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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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늘 떠남을 전제로 하지요. 일상적인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로 떠남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기에 여행에는 늘 설레임이라는 단어가 함께 하는 듯 합니다. 새로운 장소에 간다는 약간의 두려움과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공존하는 그런 기분. 그건 아마도 우리에게 돌아올 자리가 있기에 더욱 잘 느껴지게 아닐까요? 돌아올 장소가 있는 떠남이기에, 돌아옴이 약속이 되어 있는 떠남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마음껏 들떠하고 행복해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얼마 되지 않은 여행을 즐기고자 우리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들을 충족시키기에 여념이 없었죠. 10일간을 하루 5시간도 못자고 진행되는 하루 에서도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을 빛나게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즐거운 일을 찾는 우리를 보며 우리의 인생이 이런 빛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표현처럼 이 세상에 소풍 나와 즐거운 인생을 만끽하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해보았어요. 인생이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보다 조금은 더 긴 하나의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말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베로나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희망의 목소리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저희들을 부른 사람들 역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던 거였어요. 그 황당함 속에서도 동지가 생겼다는 느낌이 얼마나 사람을 든든하게 하던지요. 둘이 아닌 넷이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은 아무런 방법도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그렇게 헤매고 있을 때에는 옆에 누군가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위로가 되는 듯합니다. 다음에 어딘가의 길에서 헤매고 있는 누군가를 보게 된다면 옆에 가만히라도 있어 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있어주는 것의 힘을 알게 되었거든요. 덕분에 저는 베로나의 프리마켓을 아마 잊지 못할 거예요. 거기서 언니들을 만나서 좋아했거든요. 그 황당함 속에서도 어떻게 어떻게 일행을 찾아낼 수 있어서 우리 언니들과 미나, 그리고 백산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참, 어딘가에서 길을 잃게 된다면 짜증과 걱정은 당분간은 금물이예요. 그것보다는 씩씩하게 움직여야 한답니다.
몬테풀치아노의 와이너리에서 우리는 매우 인상 깊은 여주인을 만났죠. 제법 나이가 든 시모나라는 여자였어요. 시모나는 와인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와인에 대해 설명하는 그녀의 얼굴이 어찌나 빛을 발하는지, 저는 점차 시모나에게 빠져들었어요. 시골의 농장의 여주인 시모나에게는 화려함과 우아함이 함께 존재해 있었습니다. 우리의 반응을 보며 환하게 미소짓는 시모나의 얼굴이 저에게는 당분간 잊혀지지 않을 듯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즐기는 사람의 환하고 강렬한 느낌이었죠. 왜 일을 해야하는지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 아마 당신도 시모나를 만나게 된다면 느낄 수 잇을 거예요. 그녀는 온몸으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고 있었거든요. 이탈리아의 와인을 보게 될 때마다 아니 와인을 만나게 될 때마다 저는 시모나를 떠올리게 될 것같아요. 그렇게 아름답게 나이들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우리는 광장에서 함께 노래를 하고 춤을 췄답니다. 상상이 되세요? 몇몇의 한국 사람들이 이탈리아 광장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가수나고요? 아니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죠. 노래와 춤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참, 성당 앞 계단에 앉아서는 인원 점검을 하고 아리랑을 함께 불렀지요. 모두가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냐구요? 저희를 바라보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았다구요. 하지만 그들의 시선을 느끼기에 우리의 짧은 여행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우리의 기분은 너무나 좋았어요. 그렇게 우리의 기분을 표현하며 저는 참 마음이 뭉클했는데 다른 분들을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그까짓거 그냥 마음 가는대로 움직이고 부르면 되더라구요, 그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맞게 부르는지 틀리게 부르는지. 평생 보지도 않을 사람들일 수도 있는데 그들이 그 장소에 있다고 해서 내가 내 흥을 못찾는 건 어쩌면 더 바보같을 수도 있지 않나요? 매일 그렇게 행동하는 생각을 한다면 조금 이상하겠지만 한번 씩 그런 경험을 가지는 것도 좋은 듯해요. 세상은 우리가 노래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잖아요.
아, 이 여행기를 쓰고 있자니 산 지미냐노에서 가장 빛났던 그녀가 떠오르는 군요. 그녀는 자유시간에 쇼핑한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타났는데 무슨 일인지 맨발이었어요. 약속 장소로 오다가 신발이 끊어져 버렸는데 그날 그녀의 쇼핑 품목에는 신발이 없었죠. 결국 그녀는 맨발로 버스까지 걸어가야 했답니다. 참 안쓰러운 이야기죠.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나의 즐거운 에피소드로 바꾼 건 그녀의 태도였답니다. 그녀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어요, 사람이 한치 앞을 모른다더니 자신이 그 짝이라며 이럴 줄 모르고 가방만 쇼핑해 왔다며 그 뜨거운 길을 깔깔거리며 걸어갔어요.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태도 때문에 웃을 수 있었죠. 사진기를 들이대는 동기에게 발을 가리키며 요염한 포즈를 취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태양과 잘 어울렸죠. 세상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는 재앙(?)이 일어나게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그건 받아들이기 나름인 듯 해요. 그녀가 깔깔거리며 맨발로 당당하게 걸어가자 그건 더 이상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 되었어요. 산 지미냐노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 풍경엔 항상 맨발로 환히 웃던 그녀의 모습이 함께 있을 듯 해요.
과연 이것뿐일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도 그림이 되고 작은 돌과 바람까지도 좋았던 여행이었습니다. 아마 천일야화는 안되더라도 십일야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을 듯 해요. 그러고 나서도 빼먹은 이야기들이 있다며 발을 동동 구를지도 모르죠.
저는 아마 이탈리아의 태양이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다는 지중해 인근에 있는 나라들은 여름이면 건조하기 때문에 청명한 날을 많이 가지게 되죠. 우리 여행 역시 거의 그런 날들로 구성되었어요. (첫날에는 보기 힘들다는 빗방울을 구경하며 300만원 짜리 비라는 우스갯소리도 늘어놓았지만요.) 눈부시도록 빛나는 태양아래 밝은 색을 가진 건물들과 알록달록한 여행객들이 붐비는 도시들을 아마 저는 잊기 힘들듯 합니다. 높고 뜨겁게 빛나는 해가 있었기에 빛나는 강이 흐르고 핑크빛 노을이 지고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 태양아래 서 있자니 제 몸과 마음속 그늘지고 어두운 부분들까지 모두 밀려나와 뽀송뽀송해진 기분입니다. 여름날의 잘 마른 빨래를 갤 때면 느껴지는 햇빛의 냄새가 저의 주변에도 나는 듯 하여 자꾸만 자꾸만 햇님의 얼굴을 보고 싶은 여행이었습니다. 그 냄새가 좋아서 자꾸만 코를 킁킁거리게 되는 여행이었습니다. 빛나는 태양을 보면 하늘을 보면 상쾌한 바람이 불면 아마도 이탈리아가 생각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