천의 역사관이 가장 잘 드러나있다. 사마천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라고 믿고 황제도 제후도 아닌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객관성을 띄는 것은 역사책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써 제대로 된 충분한 자료를 바탕에 둔 것과 역사가로서 세상을 바라는 보는 눈 즉 사관이 정확하다는 데 있다.


<사기>는 관찬사서(임금의 명령으로 만든 역사책)가 아니다. 사찬사서(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관찬사서에 비해 사찬사서는 역사책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한 것과 자료를 모으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하지만 사찬사서인 <사기>가 중국의 공식 역사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사기>에 쓰인 자료가 제대로 된 것들이었고, 그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생생한 역사를 그려낼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게다가 <사기>는 사찬사서로서의 장점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사기열전>의 각 장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태사공은 말한다라고 시작하는 부분에 그 내용은 잘 반영되어 있다.


<사기열전>을 보면서, ‘저자라면 이래야 한다.’라는 모범 답안을 보는 것 같았다. 저자가 되어 글을 쓴다면 사마천처럼 인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정확한 눈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한 바른 관점은 제대로 된 충분한 자료와 제 3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행자 시각, 그리고 당대의 평가를 뛰어넘을 만한 소신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목차 및 구성


<사기>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전체 본기,표,서,세가,열전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세부 목차를 다음과 같다.
본기
총 12편. 왕(王)들의 연대기를 다룬다. 중국 역사 초의 5제(五帝)에서 한(漢) 무제(武帝)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오제본기(五帝本紀)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항우본기(項羽本紀)
고조본기(高祖本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효문본기(孝文本紀)
효경본기(孝景本紀)
효무본기(孝武本紀)


총 10편. 본기에 나오는 제왕 및 제후들의 흥망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연표이다.
1.삼대 세표 (三代世表)
2.십이제후 연표 (十二諸侯年表)
3.육국 연표 (六國年表)
4.진초지제 월표 (秦楚之際月表)
5.한흥이래제후 연표 (漢興以來諸侯年表)
6.고조공신후자 연표 (高祖功臣侯者年表)
7.혜경간후자 연표 (惠景間侯者年表)
8.건원이래후자 연표 (建元以來侯者年表)
9.건원이래왕자 연표 (建元已來王子年表)
10.한흥이래장상명신 연표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총 8편. 역대의 정책과 제도, 문물의 발달사 및 전망을 다룬다.
1.예서(禮書)
2.악서(樂書)
3.률서(律書)
4.역서(暦書)
5.천관서(天官書)
6.봉선서(封禪書)
7.하거서(河渠書)
8.평준서(平準書)
 
세가
총 30편.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제후(諸侯)들에 대해 다룬다.
1.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 오
2.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 제
3.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노
4.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 연
5.관채세가(管蔡世家) - 관숙선 • 채 • 조
6.진기세가(陳杞世家) - 진 • 기
7.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 위
8.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 송
9.진세가(晉世家) - 진
10.초세가(楚世家) - 초
11.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 월
12.정세가(鄭世家) - 정
13.조세가(趙世家) - 조
14.위세가(魏世家) - 위
15.한세가(韓世家) - 한
16.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 전제
17.공자세가(孔子世家) - 공자
18.진섭세가(陳涉世家) - 진승
19.외척세가(外戚世家) - 한나라의 외척 (여씨, 박씨, 두씨, 왕씨)
20.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 초원왕 유교
21.형연세가(荊燕世家) - 형왕 유고 • 연경왕 유택
22.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 제도혜왕 유비
23.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 찬후 소하
24.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 평양후 조참
25.유후세가(留侯世家) - 유후 장량
26.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 곡역후 진평, 안국후 왕릉, 벽양후 심이기
27.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 강후 주발
28.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 양효왕 유무
29.오종세가(五宗世家) - 경제의 아들
30.삼왕세가(三王世家) - 무제의 아들
 
열전
총 70편.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
1.백이 열전(伯夷列傳)
2.관•안 열전(管晏列傳)
3.노자•한비 열전(老子韓非列傳)
4.사마양저 열전(司馬穰苴列傳)
5.손자•오기 열전(孫子吳起列傳)
6.오자서 열전(伍子胥列傳)
7.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列傳)
8.상군 열전(商君列傳)
9.소진 열전(蘇秦列傳)
10.장의 열전(張儀列傳)
11.저리자•감무 열전(樗里子甘茂列傳)
12.양후 열전(穰侯列傳)
13.백기•왕전 열전(白起王翦列傳)
14.맹자•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
15.맹상군 열전(孟嘗君列傳)
16.평원군•우경 열전(平原君虞卿列傳)
17.위공자 열전(魏公子列傳)
18.춘신군 열전(春申君列傳)
19.범수•채택 열전(范雎蔡澤列傳)
20.악의 열전(樂毅列傳)
21.염파•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
22.전단 열전(田單列傳)
23.노중련•추양 열전(魯仲連鄒陽列傳)
24.굴원•가생 열전(屈原賈生列傳)
25.여불위 열전(呂不韋列傳)
26.자객 열전(刺客列傳)
27.이사 열전(李斯列傳)
28.몽염 열전(蒙恬列傳)
29.장이•진여 열전(張耳陳餘列傳)
30.위표•팽월 열전(魏豹彭越列傳)
31.경포 열전(黥布列傳)
32.회음후 열전(淮陰侯列傳)
33.한신•노관 열전(韓信盧綰列傳)
34.전담 열전(田儋列傳)
35.번•역•등•관 열전(樊酈滕灌列傳)
36.장승상 열전(張丞相列傳)
37.역생•육고 열전(酈生陸賈列傳)
38.부•근•괴성 열전(傅靳蒯成列傳)
39.유경•숙손통 열전(劉敬叔孫通列傳)
40.계포•난포 열전(季布欒布列傳)
41.원앙•조착 열전(袁盎晁錯列傳)
42.장석지•풍당 열전(張釋之馮唐列傳)
43.만석•장숙 열전(萬石張叔列傳)
44.전숙 열전(田叔列傳)
45.편작•창공 열전(扁鵲倉公列傳)
46.오왕비 열전(吳王濞列傳)
47.위기•무안후 열전(魏其武安侯列傳)
48.한장유 열전(韓長孺列傳)
49.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
50.흉노 열전(匈奴列傳)
51.위장군•표기 열전(衛將軍驃騎列傳)
52.평진후•주보 열전(平津侯主父列傳)
53.남월 열전(南越列傳)
54.동월 열전(東越列傳)
55.조선 열전(朝鮮列傳)
56.서남이 열전(西南夷列傳)
57.사마상여 열전(司馬相如列傳)
58.회남•형산 열전(淮南衡山列傳)
59.순리 열전(循吏列傳)
60.급•정 열전(汲鄭列傳)
61.유림 열전(儒林列傳)
62.혹리 열전(酷吏列傳)
63.대원 열전(大宛列傳)
64.유협 열전(遊俠列傳)
65.영행 열전(佞幸列傳)
66.골계 열전(滑稽列傳)
67.일자 열전(日者列傳)
68.귀책 열전(龜策列傳)
69.화식 열전(貨殖列傳)
70.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
 

<사기>는 총 130권의 책으로 크게 본기, , , 세가, 열전 이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중국 전설시대인 5제부터 한나라 무제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는 통사이다. 수천 년의 중국 역사를 다루면서 100년의 진,한 시대가 그 2/3를 차지한다.


본기는 역대 황제의 업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이고, 표는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표이다. 서는 의례, 음악, 천문 등 여러 문물 제도들의 다양한 문화를 다룬 것이고, 세가는 제후들의 역사, 열전은 여러 인물들의 전기이다. 여러 개의 장을 갖는 이런 서술 방식은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처음 만든 것인데 본기의 와 열전의 을 따서 기전체라 부르며 이후 모든 중국 공식 역사책에서 사용하게 된다.


감동적인 장절


84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초나라 위왕은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이지요. 그대는 어찌 교제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오?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어.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리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보완점


보완점은 찾지 못했다.





 

 

IP *.65.153.57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