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 조회 수 1937
- 댓글 수 6
- 추천 수 0
내가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우리나라에는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마저 얻지 못한 채 사라져간 많은 선수와 코치들이 있었다. 나는 많은 면에서 부족했지만 26의 어린 나이에 대표팀을 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고 대부분의 선수와 코치가 얻지 못하는 교육과 훈련과 경험의 기회를 얻었었다. 비록 어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은 행운이며 축복이었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선수와 코치들의 아쉬움을 위로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쓰려고 했다. 그리고 성장하고 있는 선수와 지도자와 함께 작은 이야기나마 함께 나누고 싶었다. 우리가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은 이름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선수와 코치들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들의 삶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감사와 함께 간절히 소원한다.
1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두 가지 뿐이다.
길이 어디에도 없다고?
그렇다면 모든 곳이 길이다.
길은 사람이 가야 나느니
그 길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보이 않는 것 뿐이다.
1994년말, 대만에서 귀국해서 대표팀에 합류해 최종적으로 선발된 선수 4 명의 신상기록을 훑어보고는 책상 위에 툭 내려 놓았다. 그들 모두가 다 스포츠과학연구원의 우수 펜싱 선수의 기본조건에 대한 평가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 세계무대에서 여자에뻬의 평균 신장은 175센티미터가 훨씬 넘는다. 그러나 이들의 평균신장은 165센티미터에도 못 미친다. 가장 키가 큰 선수가 170을 넘지 못했고 둘은 160도 채 되지 않는다.
네 선수 중에서 그나마 국제 시합의 경험이 있는 선수가 두 명이 있고 나머지 둘은 국제시합 경험도 없었다. 여자에뻬 대표팀의 경험이란 미천한 것이었다. 그 동안 올림픽 종목이 아니었던 탓에 아시안 게임을 제외하고는 태능선수촌에서 장기합숙훈련을 하지 않았다. 세계급 시합은 전혀 뛰지 않았고, 세계선수권대회만 시합을 앞두고 단기간 합동훈련을 하고 출전했었다.
당연히 세계 무대의 경기를 위한 기술적인 훈련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가장 취약한 종목이었다.
4명의 선수, 한 사람은 체력이 고갈되어서 20분 이상 렛슨을 받을 수 없을 정도여서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그나마 국제시합 경험이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체중이 늘어 이전의 기동성 있는 기술을 전혀 발휘할 수 없어 보였다. 그리고 국제시합 경험이 없는 키 160도 안 되는 외관상으로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는 두 선수가 있었다. 네명의 신상기록은 그렇게 비관적인 정보만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의자를 휘 돌려 창 밖을 한참동안 내다 보았다. 그리고 턱을 괴고 비스듬히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돌아앉아 신상기록표 맨 윗장의 선수를 들여다 보았다.
‘김 재린...’
대표팀 명단에 있는 네 사람 중 재린은 내가 잘 아는 선수였다. 전에 잠시 입국해서 고향에 머물며 지방팀에서 훈련을 돌봐주고 있을 때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인 친구가 활발하게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왠지 그늘진 표정을 짓고 있던 재린을 보고,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러 학교 운동장 옆으로 서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로 걸어가고 있을 때, 아까 반갑게 인사할 때와는 달리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내 뒤를 따라와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들고 온 차를 마시려던 내 앞에 섰다.
“선생님, 계속하고는 싶지만 이젠 너무 힘이 들어요, 운동장 두 바퀴만 뛰어도 숨이 차고 40분 렛슨 20분만 지나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제 힘들어서 하차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거니?”
차를 마시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서 내가 말했다.
머뭇거리다가 재린이 한 발 다가 서면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 이번 전국체전 잘 뛰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잘하고 싶은데 좀 도와 주십시오”
“아....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두어 번 흔들면서 분명하게 거절했다.
낙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재린에게 말했다.
“멋지게 은퇴하는 너를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가르치고 싶은 선수는 세계대회의 시상대에 오르고 싶어하는 선수다.“
재린이 고개를 들어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서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대표팀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선발전을 통과해서 대표팀에 들어가라 그러면 나와 함께 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재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만 한 것이 죄송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도 체력이
부족해서 훈련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헤어졌던 재린이 이번 여자에뻬 대표팀 주장으로 신상기록표 맨 앞장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일찍 들어 온 재린이 나를 찾아와 인사를 했다. 우리는 운동장 언덕 너머로 나 있는 크로스컨츄리 트랙을 걸으며 승리관이 보이는 언덕배기에 앉았다.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포트에서 우롱차를 따라 찻잔을 그에게 건넸다.
“각오가 됐나보구나?”
“그때 뵙고 나서 고민 끝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한 번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죽다니! 왜 죽어! 까무러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비장한 각오라는 의미에서라면 괜찮겠지만 말이다. 흠... 그렇다면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없을테니 준비는 충분히 된 것 같구나...”
“이길 수 있을까요?”
“선수들은 패배를 마치 죽음과도 같이 생각하는 데 그렇다면 ,이길 수 없는 시합에 나가는 것은 자살하러 가는 것이나 다를게 뭐있니? 그런데 세상에 기회만 있다면 죽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겁이 나요. 선생님 말씀에 용기를 내 칼을 거듭 다짐하지만..... 체력도 영 아니고요....”
“나도 겁나.”
“네~에 !? 선생님이요 !”
“하지만 난 언제나 그 두려움보다는 이기고 싶은 열망이 더 강하지. 그래서 늘 망설이지 않고 두려움 앞에 서 왔었다.."
재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아...네에~
겨울 날씨 치고는 괜찮은 날씨였다. 마음이 그래서일까? 재린을 포함해서 네 선수가 약속시간 정시에 체육관에 모여 있었다.
“차나 한 잔 하자.”
나는 차(茶)문화가 발달한 대만에서 익숙해져 선수들을 데리고 휴대용 다기 세트를 챙겨 산책로로 나섰다. 불암산 쪽으로 오르다가 호숫가 아담한 터에 둘러 앉았다. 선수들을 보니 재린이 뭐라고 사전에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두들 표정들이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뭔가 희망과 기대에 찬 분위기가 아니라,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마지막 배수진을 치는 그런 비장한 느낌.... 상처를 입고 사냥꾼에게 쫓겨 지치고 의기소침해 있는 사슴들같은…….
배짱있는 세희는 힘이 있고 순발력이 탁월했는데 살이 너무 많이 쪄버렸다. 그는 태릉선수촌에서 오래 훈련을 하지 않았지만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세계대회에도 출전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팀에 곧 바로 들어와서 3년 차가 되고 있었다. 실업팀 숙소 생활의 스트레스로 입단하고 나서 살이 많이 쪘다. 그런대로 시합에서는 자기 몫을 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었다.
명아는 키가 아주 작았다. 명아가 대표선수에 선발되리라고는 팀의 감독도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있는 팀으로 이적하기 전의 실업팀에서 플러레 선수였던 명아는 후보 선수였다. 죽도록 훈련을 했지만 주전의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가 고향 팀 감독이 불러서 지금의 팀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목을 바꾸어 에페 선수가 되었다. 플러레 선수로도 키가 작은 명아는 에페 선수로서는 정말 작은 선수였다. 하지만 명아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체력과 바깥쪽으로 감아 찌는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영정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온순하고 조용했다. 말없이 웃고 있었다. 명아만큼 키가 작았지만 수비형인 영정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대표선수에 선발되었다. 그 후로도 영정은 언제나 말이 없이 조용하고 얌전했다. 실업팀에서 훈련을 할 때에도 언니들 틈에 끼어서 꾸준히 노력했으면서도 작은 키 때문에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선 내 마음을 걸리는 것은 선수들의 분위기 속에 보일듯말듯 자리잡고 있는 확신이 서지 않은 막막한 태도였다.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커다란 벽 앞에 서 서 어떠한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한 채 까마득한 벽 위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머릿속 한 구석에서 마치 전혀 이길 수 없는 시합에 다만 형식적인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내보내지고 있다는 생각이 밀고 올라 오는 것 같았다. 이길 수 없는 시합에 나가는 것은 곧 등을 떠밀려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당연히 그 표정이야...
내가 말이 없자 모두들 침묵한채로 있었고 시간이 앉아있는 우리들 사이에 멈추어 있는 듯 했다.
그렇게 한 동안 말없이 앉아 있는 내 귓전에 프랑스 연수 때 스승이셨던 메트르 루팡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 킴! 에스끄 부 트하바이?(훈련 열심히 했니)” 세계대회때마다 만나면 그가 하던 첫 마디가 귀에 들려오자 나는 허리를 세워 정좌로 앉았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부드럽지만 확고한 태도를 담아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표를 향한 규칙은 두 가지뿐이다. ‘ 훈련을 하고 약속을 지킬 것 너희가 지켜야 할 이둘 뿐이다. 하나는 펜싱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훈련과 생활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무슨 사명감이나 비장한 각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거라고 생각했을까 선수들의 반응은 의외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규칙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지켜야할 규칙이 많으면 지키기 어렵다. 난 단 두 개의 규칙만 분명하게 말하겠다. 선수는 성실하게 훈련을 해서 자신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그리고 생활과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너희가 지켜야 할 규칙은 이 것 뿐이다..’
“ 그러나 이 둘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실함과 끈기가 있지 않는 한 이 둘은 실천하기 어렵다. 학생이 매일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것은 당연한데 일 년 동안 매일 가면 개근상을 준다. 왜 그럴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삶의 주변에는 매일 매일 이 두가지를 방해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학생이 학교에 매일 가는데 그리고 너희가 매일의 훈련에 충실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일지를 하루 한 페이지 쓰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일 주일, 혹 한 달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년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꾸준히 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루에 물아쓰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매일 학교에 가는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개근상을 주는 이유다. 매일 학교에 얼굴을 보여서가 아니라 그 성과를 이룬 성실함과 끈기의 태도에 대한 상이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는 필요없다. 그것은 실천이 없는 행동에 일시적인 집중을 상기시키는 생각일뿐이다. 왜냐면 ‘이 번엔 무슨일이 있어도’ 라는 식으로 하는 비장한 각오란 어쩌다 하는 실천을 위한 적극적인 태도를 각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일을 성실하게 훈련해야 한다는 것은 매일 비장한 각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곧 비장한 각오로 밥먹고 비장한 각오로 잠자고 비장한 각오 숨쉬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가? 그러니 비장한 각오는 필요없다. 그냥 매일의 삶에 성실하게 훈련하라. 그것이 바로 비장한 각오다.
내가 말하는 뜻은 작심사흘이 될 수 밖에 없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훈련을 실천할 수 있는 성실한 태도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희 모두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해두기 바란다 이기기 위한 지름길은 없다. 요행이나 기적을 바래서도 안 되며 도박 같은 꼼수로 이기려 해서도 안된다. 올림픽에 나가는 것은 결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 하루 성실하게 쌓아 올려서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실한 힘으로만 이길 수 있다. 그러니 매일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에서 먼저 이겨야 한다. 당연한 매일의 성실한 훈련에 이기면 신이 너희에게 개근상보다 훨씬 값진 성과라는 결과를 선물할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확신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두 번째 규칙, 약속을 지키는 것은 훈련을 뒷받침해주고 훈련 이외의 일상 생활과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게 해 준다. 약속이란 생각의 조건과 상황이 바뀌더라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의 약속이든 타인과의 약속이든 동일한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은 너희의 성실함을 뒷 받침해 줄 것이며 타인과의 약속은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아 .... 그리고 한 가지 충고를 해 주겠다. 약속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약속을 하지 마라 약속이 많으면 지키기 어렵다. ^^ 그렇지? ”
모두들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에~~”
법가 사상으로 중국 천하를 통일 했던 진나라는 아내와 잠자는 것까지 법으로 규정했지만 시황제 영졍이 죽은지 3년만에 30년도 되지 않아서 멸망했다. 한 고조 유방이 무자비한 법을 없애고 망한 진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법이 바로 약법 삼장이다. 즉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죄값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규칙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켜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수의 잘못이 아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아무런 계획과 준비없이 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같은 지도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은 먼저 할 수 있는 생각과 계획을 세워 제시하고 실천을 요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도자 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선수의 훈련과 관리 지침의 핵심이다. 그리고 두 가지 규칙은 펜싱뿐만 아니라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길을 안내하고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나는 강조했다.
그리고 균형잡힌 훈련을 위한 휴식의 의미와 부상과 질병에 관한 자기관리와 대처 요령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훈련의 시간은 하루의 1/3이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 시간에 관한 요령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자기관리에 충실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대표선수들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잡다한 질문에 답해 주었다.
진리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것이 너무 평범하다는 것이다. 훈련과 약속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일관되게 지키기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춧돌 같은 이 기반위에 펜싱의 모든 기술과 전술전략이 이루어진다.
훈련과 약속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당연해 마지 않는 그것에 대한 태도와 실천만이 높은 탑을 쌓아 올릴 수 있다.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나는 그 방법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선수들과의 미팅이 끝나고 돌아와 여러 가지 상념으로 밤늦게 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어둠이 내린 창위로 과거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어린시절 동네형을 따라 시내구경을 나가 넋을 놓고 펜싱훈련을 바라보다가 길을 잃고 거리를 헤매던 일, 꿈속에 나타나 가위눌리게 했던 마스크를 쓰고 있던 얼굴없는 장군, 아버지 몰래 운동을 시작했다가 둘통나면서 실망하시던 아버지 얼굴, 왼쪽 망막이 찢겨 피가 고인채로 시합을 뛰던 모습, 심한 훈련으로 폐결핵을 앓고, 위수술을 하고 얼마되지 않아 출근하던 임시교사시절,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고 20여일만에 퇴원해서 훈련장에 다시 나가던 날,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프랑스 연수시절의 루팡선생님, 아버지의 유언으로 독일 유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떠나던 날... 그리고 커다랗게 다가오는 오늘 낮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네 명의 선수들...
나는 훈련일지에 그렇게 메모를 해 두었다.
“길이 어디에도 없다고? 그렇다면 모든 곳이 길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으니 당연히 길이 없지 않겠는가. 길은 사람이 가야 나는 법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걸어 가는 발자욱이 곧 길이다. 그 길은 없는 길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가지 않아 단지 보이지 않는 길일 뿐이다.“
*** ***
“뜻을 세우고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 뜻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