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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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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0일 20시 08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삼국유사>- : 고운기 /사진: 양진/ 현암사 

삼국유사의  원저자 일연스님과 번역서가 아닌 해설서로  재탄생시킨 저자 고운기에 대해 막연한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두 분의 저자에 대하여 찾아보았다. 

저자  일연에 대하여 

삼국유사   저자 ‘일연스님

일연의 생애와 <삼국유사>  찬술된 시대적 배경, 일연이 살았던 시대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그가 생존했던 13세기는 대내외적인  격동기였다. 무신란이 일어나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전횡을 일삼고 특히,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원나라의  옷을 입고 그들의 풍습을 따라야하는  민족적 수모를 겼었던 시기였다. 

일연의  일대기에 드러난 그의  삶의 흔적을 밟아  보았다.

일연은 1206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  말기의 스님으로서 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見明) 이고 승려가  이후 처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밝음과 어둠을  대비시킨 것이다. 이런 대비는 이름  다음에 ()  지을  쓰는 방법이었다. 만년에는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본다는 의미로 ()자를 이름에 넣어  일연이라 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9 :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전남 광주의 무량사로  들어갔다.

22  : 선과에 급제. 불교의 과거 시험인 승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비슬산의 보당암으로  자리를 옮겨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에  몰두하였다.

31 : 득도의  경지인 깨달음을 얻은 시기였다. 이민족의  지배에 따른 백성들의 고통과 참담한  사회상을 목격하고, 백성들에게 구원과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임을 깨닫는 시기였다.

44 : 당대의  실력자 정안(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항과  처남매제 사이)  자신이 봉헌하였고  또한 교정도감과 함께 팔만대장경 조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정림사의 주지로  일영을 추대한 것을 보면 착실하게  선승으로서의 수행을 멈추지 않고 정진한  결과가 아닌가 짐작된다.

51 : 선사가  .

54 :   선사가 . 남해 길상암으로 옮겨 < 중편조동오위>  간행했다.

59 “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영일의 오어사에  머문다.

78 :고려  충렬왕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낙향하는  일연선사를 서울로 모시고자 보낸 편지에서  ‘선사께서는 어찌  구름만 그리워하십니까! 라고 물으며 왕명으로 국사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일연은 굳이 사양하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궁내가 싫어 노모의 병을 빙자하여  구산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잠깐: 나는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승려로서의 일연 또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다간 문인으로서의 일연보다는 인간적인 그의 성품에 집중되었다. 한 나라의 국사까지 올랐던 그가, 그 자리를 고사하고 다시 낙향하여 늙은 어머니 곁을 지키는 자식으로서 90이 넘은 노모를 봉양하는 효성스러움에 가슴 찡하게 다가왔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어머니 사후삼국유사를 저술을 하였어도 700년이 지난 지금도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로 남았다는 것은 그의 명예나 지식이 아니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자신의 성공만 바라보고 조바심을 내는 지금과는 우리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부모에게 잘 하면 삼대가 흥 한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싶다. 

84 : 여든   해를 누리고 칠월칠석날  제자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신은 의자에  앉아 여러 승려와 담소자약하게 선문선  답을 하다가 경북 화북리 화산에  있는 인각사에서 입적하셨다.  사실로만  보아도 그분의 수행의 힘을    있었다.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려 했던 그의 충성심과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 심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저자  고운기에 대하여 

1983 동아  일보 신춘문예로  당선으로 등단한  시인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라는  것은 모든 것을 경험하고 느낀 것을  함축적 의미로 표현하는 언어의 마술사이자, 독수리처럼 예리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직관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독수리 눈 대신에 사진기 렌즈로 멋지게 풍광을 찾아 찍어줄 사진가 양진과 동행한다. 그의 문학적 언어와 역사의 유적들이 사진으로 만나 현장감 넘치는 하나의 통일된 서사물을 만들어 냈다는 데 그의 특별함이 느껴진다. 

일연과의  짝사랑.

그는 국문학도였던  시절 일연의  한편에 매료되어  ‘삼국유사 일연을 향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를 사랑에 빠지게   시는 아래와 같다 : 

압록강   깊어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홀연히 들리는   젖는 , 깜짝 놀라 멀리 나네.

어느   고깃배인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역시 고운기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시인이었다.    한편으로 그의 사랑을 찾는 열병이  시작  것은 1988 여름이었다. 처음으로  일연이 말년에 삼국유사를 저술한 인각사를  시작으로 삼국유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차례로 밟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살펴  삼국유사현장에서 그는 삼국유사가  저작되게  근본 방안,  일연이  절을 옮길 대마다 직접 주변의 노래와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다양한 유적지들과   터를 직접 발로 밟아 탐사   것을 토대로 삼국유사 해설서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책상을 떠나 처음 찾아 간 곳이 인각사. 먼 소재지로 향하는 길은 아직 부분적으로 비포장도로였고, 버스는 더디 오는데, 유난하였던 그 여름의 땡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제 남한에 있는 삼국유사의 무대를 거의 다 가 본 것 같다. 짝사랑이라면 지독한 짝사랑이다.”그의 사랑을 잘 나타내주는 문구였다. 

그는 한양대  국문하과 졸업을 하고 연세대 국문학과  ,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원 연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섬강 그늘>, <나는 이거리의 문법을 만든다> 이 있다. 시 목록을 보자면 <동대문> < 수화를 하지 않는 수화시간> <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 익숙해진다는 것은> <비빔밥> 등 아주 우리 생활 속에 친숙한 제목들을 가진 시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그의 저서로는 1997일연이라는 책을 펴냈으며 (2006년에는 이를 개정하여일연을 묻는다.를 저술하였다) 2001년에는 삼국유사의 번역본을 저술하였으며, 같은 년도에 삼국유사와 관련된 본인의 연구 논문을 묶은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를 출판했다. 2002년에 2권으로 초판을 냈으며 2006년에 이를 한권으로 합쳐 개정판을 냈다. 마지막으로 2006 년도에 여행기 형식으로길 위의 삼국유사까지 저술하였다. 모두 현장을 답사하며 쓴 그의 땀이자 노력의 산물이었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나는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해 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삼국유사는 시대마다 좋은 요리사를 만나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재료인지 모른다.

혁명가는   스스로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속에서 도리어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를 찾아 뒷사람에게 남겨 주었던   같다.  

들어가며 

삼국유사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없고,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와 사() 있다는 .[3]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3]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고려 전기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사대로 요약된다. 본격적으로 중국 문화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4]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었다. 당에서 송으로 이어지며 높아질 대로 높아진 한족의 자존심을 일거에 무너뜨린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 중심의 세계관을 형성해 보려던 고려의 정권 담당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암시를 함께 주었다.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플을 꿇지 않았는가.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4]

세계관의 변화는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4]

삼국유사의 탄생 배경은  아무래도   가지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잡아야   같다.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선비들보다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먼저 이루어 사회로 퍼져나가게 했다.[5]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5]

삼국의 고대사를  보여 주는 데에 ‘삼국사기가 지닌 강점과 맹점을 누구보다 일연 자신이 깊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칠 수 없는 것이 13세기 지식인으로서 일연의 입장이었다.[5]

이미 13세기에 <삼국유사>  간행된 다음  책에 대한  관심이 면면히 이어지기는 했다. 특히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책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조선 중종   간행된 것인데,  때의 연호를 따서  정덕본이라 부른다.[8]

기이(記異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 왔다. 애써 이 시기를 눈감아버린 ‘삼국사기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11]

일연이 살았던 13세기의 사람들이야말로,  샘과 뿌리를 단군이라고  아마도 첫 세대였던가 한다. 누구나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자못 중요하게 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 등재, 그것도 첫머리에 자리잡은 일이 그렇다.[12]

 쓰디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12]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글자로 허투루 적을   없다.[12]

 나라야   일을  방식으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 잡는다.[12]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진 것이다.[12]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14]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단군조선 (일연은 고조선이라 썼지만), 위만조선 그리고 이씨조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까지, 이렇듯 다양하므로 조선의 앞이나 뒤에 관형어를 붙여야 구분이 가능하다.[19]

오늘날 북한이  정식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정통성 시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20]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신화는 건국신화다.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21]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21]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살았던 지식인 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 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22]

한껏 폼을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 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 조차 몰랐던 것 같다.[23]

일연은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우리의 실종이었다.[23]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24]

천자의 나라며 그러기에  모든 변방은 중국에 복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인에게 아니 우리 나라  같은  민족에까지 강고하기만   것이었다. 그런데  전체가 무너졌다. 아니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24]

 같은  분위기가 일연으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곳에 관심을 갖게 했고, 거기서 단군이 발견되었음은 당연하다. 단군의 발견과  기록은 일연이 지닌 선각적 혜안만으로 이루어질 성질의 일은 아니었다.[25]

그러나 나는  ‘위만조선조가 있기에야말로고조선조가 빛을 낸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28]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29]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중국 쪽 역사서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그것을 일연 나름대로 정리해 크게 두 개의 제목을 써서 정리한 것인데, 일관성과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오늘날 우리가고조선조와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4]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36]

그러나 민족의  처음 시대를 쓰면서 그다지 인색할  일은 아니었다. 분명 삼국으로 정립되기 전에 비록 왕권체제를 갖추지 못했다고  하나,  단위를 이루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서고 지고 했는데 말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한 일연으로서는 한반도가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기까지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를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36]

삼국사기고기의 신이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인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43]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이리라.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표현은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43]

주몽의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이 같은 유형으로 이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44,45]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56,57]

탈해는 누구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72]

정말로 간사스런  꾀다. 실제로 자기 것을 꾀를 내어  다시 찾았다면 지혜스헙다 하겠으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니,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탈해의 인간성을  그다지 탐탇하게   어뵤다.[78]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78]

문물의 발달이  신화시대를 거둬내고, 실질적인 힘으로 정복과 지배를 영위해 나가는 시기가 이 한반도에도 도래한 셈이다.[78]

이저런 일이 겹치자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큰 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니부인이다.[79]

탈해가 처음 신라로  들어올  가락국을 거쳤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구석이 조금 있지만, 모든  기록에 공통된다.[79]

탈해는 수로보다 15  뒤에 왕위에 오른다.  기간 탈해가  신라의 대보로 있으면서 가락국을 정벌하러  갔을  잇다. 그런데 실패했거나  거전 끝에 약간의 성공을 거둔   물러나온 일이 있었다면, 가락국의 지역에서  탈해를 깎아 내리는 이야기가 전설로  만들어졌을 것이다.[82]

머나먼 이역, 아니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올라   입신 양명한 탈해. 우리는 여기서 탈해가 비록 왕위에 오르고  후손들이씨 성으로 몇 차례 더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기존의 세력에 둘러싸여 늘 불안해 했던 것 같은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권력의 자리란 차지하기도 이어 나가기도 어려운 것인가? 탈해의 고민이 깊었음을 분명하다.[86]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여들면 곤란하다. 이런 주장들이 대체적으로 처음에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는다는 그럴듯하면서  거창한 명제 아래 시작한다. 그러나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한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91,92]

역사는 그런  쇼나 각본으로 비유될  없다.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은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 된다.[92]

이렇게 혼란스럽고  빈약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료가 미비한  탓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신라 초기의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어 있지 못함을  말하는  같다. 이런 시기의 기록을 여기저기서 따와  줄로 꿰기란  위험한 일이다.[95]

일연은 승려다.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그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96]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96]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삼국유사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101]

가깝고도  당신은 벌써  때부터 만들어진 분위기인가  보다. 왜의 잦은 침공을 받는 신라로서는  비록  때마다 물리쳤다고는 해도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셈이었고, 그런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숙원이었다.[106,107]

더욱이 고대  왕권 국가를 구축해  왜가 백제와  교린 간계를 맺게 되자 신라는 협공의  위기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박제상  사건이 터진다. 거기서 둘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109]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받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110,111]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것입니다. – 박제상 [111,112]

저는 공의 생명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만 위로하면 족합니다. 어찌 살아 남기를 바라겠습니까?” –  박제상 [114]

이런 이야기  끝에 제상의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그의 딸은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는 결말 부분은 그저 심상하게 읽힌다. 나라의 일이며 충성이 중한들, 목숨을 내놓은 값은 무엇으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16]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116]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있을까? (중략)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 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118,119]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준 ,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120]

그런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달아나는 길달을 비형이  죽였다는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또다시  귀신 세계를 보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있다.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는 데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133]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134]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137]

'먼저   자가 나중 되고, 나중  자가 먼저 된다' 말씀은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140]

민간에 퍼져  있는 초보적 종교 형태의 전통과  힘이 강했던 것이 신라이기에, 다른 두 나라에 비한다면 어려움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141]

그러나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144]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에 씌운 아상은 그토록 완고한  법이다.[147]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149]

원광 이후  신라 불교를 일으킨 삼총사라면 역시  자장, 원효, 의상이다.  신라의 고승 세 사람이 모두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다. 신라인의 사상적 무장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곧 국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153]

한반도의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쳤는지도 모르겠다.[153]

신라의 당나라  외교는 본격화된다. 사신으로 가는   길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이어 나갔다. 물론 백제나 고구려도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당의 건국 이래 신라가 취한 발걸음에 비한다면  나라는  뒤떨어지는 느낌이다.[157]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역사라며,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160,161]

사실을   그럴듯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배경에  깔리면  사실은  힘을 얻는  법이다.[167]

춘추에게는  다름 명분이 필요했다.  때까지는 두 집안이 모두 왕족이어야만 왕이 되는 신라 왕실에서, 이제  쪽 만이어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172]

그래서일까,   남자(김춘추, 김유신) 뒤에  여인의 그림자는  그만큼 짙어만 간다. 물론 이 여인은  문희다. 화려한 것을 받쳐줘야 하기에 속으로 인고하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175]

동생(문희)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까?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177]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  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179]

왕위에 있었던 20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184]

"(문무왕)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 “용은 짐승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185]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189]

신령스러운  피리를 일컬어서는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벼슬이 높아져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만파식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더할 데 없는 보배이나, 거기에 공을 더 세우니 글자를 하나씩 더 붙여 주었던 것이다.[194]

얼마 ,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 사이에서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사마천의 ‘사기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 보냈다.[196]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도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 화랑을 겨누고 있었다.[204]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205]

모죽지랑가’ 배경  설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210]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는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219]

자연이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226]

노인이 알려준  방법은 ‘강원도의 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중구란 곧 오늘날의 여론, 또는 민중의 소리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228]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한 생산물로  유지하는 시대에 노래는 민요가 되었고, 민요가 노동 현장에서 불렸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 있게 된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229]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233]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제망매가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241]

사실   시는 여덟째 줄까지 평범한 인간이  토로할 슬픔을 절제된 감정 속에서  마음껏 뱉어 놓고 있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라면 승려의  신분으로 주책 맞을 , 아홉 번째  줄에서 감탄사를 길게 뺀 다음 흩어진 감정을 추스린다. 이는 향가라는 시의 형식이 가진 특장이기도 하다.[242]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삶이 보잘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 이외에  무엇이  필요할까?[247]

같은 꿈을  놓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같은 뜻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왕위를 다투는 마당에 결과는 왕이 되거나 죽거나 어느 하나로 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는 길을 찾는 수 밖에. 여삼의 해몽이란 결국 살길을 찾으라는 말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254,255]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힘든 일이다.[261]

"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 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264]

때로 까닭을  설명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것이  사람이요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다.[266]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267]

딴에는 정직하고자  애쓴 보람 없이 비명횡사하고 말았지만, 어련히 그렇게 진행될 일에 토를 단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270]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271]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272]

염장은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277] 

처용의 노래와  춤은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러운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삼국유사.[284]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하게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286]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287]

그러나 돌이켜  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288]

억울한 일을  당해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289]

배를   본디 목적과 다른 행로를 밟게    사람이 결국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비슷하다.[293]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 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301]

'서리리  ‘시경’ 왕풍에 나오는 노래, 망한  주나라의 신하가  서울을 지나다 그 곳이 메기장 밭으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것인데, 신회의  노래는 그마저 없어졌으니, 천년 사직은 말 뿐이요 무상하기만 하다.[305]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307]

앞서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앙숙이라는 한마디로 정의 내렸거니와, 백제와 일본은 그 반대라고 해야 맞다.[314]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 한반도니 일본 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 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었다. 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도 일본열도라는 말도 모를 것이다.[315]

소문으로만  듣던 백제와 일본 왕실의 관계를, 여러  문헌과 유물 자료로 밝힌 구체적인 결과 앞에 서면서, 우리들의 마음에는  놀라움과 착잡함이 겹친다. 그토록 가까웠나, 그런데 남이 되어 있나?[321]

그러나 이는  다시 말하거니와 왕실과 호족에 한정한다. 그로 인해 다수의 인구가 백제인으로 채워졌다 한들 그것으로 한일동족을 말하자면 고구려와 신라 출신이 섭섭하고, 이미 선주민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는 마련해선, 어느 한 민족만으로 특정하여 결국 그들의 출신지와 동족이 되게 했다는 설명도 곤란하지 않을까? 여기서 왕실의 근친으로 한정해 두면 이런 섭섭함과 곤란함을 면할 수 있다.[323]

200명도    되는 집권층이라면, 탁월한 문화를 지닌 소수가 가서 단번에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수가 바로 백제계였다.[324]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없다고 포기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327]

우리는, 일연이  백제의 이야기  편을 인색하게 배정하면서 하필 서동을 택하고 그가 곧 무왕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야기 속의 서동보다 더 맹랑한 행동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도대체 역사적 사실과 하나도 맞지 않는 이야기를 짐짓 진지하게 마치 진짜처럼 올려놓은 그의 의도를 알아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야 엉뚱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진짜처럼 둘러댄 게 어디 이 하나(서동요)뿐인가? 정말이지 서동만큼 맹랑한 사람은 일연 당신이다. 그러기에 그 눈으로 서동 같은 인물이 보였을 것이다.[328]

이야기는    번째 부분에 와서 본격적인 성공담으로  이어진다.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332]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343]

불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똑같은 되풀이를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하다  망한 견훤 집안 3대다. 식민지 치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다 망해 버리는 집안을  그린 염상섭의 소설 ‘삼대는 이미     전을 무대로 삼아도  통할 이야기다.[351]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353]

"토끼와  사냥개가   지치면 마침내 놀림을  받게 되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 보면 또한 웃음거리가  것이오.“  [356]

그것은 마치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하다. 역발산 기개세라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나 꼬리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358] 

반역을 당한  자는 비참하지만, 반역자가 아들인 경우엔 슬픔은 이중으로 겹쳐오고, 급기야 천륜을 팽개친 불구대천의 원수 삼기가 어디에도 없을 지경을 만들어 낸다.[361] 

뙤약볕 모래사장에서  자라난 풀입  포기를 보며 견훤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없이 의지 하나로 나라를 일으켰던 ‘가엾은 완산 아이는 후백제 마흔 다섯 해라는 짧은 기록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362]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주는 석탑.[378] 

민족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백제-고구려의   나라를  나라로 만드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382]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물론 왜인들이 들락날락 했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다. 완충지의 치안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이냐?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384] 

흥법(興法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호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전래 경위만이 아니라 일연이 가진 역사 의식의 말단을 읽게 된다.[386] 

흥법은   흥국이었다.[386] 

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중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도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고,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다양성을 형성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을망정, 멸망의 빌미가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일연은 불교적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389]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것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392]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 된 장사꾼들의 잰 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394] 

불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399]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물꼬를 튼 처음 사건, 이차돈의 순교는 그래서 일연이 관심을 사기에 족했다. 순교는 어떤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순교 자체로 성스럽다. 거기에 신라 불교의 공인 그리고 한국 불교의 본격적인 출발이라는 의미를 보탠다면 더 이상의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지 않다. [402] 

오늘 우리는  사실을 따지는 것이 중요할까, 사실이 무엇이건 거기 실린 순교한 자의 마음을 고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까?[407] 

신라 불교가  뿌리 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곧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409]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 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411] 

탑상(塔像

그렇다. 황룡사는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417]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  돌이 소근 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도   년을 기다렸단다.”[417]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라가 가진 불국토사상 또는 본지수적사상이라 부른다.[424]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지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44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 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 인연은  그렇게 오는  아닐까?[454]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 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456,458] 

불성은 대체로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성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때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나, 무엇이 값어치 있는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469] 

간밤 계를  더렵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알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473]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476]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게셰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면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488]

일연이 여러 이야기를  한데 모아 낙산사를 이렇듯 자세하게  소개한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까닭이란 앞서 원정사를 소개하면서    말하였다. 14 , 낙산사 가까운  진전사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으며, 22세까지  곳에서 머물렀다.낙산사와  진전사의 거리는  사이에 고개도  하나 없는 이삼십  정도. 이웃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절이 일연에게는 바로  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렇기에 거기 낙산사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중히 건사하고, 끝내 <삼국유사> 에까지 거두어들였을 것이라는  추축은 추축이 아니다.[491]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 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497]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498] 

재굼마을의 우물가   바위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여자는 표주박에 해가 담긴 믈을  마시고 와서 잉테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이다.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 만의 독점물이 아니다.[499]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  세상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끊는 사이에 불과하더라 하는 비유이다.[504,505]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알겠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허망한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508] 

의해(義解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 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513] 

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종교다. 무릇 2 년을 바라보는 오랜 역사에다, 거기 누벼진 사연이 많기도 많아, 불교야말로  이성으로만 받아들이는 어떤 형식으로서가 아닌 우리들 심성 깊숙이 내린 튼튼한 뿌리다.[513] 

"평소 세상의 경전에는 익숙해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통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교 공부를 하자 도리어 썩은  같았다. 헛되이 유교를 공부하는 것이 실로 생애의 두려움으로 다가와“ 드디어 출가한다. - 원광 [515] 

 나가는  비구 같은 이와 갈이 원광은 중국에까지  유학하고 수행이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생경한 외국 이론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말로 떠들지 않고 이 땅의 토착 신앙과 만나고 있다. 일연은 그런 원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521]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고.[530]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풀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533] 

전설은 대체적으로  주인공과 전승자 사이에 합작으로 만들어진다.[535] 

그러나,   먼저  뜻을 알아  이는, 혼자되어  살고 있는 딸을 가진 태종 임금이었다. 원효가 노래한  줄을 그는 정확히  읽어 준다. 자루 빠진 도끼를 달라함은 다름 아닌 과부인 요석공주를 가리키지만,  주인공이 승려이기에 꺼림칙한 기분은  나라의 이익으로 명분을 세운다 그만한 여유와 융통성이 신라를 신라이게 했던 것은 아닐까?[535]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537] 

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이런 원효였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 아니었을까?[538] 

한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545] 

",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551] 

원효가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교조주의다.[565]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것만 일까 싶었다.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세상의 영화보다  세상이 부귀를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그렇지만 거기라고 사람 사는 세상인 바에야 왜 호사를 바라지 않고 다툼이 없겠는가 의문스러워 해본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목적으로 혹시 그렇게 길들여 놓지나 않았을까?[569] 

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버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571] 

순례자의 마음인들  범인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  하나일까?[576] 

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시점이다. 호남 출신의 스승은  충청 출신의 제자를 다시 키우고, 다시 그는 영남 출신의 제자를 키우는 이 3. 3대를 묶었던 것은점찰경과 간자지만, 그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을까? 민족과 전쟁과 화합-이런 말들이 내 머리 속에는 오가고 있다.[582] 

신주(神呪

승려를 소재로   많은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인생의  번뇌와  번뇌 속에 시달리는 세속의  인간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603] 

시구렁창 같은  세속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그러기에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결별이면서도 오히려 슬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603] 

누구나 쉽게  보이는 세계 속의 불교가 현교라면  깊이 숨어 은미한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가 밀교일 것이다. 어쨌든 밀교는 현교 곧 일반적인 불교의 세계를 거쳐 최후에 이르는 세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일반적인 불교를 포함하면서 거기에 넘어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605]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이렇게 버림받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의 눈 밝은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607] 

감통(感通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 잡혔음을 알 수 있다.[623] 

여분의     없이 살아가는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 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회의 고갱이였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기록에 나타난우리 나라 첫 번째 스트리퍼라고, 나는 이 대목을 농담처럼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그 농담 속의 진담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623]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가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계집종의 성불에 자극을 받은 귀진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신라 사회의 힘이다.[627]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636] 

정작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여기는 불교에서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656] 

옛날 계빈에  큰스님이   있었다. 아란야법을  하며 일왕사에 이르렀다. 절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그의  옷차림이 초췌한 것을 보고, 문을 닫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 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째 그러시오?”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660,661]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670] 

피은(避隱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웅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672] 

효선(孝善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자체다. 진존숙은  중국 당나라 때의 고승이건만, 만년에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하산했다는  분인데, 목주 출신의 그를 사모하여목암이라는 호를 지었다는 것이나, 일연의 일생이  깊은 까닭 가운데  하나로 ‘진정한 자애를 들고 있는 비문을 보건데, 효심은 일연을 일연이게 한 주요한 요소다.[690] 

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석굴암) 지었다고  한다.[697] 

삼뇌는 //돼지를  일컫는다. 칠정은 일곱 개의 솥에다 각각 음식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둘을 합치면 그지없는 진수성찬이다.[703]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삼국유사’,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704] 

재래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들어 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는 면을  보여 주었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704]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 정서, 이것을 담아 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 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제망매가’,’원왕생가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706]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일연은 분명 그런 시인이었다.[707]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710]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712] 

노동요는 일할   부르는 민요다. 힘든 일을 하다 지치고 괴로울 때 부르는 노래는 위안을 준다. 더욱이 함께 입을 모아  부르다 보면 박자에 맞추어 행동이 통일되니 힘이 덜 든다.[714] 

충성심과 이기심은  종이   차이다.[720]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이제는 진정된  감이 있지만 한때 일연에 대한 평가는  너무 과장되거나 너무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723]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725]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 있다.[728]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733] 

새로운 시대상을  창출한다는 명제 아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산문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업적을 널리 현창 하여야 하는 일이다.[733] 

본질 앞에서  방편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멀리  목우화상을 이었다는 말의 함의이다.[734]

일연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은삼국유사의 편찬이다. 내외적으로 불어 닥쳤던 거대한 변화의 조류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해체를 가져왔는데, ‘삼국유사는 그같이 변화된 모습을 담는 그릇이었다.[734] 

대체로   성인들이 예악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때면, 괴이한 힘이나 지저분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때에, 부명에 맞는다든지  도록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736] 

삼국유사’ 보다   세기 앞서 중국 중심의 고대  왕권 국가의 전형을 보여 주는 『삼국사기)   체재나 기술 내용이 중국의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는 고대  우리 나라의 지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지만, 과도한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이  벌써 13세기 사람들의 눈에도 무리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736] 

중국에서 처음  나라가  때부터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에게까지 신이한 일로 점철된 건국의  역사를 낱낱이 대는 것은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자존의 극치다.[738] 

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 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739]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일연은 종교와 문학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혁신적 승려였다.[741]  

사진  찍기는  재미있다 

고운기 선배의 제안으로  시작도니,삼국유사> 사진 찍기는 어는덧   년을 넘겻다. 돌아보니 우린 아이를     아빠가 되어 잇고, 비슷하게  맞닥드린 고난의 세월과 온몸으로 맞서면서도<삼국유사>  손에서 놓지 않앗다. 누가 부탁한 일도  아니엇고, 돈이 되는 일은 더욱 아니엇지만, 우리에게 <삼국유사>는 깊은 밤 외딴 산길 멀리서 혼들리는 물및같은 그런 존재였다[742]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 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별빛과 노란 가로등 불빛에 처연히 빛나던 분황사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 있는, 온갖 번뇌에도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켜 내는 의상의 순결한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로의 손 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남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게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긴 지귀의 짝사랑.[743]

내가  저자라면 

책에  대하여 

“700  년의   잠을 깨고 우리 곁으로  <삼국유사> . .  문헌을 샅샅이 뒤져   해설과 정확한 원문. 세월을 뛰어넘어  삼국유사 무대를 재현한 400여컷의 사진. 이야기  유적지에서 800     땅에 태어난 일연의 삶을 담은 삼국유사  해설서!” 

 서는  삼국유사의 번역서가 아니라 해설서이다.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대한 번역과 더불어  연구를 통해 획득한 자신의 논지와  현지를 답사하면서 본인의 감상이나  느낀 점을 풀어 놓았다. 사진작가와  동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곁들임으로  이해도 쉬워지고, 편안하고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은 역사서였다.  

사막속의  오아시스. 

내가 막연히  상상만 해오던 내가 쓰고 싶은 책에  대한 갈망에 가까이 접근한    기분이 들었다. 대중매체에 쏟아져 나와  있는 수없는 활자들은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와 같았다.  와중에 이번  책을 읽으며 오아시스를 만나 들이키는  물처럼 내내 시원했다.  자체에 대한  연구와 실제 현장 답사를 통해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있는 말로 풀어  살아있는  글이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었다. 

 책을  읽으며 알고 있었으나 실천하지    것을 다시 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관심 분야에 대한 저서를   많이 접하고 내가 가는 어느 장소이던  현장의 내음을 느끼고, 분위기를 기록하고, 풍경을 담아 간직하는 일이다.  나의  수련을 하며 주위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같이 느끼고  수집하여 담아 놓는 일이다.  

책의  장점 

1.삼국유사의  무대를 일연의 일생과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따라, 지리적 경로를 재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마치 가보지 않았어도 그곳에  있는  같은 격조와 기품이 있는  현장 사진들은 나를 역사 속으로  데리고 갔다. 이러한 사진들이 이야기  중간 중간에 적절하게 배치되어있어  역사와 해설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며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처음 고조선의 이야기에서 단군신화를 다룬다. 마한과 동부여, 북부여의 돌 밑에서 금빛 깔의 아이가 자라서 금와태자가 되었다는 등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단군신화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고대 역사가 허무맹랑한 이야기, 설화와 야사로 믿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다 이해할 수 있는 일로 바뀌어 버리는 우리만의 신화가 있다는 점이다.

2. 초등학생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글들이 있을  정도로 흥미롭고 옛날이야기 같이 재미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책을 읽을   있게 쉽게 설명되어 있고, 요즘 세대에  맞게 시쳇말도 간간히 삽입하여 역사서라는  딱딱함과 지루함을 없애 주었다.

3. 금방 가방을  싸가지고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찍어 놓은 사진들이다. 나도  마애삼존불에 가서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있었지만, 찍는 각도와 해가 비추는  시간대에 따라 삼존불의 미소가 틀려진다고  하는데  사진과는 비교도    없이  잡아 미소를 살려 놓았다. 역시 프로다. 현장감이 있는 400여장의 사진이  배치되어 있는  책은 다른 유사한  삼국유사 책들과 고운기 교수의 책이  차별화 되는 포인트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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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5.11 10:12:02 *.236.3.241
고운기는 시 한편에 삼국유사에 빠져 들었다는데, 우리 웨버도
동물에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요 ㅎㅎㅎ

잘 알면 쉽게 쓸 수 있겠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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