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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8일 07시 4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나는 책을 접하기 전에 삼국유사에 고운기님이 고전의 가독성과 독자의 흥미를 감안하여 해제(解題)한 책으로 생각했다. 책을 접하고 나니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는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그 시대에 얽힌 정사와 비사를 엮어서 그의 감성으로 새롭게 해석한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1] 고운기 (1961~)

양진과 고운기.jpg

<사진은 양진과 고운기님 / 출처 : 동아닷컴>

내 평생 작업인《삼국유사》시리즈를 매년 한 권씩 15권을 펴내겠다." -고운기-

 

저자 고운기는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삼국유사 관련 연구서로 <일연을 묻는다>,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삼국사기 열전>을 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등단하였으며, <나는 이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의 시집을 선보였다. 1999년부터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비교 연구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의 교수로 있다.

 

그가 말하는 삼국유사

 

제목 :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일본 황실이 빌려갈 정도…;삼국유사, 극진한 대접 받아"(고운기)

매체명 :  조선일보 / 게재일 : 2009.12.12 / 기고자 :  김남인

 

세상에 나온 지 700, 지난 100년간 관련 논문만 3000, 현재 활발히 팔리고 있는 관련 책은 367.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 만들어내고 있는 '기록'이다. 그 안에 든 이야기들은 어떤가.

마늘을 먹은 곰이 사람이 되고, 서동은 노래 하나로 선화공주를 꾀어내며, 문희는 언니를 졸라 꿈을 산 후 왕의 여자가 된다. 어느 하나 낯선 장면이 없다. 한민족의 원형이 고스란히 숨 쉰다.

 

20년간 《삼국유사》를 연구한 연세대 국학연구원 고운기(48) 연구교수에 따르면, 이 책은 전승과정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소설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병사의 봇짐에 싸여 바다를 건넌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집안의 문고에 소장돼 있다 최남선(1890~1957)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고 교수는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현암사)을 통해 700년간 《삼국유사》의 운명을 치밀하게 추적했다. 주 무대는 일본, 에도 시대(1603~1867).

 

"책 제목대로 도쿠가와가 《삼국유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책의 운명은 180도 달라졌을 겁니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시대가 열리자 일본 열도에도 평화가 찾아왔어요. 사무라이들도 칼을 놓고, 책을 들 때였죠. 마침 임진왜란(1592~1598) '문화 선진국' 조선에서 싹쓸이해 온 책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도쿠가와에게 바쳐졌죠. 그는 조선의 미려한 인쇄술에 탄복하며 그 책들을 끔찍하게 아끼고 관리했어요.

 

성리학에 가려 조선의 학자들에게 '황탄(荒誕·근거가 없고 황당함)하다'는 한 마디로 평가절하되던 《삼국유사》가 일본에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사실, 《삼국유사》는 일본에 흘러간 다른 조선 책에 비해 인쇄가 탁월한 건 아니었다. 고 교수는 "조선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의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삼국유사》는 1624 5만권의 도쿠가와 집안 장서 가운데 '대표선수'로 뽑혀 황실에 불려가기까지 한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 바로 고 교수였다.

"도쿠가와 장서는 현재 나고야 시의 '호사문고'라는 도서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2006년 그곳에 갔다가 안내책자에서 '황실에 빌려 드린 서적의 메모'라는 제목을 단 사진을 발견했어요. 32종 목록 중 열 번째에 《삼국유사》가 있더군요.

 

'천황의 손길이 머물렀다'는 프리미엄이 붙어 이후 일본 내 《삼국유사》의 가치는 더 뛰어올랐다.

그리고 조선에서 《삼국유사》가 행방조차 묘연해진 1904, 근대화가 한창이던 일본의 도쿄제국대학이 《삼국유사》를 출판한다. 을사보호조약을 한 해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삼국유사》가 어떤 책인지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이 책을 '조선의 오리지널 현물(現物)'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지요. 조선인의 정서와 심성을 이 책에서 찾아냈고 이를 식민지 경영에 활용했던 겁니다.

 

《삼국유사》의 귀향은 1927년 최남선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04, 그는 국내에서 소문만 돌던 《삼국유사》를 발견했다.

그 후 "백천금이라도 구하기 어려운 진서"라는 소개와 함께 최남선은 계명구락부의 기관지인 《계명》 제18호에 《삼국유사》 전문(全文)을 싣는다.

 

고 교수는 "《삼국유사》는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우리 역사를 바꿔놨다. 이 가치가 근대 식민치하에서 제대로 평가 받게 된 것"이라고 했다.

고 교수는 호사문고에서 《삼국유사》 실물을 접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이 책을 인쇄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이 터지지 않았다면, 도쿠가와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최남선이 일본 유학에 나서지 않았다면 이 책은 어떻게 됐을까요. 엄청난 우연과 필연이 겹쳐 《삼국유사》가 우리에게 돌아왔어요. '한국인은 누구인가' 물을 때 유일하게 내밀 수 있는 이 책이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일연

출처 : 동아닷컴 [저자와의 차한잔]에서 / http://news.donga.com/3/all/20101023/32067647/1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현장감각과 정치감각, 균형감각 등 세 가지 감각이 탁월한 역사가였습니다.”

 

고 교수는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역사, 문화 연구는 많은 데 비해 정작 텍스트로 연구한 경우는 드물다며 삼국유사에 천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먼저 그는삼국유사는길 위의 책’”이라며 일연의 현장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에서 연대별 사건 서술에 주력한 반면 일연은 하찮은 현장이라도 직접 둘러보고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백제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에 대한 기록을 보더라도 삼국사기는무왕 35년에 완성되었다고만 기록한 반면 삼국유사는미륵상 셋과 회전(會殿), , 낭무(廊무·정전 아래에 동서로 붙여지은 건물)를 각기 세 군데 세운 다음 미륵사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절의 구조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일연은 이런 현장감각으로 지배층뿐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담아냈습니다. 봉건시대의 역사가가 민중의 생활사를 담은 역사서를 썼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업적이죠.”

 

일연은 정치적 감각도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고 교수는일연이 살았던 13세기는 몽골의 침략 등으로 백성들이 피폐한 삶을 살았다그는 공포의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에게 주는위안의 읽을거리로 책을 썼다고 평가했다. 일연은 삼국유사 곳곳에서 단군신화를 비롯한 이상적 정치의 모습을 그렸다. 고 교수는 일연이권력으로서의 정치가 아닌, ‘권력에 맞선 창조적 삶의 지속으로서의 정치를 그렸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균형 감각. 그는일연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불교와 민간신앙이 극심히 교차한 신라 사회를 바라보면서 경우에 따라 불교를 비판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스토리텔링 기법은 빈약한 역사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사실을 왜곡시킬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국문학자입니다. 문화 콘텐츠 확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어진 자료에만 얽매이면 고전의 재탄생이 어렵습니다. 역사의 왜곡은 곤란하지만 상상력의 발휘는 꼭 필요합니다.”

 

[일연] 인터파크 도서정보에서

1206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세속의 성씨는 김()이었으며 이름은 견명(見明)이었다. 처음 승려가 되어서는 회연(晦然)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말년에 일연(一然)으로 바꿨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공부를 위해 전남 광주의 무량사(無量寺)로 들어갔고, 14세 때 승려가 되기 위해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갔다. 22세 때 승과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했다. 44세 때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의 주지로 초빙되었고, 왕명에 의해 주요한 불사(佛事)를 주관했을 뿐 아니라 수행과 불법을 펼치는 데에도 정성을 다했다. 75세 때 왕명에 따라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로 옮겼고, 잠시 국사(國師)로 책봉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9세 때 인각사(麟角寺)로 옮겼고, 그곳에서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일연은 이 책으로 ‘중화주의’나 ‘화이사상’에 물들어 있던 당시의 사회 풍토 속에서도 우리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임을 드러내 주었다. 84세 때 제자들과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뒤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했다.

 

[저자에 대한 나의 느낌]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가 800여년을 지나 오늘에까지 전해져 오지만 삼국유사를 가까이 알고 이해할 수 있는데 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았다. 어렵고 황당무계한 괴담, 기담, 전설 같은 옛날 애기로 알려져 온 삼국유사 이야기가 그 내용의 뜻을 알기 쉽도록, 그리고 재미있게 감성적인 해석의 물꼬를 터준 사람이 저자 고운기님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얼마 전 왜 우리에게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없을까? 내가 모른다고 쳐도 왜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화가 보편화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런 책이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읽히어서 풍요한 한국인의 집단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국적 원형과 정체성의 근거로서 삼국유사가 한국 신화의 고지로 끌어올려져서 우리에게도 정신적인 자긍심을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고운기님을 가이드로 해서 슬슬 전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아마도 이런 기분은 사진 작가 양진님의 빛으로 이야기하는 듯한 훌륭한 사진이 있었기에 더욱 풍성한 여행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의 뿌리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거기에는 정녕 안위와 감고의 어느 한 쪽이 아닌, 슬픔과 기쁨의 정반합으로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 합일의 세계가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료되어 화두의 열 배 스무 배 말을 쏟아 놓았건만, 이제 다시 내가 고쳐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

내가 단기에 목표하고 있는 책에 대해 생각을 미치게 한다. 이미 많은 책들을 통해 삶의 이야기들이 적나라한 이때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흉내 냄이 아닌 세상에 빛을 더하는 나의 이야기는 무엇이 될까?

 

나는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해 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요리를 하기에는 방부제 친 통조림 보다 싱싱한 과일과 야채가 더 좋은 재료 아닌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삼국유사>는 시대마다 좋은 요리사를 만나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재료인지 모른다.

 

내게도 닥쳤던 안위(安危)와 감고(甘苦)의 세월을 곱씹는 동안 세상 보는 눈이 조금 열렸고, 그 때문에 내 혁명가의 화두 또한 보이기 시작했기에 그렇다. 혁명가는 그 스스로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속에서 도리어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를 찾아 뒷사람에게 남겨 주는 것 같다.

 

 

---들어가며

<삼국유사>를 이해해 들어가는 중요한 단서 이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와 사()에 있다는 점. (3)

 

고려 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의 편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는 문자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고려의 지식인에 이르러서야 한문이라는 (중국어가 아니다) 표기 수단은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는 점도 이와 길항하는 관계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로 인해 더 이상 최소한 지식인에게 한문은 낯선 문자가 아니었다.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첫 번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 (1145)의 일이다. (4)

무엇인가의 이면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을 읽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을 준다.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나만 알게 된 듯한 그런 즐거움.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고려 전기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사대로 요약된다.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화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4)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4)

 

<삼국유사>의 탄생 배경은 아무래도 이 두 가지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4)

두 가지 세계사적 사건 : 고려의 무신정변과 한족의 송나라가 무너지고 변방의 오랑캐 원나라가 천하를 통일 한 것.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5)

 

<흥법> 이하의 편들을 나는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했다고 하였다. ...다만 불교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6)

 

근세에 들어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8~9)

 

1904년 도쿄대학의 배인본(排印本) 삼국유사 : 이는 간다본과 도쿠가와본을 저본으로 한 것인데, 이 두 책이 일본에서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임진왜란의 약탈)

 

교토대학의 교수인 이마니시 류가 순암수택본을 얻은 것은 1916년의 일이다. 이를 저본으로 1926, 교토대학에서 삼국유사의 영인본을 내놓았다.

 

한글 번역은 1940년대 김동인이 내던 잡시 <야담>에 연재 된 바 있으나 본격적인 번역본은 해방 이후를 기다려야 했다. ...실로 빛을 보기까지 600여년의 오랜 세월을 견딘 셈이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것인가? 우리나라에 정덕본이 있는지 궁금하다. 일본에서 경인본, 영인본 등이 나오면서,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서 작업하게 되는 과정에서 소실되거나 감추어지게 된 부분은 없는 것일까? 몇 가지의 궁금한 점이 있다.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유념한 몇 가지 점을 미리 밝혀 둔다.

첫째,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나는 그 배경을 설명해 주되,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둘째, 『삼국유사』에 실린 전체 조목 수는 약 140여 개, 그것을 『삼국유사』의 순서대로 40개의 제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했다. 앞의 20개는 전반부 <기이>편을 중심으로, 뒤의 20개는 후반부 <흥법>편 이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셋째,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은 『삼국사기』와 면밀히 비교해 보았고, 뒤는 승전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일본에서 정리해 놓은 여러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넷째, 『삼국유사』는 1290년경 일연에 의해 쓰여 졌고, 곧이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국유사』 본체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 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9~10)

첫째는 우리가 하고 있는 '내가 저자라면의 관점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에 해당하고 넷째는 '저자에 대해서'의 의도와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칼럼을 쓰는 것은 그것들의 사유가 뭉쳐져서 나의 것이 되는 과정이다. 올바르게 책을 읽고 소화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감사와 애착이 더해진다.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일연이 살았던 13세기의 사람들이야말로, 그 샘과 뿌리를 단군이라고 본 아마도 첫 세대였던가 한다. 누구나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자못 중요하게 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 등재, 그것도 첫머리에 자리 잡은 일이 그렇다. (12)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 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2)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다만 거기에도 무한정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도 하다. (13)

 

단군신화는 <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세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14)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국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16)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17)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18)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 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19)

 

일연은 기자가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거니와, 아예기자조선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단군조선 이후 곧바로 위만조선으로 넘어가 버린다. 여기에 <삼국유사> 첫 부분을 제대로 읽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20)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는 그러한 상징이다. (21)

 

우리는 먼저 단순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신화 중에서도 단군 신화는 창세신화인가 아니면 건국신화인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21)

 

처음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 때 그 곳에는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묶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비록 그가 첫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단군이 나오고, 단군은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21)

 

빙하기가 끝나고 지금 세상에 들어 이 땅에도 처음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 부락을 만들고, 부락들이 만나 연합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가다 보니, 그 사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을 제어하는 힘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던가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단군 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22)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23)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중국의 사고방식에 따르자니 <삼국사기>는 한반도 역사를 한나라가 세워진 한참 후인 기원전 57년에 와서야 떨렁 시작한다. (23)

 

<삼국사기>가 나온 12세기 중반과 <삼국유사> 13세기 후반까지는 150여 년의 사이가 있다.(24)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웠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24)

모든 변화는 그때껏 있어온 어떤 것의 끝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는 있어온 것의 끝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13세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가 동명왕편(東明王篇)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고구려인의 기개를 한껏 살리면서, 고주몽(高朱蒙)의 생애를 장황히 읊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기실 민족의 발견이었다. 또 다른 문장가 이승휴(李承休)는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 신화부터 시작하였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줄을 잇는 13세기였다. (25)

 

우리가 <삼국유사>의 첫 부분을 대할 때 유의할 점이 여기에 있다. 일연이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이 땅의 첫 나라인 조선에 관한 대부분을 갈무리했다는 것이다. (34)

 

고구려와 북방계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36)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한 일연으로서는 한반도가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기 전까지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6)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43)

민족의 자긍심을 눈치를 피해서 기술한 것은 삼국유사가 시초라고 할 수 있겠구나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43)

 

<삼국사기>에서 인용하는 두 가지 삽화다. 앞선 삽화가 주몽의 뛰어난 지혜를 말하고 있다면, 뒤는 하늘의 도움까지 함께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완벽히 갖춰진 조건이다.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대체로 이 같은 유형으로 지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 (44)

 

백제가 북방계의 흐름을 타고 건국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의 구성원이 전부 북방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 원주민이 있었고, 여러 역사서에 그 이름이 나타나듯이, 그들의 나라 곧 변한 등은 사실 원주민들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부족 간의 이동은 끊이지 않았고, 좀 더 우세한 세력과 기술을 가진 쪽으로 힘의 균형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일연이 백제를 북방계에 속한 쪽으로 기술한 것도 그 같은 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름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52)

 

신라와 남방계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건국에 관한 일연의 기술은 『삼국사기』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 『삼국사기』 보다 훨씬 자세하며, 적어 나가는 태도 또한 매우 자신에 넘쳐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53)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앞서 환웅과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가 직접 왕이 된다든지 왕이 될 아들을 낳는 것으로 북방계 민족과 나라의 출발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데 있지 않을까? (56)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과 성거산의 여신 전승 /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신화(巫祖神話)라 한다.

 

대체적으로 남쪽 지방의 산신 신앙의 구조가 이와 비슷하다고 할진대, 신라 왕조의 출발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명확해진다.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신화와 사촌 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왕실 또한 제정일치적인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약하다. / 신라 불교가 토착적인 신앙과 만나는 장면은 앞으로 자주 소개되겠지만, 그것이 곧 왕실과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호국불교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눈여겨볼 만하다. (68)

 

(신라 왕의 이름)“신라에서 왕을 부를 때 거서간이라 하는데 그 곳 말로 왕이다. 간혹 귀인을 부를 때 쓰는 칭호라 하고, 어떤 이는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차차웅은 이 지방 말로 무당을 일컬으며,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이를 두려이 공경하다 보니 높으신 분을 자충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 어떤 이는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마립 이라는 것은 이 지방 말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을 표지로 자리에 세워 두면 왕이니, 말뚝은 주인이 되고 신하는 아래에서 말뚝을 따라 줄을 지었다.” (69)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용성국 출신이라는 기이한 남자 석탈해는 헌칠한 체구에 꾀도 많고 덕망도 갖추었지만, 촌놈에서 출발해 왕의 사위에 이어 왕까지 된 '신라드림'의 원조다. (70)

 

탈해는 무척 복잡하고 신비한 인간이다. 그 출생 과정부터 한 남자의 생애는 파란만장을 예거하고도 남았다. 물론 밑바닥에서 시작한 인생이 평탄할 수만 있겠는가? (70)

 

탈해는 누구일까? 용성국은 어디일까? 박씨에 의해 대가 이어지는 초기 신라 왕실에서, 갑자기 거기서 벗어나 탈해를 왕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 (71)

 

치아 많은 이가 되는 왕 자리? 그래서 왕도 닛금이라 불렀다는 이 기이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72)

 

정말 간사스런 꽤다. 실제 자기 것을 꾀를 내어 다시 찾았다면 지혜스럽다 하겠으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니, 이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탈해의 인간성을 그다지 탐탁하게 볼 수 없다. 주몽이 동부여 왕실의 좋은 말을 차지하려 썼던 꾀보다도 더 심하다.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78)

 

어쨌든 문물의 발달이 신화시대를 거둬내고, 실질적인 힘으로 정복과 지배를 영위해 나가는 시기가 이 한반도에도 도래한 셈이다. (78)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김일 선수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여,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잇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92)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96)

뛰어난 사람은 뛰어난 구석이 틀림없이 있다. 혼란함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찾아 그것에 의미를 두고 실천하는 것. 어떤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많은 핑계거리를 찾는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모든 상황에서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어떤 의미를 찾는 것. 범상치 않고 싶거든 내 스스로 그런 힘을 길러야 하겠다.

 

해와 달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느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97)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98)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100)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101)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418년 봄, 드디어 박제상이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데리고 돌아고고, 가을에는 왜에 들어가 미사흔을 도망가게 한다. 제상 자신은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는다. (110)

 

물론 박제상의 장렬한 죽음에다 양쪽 모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에 큰 차이는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은 신라와 일본의 오랜 갈등 속에 빚어진 가장 비극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이다. (110)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111)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112)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 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115)

 

문제는 박제상의 일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때는 왜도 고대 왕권 국가의 틀을 확실히 갖추고 비록 지금의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히로시마 지역에 한정하지만 중앙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116)

 

밤에 찾아오는 손님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돈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120)

 

설화 문학에서 말하는 하나의 유형 중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120)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造花).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134)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137)

 

[신라중기의 왕위 계승도] (138)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 (14)

나에게는 위안을 주는 말이다. 아마도 지금 내가 걷는 길이 늦지 않았기를 바라는 심정이고 늦은 때는 없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바램이다. 다만 먼저 된 자를 나중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초심을 잃는 것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 바라 볼 수 있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2등일 때 1등을 보고 그것 이상이 되고자 하는 것. 1등은 되는 것 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이유가 그럴 것이다.

 

미리 조금 말하자면, 신라의 불교는 공인 이후에도 순조롭게 자리잡아 가지 못한다. 한 사상, 더욱이 종교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절대 시간을 계산하기 어렵지만, 민간에 퍼져 있는 초보적 종교 형태의 전통과 힘이 강했던 것이 신라이기에, 다른 두 나라에 비한다면 어려움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141)

 

그러나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44)

 

진자가 미륵상 앞에서 ‘부처님을 화랑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륵하생신앙인데, 화랑도에 자연스럽게 불교가 접목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진자가 찾아가는 부처님이 구체적으로는 미륵선화다.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64 7,000만 년 뒤에 오신다는 부처님이 미륵이다. 이른바 후세불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 바로 지금 내려와 달라고 비는 하생신앙은 중국으로부터 무르익어, 이 때 이미 백제에서는 미륵반가사유상 같은 걸출한 불상이 만들어질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147)

 

그러나 그 같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진자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에 씌운 아상(我相)은 그토록 완고한 법이다. ★★★★★★★★★★★★★★★★★★★★ (147)

진자의 사례도 그렇고, 부득과 박박의 사례도 그렇고...모든 범인들이 그러하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원하는 것 또한 이것이다.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149) ==> 147페이지에 대한 답이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150)

 

한반도의 한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쳤는지도 모르겠다. (153)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황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고 답한다.  선덕왕이 여성이기에 좀더 부드럽게 당나라와의 교유를 이어 나갈 수 있었겠다 싶다. (158)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문희라는 이름을 다시 본 것이 『삼국유사』에서다.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이 문희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역사의 문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 삼각의 한 축을 감당해야 했던 여자의 표정 또한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문희와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159)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 김유신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난다. (160)

 

일연은김유신조 또한 자신의 특유한 필법으로 써 내려갔다. 간단한 출신 배경만 남기고 번거로운 이야기는 『삼국사기』 쪽으로 돌리면서,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이야기에 거의 전면을 할애했다. 바로 백석(白石)이라는 고구려 첩자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161)

 

일제시대 때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그것은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169)

 

그러나 왕위는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선덕여왕이 15년 진덕여왕이 7년을 하는 동안 춘추는 기다려야 했다. 더욱이 이미 성골의 혈통을 깬 다음이므로 춘추에게는 다른 명분이 필요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진골이다. 그 때까지는 두 집안이 모두 왕족이어야만 왕이 되는 신라 왕실에서, 이제 한 쪽만이어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 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172)

 

동생의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까?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177)

 

물론 통일을 위한 모든 기반을 김춘수와 김유신이 마련했으므로, 문무왕은 다만 그것을 이어 마무리한 정도로 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자 태자 시절에도 문무왕이 아버지 못지않은 활약을 벌이는 데다,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통일 후의 마무리 작업 특히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해결해 낸 점 등은, 통일을 위한 전쟁보다 더 어려웠던 일로 보인다. (178)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179)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179)

 

다시 말하거니와 왕위에 있었던 20년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나라 군사를 쳐부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183)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나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없어 보인다.

문무왕의 이같이 거룩한 생각은 그 아들 신문왕에게 이어져 더욱 아름답게 꽃 핀다. 문무왕의 이름이 법민인 데 비해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이다. 두 이름을 합쳐보면 법정(法政) 민명(敏明), 두 왕에 걸쳐 정치와 법이 밝고도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이름에 넣어 소망한 것이지만, 실제 신라 천 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값을 하고 있다. (185-186)

 

사천왕사가 당나라 군대를 쳐부술 무슨 힘이 있으리라 믿지 못한 김부식은 피리 한 자루가 나라를 지킬 보배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만파식적, 이 신기한 요술 피리에 대해서 그는 심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삼국사기> <잡지>의 ‘삼죽(三竹)’조에 <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기는 하나.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187)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結晶)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189)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서는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때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예컨대 김유신은 각간이었지만, 더 공을 세우자 대각간이라 했고, 다시 더 공을 세우자 태대각간이라 한 것이 그렇다. 만파식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더할 데 없는 보배이나, 거기에 공을 더 세우니 글자를 하나씩 더 붙여 주었던 것이다. (194)

 

권력의 끝

얼마 전, 우리나라의 정치인들 사이에서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교토사주구팽’ 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196)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지금 나는 이 자리에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김춘추와 김유신 두 사람을 축으로 하는 이 기간은 역시 신라의 전성시대였다. 이웃한 당나라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과, 일본이 나라시대라고 하는 그들의 첫 문화시대를 열었던 것과 시대를 같이한다. 신라는 안정된 구도 속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 전해주었다. (204)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신라 통일의 8할’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205)

 

득오가 지은 향가「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배경 설화로도 유명한 이야기다. 득오가 새로운 자리에 전출되어 임지에 가서 일하는데, 옛 상관으로서 죽지랑이 면회를 갔던 일 정도, 거기서 좀 더 나간다면 비뚤어진 관리가 사람을 속을 썩인 일 정도로 보면 그만일 수 있는 일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210)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은 자야 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 할 뿐이다. (212-213)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대부분의 왕에게 한 사람의 왕비만 기록되어 있다. 왕이 거느린 여자가 한 사람만일 리 없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편찬된 두 책의 저자가 모두 정실로서 왕비의 격을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후궁이 여럿이었을 텐데도 기록한 것은 왕비 한 사람이다. (214)

 

[통일 후 신라의 왕위 계승도] (218)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신문황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은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막을 불러왔다. (219)

 

그런 왕의 시대에 멋진 여자가 하나 나타난다. 바로 수로부인이다. 수로부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느 여인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그것은 약간 ‘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223)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 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6)

 

훔쳐간들 닳지 않는 것이라면 적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228)

 

<구지가>로부터 <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神歌)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면서도 700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주목할 만한 변화다. (229)

 

실제로 노래는 여러 사람의 행동을 일사분란하게 통일시키는 데도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 다음 시대,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한생산물로 유지하는 시대에 노래는 민요가 되었고, 민요가 노동현장에서 불렸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있게 된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229)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233)

 

첫 성전환증 환자

 

생사의 갈림길 /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은 모르겠네

, 미타찰 세상에서 만날 나는 / 도 닦아 기다리리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은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사실 이 시는 여덟째 줄까지 평범한 인간이 토로할 슬픔을 절제된 감정 속에서 마음껏 뱉어 놓고 있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라면 승려의 신분으로 주책 맞을 일, 아홉 번째 줄에서 감탄사를 길게 뺀 다음 흩어진 감정을 추스린다. 이는 향가라는 시의 형식이 가진 특장이기도 하다.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할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241-242)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247)

 

왕이 되는 자

원성왕이 아버리로부터 만파식적을 맏앗다는 이야기는 앞서 나왔다. ...왕이 한 선의의 거짓말은 국보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거절하되 어떤 다른 외교적 분쟁이 야기되지 않도록 섬세히 배려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그의 조심스런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257)

 

사실 원성왕은 기울어 가는 신라를 되살리고자 애쓴 마지막 왕이 아닌가 한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왕족간의 싸움 끝에 등극하였다고 하나, 그것이 곧 야심찬 젊은 왕족의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왕 즉위 4년에 실시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그 대표적인 업적으로 볼 수 있다. (261)

 

때로 까닭을 설명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것이 사람이요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다. ★★★★★

(266)

그렇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능력과 운의 조화)

뱀을 이불 삼아 자야 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67)

 

나라가 망하는 징조

한 집안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이, 나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절대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언정, 한번 일어나면 한번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대체로 흥망성쇠를 유전하기 마련이다. 과학적 증명이나 운수소관을 따지기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269)

 

찼으니 이지러지는 달에서 우리가 읽는 역사의 유전이 감상적으로만 흘러서는 곤란하다 해도, 한 왕조가 들어서서 천 년 세월을 보냈다면 이제 끝을 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럴 징조를 수없이 보여 주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권력자가 애꿎은 목숨만 앗아갈 때,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271)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간다. (272)

 

[신라 후기 왕위 계승도] (274~275)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완도·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 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에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277)

 

여기서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단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 (284)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機微)를 보아 사리(事理)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286)

 

 

지는 해 뜨는 해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287)

조직에서의 경직된 인사, 일보다는 사람을 보게 하는 폐단.

 

돌이켜 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288)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289)

 

이야기의 끝은 늘 풍성한 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품속의 꽃 가지를 꺼내 아내로 맞는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 주려는 일연의 붓끝이 보이는 듯하다. (294)

 

나 또한 앞서 비슷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왕조 사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백성의 힘이다. (302)

 

그러나 정녕 아쉬움은 있다. 태자의 이 간절한 한마디, ‘천 년 사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실리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어떤 다른 논리 아닌 논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물론 그런 느낌일 뿐이다. (302)

 

[경순왕과 관련된 고려 초의 왕] (306)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다만 시조 왕의 사적을 잠깐 언급한 다음, 나머지는 신라에 비해 옹색하기 그지없다. (307)

 

여러 역사학자들이 마치 사금을 모으듯, 고구려와 백제의 잃어버린 역사를 여기저기 역사서에서 그러모아 짜깁기를 해놓고 있지만, 그것이 시원스레 당시를 재현해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정녕 충분한 자료가 갖추어졌다면, 고구려에 관련해서는 대륙 중국과의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백제에 관련해서는 이웃 일본과의 교류를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307)

 

부여를 '여주'라고도 부른다는 일연의 기록은 매우 값진 것이다. 일연 자신이 직접 자복사라는 절에 가 보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서 본 들을 바탕으로 지명의 유래를 확실히 고증해 놓고 있는 이런 대목이 <삼국유사>가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다. (309)

 

한강 유역을 고집하지 않을 바에야 일본에 이르기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웅진으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속내로 보인다. (311)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아마도 더 이상 도움 받을 수도, 받는다고 자처해 이로울 것도 없는 백제계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의 멸망은 백제 왕실 하나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325)

 

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326)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327)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 놓기 십상이었다. (327)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 첫머리다. 기이한 출생,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그 때문에 받는 고난 등의 배치가 그렇다. (328)

 

영웅은 자기가 타고난 비범한 재주로 고난을 극복해 낸다. 서동은 이웃 나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고 있다. 첫발치고는 통도 크다. (330)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332)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强固)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338)

 

미륵사상은 백제 불교에서 먼저 피어났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불교의 전반적인 발전은 신라에 비해 백제가 언제나 한 발 앞서 있었다. 백제는 발전된 항해술을 이용해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교를 그때그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화해서 토착시키고 있었다. (338)

 

미래불로 오시는 미륵보살의 세상이 이렇기에 시대가 혼란해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신앙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남북조시대의 혼란한 시기에 먼저 생겼고, 후백제의 견훤이 자신을 ‘미륵의 하생’이라 선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343)

 

견훤, 비운의 영웅

일연이 쓰는 견훤의 생애란 『삼국사기』 안의 전기가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책은 한 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고려 쪽에서 만든 역사서가 아닌가? 그런 마련해선 전모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다, 더 나아가 긍정적인 쪽의 자료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가 포악한 인물로 알려진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한다면, 견훤에 대한 평가는 전해오는 자료를 일단 한 번 접고 들어가는 유연성이 필요할 듯하다. (348)

 

설화 속에서 커다란 지렁이란 곧 여자가 남몰래 정을 통한 사내일 터인데, 서동의 경우처럼 용이 아닌 것으로 보면 그만한 지체는 아니지만 뭔가 남달랐을 사내의 영상이 떠오른다. (350)

 

절정의 순간에 보낸 견훤의 편지와, 예봉을 피해 가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왕건이 보낸 답장에서 우리는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싸움터의 칼 바람이 스산하게 묻어 있는, 그러면서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붓 놀림은, 그대로 칼 없이 겨루는 한판이다. (354)

 

그것은 마치 초 항우와 한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하다. 역발산 기개세라 한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나 꼬리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358)

 

가엾은 완산 아이가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360)

 

반역을 한자는 비참하지만, 반역자가 아들인 경우엔 슬픔은 이중으로 겹쳐오고, 급기야 천륜을 팽개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삼기가 어디에도 없을 지경을 만들어 낸다. (361)

 

능환만은 "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다. 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이래야 한단 말이냐"하고 목을 베었다. (363)

 

신비의 왕조, 가야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베스트 3’을 꼽으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 신화-향가-가락국기 이 세 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364)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許黃玉)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 든 좋은 자료가 바로가락국기. (365)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가야의 역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일연의 손에 의해 거둬들여진 이 짧은 기록 하나가 전부다. (369)

 

노래에서는 맞이하려는 대상을 거북이로 상정하고 있다. 이 거북이는 용으로도 바꿔볼 수 있다.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이는 왕왕 용의 다른 모습이거나 똑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 신성한 동물의 하나다. 그러나 존대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372)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절에는 어느 곳에나 탑을 세운다. 그 탑의 의미가 여러 가지나. 절을 고해에 떠가는 배로 비유한다면 탑을 여기 왕후가 싣고 왔다는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378)

 

그런데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다. 이 시기에 가야 지방에는 왜()의 식민지가 서 있었으며, 그 식민지의 이름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384)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나는 섬진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의 완충지였다고 본다. 거기에 서 있었던 가야국은 오랜 기간 이어졌어도 고대 왕권 국가로 발전했다고 평가하기가 미흡하고, 일찍이 일본열도 경영을 나선 백제에 비한다면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신라가 병합에 더 의욕적이어서 결국 그렇게 흘러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384)

 

물론 왜인들이 들락날락했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다. 완충지의 치안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384)

 

 

---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전반부의 <기이> 편이 끝나고 <삼국유사>의 후반부를 여는 첫 편은 <흥법>이다. 세 나라가 솟발처럼 선 다음 처음 불교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다.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부의 <삼국유사>는 완연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일, 탑과 절을 만든 경위, 고승들의 전기 등이 누벼지는데, 일연 자신이 승려 출신이기에 그랬을까, 전반부에 비할 때 이야기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인용한 책도 다양하다. <삼국유사>의 본령이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일각에서 <삼국유사>를 불교문화사라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385)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전래 경위만이 아니라 일연이 가진 역사의식의 일단을 읽게 된다. (386)

 

흥법은 곧 흥국(興國)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물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흥법」 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불교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386)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잠시 뒤에 소개할 신라와 비교한다면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어떤 이유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지닌 대륙적 기질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라고 해서 민간 신앙이 없었을 리 없고, 4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것이 나름대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큰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중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도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고,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다양성을 형성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을망정, 멸망의 빌미가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일연은 불교적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389)

 

다만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옮겨다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機制)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삼국유사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 (392)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나으네 /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고깃배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나타나는데, 시초는 그처럼 신비롭고 엄숙했다는 시적 표현이면서, 놀라서 나는 갈매기와 왜가리는 거기로부터 터져 나오는 돈오(頓悟)와도 같다. 상승과 하강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일연은 그것을 봄빛이 완연한 압록강이며, 고기 잡는 배를 빌려 타고 건넜다고 노래한다. 물론 상상이다. 이 같은 시적 상상은 그 선연한 형상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사실 이상의 사실 어디로 데려가고 있다.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 된 장사꾼들의 잰 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 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394]

 

신라는 앞선 두 나라에 비해 불교를 만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우람한 줄기에 무성한 가지를 뻗는 나무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듯 신라에 불교가 자리잡기까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394)

 

신라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교의 전통은 면면하다. 이로부터 뒷날 100여 년이 흐른 다음, 법흥왕이 불교를 세우자 했을 때도 이차돈의 순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불교의 큰 나무, 신라의 인고는 만만치 않았다.(398)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 재주도 많아 /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399)

 

순교의 흰 꽃 이차돈

불교 전래는 앞서고 뒤서는 순서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지지만, 이후의 전개 과정은 거꾸로 되어 있다. 곧 신라를 먼저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순이다. 이는 일연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전래된 순서야 이미 정해진 터여서 마음대로 바꿀 수 없지만, 그 다음의 일은 중요성에 따라 조정할 수 있으므로, 거기에 편찬자로서 일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401)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왜 그랬는지 그 기준은 삼국사기와 비슷할 터이나, 한 가지 추가한다면 불교역사주의적 의식이 적용했다는 점도 앞서 지적했다.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2)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도다.” (405)

 

살을 베어 저울로 단다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시비왕(尸毗王)이 고행을 할 때였다. 메추라기가 매에게 쫓겨 시비왕의 품으로 들어왔다. 왕은 메추라기도 살려야겠고 매도 굶길 수 없으므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매에게 먹였다. (406)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는 대목은 어디에나 있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이었다는 이적이 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며, 흰 젖은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것이다. (407)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411)

 

 

---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자리상으로만 아닌 마음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417)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417)

돌의 소곤거림이 위로의 기운을 느낄 듯 하다. 경주여행에서의 느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424)

 

고구려에 처음 온 전진의 승려 순도 또한 불상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불상은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다음 그에 따라 중국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장륙존상은 인도에서 직수입된 모델을 가지고 만들었다.

순도의 불상도 장륙존상도 모두 없어져 버린 지금, 한반도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머물렀던 세계 불교 문화의 두 중심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워할 뿐이다. (430)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 중 두가지에 해당 된다. 나머지 하나는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옥대다. (434)

 

이에 올라 보라, 어찌 구한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평화로움을 깨닫겠네

라고 노래한다.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435)

 

한 탑의 역사를 이렇듯 자세하게 남긴 것은 삼국유사에서 이 구층탑밖에 달리 없다. 일연의 이 탑에 대한 애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답상>편의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조에서 인용한 다음의 시는, 일연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배 승려 무의자((無衣子)가 쓴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의 마음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나는 들었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지는 불길 속에서 한 쪽은 무간지옥을 보여 주더라고 (436)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일연이 <탑상>편에서 오대산과 월정사의 사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에는 그 생애와 관련해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다. 그 까닭으로부터 왜 일연이 황룡사를 다룬 것과 버금가게 월정사에다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게 된다.(437)

 

오대산이 왜 문수 신앙의 근거지인가. 좀더 나아가 문수 신앙이 무엇인가를 조금만 더 거론하고 넘어가자.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저 유명한 <화엄경>의 이야기에서, 문수 스스로 남쪽을 두루 돌며 깨닫고 동쪽으로 오는데, 거기서 만난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 데 부로라고도 한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리라.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로 이런 문수 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40)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44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454)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가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경우,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455)

 

내 마음 오늘 / 절에 가서 절을 한다

잎 한 장 만들어지는 동안 / 온기가 없어 차가운

오랜 그 옛 마룻바닥에 엎드려

일어난다 다시 쳐다본다 / 즐겁고 깨끗하고 늘 있는 나는

지난 봄이 사라진 숲 속에 / 가을의 마지막 시간 속에 / 덧없음만 항상하고 아름다워라

나 이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 새싹의 아픔으로 돌아가라고

잎 한 잎 한 잎 덜어지는 동안에도 / 모든 것 향해 절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오늘 / 절하며 간다

 

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化身),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하는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 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56~458)

행복에 이르는 길은 결국 내 마음 안의 길이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 완성이요, 자기 성취가 아닐까. 마음이 찾아갈 정처 그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캠벨이 이야기했던 '성소(聖所)'와 같은 곳일 것이다. 매일 내 마음을 다스리고 돌아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성소, 그리고 시간적 개념의 성소.

 

개인사의 그늘에 놓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삼국유사>는 때로 일연의 생애와 견주었을 때 보다 맑게 이해되기도 한다.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69)

 

나는 이 대목이 모두 놀라웠다.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 없을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들이 많다. 꿩이나 그 새끼 몇 마리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살린 어떤 메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그런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471)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2000년 가을, 중동의 예루살렘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다시 벌어졌었다. 그 현장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이 머물렀던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에 두려워 떨고 있는 한 소년과 소년을 지키려고 온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 그러나 사격을 중지해 달라는 아버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결국 배에 총을 맞고 아버지의 품에서 숨져가는 소년을 보았을 것이다.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굴정현 꿩 모자가 마치 소년 부자의 이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 꿩 식구들을 살린 조상을 가진 후손으로 우리는 그나마 착한 사람들일까. (471)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 가장 듯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탑상>편의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조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 조가 일연과 일연의 문학 그리고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472)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으로 보살이 된다. ★★★★★★★★★★★★★★★★ (473)

나에게 마음 속에 가린 것은 너무도 많다. 득도 하지 않더라도 박박만큼이라도 원칙을 추구하는 삶이기를 바래본다. 원칙도 부족하고, 마음은 어지럽다. 얻고자 하는 것 가고자 하는 곳이 멀기만 하다.

 

“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무척 남는다 해도, 옷과 밥이 생각하는 대로 이르러 저절로 배부르고 따스함만 같지 못할 것이요,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한,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도를 이루려면 이만한 결단력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저절로 시켜서 된 것이지 억지가 끼여들 수 없다. (475)

 

“이곳은 여자가 와서 더럽힐 곳은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지요. 하물며 깊은 산골에 날마저 저물었으니 어떻게 소홀히 대하리요.” 부득과 박박이 갈라지는 극명한 지점이다.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479)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 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현신인지도 모른다. (481)

 

“내가 눈에 씌운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먼. 그대는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이루었네.(481)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다. 여자를 암자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것은 일편 계를 지키는 출가자의 바른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속에는 이기적인 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기심은 독선만 키울 뿐이요 자비심이란 찾을 수 없게 한다. (484)

그런 원칙을 지키는 것 조차 나에게는 부러움이다.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노힐부득을 두고 쓴 시다. 일연은 부득의 높은 도를 이중의 굴절을 통해 보여 준다.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순수중생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부득의 행위는 이 같은 참 보살행의 소치임이 분명하다. (485)

 

일연이 쓴 찬시 속에서 이런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또한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鄕歌한시(漢詩민요(民謠)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 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486)

 

낙산사의 힘

더욱이 이 이야기들은 일연이 승려로 살아가는 동안의 어떤 지남(指南)과도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마땅히 승려가 가야 할 길, 그러면서도 그나마 듯 있게 살아가는 방법-그런 이야기들이  관음과 정취보살의 친견 그리고 조신의 꿈에 잘 나타난다.(492)

 

낙산사에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힘일까? 비밀의 열쇠는 다름 아닌 담에 있다고 본다.

본격적인 낙산사의 경내라고 할 사천왕문부터 금당까지는 담이 둘러쳐 있다. 특이한 공법으로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담은,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금당 뒷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다른 큰 절에 비해 그다지 넓지 않은 경내가 이 담으로 인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가 싶다.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488)

 

참으로 치밀하고 정성들인 노력 후에 얻은 만남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지 못할 무엇이 있겠는가 웅변하는 듯하다. 나는 이것을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495)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을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나는 이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 명명하였다. 이런 만남은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이다. (496-497)

 

더 나아간다면, 이런 정도?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498)

 

아홉 살에 어머니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 일연에게는 귀 하나가 없는 사미승의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한 귀가 잘린 채 먼 이역에서 고국의 스님을 만나 고향에 돌아가거든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 달라고 말하는 소년은 정취보살이기에 앞서 일연 자신인지 모른다. 어머니를 떠나 머나 먼 강원도 산골에 와 있는 소년 일연의 마음이 그랬을 터이니 말이다. (502)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芝蘭)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근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 /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507)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시들고 /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508)

 

 

---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의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까? 중국에서 나온 승전에도 한편의 제목으로 이 말을 쓰고 있고, 일연도 그것을 본더 만들었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승전에서나 <삼국유사>에서나 이 편의 내용은 모두 고승들의 전기다. 그러므로 의역하건대 '고승의 삶' 정도일까?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아마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삼국시대를 특히 신라 중심으로 기술한다고 했을 때, 몇몇 승려들의 역할과 업적은 불교의 그것을 떠나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쉬움을 크다.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513)

 

“평소 세상의 경전에는 익숙해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통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교 공부를 하자 도리어 썩은 풀 같았다. 헛되이 유교를 공부하는 것이 실로 생애의 두려움으로 다가와 ” 드디어 출가한다. (515)

 

「수이전」은 본디 그런 책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연의 입장에서 이를 만약 불순하다고 여겼다면 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연은 원광의 전기 속에, 그것도 가장 공을 들였다는 「의해」편의 첫 글에 당당히 넣고 있다. 물론 일연으로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원광이기에 어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막 나가는 비구 같은 이와 달리 원광은 중국에까지 유학하고 수행에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생경한 외국 이론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말로 떠들지 않고 이 땅의 토착 신앙과 만나고 있다. 일연은 그런 원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광을 신라의 원광으로 고스란히 그려낸 이 대목을 읽는 일이란 참으로 신난다.

일연은, 이미 13세기에, 이 땅에 뿌리내린 불교의 모습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이였다고 보아 무방하리라. (521)

 

 

세속오계는 다분히 유교의 삼강오륜에서 오륜과 닮아있다. 원광이 승려이기에 앞서 유학을 공부했던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세속오계가 그저 오륜을 베낀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일상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범위의 불교의 계율이 잘 스며들어 있다. 처음에 귀산과 추항이라는 사람이 원광을 찾아왔을 때 원광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남의 신하가 된 몸’이란 곧 현실 정치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임을 가리킨다. 그들이 승려와 똑같은 계를 지니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어렵다는 점을 원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속 깊은 배려다. (521-522)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보이더라도 부분만 보인다. 그가 그린 어느 한 부분만 보이고, 그가 한 말의 어느 한 부분만 들린다.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530)

 

「의해」편에서 원효의 전기를 쓰며 지은 제목원효불기(元曉佛紀)’를 풀어보면 그렇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본문을 시작하는 첫머리에 원효를 관형(冠形)하기를성사(聖師)’라 한 것이다. 같은 「의해」편에서 일연은 의상에게 법사(法師)라 하고, 자장에게 율사(律師)라 했다. 세 분은 신라 불교를 대표한다. 일연이 그런 세분을 평가하는 첫마디는 그들의 이름 앞에 붙인 관형어에서 들을 수 있다.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 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 뜻일까?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 할까? (530~531)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531-533)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배우들이 노는 도구란 일반 민중들에게 익숙하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니, 거기에 빌려 어려운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고,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537)

 

"시인은 소상이 있는 분황사를 찾아 왔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낳은 아들 설총이 죽은 아비의 유해를 부수어 만들었다는 그 소상이 앞이다. 문득, 거추장스런 교의(敎儀현)의 탈을 벗어 버리고, 하늘을 괼 아들을 얻으려 세속의 인연도 마다 않은 원효의 큰 뜻을 생각하는데, 아들 설총마저 아비 따라가 버린 분황사는 문만 굳게 닫았을 뿐 이젠 아무도 없다. 오직 그들을 추억하는 시인만이 서있을 뿐이다.

현실과 역사를 관조하는 일연의 태도가 드러나 보인다. 인생의 제무상(諸無常)은 원효라고 다를 수 없다. 그들의 치열했던 한 시대를 생각하는 시인의 심상은 비관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숙명으로 수놓아진다.“ (548)

 

의상, 화엄의 마루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551)

 

그러나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송고승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의상은 그런 사람이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552)

 

국난을 구하고, 부석사 같은 큰절을 지으며 화엄종을 전한 의상의 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불도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이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법사란 말속에는 의상의 교조적 신앙태도가 함의된다. (568)

 

일연이 그를 찬한 시에서무성한 꽃들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 똑같은 봄이로다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무성한 꽃들이란 화엄의 세계를 말한다. 지상사사 있는 종남산이나 부석사가 있는 태백산이나, 의상의 전교로 인해 같은 화엄의 세계가 펼쳐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568)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화보다 저 세상의 부귀를 더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지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그렇지만 거기라고 사람 사는 세상인 바에야 왜 호사를 바라지 않고 다툼이 없겠는가 의문스러워 해본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목적으로 혹시 그렇게 길들여 놓지나 않았을까? (569~570)

 

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벼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571)

 

(인도 라다크, 김수남 사진)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인도와 중국을 히말라야가 가로막고 있고, 중국에서 파밀고원을 거쳐 인도로 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 라다크 지방이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로 들어왔던 혜초도 이 곳을 거처 파밀고원을 넘어 당나라로 돌아갔다. (573)

깨침과 배움을 위해 그 길을 걷는구나, 뼈 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고통 속을 걷는구나. 그 길에 서는 구나. 존경이란 말이 궁색하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지장보살은 누구인가? 지장은 대지의 태, 곧 땅 속에 묻어 있는 어떤 것이다. 땅이 지닌 덕을 의인화하였다고도 하는데, 지장보살은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과 함께, 죽은 이들의 구제자가 된다. 특히 죽은 이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는 이 보살에게 빌어야 한다. 지금도 절에 가면 명부전이라는 불당이 있는데 거기서 바로 이 지장보살을 주불로 삼는다. (587)

 

‘삼베를 붙들고 황금을 버린다’는 말은 <중아함경>에 나오는 비유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길가에 삼이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 캐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은이 널려 있었다. 한 사람은 삼베를 버리고 은으로 바꾸어 들었다. 또 가다 보니 금이 널려 있자. 은을 들고 있던 사람은 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처음의 삼베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들고 돌아왔다. 좋은 것을 보고도 취하지 않는 바보스런 사람을 비유한 이야기다. (590)

삼베에 뜻을 둔 사람은 중간에 더 좋은 무엇을 보더라도 삼세를 고집해야 하는 것일까?

얼핏 어떤 개념과 상충되는 느낌이다.

 

일연이 그랬던 것처럼 진표에게도 불심과 효심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으리라. [596]

 

 

---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승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인생의 번뇌와 그 번뇌 속에서 시달리는 세속의 인간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가는 그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

시구렁창 같은 세속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그러기에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결별이면서도 오히려 슬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 (603)

 

다만 더 극적이어서 가치가 높다는 말은 아니다. 평범함 속에서도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깨달은 무상의 존자(尊者)들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의 출가자들 속에 연면히 내려오는 출가의 동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 동기 하나로 깨달음은 단박에 몰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604)

 

현교는 드러난 불교, 밀교는 숨어있는 불교랄까, 누구나 쉽게 보이는 세계 속의 불교가 현교라면 깊이 숨어 은미한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가 밀교일 것이다. 어쨌건 밀교는 현교 곧 일반적인 불교의 세계를 거쳐 최후에 이르는 세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일반적인 불교를 포함하면서 거기에 넘어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605)

 

다만 여기 단 한 번 나오는 지은이 이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의 저자를 일연으로 비정(批正)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이 책의 저자를 찾는 데 무척 애먹었을 것이다. 다른 역사 사료뿐만 아니라 일연의 생애를 기록한 비문에도 이 책의 이름은 나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이렇게 버림받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의 눈 밝은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607)

 

일연의 혜통에 대한 평가는 극진하다. “이제 화상이 무외를 제대로 배워와, 속세를 두루 돌며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교화시킴은 물론 운명을 보는 밝음으로 절을 지어 원망을 씻어 주니, 밀교의 바람이 여기에서 크게 떨쳤다는 논평은 물론이려니와,

산 복숭아 시냇가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 오솔길에 봄이 깊자 양쪽 언덕에 꽃이 피었네

그대가 우연히 수달을 잡았던 인연으로/ 나쁜 용은 서울 밖으로 멀리 쫓게 되었네

라는 찬은, 뼈만 남은 수달이 제 새끼 있는 곳으로 가 있는 것을 보고 출가한 혜통의 인생에 불교가 어떻게 심어져 있는지 보여 주고, 살구 꽃 같은 그의 생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찬미하고 있다. (616)

 

앞서 진표(眞表)나 심지(心地) 같은 점찰승들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과 함께, 일연이 관심을 가진 불교 사상이 매우 넓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조선조에 들어와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한다.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나선 조선조의 정치 이념에 따라 한국의 불교사는 잠시 주춤한다. 그런데 이 때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족이 밀교나 점찰법회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연도 이 같은 부류로 나눠지고, 그에 따라 일연에 대한 관심이나 사적이 인멸되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이다. (620)

 

 

---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삼국유사의 9개 편 중에 일곱 번째인 <감통>편은 기본적으로 <의해>편과 성격이 비슷하다. ‘감통이라는 용어도 중국의 고승전에 나오지만, 승려들이나 불교신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데에서 그렇다. 다만 여기 나오는 승려나 신도들은 고승(高僧)이라기보다 다소 평범한 사람들이다. 더러 고승의 반열에 올릴 만한 승려도 전기로서 엮어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감통>편의 이야기들은 신라 사회가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 민간 대중들에게까지 얼마만큼 체화(體化)되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621)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불쌍한 어린 아이에게 베푼 덕이 곧 내게 해준 일이라고,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에게 말한다. 아마도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위로하자는 차원의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 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 (623)

 

미륵 신앙과 대칭되는 점에 서 있는 미타 신앙의 정토왕생 신앙은, 현세에 복락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내세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마음의 소산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실 정토 신앙은 번성기의 유복한 사람들에게 퍼지게 마련이다. (625)

 

그러니까 미타 신앙에도 미륵 신앙에도 여러 부면이 있거니와, 그 가운데 뚜렷이 보이는 특징을 하나로 정리하자면, 전자가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에, 후자가 혼란한 시기의 고통 받는 층에 왕성히 퍼져나간다는 정도로 이해해 두자. (625)

 

밤 깊은 시간에야 겨우 제 일을 마치고, 곤한 몸을 이끌고 밤길을 걷는 한 여자가 여기 있다. 게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 (627)

이 책에서 소개한 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욱면'의 이야기이다. 욱면을 무엇을 빌었을까? 고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빌었을까? 해탈을 바랬을까? 그녀의 절실함이 그녀를 이끌었다는 이야기는 나를 위로한다. 그녀의 절실함을 나는 가졌는가. 일연의 노래가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하늘에서 내린 소리 부처를 이루게 했네

손바닥을 줄로 꿰어 육신을 잊었으니.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627)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약속한 바가 있었다. 광덕이 그 약속을 지키는 사이 엄장은 한눈을 팔았다. 아미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기야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과 현실의 삶에 고단하게 매인 사람은 마지막의 자리가 서로 멀다.★★★★★★ 그러나 엄장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내였다, 늦게나마 생각을 바꾸고 성실히 수행하여 마침내는 친구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적과 엄장의 성불은 한결같이 여자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앞서 소개한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서처럼 위 예의 여자도 관음보살의 현신이다. (632)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 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회한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엄장은 원효 스님에게 달려가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가르침을 물었다고 한다. (633)

 

이 조의 본문과 찬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계일 것이다, 절의 재산을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게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636)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절이 산에 만들어진 것은 이 나라 불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있었던 일이다. 특히 조선왕조 이후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사람이 사는 마을의 절들은 자꾸 없어지고 산에만 남게 되어, 이제는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처럼 보인다. 산에 절을 두니 그 산을 지키는 신령도 모신다. 그런 까닭으로 절과 호랑이는 한 살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637)

 

불교가 토착화되면서 민간 신앙의 큰 줄기인 산신 신앙을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절 안에도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 생기게 된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산신각에는 산신뿐만 아니라 칠성신, 용왕신 등을 같이 모시기도 한다. (641)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를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화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을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이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성인을 만나는 가? 의상 스님과 같이 치밀하고 정성스런 사람이 만날 것이며 효소왕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가에서 외치듯이 기도하는 무리들을 보고 예수님을 말한다. "하늘 나라에 이르거든 하느님은 저들을 결코 모른다 할 것 이다." 그리고 첨언하지 않았는가, 골방에 숨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에게 하느님은 다가올 것이라고. (656)

 

진신은 달빛처럼 이 땅에 찾아왔었다. 그러나 정토에의 참된 희구는 없고, 형식과 의례에만 치우친 무리들뿐이니, 그들은 밝은 달빛을 가리우는 구름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663)

 

사실 고려는 기본적인 국가 체계를 유학의 이념에 두었다고 해야 한다. 불교의 권위는 여전했으되 신라만큼 그렇게 철저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사회의 종교는 오히려 더 타락하기 쉽다. 헛된 권위만 살았을 뿐 책임의식이 없으므로 자기에게 좋은 것만 택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았다. (670)

 

 

--- 피은(避隱)

 

숨어사는 이의 멋

‘피은’은 피세은거(避世隱居), 즉 세상은 떠나 숨어 사는 것이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671)

 

산지가람과 평지가람의 공존에서 산지가람 일변도로, 이것은 불교가 사회의 전면에 있느냐 배경으로 밀리느냐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672)

 

p.67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672)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674)

나는 그러지 아니한가?

 

관기와 도성이라 이름한 두 스님은 다소 설화적인 인물이지만, 숨어 산다면 바로 이런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그런 이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누린 즐거움이랄까를, 일연은 부러운 듯 그리고 있다. (678)

 

"내가 일찍이 포산에 머물며 그 분들의 남기신 아름다움을 적어 놓았었다. 이제 여기 함께 적는다."는 말을 남긴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술 원리를 말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다. 일연은 아직 젊은 시절부터, 자기가 머문 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꼼꼼히 메모해 두었던 듯하다. 이것이 <삼국유사> 찬술의 재료가 되었는데, 여기서 그 결정적인 증거를 보게 된다. (682)

 

변재천녀는 불교에서 보이는 최고의 여신이다. 인도의 전통적인 여신이지만 불교에 들어와서 사람의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비파를 오른손으로 퉁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686)

 

 

---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일연의 나이는 79세였다. 어머니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아들을 보았다는데, 일연이 여덟 살 나던 해 산으로 공부하러 떠났으니, 어머니는 무려 스물다섯 살부터 돌아가시기까지 70여 년을 홀로 사신 분이다. 일연의 아버지는 이름만 나올 뿐이요, 다른 형제에 대해서 일체 아무런 기록이 없어, 어머니의 일생은 외롭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그 자체다.  (690)

 

대성이라는 아이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집에 종살이로 팔려가는 신세였다. 성도 가지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다. 그런 그의 아픈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점개 스님의 축원이었다.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받는다는 축원은 시주 받은 승려가 해줄 답례일지 모르고, 지금 잘 살고 있는 주인집으로서야 그 부가 자손만대 이어지기를 바라는 정도이겠지만, 대성으로서는 그 이상 절박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696)

 

복을 빌어 받되 받은 다음에는 제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699)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701)

 

삼뇌는 소, , 돼지를 일컫는다. 칠정은 일곱 개의 솥에다 각각 음식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이 둘을 합치면 그지없는 진수성찬이다. 그런 진수성찬으로 대접을 받은들, 아들이 수련에 들어 도에 이르는 것만 못하다는 어머니의 확고한 신념과, 남의 집 문 앞에서 걸식을 해도 좋다는 각오, 그것이 진정을 진정이게 했다.

어쩌면 참된 효도가 무엇이겠냐는 일연의 질문을 담고 있는 진정의 이야기는, 여덟 살에 어머니 곁을 떠나, 그 어머니가 70년을 홀로 사시도록 이 세상에서는 외롭게만 해 드렸던 자신의 삶에 대한 답변이지 않았을까? (703)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표기 수단이 외연적 현상이라면 문제 안에 내포된 은밀한 논리가 있다. 무엇을 그토록 표현하고 싶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 하였는가? 한문이라는 고급 언어 수단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란 무엇인가? 한문이 어렵다지만 배우면 그만이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 정서, 이것을 담아 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 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제망매가>,<원왕생가> 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706)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 신라시대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화랑 밖에 없다. 다만 같은 화랑 출신이라 해도 관계에 나가 화려하게 출세한 이들은 여기서 제외되며, 현세에서 박탈된 사람들이 시인이 된다. 그들은 그 박탈감 속에서 오히려 현세 이상의 어떤 것을 보고 노래하는 것이다. (710)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712)

 

노동요는 일할 때 부르는 민요다. 힘든 일을 하다 지치고 괴로울 때 부르는 노래는 위안을 준다. 더욱이 함께 힘을 모아 부르다 보면 박자에 맞추어 행동이 통일되니 힘이 덜 든다. 양지 스님은 그 같은 노래의 효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온 백성들이 힘을 모아 벌이는 사업은 곧 즐거운 잔치로 변한다. 거기에 양지는 당대 불교가 추구한 이념을 자연스레 녹아 들게 하였다. 서방정토를 간절히 바라는 이생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공덕을 쌓아 나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태어난 일 자체가 설움, 우리는 그 운명의 짐을 저버리지 못한다. (714)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725)

 

우리는 일연을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 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 사상으로 이었으며, 만년에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 (728)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선승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한마디로 파탄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앞에서 요약한 13세기의 시대 상황을 다시 떠올리건대, 나라의 체모는 흐트러지고 백성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거니와, 그것은 한두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모든 기존의 질서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무너져 버린 다음이었다. 새롭게 서야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것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733)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741)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의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741)

 

 

3. 내가 저자라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전체 5 2책으로 되어 있고, 모두 9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대기로서 왕력(王歷), 준 역사서로서 기이(紀異),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편이다. <삼국유사>는 전통적인 역사 서술 방식을 취하기보다는 저자 일연에게 의미 있는 내용들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테두리로 분류되어 있는 말 그대로의 유사(遺事)이다.

 

더불어 고운기님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또한 일연의 <삼국유사>를 해제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독자적인 관점과 감성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을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저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고운기님의 개인적인 역사관과 각 인물에 대한 의견이 들어간 새로운 저술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편협하지 않고 딱딱하지 않아 받아들이기가 물 흐르는 듯하다.

 

그는 머리말에서 "나는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해 본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요리를 하기에는 방부제 친 통조림 보다 싱싱한 과일과 야채가 더 좋은 재료 아닌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삼국유사>는 시대마다 좋은 요리사를 만나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재료인지 모른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저자 고운기가 삼국유사의 온갖 재료를 맛있게 요리하여 우리에게 자신 있게 내어 보이는 맛이 깊은 음식 같다.

 

다만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삼국유사> 9 140개의 조목을 40개의 제목으로 분류하고 기술하고 있으며, 9편 중 <왕력>편은 다루지 않았으며, <기이>편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불교에 대한 부분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에 ‘향가’와 ‘일연’에 대한 항목을 가미함으로써 구성을 마무리하였다.

이는 원문에 대한 갈증이 나무를 보고 난 후 숲에 대한 갈증처럼 남는다. <사기열전>과 같이 전체적인 내용을 큰 틀로서 가져가면서 지금과 같이 저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까 생각해면서 내가 저자라면 이런 부분을 보완하여 도전 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좋은 점은 저자가 삼국유사의 현장을 일연의 길을 쫓아가는 것처럼 답사하여 생생하게 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 작가 '양진'과 함께 하여 역사적 현장을 아름답게 전달함으로써 보고 느낀 것을 2~3배 더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당장이라도 나 또한 그의 자취를 따라 기행하고 싶은 마음이다.

 

[기타] 찾아 본 어의들

* 길항(拮抗) : 서로 버티어 대항함.

* 감발(感發) : 감동하여 분발함

* 각고면려 : 어떤 일에 고생을 무릎쓰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무척 애를 쓰면서 부지런히 노력함.

  () 오늘의 영광은 각고면려의 결과이다. 

* 고장난명(孤掌難鳴) : 외손뼉은 울릴 수 없다는 뜻으로, 혼자서는 일을 이루지 못하거나, 맞서는 사람이 없으면 싸움이 되지 않음을 일컫는 한자성어.

* 범박(汎博) : 구체적()이지 못하고 대강 두루 걸친 범위()가 넓음

  ()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 무애(無礙) : 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

  ()그는 계율의 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광활한 무애의 대승 세계를 살고 있는 자유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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