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강훈
  • 조회 수 216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1년 5월 23일 04시 14분 등록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첫 번째 읽기에서 적지 않은 양을 발췌하였다. 하지만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앞에서 마음을 두고 머무르는 시간은 부족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별표 달면서 눈을 머물게 했던, 내 안에서 공명하였던 글귀에 충분한 마음을 준다. 책을 내 곁에 오래 두고 한참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의 생각들을 쫓아 마음 속의 그림자들을 드러나게 해본다.

 

1.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거기에는 정녕 안위와 감고의 어느 한 쪽이 아닌, 슬픔과 기쁨의 정반합으로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 합일의 세계가 있다. / 내게도 닥쳤던 안위(安危)와 감고(甘苦)의 세월을 곱씹는 동안 세상 보는 눈이 조금 열렸고, 그 때문에 내 혁명가의 화두 또한 보이기 시작했기에 그렇다. 혁명가는 그 스스로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속에서 도리어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를 찾아 뒷사람에게 남겨 주는 것 같다. (머릿말)

 

세상에 홀로 생겨나는 것은 없다. 빛은 그림자와 함께 태어나며, 진정한 기쁨은 낙망 속에서 싹튼다. 이런 위안이 있기에 나는 나의 길을 노래할 수 있다. 앞서 간 사람들의 안위가 교차하고 감고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볼 수 없었다면 해질 녘에 문득문득 드는 외롭고 두려운 마음을 나는 견디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앞서 간 사람들이란 역사 위에도 있지만 나의 주위에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2.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료되어 화두의 열 배 스무 배 말을 쏟아 놓았건만, 이제 다시 내가 고쳐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머릿말)

 

내가 단기에 목표하고 있는 책에 대해 생각을 미치게 한다. 이미 많은 책들을 통해 삶의 이야기들이 적나라한 이때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야 하는 것일까? 흉내 냄이 아닌 세상에 빛을 더하는 나의 이야기는 무엇이 될까?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눈길을 멈추게 하고 그래서 그 안에 어떤 가치와 공명하여 그를 조금은 덜 외롭게 만들 수 있다면 나의 글을 글다운 것이리라.

스스로 대견하다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을 예전에는 해보지 못했으니. 글을 쓸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어떤 글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오늘 나의 모습에 스스로 다독여 응원한다.

 

3.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23)

 

내가 글을 씀에 이런 것은 없는가? 그저 이차, 삼차가공 하는 독자성이 결여된 그저 그런 평범한 감상을 늘어놓는 투덜거림 같은 글이 아닌가. 나에게 본질은 무엇이어야 할까,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나를 잃어버리는 실종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

볼품도 중요하지만 진품 같은 글을 세우고 싶다.

 

4.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웠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24)

 

모든 변화는 여태껏 있어온 어떤 것의 끝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는 있어온 것의 끝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나는 나의 신화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사부님의 칼럼에서 이런 글을 인용했다. "하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새로운 균형이 시작된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구태의 질서를 부시고, 버려야 한다. 마음은 변하고자 하면서 사고의 체계, 몸과 마음의 습관은 여전히 구태의 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돌아보고 챙겨야겠다. 환골탈태 하는 것.

 

5.

해와 달은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 없듯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 없는 물건이 된다. 그러나 빛이 있다고 다 보는가? '눈 뜬 소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98) /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100)

 

그러나 그 같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진자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에 씌운 아상(我相)은 그토록 완고한 법이다. (147)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149)

 

최근에 유명 배우의 대사에서 언급된 '엘리스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대상이 실제보다 크거나 작게 혹은 가깝거나 멀게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는 병이라고 한다. 대상이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병이니 증후군이니 하는 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과연 우리는 자신은 제대로 삶을 생을 보고 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나는 연구원 과정을 통해서 좋은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50주가 지나면 나의 눈이 개안되어 삶의 진실을 보는데 한 걸음 나아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6.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돈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120)

 

큰 강처럼 흐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램은 비단 나만의 바램은 아닐 것이다. 아침에 목이 좋지 않아 홍삼차를 준비하면서 차의 분말을 몇 개를 넣을까를 생각하다가 너무 많이 넣으면 잘 녹지 않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릇 속에 있는 물이 담을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다. 나는 작은 찻잔 속의 물처럼 갇혀 있는 물은 아닌가. 그리고 많은 담으려는 욕심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받아들이고 담으려면 최소한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 큰 강이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먼저 흘러야 한다. 두려워 하지 않고 가고자 하는 길로 흘러야 한다. 흘러서 큰 강을 만나거든 그곳에 내어 맡김도 필요하다. 그렇게 관계라는 것을 거쳐서 나를 섞이게 하면 큰 강이 내가 되는 것이고, 내가 큰 강도 되는 것이다. 흐르자. 담겨있지 말자.

 

7.

자줏빛 바위 가에 /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6)

 

시를 접하니 사랑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하고 싶다는 바램은 일상에서 사랑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내를 생각해본다. 사랑을 생각해본다. 설레는 사랑은 어디에서 찾는 것일까. 노인의 설레는 마음은 그의 마음에 핀 꽃이겠구나. 여인이 꺾어서 갖고 싶은 꽃은 바위 위의 꽃이지만 노인이 받친 꽃은 그의 마음에 핀 꽃이겠구나.

 

8.

기미(機微)를 보아 사리(事理)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286)

 

위기와 실패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종종 인용하는 것이 '하인리히 법칙'이다. 1개의 치명적인 실패가 발생하기 전에는 원인이 같은 29개의 작은 실패와 300여 가지의 이상 징후가 앞서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보험 통계와 관련하여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발견한 법칙이라고 하고, 이것을 1:29:300 법칙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눈길 주지 않고 마음 쓰지 않은 곳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이 나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29개의 작은 실패들 300여 가지의 눈치채지 못할 징후들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볼 일이다.

 

9.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327)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오월의 날씨는 생동감이 넘친다. 나는 늘 머뭇거림이 많다. 이것 저것 생각하는 것이 많이 때문이다. 내 마음도 확인해야 하고, 나를 상대하고 있을 누군가의 마음도 짚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분명이 알고 있다는 확신으로 걷고 웃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책 없이 매력을 느낀다. 얼굴이 구겨지도록 웃음을 웃는 사람들, 음정이 고르지 못한 노래를 열성적으로 부르는 사람들, 오월의 날씨처럼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이 부럽다. 좀더 생동감 있게 맹랑하게 사는 삶을 꿈꾼다.

 

10.

다만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옮겨다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機制)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삼국유사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 (392)

 

있는 그대로를 적어보는 것,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 하지만 같은 것에도 왜?하고 묻는다면 모든 것이 신비롭고 놀랍다. 보이는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면 사실 이상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가 보다.

귀가 없이 음악을 했던 베에토벤, 눈을 감고 글을 쓴 실낙원의 작가 밀튼 그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은 것을 생각과 느낌으로 이룩해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 사실 이상 이상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생각은 깊고 밝아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많이 아둔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나의 직업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다. 많이 묻고 생각하여 그것을 자신 있게 나눌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사실 이상의 사실을 완성하는 글을 꿈꿔본다.

 

11.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나으네 /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고깃배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나타나는데, 시초는 그처럼 신비롭고 엄숙했다는 시적 표현이면서, 놀라서 나는 갈매기와 왜가리는 거기로부터 터져 나오는 돈오(頓悟)와도 같다. 상승과 하강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일연은 그것을 봄빛이 완연한 압록강이며, 고기 잡는 배를 빌려 타고 건넜다고 노래한다. 물론 상상이다. 이 같은 시적 상상은 그 선연한 형상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사실 이상의 사실 어디로 데려가고 있다.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 된 장사꾼들의 잰 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 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394]

 

나의 걸음은 조급한 걸음이다. 내가 가는 길은 먼 길이지만 마음이 조급한 것이다. 그런 욕심 탓에 열심히 발을 놀려도 한없이 제자리 걸음을 걷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천천히 가는 길처럼 조급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문득 날아오르는 갈매기와 왜가리의 돈오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12.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도다.” (405)

 

"여러분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활기찬 인생을 사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삶, 그리고 작품활동은 필연입니다. 마치 동물처럼 다른 생각 하나 없이 오직 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선택은 없습니다. 동물이 일체의 속임수나 야망 없이 먹고 마시고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열정과 기질>에서 마샤 그레이엄의 말이 생각난다. 자기의 길을 아는 것, 그리고 그 길 이외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13.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417)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마음으로 뭔가를 헤아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나와 너의 분리가 아닌 합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런 것은 머리의 이해로는 불가한 것이리라. 무엇이 이것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3월 경주 여행을 돌아본다. 합일의 전제는 이해가 아닌가 생각하고, 더불어 이해한다는 것은 또다시 안다는 것과 열린 마음을 전제로 한다는 느낌이다. 제대로 느끼려면 이해하여야 하고, 나를 열어서 내어 맡기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유언장을 읽었던 공감의 순간, 그 시간의 장과 같은 것이리라.

 

14.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444)

 

편견과 정견. 사람이 좋은 정견을 가지려면 우리의 아상(我相)이 가지고 있는 수 많은 편견을 버려야 할 것이다. 수 많은 편견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을 해보지만 떠오르는 건 많지 않다. 좋은 정견을 가진 책과 스승을 통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수 밖에는 없다. 자기의 편견을 떠나 정견을 가지고 직관하면 일체의 사물로부터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석가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이 그런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이렇다. 나는 일상에서 수 없이 많은 편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런 편견들이 내부에서 매우 공고히 자리하고 있다. 이것들은 매일 같이 어리석은 생각들을 되풀이 함으로써 내부의 근육처럼 그렇게 붙어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올바름이 그것들의 대극으로서 자리하겠지만 이것들을 약하게 하려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음이다.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과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동일한 길을 두고서 다른 두 개의 가방을 챙겨야 하는 듯이 어려운 길이다.

 

15.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454)

 

연구원 생활을 하기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쳤다. 내가 가는 길이 두려웠고 겁이 났다. 스스로에게 요구한 의지는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높은 산과 푸른 물이 용솟음 치다가 어느 순간 시커먼 물로 바뀌어 나를 삼키곤 했다.

요즘은 강물이 스스로 깊이를 만들고 유유히 흐르듯 그런 느낌이다.

공자는 배우고 익히면 한없이 기쁘고, 가르치고 친하면 한없이 즐겁고, 사귀고 믿으면 한없이 든든하다고 했다. 나는 요즘 배우고 익혀서 기쁘다. 돕고 도우니 즐겁고, 사귀어 믿으니 든든하다. 공자의 말씀이 요즘은 나의 생활이 되었다. 가히 행복하다 말할 수 있겠다. 배우는 자는 교만하지 않다고 했으나 행복하다고 스스로 교만해져 본다.

 

16.

내 마음 오늘 / 절에 가서 절을 한다

잎 한 장 만들어지는 동안 / 온기가 없어 차가운

오랜 그 옛 마룻바닥에 엎드려

일어난다 다시 쳐다본다 / 즐겁고 깨끗하고 늘 있는 나는

지난 봄이 사라진 숲 속에 / 가을의 마지막 시간 속에 / 덧없음만 항상하고 아름다워라

나 이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 새싹의 아픔으로 돌아가라고

잎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동안에도 / 모든 것 향해 절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오늘 / 절하며 간다

 

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化身),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하는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 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56~458)

 

행복에 이르는 길은 결국 내 마음 안의 길이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 완성이요, 자기 성취가 아닐까.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 그런 곳이 있으면 참 좋겠다. 그것이 장소이건, 사람이건, 꿈이건. 내 마음이 그곳, 그 사람, 그것에 가거나 이르면 내가 치유되는 대상 같은 것이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스승님이 있고, 동지가 있고, 아내와 아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의 나를 받아준다. 평가하지 아니하고, 크게 걱정하지 아니하고 응원해준다. 내 마음의 정처다. 든든하고 행복하다.

 

17.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으로 보살이 된다. (473)

 

책을 읽는 것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좋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더라도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더불어 안다고 해도 내 삶에서 그것이 실천으로서 녹아 들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부득과 박박의 이야기에서 나는 두 가지를 보았다. 하나는 성인을 알아보거나 삶의 오의를 깨칠 수 있는 지혜의 깊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삶의 지혜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다.

부득은 지혜라는 눈을 가졌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신에게 깊이 있게 받아들인 것이다.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 씀을 확인할 수 있다. (481)

 

18.

“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무척 남는다 해도, 옷과 밥이 생각하는 대로 이르러 저절로 배부르고 따스함만 같지 못할 것이요,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하나,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도를 이루려면 이만한 결단력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저절로 시켜서 된 것이지 억지가 끼여들 수 없다. (475)

 

깊이 생각하려면 깊이 숨어야 한다. 그것이 일상이 되었든 산속이 되었든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번잡함을 벗어나야 한다. 먼지 날리는 세상의 한가운데 코를 박고서는 깊이 생각할 수 없다. 깨침이 있을 수 없다.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깊이 가라 앉히고 천천히 보아야 한다. 그런 시간이 많아져야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것 같다. 나를 이탈하여 새로운 나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홀로 걸어가는 한 길을 선택하는 결단이 필요하리라.

 

19.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531-533)

 

현실이라는 미로를 회피하고 피안의 세계에 다다를 수는 없다. 현실이라는 미로는 얽히고 설켜있어서 그것이 고르디아스의 매듭과 같이 풀기 어렵다 해도 나에게도 세상에게도 알렉산더의 지혜가 없으리란 법은 없다. 그것이 다이달로스가 나에게 풀어 놓은 신기(神技)라 해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잡을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말란 법이 없다. 나를 믿고 그리고 나의 내부적 가치에 귀와 눈을 기우려 천천히 걸어가야 하리라.

 

20.

밤 깊은 시간에야 겨우 제 일을 마치고, 곤한 몸을 이끌고 밤길을 걷는 한 여자가 여기 있다. 게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627)

 

이 책에서 소개한 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욱면'의 이야기이다. 욱면을 무엇을 빌었을까? 고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빌었을까? 해탈을 바랬을까? 그녀의 절실함이 그녀를 이끌었다는 이야기는 나를 위로한다. 그녀의 절실함을 나는 가졌는가. 일연의 노래가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하늘에서 내린 소리 부처를 이루게 했네 / 손바닥을 줄로 꿰어 육신을 잊었으니."

 

욱면이 뛰어넘는 도약을 생각해본다. 그것을 그저 도약이라고 해도 되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마치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다시 나비가 되는 것처럼 정신의 성장이란 각 층계를 넘어갈 때마다 위험과 비약이 그칠 새가 없는 듯하다. 도약은 그저 매일 조금씩 한 계단을 오르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진보와 혁신의 차이 같은 것이 느껴진다. 혁신에는 더 큰 리스크가 있는 것처럼 나의 도약에서 위험과 고독과 비참이 있을 것이다. 그리 짐작된다.

 

하지만 욱면처럼 생명이 다시 전혀 다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위험과 비참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보다.

 

21.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약속한 바가 있었다. 광덕이 그 약속을 지키는 사이 엄장은 한눈을 팔았다. 아미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기야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과 현실의 삶에 고단하게 매인 사람은 마지막의 자리가 서로 멀다. 그러나 엄장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내였다, 늦게나마 생각을 바꾸고 성실히 수행하여 마침내는 친구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덕과 엄장의 성불은 한결같이 여자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앞서 소개한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서처럼 위 예의 여자도 관음보살의 현신이다. (632)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 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회한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엄장은 원효 스님에게 달려가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가르침을 물었다고 한다. (633)

 

삶에서 기댈 조력자가 있다는 것의 의미를 요즘 조금 알듯하다.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에서 미륵의 현신처럼 그런 배움이 있다는 것의 의미를 알 듯하다. 사부님을 보면서 가르침은 스스로 자란다는 말을 실감한다. 자기가 자라지 못하고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글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혹은 말을 통해서 누군가의 공감을 구하고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려면 나는 끊임없이 자라야 한다. 누군가의 삶에 조력자가 된다면 내 삶의 중요한 가치 하나를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계란이 병아리가 되듯이 놀라운 변화를 꿈꾼다. 이런 변화는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품 안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책과 스승, 동지와 배움을 통해서 나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이 한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도약이고 깨달음이고, 각성일 것이다.

 

2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672)

 

요즘 나의 시간에서는 산 길을 홀로 걸어가는 묵묵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조금은 고독하고, 힘이 들고, 그리고 정상에 올라가면 뭔가 탁 트여 보일 것 같은 직관을 기대한다. 산의 꼭대기에 오르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지금까지의 나를 이탈하여 새로운 나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홀로 걸어가는 한 길을 선택하는 결단 말고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었다. 산에 오르는 길 위에서 때로는 바람불고 비 오고 그래서 숨어있기도 하고 드러누워 잠도 자겠지만 내가 올라야 하는 곳은 멀리 있지만 조금씩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요즘에는 아주 까마득하지만 눈에 들어오는듯 하다. 그것도 진상인지 허상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23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674)

 

나는 그러지 아니한가? 천복을 생각하기에 앞서 명성이나 영광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나?

명성이니 영광이니 하는 것은 어떤 이룸의 뒤에 따라오는 것이지 선행하여 쫓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복으로서의 일을 생각하는가, 재물, 명성, 영광이라는 과실을 맺어 줄 어떤 과정을 생각하고 있는가. 선후가 뒤바뀌어 기쁨과 충만감이 사라자는 헛됨이 없도록 해야겠다.

글을 왜 쓰는가? 책을 왜 써야 하는가? 다시 한번 나의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나의 가치는 선후를 바꾸어 내 삶을 위태하게 할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내 안의 작고 희미한 길을 끊임없이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은 자기에게 부끄럽지 아니한 스스로에게 인정을 받는 삶이다. 남에게 인정을 받을지라도 자기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늘을 보고도 부끄럽지 아니하여 언제든지 마음 놓고 죽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세상인심에서 나를 떼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나로서 살다가 나로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부님의 글쓰기 방식이 생각난다.

 

 

3. 내가 저자라면( 번째 읽기)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가 나에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은 '우리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5월의 '두번 읽기' 책으로 선택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받았던 나의 뜻 모를 어떤 열등감을 다독이고,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받은 역사의 풍성함을 우리의 것으로 더욱 풍성하게 건네주고 있다.

 

국문학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 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연구한 그의 경 륜이 일연의 삼국유사를 만나서 새로운 빛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의 농밀한 지식과 국문학을 전공한 유려한 필체와 감성은 삼국유사를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유장한 서사시처럼 그려내고 있다.

 

내가 저자라면 고운기님에게 받은 이런 느낌의 역사 기행서를 써보고 싶다.

길 위에 역사가 있고, 그 역사에서 우리의 삶을 비추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그저 기록되어 전달되는 역사는 한 개인에게 아무런 감응을 불러들이지 못하지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처럼 현대와 역사를 엮어놓은 글은 역사에 대한 감응을 새롭게 한다.

역사는 과거이다. 그래서 다시 볼 수 없다. 하지만 좋은 글을 통해 다시 본듯한 기쁨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마치 차 한잔 마시면서 내가 만난 것처럼 느끼도록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의 현장은 오래되고 그저 나와 무관한 곳이라 생각하지만 좋은 글을 통해서 내가 역사에 참여하는 듯한 그래서 가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저자라면 내가 받은 감흥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그런 기행서를 써보고 싶은 것이다.

첫 번째 읽었을 때 역사의 이야기를 따라 나도 길을 나서고 싶다 생각했다.

이 책의 힘인 듯하다. 그 힘으로 <길 위에서 만나는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면 좋겠다는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 길에는 옛날 옛적의 길, 고구려의 길, 백제의 길, 신라의 길, 그리고 또 그 길 위에는 고려의 길이 있고 조선의 길이 있을 터이다.

그 길 위에서 좋은 생각과 역사가 조우하여 나의 삶을 비추고 누군가의 삶을 비추어 길 떠나게 하였으면 좋겠다.

IP *.69.251.20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글/ 양진 사진 세린 2012.09.11 2570
55 삼국유사 레몬 2012.09.11 2710
54 (우리가정말알아야할)삼국유사 -고운기- file [1] [1] 장재용 2012.09.11 5371
53 #19_우리가 알아야할 삼국유사, 고운기 서연 2012.09.11 2040
52 # 19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1] 샐리올리브 2012.09.11 3173
51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id: 깔리여신 2012.09.11 3001
50 #19. 삼국유사(일연 원저)_고운기_Review 한젤리타 2012.09.10 2220
49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두번읽기) 루미 2011.05.23 2559
» 08.<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_두번째> 고운기 강훈 2011.05.23 2161
47 8.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두 번 읽기 file 미선 2011.05.23 1922
46 [북리뷰 008]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두 번 읽기 file [1] 김경인 2011.05.22 4622
4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3] 루미 2011.05.09 2479
44 6th Review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북리뷰 file 사샤 2011.05.09 2550
43 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file 미선 2011.05.09 1893
42 [북리뷰 006]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김경인 2011.05.08 4381
41 [리뷰6] 우리가정말알아야할 삼국유사_고운기 file 양경수 2011.05.08 4208
40 0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file [2] 미나 2011.05.08 2666
39 06.<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file 강훈 2011.05.08 2013
38 북No.6 -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file 유재경 2011.05.07 4472
37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양진 미옥 2010.05.11 2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