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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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77 -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집으로 돌아왔다. 한 주일을 건너 뛴 컬럼을 써야했다. 아무르 강가에서 별을 줍던 시인이 생각났다. 삶이라는 직업, 그가 코피를 흘리며 써 놓은 시를 읽어 내린다. <나의 플럭서스> 박정대.

[출처] 박정대 시인의 詩 5편 |작성자 마경덕
낯선 공항과 낯선 공기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삶
삶은 유동적인 것 끊임없이 출렁거려야 삶인 것
꿈꾸는 자들의 달력은 어느 해안가 해당화 속에서 피어나고 있나
구름 위를 지나본 사람들은 안다, 천국과 지상이 구름의 장막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구름 위를 지나 당도한 또 다른 행성에서의 삶,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안다
그대는 그대가 꿈꾸는 삶을 선택했는가 삶에 의해 선택되었는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척이는 세계의 모습, 그대와 나는 세계에 관련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그대가 꿈꿀 때마다 불어오는 세계의 숨결, 그대와 나는 세계의 가장 충분한 심장이다 삶이라는 직업을 그만둘 때까지
그대의 왼손을 나의 오른손이 잡고 걷고 있다
그대와 내가 이 세계를 걷고 있다
그것이 삶이다
플럭서스 플럭서스 움직이는 나의 사랑이다
* 플럭서스 (Fluxus) 라틴어로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의미함
아레죠(Arezzo)는 묘한 도시이다. 버스에서 내려 광장으로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교회가 있다. 이곳엔 매우 아름다운 제단화가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이다. <십자가의 전설>이라고 알려진 그의 프레스코화는 이미 색깔로도 우리를 아득한 그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성당 지하엔 엽서와 프란체스카의 그림책과 기념품들이 있었다.
교회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첼로의 현을 뜯으며 영어노래를 들려주는 거리의 뮤지션을 빙 둘러서서 음악을 즐겼다.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가 피아짜 그란데에 이르렀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남자 주인공이 아내와 마법같은 사랑을 시작하던 곳이다. 영화 포스터가 여기가 바로 그곳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연인들은 “본죠르노, 프린치페싸! 안녕, 나의 공주님!”을 크게 외치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본다.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도 아레죠 출신이다. 광장의 왼쪽 건물엔 바사리 회랑이 있고 아름다운 카페와 레스토랑이 훌륭한 조상의 영광을 요즈음 세상에 맞게 누리고 있다. 햇살이 따갑게 따라오는 언덕을 올라 페트라르카의 생가에 이르렀다. 그의 집 바로 앞에 웅장한 시립도서관이 있다. 건물 벽에 내다 조각해 둔 책과 인물과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다. 먼저 이곳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욕망은 잠재워야 했다. 우린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삼대 문필가,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이렇게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대의 서정시인 페트라르카에게 집중 조명을 하게 되는 순간이 왔다. 그의 옛집은 참 아늑했고 평화로웠다. 수많은 책들이 그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철학자에게 선물할 깃털 펜을 사고 노트도 사고 그림 엽서도 몇장 골랐다.
페트라르카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했으나 22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문학을 시작했다. 젊은 문학도로서 ‘폭식 수면 그리고 태만한 펜...빗나가던 내 젊디 젊은 시절..’ 을 살았다. 23살에 만난 유부녀 라우라는 영원한 연인으로 평생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아버지의 유산을 다 써버린 26세에 문학 활동에 필요한 자유와 여가를 갖기 위해 성직자가 되었으나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는 평생 부를 경멸했다. 그러나 부 자체보다는 부가 초래하는 노고와 근심과 구속을 혐오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32살이 되었을 때 스승이 건네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읽고 크게 깨닫게 된다. 그를 각성시킨 문장은 바로 이 글. “사람들은 높은 산 거센 파도 넓은 강 광대무변한 대양, 그리고 성좌의 운행을 보고 놀라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는다.”
그후 그는 “나는 내가 아는 어느 누구하고도 다르다”는 생각을 키워나가며 진정한 르네상스인으로 나아갔다. 34살에 사생아가 태어났고 그후 사생아들과 함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가서 홀로 문학연구에 전념해 4년 뒤에 계관 시인이 되었다. 48살에 연인 라우라와 많은 친구들이 페스트로 죽었다. 평생 가혹한 시대를 살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꼈던 페트라르카는 라틴어가 아닌 이태리어로 씌여진 366행의 <칸쵸니에레>라는 서정 시집을 남겼다. 그리고 고독한 자기와의 대화인 <나의 비밀>이라는 책을 써서 자기의 철학을 밝혀놓았다. 그는 시골생활을 찾아 이탈리아 각지를 방랑하다가 71세에 죽었다. 그가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루종일 달려서 해질녘에 목적지에 닿는다면....”
그리고 나에게 남겨준 말.
“행복은 외부로 향한 시선을 거두어 내면으로 돌리는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고 가꾸는 시간을 늘일 때, 내 안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아레쬬여, 페트라르카여, 끈임없이 출렁거리는 삶이여, 오늘은 이만 ...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