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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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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9일 01시 59분 등록

  바람과 몸, 그리고 사랑이 들려준 이야기


리즈 길버트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자신에게 꼭 맞는 인생을 찾기 위해 1년간의 여행을 떠난다. 첫 번째 여행지인 이탈리아에서 그녀는 잘생긴 청년에게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푸짐하고 싱그러운 이탈리아 음식으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살찌운다. 그러나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를 맞아준 것은 잘생긴 청년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람이었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던가,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를 보듬어 준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고 돌아온 늦은 밤, 아씨시의 로제오 호텔 야외 테라스에서 우리는 각자의 사랑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달은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는데 바람은 가만히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들어 이야기 한 자락을 놓쳐도 상관없었다. 바람이 내 귓가에 속삭여주니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보석함 속의 보석처럼 반짝인다. 가끔 꺼내보면 아스라한 추억에 가슴이 설렌다. 사랑이야기를 하면서 누군가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또 누군가는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자 다짐했다. 베로나 줄리엣의 집 담벽에 쓰여진 수많은 사랑의 낙서들을 떠올랐다. 그렇게 사랑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씩의 이야깃거리를 선물한다. 그 날 밤, 내 마음 속에서 손톱만한 사랑의 불씨가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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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수많은 을 만났다. 그림에서, 조각에서 꿈틀거리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며 감탄했다. 윌 듀랜트의 <철학이야기>에서 쇼펜하우어가 결국 남자가 여자보다 육체는 훨씬 아름다우므로라고 말했을 때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곳에서 나는 보았다. 진정 아름다운 남성의 육체가 무엇인지. 누군가의 말대로 조각과 그림의 몸은 이데아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육체들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곤 생각했다. ‘그래, 내게도 몸이 있었지. 내가 가진 몸 말이야어느 순간 내 몸은 짐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는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이젠 알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했으니 몸이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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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까의 성곽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바람이 세차게 몰려와 내 몸을 관통한다. 마치 몸 속 세포 하나하나에 바람이 닿는 듯 하다. 바람의 말소리가 들린다. ‘바보야,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하면서 산 거니?’ 지금껏 여행을 많이 하지도 못했지만 여행을 하면서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도 돌아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몸은 현재에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머물렀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 순간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있어야 할 자리, 그것을 잘 기억해 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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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 델 라고 푸치니 페스티발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를 마주하고 앉는다. 조상 여인들이 외국의 침략 때 겪은 수모를 떨치지 못하여 남자에 원한을 갖고 결혼을 거부하는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목숨을 건 도전을 하는 몰락한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 공주는 눈물은 흘리며 말한다. “이제 나의 영광은 끝났어칼라프가 말한다. “우리의 영광은 이제 시작이오당신이 이겼으니 이곳을 떠나달라고 애원하는 공주, 왕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내 이름은 칼라프!” 하지만 공주의 차가운 마음은 녹아 내리고 없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주가 외친다. “그의 이름은 사랑얼음같이 차갑게 원한에 맺혀있던 그녀가 드디어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오페라를 보면서 간간히 졸았다. 달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두둥실 떠올랐고 바람은 살금살금 내 몸을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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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퀘테레의 다섯 마을 중 하나인 리오마조레. 라스페치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고가도로와 기찻길, 알록달록한 집과 푸른 바다가 제법 예쁜 풍광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사랑의 샛길(Via dell’ Amore)’이 있다. 리오마조레로부터 이웃 마을인 마나로라를 묶는 해안 산책길에 두 남녀가 입을 맞대고 있는 이 길의 표지판이 보인다. 그리고 연인이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스팟도 마련되어 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보이는 연인이 사람들의 키스환호에 수줍게 입을 맞춘다. 사랑은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 소풍의 단골 레파토리인 보물찾기처럼 여행지의 곳곳에 각각의 얼굴로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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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내 아침이면 설렘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절대 감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 했던가? 가만 있어도 슬금슬금 웃음이 삐쳐 나왔다. 그것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예전의 내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제야 나는 스승이 왜 이 여행 내내 사랑이야기를 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설레기 위해 여행을 한다. 여행은 일상에서는 갖기 힘든 설렘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가슴 설레는 아침을 맞은 적이 언제였던가? 사랑을 하면 설렌다. 가슴이 설렌다면 당신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사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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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돌아와 곤한 몸을 누이고 일어나니 새벽 2시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명료해진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본다. 아오이가 말한다. “피렌체 대성당은 연인을 위한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언젠가 함께 가 줄 거지?” 토요일 이른 아침 올랐던 피렌체 대성당의 돌계단과 정상에서 보았던 피렌체의 아름다운 풍광이 떠오른다. 그곳에도 베로나 줄리엣의 집에서 보았던 수많은 사랑의 낙서들이 있었다. 1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그들은 그 곳에서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한다. 영화 속 대사처럼 자신이 머물 곳은 누군가의 가슴 속 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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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 냉정과 열정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냉정한 얼음 공주 투란도트의 마음을 녹인 그것, 외로움으로 차가워진 아오이의 마음의 문을 연 그것, 그리고 목숨을 바쳐 뜨거운 하나가 되고자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 친퀘테레의 수줍은 연인을 입맞추게 한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나는 그 동안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어디쯤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까?


이탈리아에서 바람과 몸, 그리고 사랑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야 할 내 세상 하나, 내가 가야 할 내 길 하나를 생각해본다. 그리곤 씩 웃는다. 아직도 마음이 설레고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으니 나는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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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143.15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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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02:02:53 *.75.194.69
언니 몇몇 사진들이 깨져서 보이네요 저에게만 그런건가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 
사랑을 되찾은 웨버님의 돌체비타를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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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2011.08.19 02:12:52 *.143.156.74
수정했어.
사진 넣기 정말 힘들다. ㅠㅠ
근데 너랑 나랑 아직까지 안 자고 뭐 하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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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희
2011.08.19 07:24:30 *.105.125.156
여행 잘 다녀 오셨는지요?
웨버님 노고 많으셨겠군요.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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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2011.08.19 09:51:35 *.143.156.74
네,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웨버가 아니라 재키가 되어 즐겼답니다.
여행이 정말 좋은 것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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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1.08.19 09:55:54 *.42.252.67
이태리에 다녀온 사람들이 모두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잠자고 있던 사랑의 씨앗에 불을 댕길만한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드니
당장 떠나고 싶은 걸......

냉전과 열정 책은 읽었는데 영화는 못 보았는데 재경이 글을 보니 당장
다운을 받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왜냐면 남자 주인공 얼굴이 마음이 드네....ㅋㅋ
이태리에서의 멋진 수업과  멋진 여행의  좋은 기운의  에너지로  연구원 후반부를
달릴 수 있는 충전이 가득되었으리라 믿어.
좋은 글과 사진으로 아침을 맞았다. 땡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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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2011.08.19 11:03:17 *.143.156.74
가끔씩 여행을 통해 사랑의 불을 당겨줘야할것 같아요.
내년 프랑스 플로방스 여행에 꼭 같이 가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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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8.19 10:43:05 *.142.255.23
와우.. 언니.. 사랑이란 테마로 글을 쓰니. 너무 좋다...

훔.. 왠지.. 나도 글을 다시 써야할 것 같다능..ㅋㅋㅋ.. (나 너무 대충 쓴것 같은.;;;)

이태리에서 느꼈던 바람과 곳곳에 숨겨져 있었던 사랑이 마구 느껴지는 것 같아요. 다시 내 몸이 반응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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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2011.08.19 11:01:35 *.143.156.74

미나야, 땡기면 하나 더 쓰렴.

나는 베로나와 볼로냐 더 쓰려고.

볼로냐 여행기의 제목은 '사부님 실종사건'이 어떨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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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8.19 12:00:17 *.163.164.178
와우. 여행이 재경이의 글 분위기를 확~~~~~~~~~~뒤집어 놓았네.
멋지다. GO! GO!
내년에도 취직하지 말고 계속 여행 댕겨라.
그리고 이런 글빨로 계속 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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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8.20 14:09:32 *.143.156.74
그러게요, 사랑에 빠져있으니 글도 새곰새곰하죠?
여행이 참 좋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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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1.08.19 13:38:24 *.237.209.28
여행은 마음의 공간을 늘려주는 시간,
공간이 넓어지면 자연히 재구성이 시작되죠.
 
여행이 해 놓은 작업을 스스로 감상하는 즐거움도
우피치의 걸작들과 소통하는 재미에 버금갈만큼 짜릿한 것 같아요.

훈이오빠 말씀대로
여행이 언니 글에 제대로 간을 해 놓았네요. 
감칠맛나게 익어가는 과정도, 또 그 맛도 알뜰히 감상해보고 싶습니다.

ㅋㅋ
글구 왠지 언니도 내년엔 취직을 거부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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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8.20 14:10:55 *.143.156.74
여행다녀오고 나니 정말 미옥 말대로 취직을 거부하고 싶어지네.
투자 노하우 좀 알려줘.
나도 1년 여행비랑 도우미 아줌마 수고료 등등만 있으면 계속 전업주부하고 싶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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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0 12:02:48 *.128.229.239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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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8.20 14:11:37 *.143.156.74
사부님 덕분에 마음 속에 사랑의 작은 불씨를 담아왔습니다.
저도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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