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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1일 11시 52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글 고운기 / 사진 양진 / 현암사 / 2002]

 

*저자에 대하여*

<저자 고운기의 일연을 향한 짝사랑>

저자 고운기는 1981년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상식적으로 배워온 역사의 진리를 믿기로 한다. 역사는 참으로 무겁게 그러나 기어이 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으로 즐겨 읽었던 책이 <역사를 위한 변명>과 <三國遺事삼국유사>이다.

저자가 구체적으로 <삼국유사>에 빠져들었던 것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일연의 48수 시 중 한편이었다.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 홀연히 들리는 노 젓는 소리 / 깜짝 놀라 멀리 나네 / 어느 곳 고깃배인지 / 안개 속에 이르는 손님.

작자는 “시초는 그렇게 신비롭고 엄숙했다. 안개가 가득한 강 저편에서 새로운 진리를 품고 미지의 땅을 향해 다가오는 전도자의 모습이 시 속에는 여실히 그려져 있다. 움직임과 고요함. 상승과 하강의 시적 긴장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작자는 이 시를 읽으면서 단박에 일연에 그리고 그가 쓴 <삼국유사>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작자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그 많은 기록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현지 답사와 더불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인상깊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일연의 발길이 애정어리게 주지고 치밀함과 정성이 배어 기록되었기에, 우리가 오늘날 이 책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같은 수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작자는 <삼국유사>의 이해가 책상에 앉아 읽는 것이 아니라 발로 뛰며 읽어 나가야겠다 생각하였다. 이것이 학문의 단초가 되어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삼국유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캐기 시작하였으며, 작자의 관심과 시각은 그 현장과 관련되었다.

<삼국유사>룰 새롭게 읽기 위해 이야기의 현장을 직접 방문해보고 그 의미를 상고해봄은 일연 자신이 그러한 행로를 겪었기 때문이고, 온전히 그가 남기고자 한 뜻을 읽어 내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기에 작자는 1988년 여름 인각사를 시작으로 그 행로를 시작하여 남한에 있는 <삼국유사>의 무대를 거의 다 가보게 된다. 이는 삼국유사에 대한 지독한 짝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운기가 본 작자 일연>

일연은 1206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金(김)이었으며 이름은 見明(견명)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홀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되었는데, 아홉 살 나던 해 광주 무량사로 취학한 것도 이런 사정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엔 다만 공부를 하기 위해 갔던 무량사에서 인연이 되어 일연은 열네 살 되던 해 설악산의 陳田寺(진전사)로 가서 삭발을 하고 스님이 되었다.

승려로서 처음 처음 이름은 晦然(회연)이었다. 스물두 살에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고 전란기의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도 올곧은 수도생활을 계속하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차례 올랐다. 세속의 지위에 큰 의미를 부여할 바 아니나 그가 얼마나 자기 삶에 충실했던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마흔네 살에 당대의 실력자 鄭晏(정안)이 남해의 개인집을 내놓고 定林寺(정림사)를 만들었는데 그곳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때부터 바야흐로 불교계의 지도자로 자리잡아가게 된다. 왕명을 받들어 불교행사를 주관하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지금 남아 유일하게 전하는 그의 저서 <重篇曺洞五位중편조동오위>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一然(일연)이란 이름은 그가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로 改名의 이유룰 분명히 알지 못한다. 다만 옛 분들의 작명관습으로 보아 세속에서의 이름과 승려가 되어 처음 가진 이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일연은 처음 이름이 見明(견명)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晦然(회연)이라고 지어 밝음(明)과 어둠(晦)을 대조시켰다. 옛사람들이 이름(名) 다음에 자(字)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었다.

일연은 1281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일연을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정권기와 몽고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늘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일연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한 사람의 승려요 문인이다. 마침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저서를 보면 승려로서 그를 평가할 저서와 문인으로써 그러할 책이 하나씩이다. 바로 <중편조동오위>와 <삼국유사>가 그것이다.

 

<내가 본 고운기와 일연>

21세기의 고운기와 13세기의 일연, 둘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 둘 다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의미있게 살아가려고 한 지식인이다. 저자는 80년대 한국사회의 격변기를 살아내면서 자신 나름의 역사인식을 했고, 열연은 고려시대 말엽 무신정권이후 대몽항쟁시기를 겪으면서 시대인식을 했다. 같은 한반도에서 다른 시기를 산 지식인의 시대인식이 <삼국유사>를 매개로 소통하고 있음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즐겁다. 둘 다 ‘이랬다더라’라는 공허한 기술이 아니라, 자신이 들었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직접 경험과 확인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작자의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자신이 다루는 내용에 대한 세심하고 꼼꼼한 답사가 책속에서우리나라 구석구석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일연이 고려시대 이전의 이야기를 통해 그 안의 상징성을 파악하고, 자신이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상징성을 담아내려고 한 문인이자 역사가이다. 고운기 또한 <삼국유사>라는 옛날이야기를 통해 일연이 발견하거나 담아놓은 상징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징성을 담아내려고 노력한 문인이자 역사가이다. 일연이 향가에 대한 의미를 두었듯 고운기 또한 향가가 우리 민족의 자주성 발현임을 인정하고 있다. 일연은 대몽항쟁기라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다른 뿌리의 자주적인 국가였음을 단군신화를 제일 앞부분에 실으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고운기는 일제강점기 이후 여전히 계속되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대립구도 속에서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삼국유사>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를 하였으나 일본인들의 연구성과에 매몰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체적인 시각으로 일본의 삼국유사 연구의 오류를 명백히 지적하며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일연과 고운기의 가장 큰 공통점은 민족역사학자 겸 문인이라는 평을 할 수 있겠다. 둘의 가장 큰 닮은 점은 한반도를 우리나라를 짝사랑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p.머리말 안위(安危)와 감고(甘苦)의 어느 한 쪽이 아닌, 슬픔과 기쁨의 정반합으로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 합일의 세계가 있다.

p.머리말 『삼국유사』는 시대마다 좋은 요리사를 만나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재료인지 모른다.

p.3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p.5 『삼국유사』는 이시기에 유라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p.6 다만 불교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p.8 근세에 들어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중략........

1926년, 교토대학에서 『삼국유사』의 영인본을 내놓았는데, 당대 가장 완벽한 『삼국유사』였다.

p.9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유념한 몇 가지 점을 미리 밝혀 둔다.

첫째,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중략.............. 나는 그 배경을 설명해 주되,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 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둘째, 『삼국유사』에 실린 전체 조목 수는 약 140여 개, 그것을 『삼국유사』의 순서대로 40개의 제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했다.

셋째,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은 『삼국사기』와 면밀히 비교해 보았고, 뒤는 승전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넷째, 『삼국유사』는 1290년경 일연에 의해 쓰여 졌고, 곧이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중략........ 그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국유사』 본체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중략....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여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 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p.11 뿌리를 찾았던 첫 세대의 상징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호들갑을 떨고 싶다.

p.12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 등재(登載), 그것도 첫머리에 자리 잡은 일이 그렇다.

p.12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 잡는다.

p.14 단군신화는 『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p.16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국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p.18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p.19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 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p.20 일연은 기자가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거니와, 아예 ‘가자조선’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단군조선 이후 곧바로 위만조선으로 넘어가 버린다. 여기에 『삼국유사』 첫 부분을 제대로 읽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p.21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는 그러한 상징이다.

p.21 우리는 먼저 단순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중략........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중략......‘세상’이 아니라 ‘나라’다.

p.23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p.24 『삼국사기』가 나온 12세기 중반과 『삼국유사』의 13세기 후반까지는 150여 년의 사이가 있다.

p.24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중략.... 무엇보다 기존에 세웠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p.25 13세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가 동명왕편(東明王篇)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고구려인의 기개를 한껏 살리면서, 고주몽(高朱蒙)의 생애를 장황히 읊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기실 민족의 발견이었다. 또 다른 문장가 이승휴(李承休)는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 신화부터 시작하였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줄을 잇는 13세기였다.

이 같은 분위기가 일연으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더 먼 곳에 관심을 갖게 했고, 거기서 단군이 발견되었음은 당연하다.

p.34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p.36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한 일연으로서는 한반도가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기 전까지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p.43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p.43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父系)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母系)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난생 신화(卵生神話)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p.44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p.53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건국에 관한 일연의 기술은 『삼국사기』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 『삼국사기』 보다 훨씬 자세하며, 적어 나가는 태도 또한 매우 자신에 넘쳐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p.56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중략...........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p.65 무열왕릉 옆으로 난 길을 따라서 한 시간 정도 걸어 오르면 선도산 정상에 닿는다. 반쯤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무열왕릉을 비롯한 고분들이 발 아래로 보이고, 정상에서 보면 경주 시내와 남산, 토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경주 선도산)

p.68 경주의 선도산은 지금도 민간에서 성스러운 진산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마애삼존불이 바라보는 산 아래로는 태종무열왕릉 등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p.69 “신라에서 왕을 부를 때 거서간이라 하는데 그 곳 말로 왕이다. 간혹 귀인을 부를 때 쓰는 칭호라 하고, 어떤 이는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은 ‘차차웅은 이 지방 말로 무당을 일컬으며,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이를 두려이 공경하다 보니 높으신 분을 자충이라 하였다.’고 하였다.…간혹 부르는 니사금(尼師今)은 잇금(齒理)을 일컫는 말이다. ......중략..... 탈해가 ‘내가 듣기에 성인과 지혜로운 이들은 이가 많다’하고 시험 삼아 떡을 물어 보였다. .....중략...... 어떤 이는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마립 이라는 것은 이 지방 말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을 표지로 자리에 세워 두면 왕이니, 말뚝은 주인이 되고 신하는 아래에서 말뚝을 따라 줄을 지었다.”

p.70 탈해는 무척 복잡하고 신비한 인간이다. 그 출생 과정부터 한 남자의 생애는 파란만장을 예거하고도 남았다. 물론 밑바닥에서 시작한 인생이 평탄할 수만 있겠는가?

p.72 탈해는 누구일까? 용성국은 어디일까? 박씨에 의해 대가 이어지는 초기 신라 왕실에서, 갑자기 거기서 벗어나 탈해를 왕으로 세워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

p.73 치아 많은 이가 되는 왕 자리? 그래서 왕도 닛금이라 불렀다는 이 기이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p.74 탈해로서는 서라벌이 아직도 남의 동네다. 뭔가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닦은 다음 굳건한 위치에서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p.78 정말로 간사스런 꾀다. 실제 자기 것을 꾀를 내어 다시 찾았다면 지혜스럽다 하겠으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니. 이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탈해의 인간성을 그다지 탐탁하게 볼 수 없다. 주몽이 동부여 왕실의 좋은 말을 차지하려 썼던 꾀보다도 더 심하다.

p.85 사림(계림)의 나뭇가지에 걸린 황금 궤짝에서 김씨 왕들의 시조가 된 김알지가 나왔다. 어림잡아도 수백 년 이상은 될 듯한 고목들의 구불구불 올라간 나뭇가지에 새잎이 돋았다. 계림 숲이 가장 아름다울 때다.(경주계림)

p.97 해와 달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느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p.98 일관이 이르기를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 했다. ....중략.... 해와 달은 빛이다. ...중략...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p.100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p.101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金現)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p.110 일연이 쓰는 박제상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기이」편의 ‘내물왕과 김제상(奈勿王金堤上)’ 조다.

p.110 물론 박제상의 장렬한 죽음에다 양쪽 모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에 큰 차이는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은 신라와 일본의 오랜 갈등 속에 빚어진 가장 비극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이다.

p.111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p.111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내물왕과 김제상’........중략........... 다만 제상의 충성스런 마음씨와 영리한 꾀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다르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p.112 이렇듯 비장하고 정연한 결의에다 무슨 해설을 더 붙이겠는가? 그대로 읽어 마음에 간직할 밖에 아무런 췌사(贅辭)가 필요치 않다.

p.115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p.116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p.118 박제상에게 초점을 맞추되, 보다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묘사를 추구했던 의도가 드러나 보인다.

p.118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더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p.118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련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p.120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 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p.126 “다섯 빛깔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는 것인데, 다섯 빛깔이 오방(五方)을 상징한다면 천하가 감싸준다는 것이고, 향기는 귀한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니,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징조다.

p.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造花)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p.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p.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p.142 노인이 편지를 들고 나와 바쳤다고 해서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르는 연못은 지금도 경주 남산 피리촌에 있다.

p.144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p.147 진자가 찾아가는 부처님이 구체적으로는 미륵선화다.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64억 7,00만 년 뒤에 오신다는 부처님이 미륵이다. 이른바 후세불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 바로 지금 내려와 달라고 비는 하생신앙은 중국으로부터 무르익어, 이 때 이미 백제에서는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 같은 걸출한 불상이 만들어질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p.149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p.150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중략....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p.153 한반도의 한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쳤는지도 모르겠다.

p.157 신라로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당나라와의 거리가 멀다는 점이 이득이었다. 일단 침공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도 없고, 당나라와 화친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수 있다는 이중의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p.159 문희라는 이름을 다시 본 것이 『삼국유사』에서다.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이 문희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역사의 문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 삼각의 한 축을 감당해야 했던 여자의 표정 또한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문희와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p.160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 김유신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난다.

p.161 일연은 ‘김유신’조 또한 자신의 특유한 필법으로 써 내려갔다. 간단한 출신 배경만 남기고 번거로운 이야기는 『삼국사기』 쪽으로 돌리면서,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이야기에 거의 전면을 할애했다. 바로 백석(白石)이라는 고구려 첩자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p.169 일제시대 때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그것은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

p.172 “어찌 나는 새 한 마리의 괴이한 짓거리를 가지고 하늘이 준 기회를 어길 수 있겠소.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따라,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마당에,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

p.176 문희는 오라비의 어떤 계획에 따라 춘추와 맺어진 사이가 아닐까? 어쩌면 법민을 낳고도 정식 결혼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차가 있지 않을까?

p.177 동생의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까?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

p.178 물론 통일을 위한 모든 기반을 김춘수와 김유신이 마련했으므로, 문무왕은 다만 그것을 이어 마무리한 정도로 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자 태자 시절에도 문무왕이 아버지 못지않은 활약을 벌이는 데다,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통일 후의 마무리 작업 특히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해결해 낸 점 등은, 통일을 위한 전쟁보다 더 어려웠던 일로 보인다.

p.179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p.183 죽어서는 나라를 지티는 용으로

다시 말하거니와 왕위에 있었던 20년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나라 군사를 쳐부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主敵)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p.186 문무왕과 신문왕 그리고 감은사와 대왕암·이견대의 관계가 명백히 나타난 부분이다. 금당 아래의 동쪽에 구멍을 낸 감은사, 용더러 다니라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라니,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부자간의 짝짜꿍이 잘 맞아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없다.

p.187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p.189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p.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結晶)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p.194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서는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때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예컨대 김유신은 각간이었지만, 더 공을 세우자 대각간이라 했고, 다시 더 공을 세우자 태대각간이라 한 것이 그렇다. 만파식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더할 데 없는 보배이나, 거기에 공을 더 세우니 글자를 하나씩 더 붙여 주었던 것이다.

p196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p.196 『삼국유사』에서 토사구팽의 첫 비극적 주인공은 뜻밖에도 김유신이다.

p.200 흔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삼국시대를 신라 중심으로 기술했다고 하지만, 좀 더 면밀히 말하면 신라의 김씨 왕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부식과 일연이 다같이 경주 출신에 김씨여서였을까?

p.201 미추왕이 능을 왜 죽현릉이라 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연의 붓끝은 이처럼 기승전결의 극적인 구조로 전개된다. 『삼국유사』의 기술 체제가 『삼국사기』와 다른 점, 그리고 그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음을 극명히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p.204 김춘추와 김유신 두 사람을 축으로 하는 이 기간은 역시 신라의 전성시대였다. 이웃한 당나라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과, 일본이 나라시대라고 하는 그들의 첫 문화시대를 열었던 것과 시대를 같이한다. 신라는 안정된 구도 속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 전해주었다.

p.205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p.210 득오가 지은 향가「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배경 설화로도 유명한 이야기다. 득오가 새로운 자리에 전출되어 임지에 가서 일하는데, 옛 상관으로서 죽지랑이 면회를 갔던 일 정도, 거기서 좀 더 나간다면 비뚤어진 관리가 사람을 속을 썩인 일 정도로 보면 그만일 수 있는 일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p.211 화랑 출신들의 토사구팽이다. 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지나 효소왕에 이르면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의 한 단면을 죽지랑의 이 사건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p.212 득오의「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여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p.214 대부분의 왕에게 한 사람의 왕비만 기록되어 있다. 왕이 거느린 여자가 한 사람만일 리 없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편찬된 두 책의 저자가 모두 정실로서 왕비의 격을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후궁이 여럿이었을 텐데도 기록한 것은 왕비 한 사람이다.

p.219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p.223 수로부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느 여인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그것은 약간 ‘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p.226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p.229 「구지가」로부터「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神歌)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면서도 700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주목할 만한 변화다.

p.233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p.238 월명은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불러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미륵좌주 모셔 서 있어라

p. 241 월명사 「제망매가」 이 노래는 서정 시가로서 신라 향가 최고의 명편이다.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 시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

생사의 갈림길/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p.242 사실 이 시는 여덟째 줄까지 평범한 인간이 토로할 슬픔을 절제된 감정 속에서 마음껏 뱉어 놓고 있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라면 승려의 신분으로 주책 맞을 일, 아홉 번째 줄에서 감탄사를 길게 뺀 다음 흩어진 감정을 추스린다. 이는 향가라는 시의 형식이 가진 특장(特長)이기도 하다.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 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할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p.261 사실 원성왕은 기울어 가는 신라를 되살리고자 애쓴 마지막 왕이 아닌가 한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왕족간의 싸움 끝에 등극하였다고 하나, 그것이 곧 야심찬 젊은 왕족의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왕 즉위 4년에 실시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그 대표적인 업적으로 볼 수 있다.

p.267 경문왕은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결코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p.269 달도 차면 기운다

한 집안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이, 나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절대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언정, 한번 일어나면 한번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대체로 흥망성쇠를 유전하기 마련이다. 과학적 증명이나 운수소관을 따지기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p.271 찼으니 이지러지는 달에서 우리가 읽는 역사의 유전이 감상적으로만 흘러서는 곤란하다 해도, 한 왕조가 들어서서 천 년 세월을 보냈다면 이제 끝을 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럴 징조를 수없이 보여 주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권력자가 애꿎은 목숨만 앗아갈 때,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p.272 일연은 사건의 기록보다는 ‘이른 눈’이라는 이상 징후를 통해 한 사회의 종언을 증언하고 있다.

p.272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간다.

p.277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완도·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거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 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에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84 처용은 빛나는 조연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단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다.

p.286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機微)를 보아 사리(事理)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p.288 돌이켜 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p.294 이야기의 끝은 늘 풍성한 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품속의 꽃가지를 꺼내 아내로 맞는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 주려는 일연의 붓끝이 보이는 듯하다.

p.302 나 또한 앞서 비슷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왕조 사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백성의 힘이다.

p.305 저물어 가는 시대는 신라 말이나 일연의 생애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슬픈 마음의 끝이었을까, 김부식의 사론을 다 적은 다음, 일연은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로 신라사를 끝맺고 있다.

p.307 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다만 시조 왕의 사적을 잠깐 언급한 다음, 나머지는 신라에 비해 옹색하기 그지없다.

한편 『삼국사기』가 비슷한 상황일진대, 고려시대 지식인들이 삼국의 적자로 신라를 인정했을 뿐, 그렇다면 다른 두 나라를 그 부속품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섭섭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p.307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p.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서동(薯童)은 우리 고대사에서 만나는 맹랑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서여(薯蕷)를 캐서 내다 팔아 홀어머니를 모시는 처지에, 더욱이 백제 사람으로, 신라의 공주 선화가 어여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꾀어내러 가는 출발부터가 맹랑하다. 마라고 부르는 서여는 요즈음으로 치면 군것질거리 음식이었다.

p.337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나 전파되기 마련이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마저 있기도 하다.

p.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强固)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p.338 미륵사상은 백제 불교에서 먼저 피어났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불교의 전반적인 발전은 신라에 비해 백제가 언제나 한 발 앞서 있었다. 백제는 발전된 항해술을 이용해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교를 그때그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화해서 토착시키고 있었다.

p.342 신라는 아직 유학승 하나 중국에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백제는 벌써 많은 승려가 유학을 다녀오고 불상을 들여와, 거기에 자기들의 이름을 넌지시 하나 더 얹어 놓고 있다. 저 유명한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이 그 뒤를 잇고, 절정에 와서 미륵사의 창건이 따른다. 불교의 백제화는 신라인의 자기화에 못지않다.

미륵보살은 누구인가? 부처님 당시에 생존했던 미륵보살은 부처님에 의해 미래불로 지정 받았다.

p.343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적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p.348 일연이 쓰는 견훤의 생애란 『삼국사기』 안의 전기가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책은 한 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고려 쪽에서 만든 역사서가 아닌가? 그런 마련해선 전모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다, 더 나아가 긍정적인 쪽의 자료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가 포악한 인물로 알려진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한다면, 견훤에 대한 평가는 전해오는 자료를 일단 한 번 접고 들어가는 유연성이 필요할 듯하다.

p.354 절정의 순간에 보낸 견훤의 편지와, 예봉을 피해 가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왕건이 보낸 답장에서 우리는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싸움터의 칼바람이 스산하게 묻어 있는, 그러면서 기(氣) 싸움에서지지 않으려는 붓놀림은, 그대로 칼 없이 겨루는 한판이다.

p.361 반역을 한자는 비참하지만, 반역자가 아들인 경우엔 슬픔은 이중으로 겹쳐오고, 급기야 천륜을 팽개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삼기가 어디에도 없을 지경을 만들어 낸다.

p.364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 3’을 꼽으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 신화-향가-가락국기 이 세 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p.365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許黃玉)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다.

p.369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무너지지 않았고, 그 때 심은 아름다운 나무도 말라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안에 벌려 놓은 수많은 옥 조각들 또한 부서지지 않았다.

p.369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가야의 역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일연의 손에 의해 거둬들여진 이 짧은 기록 하나가 전부다.

그러기에 읽어 볼수록 중요성이 새겨지는 조가 ‘가락국기’다. 3등 안에 들 만하다. 일연이 수고한 김에 조금 더 넉넉히 마음을 써서, 간략히 줄이지 말고 모두 실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에는 그런 생각까지 든다.

p.372 노래에서는 맞이하려는 대상을 거북이로 상정하고 있다. 이 거북이는 용으로도 바꿔볼 수 있다.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이는 왕왕 용의 다른 모습이거나 똑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 신성한 동물의 하나다. 그러나 보존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p.378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航海)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苦海)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p.384 그런데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다. 이 시기에 가야 지방에는 왜(倭)의 식민지가 서 있었으며, 그 식민지의 이름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p.384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나는 섬진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의 완충지였다고 본다. 거기에 서 있었던 가야국은 오랜 기간 이어졌어도 고대 왕권 국가로 발전했다고 평가하기가 미흡하고, 일찍이 일본열도 경영을 나선 백제에 비한다면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신라가 병합에 더 의욕적이어서 결국 그렇게 흘러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p.384 물론 왜인들이 들락날락했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다. 완충지의 치안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p.385 전반부의「기이」편이 끝나고 삼국유사의 후반부를 여는 첫 편은「흥법(興法)」이다. 세 나라가 솟발처럼 선 다음 처음 불교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다.

p.385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것을 다루는 일연의 태도는 뭔가 자신감에 차 있다. 보고 들은 것과 몸소 체험한 것이 일체를 이루는 부분이기에 그랬으리라.

p.386 흥법은 곧 흥국(興國)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물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흥법」 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 ‘불교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p.391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포교를 적은 다음이 삼국유사에서는 더 중요하다. 본문은 간단할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일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찬(讚)이라고 하는, 삼국유사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시들이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처음이 먼 길을 걸어 또는 세찬 바다를 해치고 이 땅에 이른 순례자들을 위해 바치는 헌시(獻詩)다.

p.392 다만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옮겨다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機制)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삼국유사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

p.393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고깃배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나타나는데, 시초는 그처럼 신비롭고 엄숙했다는 시적 표현이면서, 놀라서 나는 갈매기와 왜가리는 거기로부터 터져 나오는 돈오(頓悟)와도 같다. 상승과 하강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p.394 일연은 그것을 봄빛이 완연한 압록강이며, 고기 잡는 배를 빌려 타고 건넜다고 노래한다. 물론 상상이다. 이 같은 시적 상상은 그 선연한 형상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사실 이상의 사실 어디로 데려가고 있다.

p.394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 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p.394 신라는 앞선 두 나라에 비해 불교를 만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우람한 줄기에 무성한 가지를 뻗는 나무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듯 신라에 불교가 자리잡기까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p.396 때마침 성국공주가 병에 걸렸으나 무의(巫醫)가 고치질 못하자 사방으로 사신을 보내 의사를 찾았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대궐로 나아가 그 병을 깨끗이 고쳐냈다. 미추왕은 매우 기뻐하며 바라는 마가 무엇인지 물었다.

“하찮은 중은 아무것도 얻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를 위해 복을 빌고자 할 따름입니다.”

p.397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神)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p.398 신라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교의 전통은 면면하다. 이로부터 뒷날 100여 년이 흐른 다음, 법흥왕이 불교를 세우자했을 때도 이차돈의 순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불교의 큰 나무, 신라의 인고는 만만치 않았다.

p.398 모례는 모록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이야기에는 단지 승려만이 등장하는 것과 달리, 신라의 이 이야기에서 평신도인 여자의 존재는 이채롭다. 일연은 찬에서 바로 이 모례에게 주목하고 있다. 앞의 고구려와 백제에서 불교를 전한 당사자가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과 다른 점이다.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神)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p.399 봄빛이 아직 두루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神佛)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p.401 불교 전래는 앞서고 뒤서는 순서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지지만, 이후의 전개 과정은 거꾸로 되어 있다. 곧 신라를 먼저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순이다. 이는 일연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전래된 순서야 이미 정해진 터여서 마음대로 바꿀 수 없지만, 그 다음의 일은 중요성에 따라 조정할 수 있으므로, 거기에 편찬자로서 일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p.402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왜 그랬는지 그 기준은 삼국사기와 비슷할 터이나, 한 가지 추가한다면 불교역사주의적 의식이 적용했다는 점도 앞서 지적했다.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p.405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도다.”

p.406 ‘살을 베어 저울로 단다’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시비왕(尸毗王)이 고행을 할 때였다. 메추라기가 매에게 쫓겨 시비왕의 품으로 들어왔다. 왕은 메추라기도 살려야 겠고 매도 굶길 수 없으므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매에게 먹였다.

p.413 백제에 비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도교를 신봉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가 쇠퇴해진 데 대한 아쉬움이 컷겠지만, 굳이 그것만으로 이유를 댈 수야 없다. 보덕(普德)이라는 큰 스님이 제 나라에 있지 못하고 피신해야 했던 것을, 일연은 나라가 기우는 혼란스런 상황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p.417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자리상으로만 아닌 마음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p.417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둘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p.434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p.436 한 탑의 역사를 이렇듯 자세하게 남긴 것은 삼국유사에서 이 구층탑밖에 달리 없다. 일연의 이 탑에 대한 애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답상」편의 ‘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조에서 인용한 다음의 시는, 일연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배 승려 무의자((無衣子)가 쓴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의 마음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나는 들었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지는 불길 속에서 한 쪽은 무간지옥을 보여 주더라고

p.437 일연이「탑상」편에서 오대산과 월정사의 사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에는 그 생애와 관련해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다. 그 까닭으로부터 왜 일연이 황룡사를 다룬 것과 버금가게 월정사에다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게 된다.

p.440 청소년기의 월정사 경험과 장년기의 문수보살 체험, 이것이 오대산의 문수 신앙을 삼국유사에 남기고 싶은 개인적인 사연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p.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出家)의 보살이라 한다. 저 유명한『화엄경』의 이야기에서, 문수 스스로 남쪽을 두루 돌며 깨닫고 동쪽으로 오는데, 거기서 만난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p45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p.455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聖所)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었을 경우, 마치 고향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p.456 내가 존경하는 선배 시인이 쓴「절」이라는 시가 있다.

내 마음 오늘/ 절에 가서 절을 한다/ 잎 한 장 만들어지는 동안/ 온기가 없어 차가운/ 오랜 그 옛 마룻바닥에 엎드려/

일어난다 다시 쳐다본다/ 즐겁고 깨끗하고 늘 있는 나는/ 지난 봄이 사라진 숲 속에/ 가을의 마직막 시간 속에/ 덧없음만 항상하고 아름다워라/

나 이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새싹의 아픔으로 동라가라고/ 잎 한 잎 한 잎 덜어지는 동안에도/ 모든 것 향해 절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오늘/ 절하며 간다

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化身),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하는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 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p.469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向念)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p.470 나는 이 대목이 모두 놀라웠다.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없을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들이 많다. 꿩이나 그 새끼 몇 마리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살린 어떤 메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그런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p.472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 가장 듯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탑상」편의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조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 조가 일연과 일연의 문학 그리고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p.474 지금의 경남 의안에 있는, 이렇듯 아름다운 산에서 그 산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는 시작한다.

p.478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敎條的)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p.484 시(時)로 완성되는 삼국유사

찬을 말하면서 나는 삼국유사 안의 기능이나 의미를 자주 반복하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여기 두 사람의 행적을 두고 쓴 일연의 찬 또한 마찬가지다.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다. 여자를 암자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것은 일편 계를 지키는 출가자의 바른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속에는 이기적인 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기심은 독선만 키울 뿐이요 자비심이란 찾을 수 없게 한다.

p.485 계율이 인간보다 앞서는, 그래서 매정하게 보이기만 하는 도의 낮은 차원을 일연은 이렇게 표현했다.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노힐부득을 두고 쓴 시다. 일연은 부득의 높은 도를 이중의 굴절을 통해 보여 준다.

p.485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순수중생’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부득의 행위는 이 같은 참 보살행의 소치임이 분명하다.

p.486 일연이 쓴 찬시 속에서 이런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도한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鄕歌)·한시(漢詩)·민요(民謠)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 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p.492 더욱이 이 이야기들은 일연이 승려로 살아가는 동안의 어떤 지남(指南)과도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마땅히 승려가 가야 할 길, 그러면서도 그나마 듯 있게 살아가는 방법-그런 이야기들이들 관음과 정취보살의 친견 그리고 조신의 꿈에 잘 나타난다.

p.497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는 순간 끝나는 경우로 갈라질 뿐.

p.498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에 늘 원효를 배치하는 일연의 일관된 기술을 염두에 둔다면, 누구를 편들거나 깍아내리자는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무릎을 칠 일, 거기서 애석해 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위기, 원효는 그렇게 인간답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더 나아간다면, 이런 정도?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

p.502 아홉 살에 어머니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 일연에게는 귀하나가 없는 사미승의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한 귀가 잘린 채 먼 이역에서 고국의 스님을 만나 고향에 돌아가거든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 달라고 말하는 소년은 정취보살이기에 앞서 일연 자신인지 모른다. 어머니를 떠나 머나 먼 강원도 산골에 와 있는 소년 일연의 마음이 그랬을 터이니 말이다.

p.504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邯鄲之夢),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따듯한 불을 쬐다 잠깐 잠이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사는 온갖 영고성쇠(榮枯盛衰)가 한솥밥 끊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p.505 그에 못지 않은 것이 이 조신의 꿈이다. 이야기의 틀은 비슷하다. 다만 주인공이 승려요, 그래서 불교적 의미가 더욱 강화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p.506 10여 년을 거지로 구르다 드디어 이런 기막힌 일까지 당하자 먼저 결심을 한 것은 부인이었다.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p.507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芝蘭)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근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

p.507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p.508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무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p.513 「의해」편에다 들인 일연의 이 같은 노심초사가 승려로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결과만은 아니다.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아마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삼국시대를 특히 신라 중심으로 기술한다고 했을 때, 몇몇 승려의 역할과 업적은 불교의 그것을 떠나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쉬움은 크다.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의해」편의 여러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이런 단점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p.521 중요한 점은 여기에 있다. 「수이전」은 본디 그런 책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연의 입장에서 이를 만약 불순하다고 여겼다면 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연은 원광의 전기 속에, 그것도 가장 공을 들였다는 「의해」편의 첫 글에 당당히 넣고 있다. 물론 일연으로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원광이기에 어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막 나가는 비구 같은 이와 달리 원광은 중국에까지 유학하고 수행에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생경한 외국 이론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말로 떠들지 않고 이 땅의 토착 신앙과 만나고 있다. 일연은 그런 원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광을 신라의 원광으로 고스란히 그려낸 이 대목을 읽는 일이란 참으로 신난다.

일연은, 이미 13세기에, 이 땅에 뿌리내린 불교의 모습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이였다고 보아 무방하리라.

p.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의해」편에서 원효의 전기를 쓰며 지은 제목 ‘원효불기(元曉佛紀)’를 풀어보면 그렇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본문을 시작하는 첫머리에 원효를 관형(冠形)하기를 ‘성사(聖師)’라 한 것이다. 같은 「의해」편에서 일연은 의상에게 법사(法師)라 하고, 자장에게 율사(律師)라 했다. 세 분은 신라 불교를 대표한다. 일연이 그런 세분을 평가하는 첫마디는 그들의 이름 앞에 붙인 관형어에서 들을 수 있다.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 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 뜻일까?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 할까?

p.531 최고 아름다운 칭찬이다. 일연은 무슨 근거로 이런 칭호를 붙이고 있는가?

p.532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연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어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p.537 속성과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否定)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p.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p.545 아들 설총이 이두를 창안했다는 것이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다. 이 무렵 신라는 향가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흔히 향가를 지을 때 쓰는 향찰이라는 표기법은 이두에서 더 발전된 것으로 본다. 이두가 하급 관리들이 쓰는 문서 작성용의 간단한 표기법이라면, 향찰은 시를 적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해진 언어다. 이것은 한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며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신라 식의 표기법에 관심을 가지게 했으므로 이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원효와 관련된 여러 명칭에 방언의 기록이 자주 눈에 EM이는 것은 원효 자신이 거기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아들 설총에게 자연스레 전승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p.548 “시인은 소상이 있는 분황사를 찾아 왔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낳은 아들 설총이 죽은 아비의 유해를 부수어 만들었다는 그 소상이 앞이다. 문득, 거추장스런 교의(敎儀현)의 탈을 벗어 버리고, 하늘을 괼 아들을 얻으려 세속의 인연도 마다 않은 원효의 큰 뜻을 생각하는데, 아들 설총마저 아비 따라가 버린 분황사는 문만 굳게 닫았을 뿐 이젠 아무도 없다. 오직 그들을 추억하는 시인만이 서있을 뿐이다.

현실과 역사를 관조하는 일연의 태도가 드러나 보인다. 인생의 제무상(諸無常)은 원효라고 다를 수 없다. 그들의 치열했던 한 시대를 생각하는 시인의 심상은 비관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숙명으로 수놓아진다.“

p.551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p.552 그러나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송고승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의상은 그런 사람이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p.568 국난을 구하고, 부석사 같은 큰절을 지으며 화엄종을 전한 의상의 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불도(佛道)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의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법사란 말속에는 의상의 교조적 신앙 태도가 함의된다.

p.568 일연이 그를 찬한 시에서 “무성한 꽃들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 똑같은 봄이로다”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무성한 꽃들이란 화엄의 세계를 말한다. 지상사사 있는 종남산이나 부석사가 있는 태백산이나, 의상의 전교로 인해 같은 화엄의 세계가 펼쳐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p.582 이 세 사람의 손으로 지금 전라북도를 대표할 금산사(金山寺), 충청북도를 대표할 법주사(法住寺), 경상북도를 대표할 동화사(桐華寺)가 만들어지거나 커졌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들은 사제지간이다. 이른바 삼남(三南)이라 일컫는 이 지역의 중요한 사찰이 한 사제지간의 계보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점을 해석해 들어가다 보면, 뜻밖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이 밝혀진다.

p.603 승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인생의 번뇌와 그 번뇌 속에 시달리는 세속의 인간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가는 그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

시구렁창 같은 세속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그러기에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결별이면서도 오히려 슬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

p.604 다만 더 극적이어서 가치가 높다는 말은 아니다. 평범함 속에서도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깨달은 무상의 존자(尊者)들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의 출가자들 속애 연면히 내려오는 출가의 동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 동기 하나로 깨달음은 단박에 몰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p.607 한편 「신주」 편부터 시작하는 삼국유사 제5권에서 한 가지 설명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저자의 이름이 처음 나온다는 사실이다.

p.607 다만 여기 단 한 번 나오는 지은이 이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의 저자를 일연으로 비정(批正)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이 책의 저자를 찾는 데 무척 애먹었을 것이다. 다른 역사 사료뿐만 아니라 일연의 생애를 기록한 비문에도 이 책의 이름은 나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이렇게 버림받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의 눈 밝은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

p.616 일연의 혜통에 대한 평가는 극진하다. “이제 화상이 무외를 제대로 배워와, 속세를 두루 돌며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교화시킴은 물론 운명을 보는 밝음으로 절을 지어 원망을 씻어 주니, 밀교의 바람이 여기에서 크게 떨쳤다”는 논평은 물론이려니와,

산 복숭아 시냇가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오솔길에 봄이 깊자 양쪽 언덕에 꽃이 피었네/ 그대가 우연히 수달을 잡았던 인연으로/ 나쁜 용은 서울 밖으로 멀리 쫓게 되었네

라는 찬은, 뼈만 남은 수달이 제 새끼 있는 곳으로 가 있는 것을 보고 출가한 혜통의 인생에 불교가 어떻게 심어져 있는지 보여 주고, 살구 꽃 같은 그의 생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찬미하고 있다.

p.620 앞서 진표(眞表)나 심지(心地) 같은 점찰승들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과 함께, 일연이 관심을 가진 불교 사상이 매우 넓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조선조에 들어와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한다.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나선 조선조의 정치 이념에 따라 한국의 불교사는 잠시 주춤한다. 그런데 이 때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족이 밀교나 점찰법회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연도 이 같은 부류로 나눠지고, 그에 따라 일연에 대한 관심이나 사적이 인멸되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이다.

p.621 삼국유사의 9개 편 중에 일곱 번째인 「감통」편은 기본적으로 「의해」편과 성격이 비슷하다. ‘감통’이라는 용어도 중국의 고승전에 나오지만, 승려들이나 불교신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데에서 그렇다. 다만 여기 나오는 승려나 신도들은 고승(高僧)이라기보다 다소 평범한 사람들이다. 더러 고승의 반열에 올릴 만한 승려도 전기로서 엮어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감통」편의 이야기들은 신라 사회가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 민간 대중들에게까지 얼마만큼 체화(體化)되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p.623 「감통」편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정수 스님이 얼어죽을 뻔한 여자를 구하다’조의 전반부다. 구차한 설명을 붙일 것도 없다. 원체 감동스러운 모습은 우리에게 바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p.623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이론으로서 맏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의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

p.623 사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저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한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 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회의 고갱이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 첫 번째 스트리퍼’라고, 나는 이 대목을 농담처럼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그 농담 속의 진담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

바로 「감통」편은 이 같은 이야기로 누벼진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삼국유사 9개 편 가운데 여기를 가장 즐겨 읽는다. 이름 없이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불교를 매개로 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p.627 밤 깊은 시간에야 겨우 제 일을 마치고, 곤한 몸을 이끌고 밤길을 걷는 한 여자가 여기 있다. 게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p.627 저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p.632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약속한 바가 있었다. 광덕이 그 약속을 지키는 사이 엄장은 한눈을 팔았다. 아미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기야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과 현실의 삶에 고단하게 매인 사람은 마지막의 자리가 서로 멀다. 그러나 엄장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내였다, 늦게나마 생각을 바꾸고 성실히 수행하여 마침내는 친구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적과 엄장의 성불은 한결같이 여자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앞서 소개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서처럼 위 예의 여자도 관음보살의 현신이다.

p.633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 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도한 우리의 모습이다.

회한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엄장은 원효 스님에게 달려가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가르침을 물었다고 한다.

p.636 이 조의 본문과 찬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계일 것이다, 절의 재산을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게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p.67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p.690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그 자체다.

p.701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p.710 신라시대에 시인이 죌 수 있는 대표적인 그룹은 화랑이었고, 특히 그들 가운데 승려가 된 자들이다.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신라 시대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화랑 밖에 없다. 다만 같은 화랑 출신이라 해도 관계(官界)에 나가 화려하게 출세한 이들은 여기서 제외되며, 현세에서 박탈된 사람들이 시인이 된다. 그들은 그 박탈감 속에서 오히려 현세 이상의 어떤 것을 보고 노래하는 것이다.

p.712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威儀)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p.714 온 백성들이 힘을 모아 벌이는 사업은 곧 즐거운 잔치로 변한다. 거기에 양지는 당대 불교가 추구한 이념을 자연스레 녹아들게 하였다. 서방정토를 간절히 바라는 이생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공덕을 쌓아 나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p.733 새롭게 서야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것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p.741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 내가 저자라면 *

이 책은 일연과 <삼국유사>에 반한 저자가 오래도록 과거 역사의 흔적인 일연과 <삼국유사>를 연구한 내용을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보다 쉽고 친근하게 하지만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무단히도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공자가 아닌 보통의 독자들에게 <삼국유사>는 우리나라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옛날이야기가 가득담긴 이야기 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자의 지속적인 애정을 통해 단순한 옛날이야기 책이 아닌 그속에 담긴 많은 상징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이 오늘날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한다.

특히나 일연의 13세기 중세시대의 혼란기 속에서 시대인식의 반영을 나타내는 <삼국유사>를 통해 저자 고운기는 21세기를 살아가며 현대사회 속에서 시대인식의 반영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고있는 것이 참 재미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E.H.Carr).”라는 말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의 이해와 소통을 통해 우리의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가는 것이다. 과거의 유물인 <삼국유사>를 읽어나아감에 있어 저자는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가 발생한 그 시점의 사회를 인식하고 일연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상징성을 파악하여 오늘날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자칫 고루한 과거의 역사인 옛날이야기가 현재의 우리에게 생명력을 얻어 살아날 수 있도록 한다.

저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읽어가면서 그와 항상 대비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작품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비판적인 책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전혀 다른 사회적 인식을 지닌 일연과 김부식이 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동시에 등장하는 내용을 함께 제시하여 비교하여 읽게 하여 독자들의 균형있는 역사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예를 들면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연구결과에 대한 내용을 함께 수록하여 저자 스스로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독자들 또한 다양한 견해를 접하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점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유적지를 직접 둘러보았던 저자의 생생한 해설에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된다는 것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그속에 등장하는 지역을 직접 돌아보았던 흔적이 있듯이 저자 또한 그런 일연을 답습하듯 직접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남한에 존재하는 유적지들을 대부분 찾아보았다고 한다. 책속에 들어있는 과거의 내용이 현재 우리의 삶속에 발딛고 있음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체험이다. 동시에 저자와 함께 책속의 그곳들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은 양진이 유적지의 사진과 함께 자신의 단상을 메모한 짧은 글들이 인상적으로 와닿는다. 마치 지루한 역사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답사기를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과거의 유물이 현재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이야기를 수록하고 그 뒤에 시로 찬(讚)을 붙여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고 있듯이 저자도 각각의 부분마다 그 이야기와 관련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기록으로 현재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작업으로 저자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알 수 있는 동시에 독자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한 고전속의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를 적절하게 연결시켜 과거를 통해 현재의 삶에 경계 삼을 수 있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고 있다는 것이 여느 <삼국유사> 책과는 다른 매력이라 생각된다.

 

아쉬운점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라는 제목처럼 저자가 정말 알아야 한다고 판단해서 선택한 <삼국유사>속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고 일부는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나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독자가 전달받는 내용의 가치와 유무가 달라질 수 있음이다. <삼국유사>는 기본적으로 역사서이므로 한권의 책에 모든 내용을 실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책을 상,하권으로 나눠 빠진 내용없이 모두 독자들이 접하게 하고 독자들이 가치여부를 판단하게 하는 것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아예 책의 분류를 여행기로 잡고, 학생을 대상으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유적지를 돌아보는 여행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저자도 <길위의 삼국유사>라는 책을 통해 그러한 시도를 한적이 있다. 저자는 대상이 성인이라 책속에 등장하는 현재의 내용이나 일화들이 지금 학생들의 기억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종종 있어 보인다. 그래도 어른들은 고전에 대한 인식이 친근하다. 하지만 요즘의 학생과 젊은이들은 고전에 대한 인식이 고루하다는 편협한 시각과 느낌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우리고전에 대한 인식을 전화시키기 위해 여행을 매개체로 한 보다 친근한 접근과 그 안에 담긴 내용과 기술방법을 지금의 세대에 맞게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례>

머리말

들어가며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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