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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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가치는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과 실천에 의해 존재한다.
사실 한국적인 펜싱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름지어진 것에 불과하다.
마치 나의 이름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내가 자신과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처럼...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나의 이름은 '펜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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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펜싱인가?
아주 오래된 새 길
모두가 갔으나 언제나 새로운 길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배워서 오직 나만 갈 수 있 그 길
무엇이 한국적인가?
한복과 짚신을 개량해 신고 산속에 들어가 짐승을 흉내내고 장작더미를 패고 산등성이를 달리며 100일 기도를 하는 것이 한국적인가?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것이다. 한국적인 것은 오늘의 한국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 남아 세계의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 내 고향의 친구들은 내게 서구적인 펜싱을 가르친다고 했지만 프랑스의 내 친구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보고 한국적인 스타일의 펜싱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본 훈련 약 두 달, 전지훈련 한 달, 최종 훈련 석 달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 받침해줄 수 있는 체력, 기술, 전술전략들을 세운 구체적이고 접근가능한 단계적인 훈련계획이 세워져만 했다.
나는 1급 경기지도자 과정에 참여해 연구원들과 펜싱 전담 연구원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도움을 받았다.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의지와 열정만으로 충분하지가 않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과 이기고자하는 강열한 충동적 노력만으로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 즉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선수들이 기량 향상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훈련계획을 세워야만 했는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펜싱기술과 시합에 대한 충분한 양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수준과 단계에 맞게 효율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한 참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 프랑스에 펜싱유학 중이던 재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재정은 고등학생 때 올림픽 꿈나무였다. 꿈나무 코치였던 나는 그에게 프랑스에 펜싱 유학을 가기를 권했었다. 재정의 중학교 체육선생님은 펜싱은 두뇌가 좋아야 잘 한다는 지론으로 성적이 전교 5등 안에 드는 학생들을 선발해서 펜싱을 가르쳤던 특별한 인물이다.
재정은 대학도 특기자 전형이 아닌 일반전형으로 펜싱 팀이 있는 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군대를 마치고 가정 형편이 어렵기는 했지만 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프랑스 펜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생 됐다. 그는 프랑스에서 종종 다른 나라 선수들에 대한 정보나 주변 상황들은 자세하게 전해주었다
“선생님, 저 서울 가요.”
우리로 치면 겨울방학에 해당되는 휴가기간 동안에 일이 있어 잠깐 다녀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면 바로 만나자고 했다.
재정이 찾아 오던 날 거리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큼지막하고 길다란 스포츠백을 받아 주면서 가볍게 포옹하는데, 뒤에 보니 눈이 새파란 외국인 둘이 서 있었다.
“알레!(시작)”
주장 재린과 재정의 친구 미셸의 연습 시합이었다.
나도 겪은 것이지만, 원래 유럽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다른 나라 선수들과 함께 연습하는 것을 꺼린다. 마지 못해 뛰어도 성실하게 뛰지 않는다. 특히 수준이 낮아 보이는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아예 연습경기를 하려 들지 않는다. 기술이나 전술의 노출 때문이기도 하고 수준 낮은 상대로 인해 자신의 페이스나 기술적인 체계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력 차이가 많이 나면 많은 비용을 들여 전지훈련을 가도 양질의 훈련을 하기가 어렵다. 그저 그만그만한 상대들과 연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미셀과 그 친구에게 내가 몸담았던 대학의 체육관에서 가벼운 연습경기를 청했다.
미셸은 세계랭킹 순위를 정하는 A레벨의 국제경기를 뛰었던 국가대표급 선수였지만 지금은 국가대표는 아니었다. 재정과 함께 지도자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신장은 175센티미터가 넘어보였다.
재린은 미셸의 긴 팔과 리치의 프랑스 전통적인 기술에 번번이 당했다. 다급하다보니 속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차이가 많이 났다. 저런 선수보다 더 월등한 선수들을 앞으로 상대하게 될 것이었다.
일부러 연습경기를 시킨 것은 실력을 그래서 경기를 이기는지 지는지를 알아보자는 것이 아니었다.내겐 다른 생각이 있었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우리와는 다른 유럽선수들의 기술과 전술적인 움직임들에 대해 대응하는 것을 보고자 한 것이었다. 말로 설명 듣는 것보다는 몸으로 직접 한 번 겪어보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자주 접하지 못하고 그나마 어쩌다 있는 초청지도자들의 강습회를 통해서 배운 유럽식의 기술과 움직임들이 잘못된 해석이나 훈련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실전경험과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과 체계로 훈련된 지도자가 없는 우리는 수준높은 일대일 렛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훈련 때 내가 말했다.
“프랑스의 검술은 진검으로 결투를 하던 실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체계로 유파를 형성하고 전통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진검의 역사가 없다. 그러니 지켜야 할 전통이 없고 얽매일 형식 같은 것도 없다.”
올림픽으로 펜싱이 스포츠 종목화 되었다. 펜싱 강국들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 기반위에 이미 100년에 가까운 스포츠 펜싱의 형식과 기술, 전술전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이 없고 경험마저 거의 없는 우리로서는 어떤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더 많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많은 지도자와 선수를 가지고 훈련하고 있는 그들의 방식을 좇아 훈련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을 넘어서지 못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우리만의 펜싱, 한국적인 펜싱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아직 미지수이지만 나는 대만에서 프랑스의 인셉 (INSEP: national sports and physical education institute), 독일의 타우버비숍스하임과 본에서 배운 훈련내용, 대만에서 함께 지도하던 헝가리의 국립체육학교의 루코비치 교수에게 배운 내용,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번역된 자료와 교육자료와 그 동안 국제 시합과 전지훈련등에서의 경험들 정리하여 마무리한 뒤였다.
“왜 팔을 뻗어서 칼을 처리하려고 하지?.”
국제시합 경험이 없는 명아와 영정이는 재정과 프랑스 친구들이 다녀간 이후 눈에 띄게 길게 뻗어 서 칼을 처리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재린과 세희의 미셀과의 게임을 보아서 그랬을 것이다.
“선생님, 미셀과 뛰어보니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마주치게 될 스타일인데 좀더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 당장은 잘 할 수 없지만 계속 연습하면 미셀만큼 할 수 있습니다.”
연습게임이 끝나고 재린이 세희와 함께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재린은 미셀과의 연습경기 이후에 자꾸 미셀의 긴 리치와 정교한 기술에 밀려서 자신의 기술이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연습하고 자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키가 크고 다리도 길고 팔도 길다, 나는 작고 짧다. 어떻게 해야 할까? 팔이나 다리를 잡아 뽑아 늘릴 수도 없고 ... 그런데 그 기술을 따라 하겠다면 뱁새가 황새 되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지 않니?
유럽 선수들이 타고난 신체 조건이나 습관을 이용하듯이 너도 너의 타고난 신체 조건과 습관을 이용해야 하지 않겠니? 남이 잘하는 것을 더 잘 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남이 잘 할 수 없는 것 중에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니?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그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일까? .”
“글쎄요...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요... ”
“익숙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다. 네가 익숙하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그들은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고 익숙해져야 하겠지? 그 방법은 내가 이미 개발해 두었다. 지방에 있을 때, 대표팀 임용이 결정되자 나는 준비에 들어갔다. 그 때 너 왔었지 않니? 기억하지... 대만에 있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연구하고 개발하려고 했던 한국적인 펜싱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직접 연습경기를 통해서 다양하게 실험해 보고 문제를 보완하고 세부적인 훈련방법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너는 확신과 믿음을 가져라, 알았지? ”
“네에~”
“ 나는 그들의 방법을 존중하지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따라하지도 않는다. 나는 성실하게 그들의 것을 배우고 이해하지만 거기다 나의 생각을 보태어 나의 방식으로 새롭게 한다. ‘
그렇게 나는 이미 나름의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기존의 체계나 방법으로는 신체 조건과 훈련방법 그리고 경험의 질과 양이 훨씬 월등한 그래서 따라잡을 수 없는 유럽 선수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에 부심했었다. 끊임없이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하려 했었다. 그러던 중에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였다.
나는 선수촌 숙소에 함께 있던 중국무술 ‘우슈’ 감독의 방을 찾아갔었다. 지금은 나의 무예 사부이시지만 초면인 그 당시, 그는 조용한 미소를 띠고 나를 맞아주었다. 그 가늘고 매서운 눈매를 감춘 채 나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바라 보고 있었다.
동서양의 무예와 검술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나는 내가 고민하던 우리식 펜싱, 이를테면 ‘한국적인 펜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관하여 물었다. 그러면서 동서양의 기술과 전술에 대한 내 생각을 산만하게 늘어 놓았다.
나는 끝없이 훈련을 해왔었다. 프랑스에서 배운 기술과 번역 자료들, 녹화 테이프를 보면서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실행하고 검토하고 수정하고 또 실행해 왔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 유럽의 경기장에서 보고 기록했던 훌륭한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의 레슨 내용과 훈련 방법들을 시도하고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훈련 내용을 모두 외우고 수없이 많은 기술적인 동작들을 가르치고 수정하면서 익히고 또 익혔다.
여러 나라의 우수한 선수들의 독특한 펜싱 스타일을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습득하여 선수들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1년에 겨우 한 번 있는 유럽 경기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선수들의 당혹감을 없애주고 나름대로의 전략을 세워 경기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을 쫓아가는 것이지 앞서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조금 나은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 게임의 흐름을 바꿀 수가 없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코치들에 의해 수준 높은 렛슨으로 잘 훈련된 유럽 선수를 이기기란 요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본래 동양의 무예라는 것은 단지 기교를 익히고 요령을 터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어요. 사상이 있고 원리와 도리가 있었네. 서양과는 다른 정신이 있다네, 자네 말대로라면 그들은 ‘살기 위해서 먼저 죽여야 한다’는 논리지만 우리는 ‘죽이지 않고 내가 살 수 있는 법’이 궁극의 논리였지, 우리는 그걸 ‘활인검’ 아라고 하네. 도전하는 상대를 죽여 없애는 것은 기량만으로 충분한 일이네 그러나 도전한 상대를 죽이지 않고 물리치기 위해서는 더 월등한 기량과 함께 검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고결한 정신도 필요하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상대를 죽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상대를 이기는 것은...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네, 상대를 제압하려면 상대가 잘 하는 것을 알고 나만의 것을 숙달해서 겨루면 충분히 이길 수 있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물리칠려면 상대가 가진 온갖 방법이 무력해질만큼 강해야 하네, 그러면 상대도 스스로 인정할 수 밖에 없네, 자네도 검을 다루었으니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선수를 만나본적이 있겠지?스스 로 용인할 수 밖에 없지 않던가? 그것이 상대를 살리는 활인검법이네. 우리가 검을 수련하는 것은 누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네. 그러니 그 지키는 방법은 꼭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네 물론 훨씬 더 많은 신체의 훈련과 정신의 수양이 필요하겠지만 말일쎄.”
그가 계속 말했다.
“중국 검은 무게와 힘을 이용해서 휘두르는 것이 아니네, 그렇게 검을 다루면 가벼운 무게와 휘청임 때문에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없네, 검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과 정신의 힘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상대방의 칼을 흘려보내야 하는데, 그 움직임이 조금만 늦으면 목숨을 잃게 되고 너무 빠르면 상대가 예측해 버리기 때문에 역시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네. 상대의 움직임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 때맞추어 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것은 검과 나의 심신이 일치해야만 가능하다네. 그 찰나의 순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야 하고 고도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지않겠는가. 그것은 생각이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네. 훈련되고 또 훈련된 기술과 죽음에 초연한 정신 상태에 이르러서야 가능하네, 그래서 옛날부터 도는 백일을 연마하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창은 천일을 연마하면 능히 다룰 수 있으나 검은 만일을 수련해야 입문할 수 있다 했네..”
나는 물었다.
“생각과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씀인가요?”
“생각과 힘은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이네, 더 나은 생각 더 강한 힘 말일세. 그래서 옛날의 무인들은 이 둘을 모두 초월할려고 했지. 옛날에 무상신검(無想神劍)이라는 게 있었다네. 말 그대로 생각이나 감정을 초월한 경지를 뜻하네 무예에서 신이란 개념은 종교적인 신이 아닐세 감정과 생각으로 하는 의식의 자원을 넘어서 존재하는 존재가 신일세 심신이 완전하게 통합된 상태를 말하지”
사부님은 헤어지기 전에 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씀하셨다.
“생각하면 생각에 쫓기게 되지, 단지 긴장하면 될 것을...”
선문답의 화두 같았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생각하면 생각에 쫓기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와 서양 선수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다시 따져 보기 시작했다.
나는 대만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스포츠심리학의 한 분과인 운동학습과 제어를 전공했는데 인지정보에 기계적인 메카니즘에 초점을 맞춘 인지심리학습이론 자연의 현상과 생태적인 원리에 입각한 직접지각(direct perception) 매료되어있었다. 깁슨의 이론은 어떤 상황 자체가 이미 정보이기 때문에 학습만 되어 있다면 즉 훈련만 되어 있다면 인지과정없이 직접지각 즉 생각하는 과정없이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머릿속의 인지과정이 1/1000 초 단위로 진행되지만 직접행동이 가능하다면 생각은 행동의 수행에 장애가 된다. 따라서 생각을 멈추어 행동이 스스로 직접 반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생각하면 생각에 쫓긴다 단지 긴장하라’는 화두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풀이였다.
그렇다면 펜싱에서 생각에 쫓기지 않을 수 있는 직접지각은 어떤 걸일까? 가능할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펜싱에서 서양 선수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차피 기술이나 전술은 태어나서 배우는 것인데 훈련의 질에서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볼 때, 자동화가 가능한 훈련의 양은 우리도 충분한데 말이다. 빌어먹을 태권도나 할 껄 왜 하필 펜싱을 해가지고... 어! 한 순간. 갑자기 빛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양적인 무술인 일본 유도는 왜 유럽이 강세가 되었을까? 태권도가 점점 위기에 처하는 것은 ?... 그래,,, 내 고향의 친구들은 내게 서구적인 펜싱을 가르친다고 했지만 프랑스의 내 친구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보고 한국적인 스타일의 펜싱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들도 초기에는 동양적인 것을 배웠겠지만 기교를 터득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태도나 습성이 나타났겠지 .... 그렇다면 프랑스 친구가 한국적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이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인사하지 않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연습하지 않아, 우리는 그렇게 무모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시도하지도 않아... 어떻게 그렇게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지?
그래 그랬지... 바로 문화의 차이다. 그들 속에서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 그들 때문에, 그들과 다른 태도와 습성 때문에... 무엇이 한국적이냐고... 그래, 중국과 일본과 달리 손에 밥그릇을 들지 않고 젓가락을 사용해서 밥을 먹지 않은 것이 한국적이다. 고추장과 된장으로 만든 김치와 국이 한국적인 것이다. 문을 밀어젖히지 않고 끌어 당겨 열듯이 그놈의 정 때문에 털어내지 못하고 보듬어 안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 일단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열받으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장을 내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
그런 역사와 문화가 내 안에 살아 있는 것 그 본능처럼 느껴지는 습성이 오늘의 현실과 사실들과 맞닿아 이루진 것이 한국적이다.
그래서 난 서구의 가장 전통적인 펜싱을 통해서 내가 한국인이고 한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았던가.
그래 그것을 활용하자. 그 태도와 습성을 기준으로 다시 정리해 보자. 그것이 한국적인 펜싱이니까... 그렇게 우리의 몸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보일듯 말듯 존재하는 정신과 습성을 활용해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보자. 전반적인 펜싱의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비록 아주 작은 차이지만 결과를 다르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것이 전면적인 펜싱의 흐름을 지배하지 않아도 좋다. 동등하게 갈수만 있다면 족하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만으로도 전체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나는 서양과 동양의 일상적인 문화 차이에서 힌트를 얻어냈다. 서양은 숟가락질이나 톱질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한다. 따라서 펜싱 역시 팔을 뻗어 찌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러한 습관과 훈련이 서양 선수들이 막고 찌르기를 한 번의 동작으로 할 수 있는 기틀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기면서 힘을 쓰기 때문에 막고 찌르는 동작을 한 동작으로 할 수가 없다.
만약에 밀어젖히며 힘을 쓰는 그들의 기술을 당기며 힘을 쓰는 우리가 제대로 사용할려면 몸의 뒷 면의 신전 근육을 당기면서 힘을 쓰는 옴 전면의 굴곡근보다 더 강하게 강화해야 한다. 동일한 효과를 가진다면 당연히 당겨치는 힘을 사용하는 공격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확률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어야만 시도하는 그들, 그러나 나는 아주 작은 가능성에도 과감한 시도를 불사하는 우리의 방식을 선호해야 한다. 왜냐고?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미 내 안에 축척되어 생각없이 반응할 수 있도록 자동화되어 있는 본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몸이 직접적으로 더 빨리 반응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유럽의 큰 키와 긴 팔과 정교한 기술로 잡으려는 칼을 타고 들어오는 서양 선수들에 대항할 것인가. 쳐내자, 기동성있는 짧은 단검이 긴 창에 대응하듯 팔을 구부려 더 많은 기동성을 확보하고 팔을 폈을 때의 부족한 힘과 거리의 이동속도를 보강하자. 기술적 정교함 때문에 잡을 수 없다면 쳐내자, 짧고 강한 힘으로 쳐내서 길을 차단하면 최소한 동등한 조건으로 만들 수는 있다. 그렇게 긴팔과 정교한 기술을 무용화시킬 수 있고 대치거리를 좁힐 수 있다면 키와 리치는 장점이 아니다.
근접대치가 가능한 기술체계는 체력을 절약해 주고 여유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곧 기동성으로 이어질 수 있고 시간지연과 찬스포착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연은 끈기가 필요하고 돌파는 과감성이 요구된다. 그 점에 관해서라며 한국적인 기질에 가장 적절하게 부합한다. 우리에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끈기와 과감성이 있다.
좋아,! 이것으로 기술적인 대응 능력과 전략적인 기반은 충분히 안정적으로 확보된다. 이것은 신체적인 조건을 바탕으로 한 기술적인 프랑스 검법과 강한 힘으로 기계적인 대응을 하는 독일검법은 물론 힘과 기교를 함께 하는 형가리 러시아 검법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쳐내는 기술을 보강한다. 빠른 속도의 다양한 쳐내기와 그와 유사한 단순한 기습공격방법을 강화한다. 단순한 기습공격을 바디 페인팅을 합치면 상대에게 공격을 망설이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민감해진 반응으로 인해 움찔거리게 해서 그 시간을 벌고 그 여유로 인해서 과감한 공격에 대한 기회포착이 용이해진다.
손발의 조합 순서와 같은 방어라인에 대한 이중방어체계, 복합방어체계를 세웠다.
동일한 기술을 기존의 자기리듬에서 두배 빠르게 두배 느리게 처리할 수 있는 속도조절능력과 하나
의 대응에서 다른 두 개의 힘있는 쳐내기와 단순한 기습공격 능력을 숙달할 수 있는 훈련을 계획했다. 그리고 한국적인 태도와 습성에 기반한 이 모든 움직임이 철저하게 훈련되어 생각이나 판단 없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그 ‘반 박자 빠르게’를 위하여...
결국 훗날 시합에서 이러한 나의 생각은 성과로서 증명되어 질 것이다.
체력훈련은 기초체력과 정신의 지구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스피드가 시간목표가 안정적인 리듬과 지속적인 집중이 가능할 수 있도록 호흡과 유연한 움직임을 목표로 삼았다. 전문체력은 자기기술의 자세와 동작의 안정과 정확한 이동, 상대적인 대응 기술의 타이밍, 거리, 이동속도의 빠르기 조절, 그리고 시간지연과 과감성을 위한 페인팅 기술을 확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인차를 고려한 일대일 레슨은 매일 조정되었고 매주 전체적인 균형을 분석하고 방향을 조절하도록 계획했다. 연습경기는 리그와 토너멘트 5점경기, 15점 경기 주제경기와 단체경기을 진행하면서 대진순서와 선수교체 시기 그리고 전술적 판단시기를 기록 분석 조정하도록 계획했다.
시합은 물감들을 적절히 혼합하고 배치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기초체력은 질 좋은 물감이고 전문체력이란 혼합된 색깔이며 섞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시합이란 힘과 정확한 자세를 바탕으로 삼아, 상대방의 기술과 전술, 그리고 경기 상황의 여러 변수와 관련해 개인기를 다양하게 발현하는 총제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최빈값의 대표치다”라는 트레이닝 이론에 근거해 가장 약한 부분을 개선해 취약점이 집중공략당하는 국제경기에 대비하고 특성화전략으로 개인차를 살린 각각 다른 개별 전술전략과 이를 이용한 단체전의 효율성을 높이는 대진순서에 따른 경기운영 전략을 개발했다.
호흡 곤란이라든가 비만, 부족한 근지구력 등 선수에 따라 취약한 부분을 지적해 주고, 일정한 훈련량을 소화해 나가면서 개인 특유의 문제점을 성과를 기록하고 분석해서 알려주고 훈련을 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도록 유도했다.
몸과 마음의 훈련과 약속은 그 모든 것의 기반이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어떠한 일과 변화가 있더라도 계속된다. 나 또한 모든 훈련의 시작과 끝에 서 있다. 언제나 한결같이...
재린을 비롯해서 모든 선수는 이러한 나의 훈련과 계획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보여 주었다. 모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듯 훈련에 임했으며 의지는 확고했지만 태도와 행동은 힘든 훈련에 초연했다.
하루가 또 저문다. 재린, 세희, 명아, 영정은 젖은 땀이 베어 있는 체육관을 나선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곧, 누구든 피스트 위에서 저들을 만나고 나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조 섞인 위로의 말이 아닌 축하와 말을 전하며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자랑과 긍지로서 감사하게 될 것이다. ‘
그 날 저녁 나는 그렇게 썼다.
‘방법 없는 목표는 슬프다. 목표없는 방법은 표류한다.
그둘이 함께 있는 오늘, 나는 기쁨과 감사로 내일을 기대하고 준비한다.
이기고자 하는 것은 목적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선택이다. 그러나 방법은 목적지에 이르는 수단이다. 가고자 하는 곳은 분명하더라도 갈 수 있는 길에 얽매이지 말라.
유연하라. 옳은 수단 옳은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옳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가 옳은 수단과 방법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방법은 늘 달라지는 상태와 조건과 그 위를 달리는 나에 의해 변한다. 날마다 길을 물으라 그들의 행동과 표정과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들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줄 것이다. 그것이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심판은 그 날, 거기 비난과 갈채 사이에서 받는 것이 아니다. 오늘! 언제나 있는 그 매일의 삶속에 있다.
나는 그 날 신에게 심판받기위해서 매일의 오늘 온몸과 마음으로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