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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0일 22시 40분 등록

우린 부부다. 다른 이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로맨스와 연애의 시기를 거친 후 결혼에 골인 하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생활을 꿈꿨었고 솔직히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 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 하랴. 다른 사람들 말을 들을걸. 눈에 콩깍지가 껴서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행위가 참담한 현실이 되어 나의 목을 나의 모든 것을 옭아 메고 뒤바꿔 놓고 말았으니.

 

지옥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질수록 힘들어진다. 무어 그리 잘못한 게 있다고. 나를 자기 테두리에만 가두어 두려고 한다. 잘못한 게 없다고 항변해도 믿어주질 않는다.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틈만 나면 추궁을 한다. 의심이다. 의심. 매사가 의심이고 그 덕에 집안에 전화도 남아나는 게 없다. 아마도 최근 2년간 10개는 부서졌을 것이다. 어디 가서 이젠 이야기도 못한다. 어쨌든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만은 도저히 용납을 하기 힘들다. 신체뿐 아니라 인간성까지 발기발기 찢어 지워지지 않는 멍을 들게 하는 폭력. 나는 그의 무자비한 힘 앞에 아무 대항을 하지 못하고 무너져 간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때 세상을 원망한다. 나를 구해달라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도 해본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구원해 주질 않는다.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지고 나면 그이는 또다시 술을 마신다. 홧김에 먹고 다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도덕한 정당성을 보상받기 위해 또다시 술을 먹고. 그러다 또 나를 추궁하고 매질을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려고 내가 결혼을 한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 앞이 보이질 않는다. 빛이 보이질 않는다. 탈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가장 가까운 나를 믿지 못하는 그이를 볼 때면 억장이 무너져 내리지만 어떨 때는 그런 그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한때는 나를 사랑해주던 그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하게 되었는지. 하지만 그러다 인간 백정으로 돌변할 때는 정말 하늘이 새까매진다. 개새끼보다 못한 삶을 산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나의 설움은 깊어져 간다. 나의 생채기와 한 맺힘은 곪아서 문드러져 간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집요하게 나를 가두는 그이의 행동은 나를 자신의 모르모트가 되게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나의 의지와 나의 생각도 어느덧 길들여져 간다. 내가 정말 잘못한 걸까. 핸드폰을 뒤지고 24시간 나의 행적을 감시하는 거기에는 내 탓도 있는 것일까. 나는 깨끗하고 결백한데 왜 그 사람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자유. 그래 이제는 정말로 자유롭고 싶다. 훨훨 하늘을 날아가고 싶다. 마당에 산책 나온 저 참새마저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데 하물며 나는 이렇게 감금 아닌 생활을 하고 있으니. 미칠 것 같다. 이것이 내가 꿈꾸던 삶이었나.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린 나의 삶. 이제 어떡하나. 길들여진 나의 삶. 나란 존재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처녀 때의 그녀는 남들이 쫓아다닐 정도로 예뻤었다. 그런 그녀와 결혼을 한 것이 나에게는 정말로 행운 이었다. 모든 것이 장밋빛처럼 보였다. 내 인생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의 세레나데만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 이었다.

어느 날 아내의 핸드폰에 낯선 전화번호가 찍혔다. 누굴까. 누구일까. 그녀를 잊지 못하고 따라 다녔다는 그때 그놈일까. 아니야. 멀리 이사를 갔다고 들었는데. 그럼 누구지. 지난번 시장 갔을 때 유심히 쳐다보던 그놈인가. 그래. 맞아. 아내를 바라보던 그놈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어. 어쩐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술을 한잔했다. 집에 들어와 보니 그녀는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있다. 이런. 이런 판국에 잠이와. 딴 놈하고 작당해 놓고 잠이 오냐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냅다 아내의 배를 걷어찼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날벼락을 당한 그녀는 놀람과 아픔에 데굴데굴 방바닥을 구른다. 나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들어야 했다.

“그 전화번호 누구야?”

“무슨 전화번호요.”

“내가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혔잖아. 누구냐고?”

“잘못 걸려온 전화예요.”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웃기지마. 그 전화 이후로 당신이 안절부절 못하는걸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았는데. 바른 대로 돼. 바른대로 되란 말이야.”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결백을 계속 주장한다. 변명 같은 그 소리에 나는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다. 옆을 돌아보니 뭔가 잡히는 게 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그냥 내갈겼다. 그녀의 외마디 비명소리. 깨지는 소리. 살겠다는 아우성. 그러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들리질 않는다. 잠이 들었다.

눈을 떴다. 깜깜한 밤. 목이 말라왔다. 주섬주섬 손을 내미니 머리위에 주전자가 잡힌다. 타오르는 뜨거운 목구멍으로 물을 들이켜니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어나 더듬더듬 벽에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초크다마가 나갔는지 깜빡이는 불빛아래 펼쳐진 낯선 풍경. 이게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거야. 내가 무슨 일을 벌였던 건가.

 

비가 온다. 올해 여름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유난히도 많은 비가 내린다. 꿈 많던 여고시절 나도 잘나갔었는데 현재 내모습이란. 살아갈 의미조차 남아있지 않는 이런 날에 비까지 내리면 정말 나도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내 마음을 두드릴 때면 나도 모르게 어딘가로 떠나가고 싶다. 무작정 벗어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철창 안에 갇힌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질 못한다. 설사 도망가더라도 그이는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러면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에게도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 그 사람은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금니 꽉 깨물고 팔자를 탓하며 이렇게 한평생을 살아야 하나. 이런 삶이 내가 그토록 그리던 삶이었나.

7월의 어느 날. 그날도 세찬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남편이 나를 깨운다.

“일어나.”

며칠 동안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나는 그이의 묵직한 목소리에 겨우 눈꺼풀이 뜨였다.

“빨리 일어나서 옷 입어.”

서둘러야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발길질이 날아올지 몰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따라 나섰다. 차에 올라탔다. 그는 시동을 켜고 급하게 고속도로로 향하였다. 이 시간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날씨에 어디를 향하는 걸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내마음속 똬리만 치고 있었다. 선잠이 들던 차 언 듯 눈을 떠보니 어둠을 뚫고 도착한 곳은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강원도 미시령 정상 근처 고갯길이다. 뭐야. 이곳에는 왜 온 것이지. 갑자기 살이 떨려오고 머리가 쭈뼛해진다. 왜 온 것일까.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남편은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하고 술 한 잔을 건넨다. 평소 그 사람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거지.

“미안해. 그런데 그때 그놈은 누구야. 왜 훤칠하게 잘생긴 그놈 말이야.”

또다시 반복되는 이야기. 진절머리가 날 법도 한데 남편은 이곳까지 와서도 며칠 동안 했던 이야기를 또 끄집어낸다. 도대체 나에게서 무엇을 얻기 위함인지. 그이가 원하는 대답은 무엇인지. 그냥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거짓말을 할까. 그래서 이혼 하자고 할까. 그럼 그이후의 남편의 행동은…….

그러다 남편의 서슬 퍼런 눈빛이 나의 가슴에 박힌다. 뭐야. 왜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지. 무서워진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도 욱하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편은 자동차 적재함 쪽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긴 후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들고 왔다. 달빛하나 없었지만 반짝이는 무언가를 느꼈다. 흉기였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사지가 떨려온다. 도망쳐야해. 무조건 도망가야 된다고. 하지만 내 머릿속은 무엇엔가 맞은 듯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에게 길들여진 동물 이었던 것이다. 그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짖으라면 짖어야 대는 그런 애완견 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무언가가 뱃속 깊숙이 들어왔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이의 나에 대한 감정의 깊이만큼 그는 나를 난도질 하였다. 뼈에 사무치는 절절한 아픔과 고통이 사정없이 밀려 들어왔다. 이빨이 저절로 사시나무 떨듯 부딪친다. 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건 그래도 이제까지 하늘 아래 남편이라고 믿고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내처지 내 인생이 완전히 무너진 패배감이 나를 더욱 낭떠러지로 밀려나게 한 것이다.

어느새 나의 배에서는 검푸른 피가 뭉텅이로 고여 나오기 시작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슬픔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이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삶을 애써 움켜쥐었다. 남편은 이런 나를 다시 차에 태워 고개 길 위로 향하기 시작한다. 어쩌자는 건지. 이제는 아픔마저도 희미해진다. 고개 위로 도착한 남편은 바닥에 쓰러져 버린 나를 난간 근처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피하고 싶지만 가야된다. 그렇지 않으면……. 배를 부여잡고 기다시피 한 나는 그에게로 향한다. 마주하기 싫은 억 겹의 세월이 있지만 나는 기어서 그를 향한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기에.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난간 밑으로 밀기 시작 하였다. 한 갈래 남아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꺼져 버렸다. 그랬구나.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구나. 험하디 험한 이곳에서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고 그랬던 거구나.

“여보, 왜 그래요. 이러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어요. 살려줘요. 제발 살려 주세요. 여보. 정신 차려요.”

울분의 나의 목소리와 절망의 하소연에도 그 사람은 미동조차 하질 않는다. 가빠오는 호흡 속에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 나는 정말로 악마를 보았다. 내가 상상한 그이상의 악마를.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와중에 그 사람의 손을 부여잡고 잡아달라고 살려달라고 부탁 하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지막 이었다. 이로써 그와 나의 세상에서의 질기디 질긴 악연은 끝이 났다. 이제까지의 살아온 시간만큼 높디높은 언덕에서 구르고 또 굴렀다. 얼마나 더 떨어져야 하나. 엄마가 생각난다. 아빠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또 다른 내가 말을 건넨다. 정신 차려. 이게 죽는 거구나.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뭐지. 물방울이다. 꿈인가. 분명히 죽었을 텐데. 질려오는 아픔이 또다시 밀려오는 가운데 어렵사리 눈을 떴다. 뭐야. 내가 살아 있잖아. 울음이 나왔다. 뼛속 깊은 세상에 대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냥 죽지. 왜 살아난 거야. 소리를 질렀다.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다. 나의 악다구니 메아리만 돌아올 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추워온다. 몸이 얼음장 같다. 배는 어떻게 된 거지. 참 사람 목숨이 정말로 질기구나. 옷이 다젖은 가운데 몸이 사시나무 떨 듯 흔들려 온다. 입술이 타들어 가는 상태에서 목이 너무 마르다. 이렇게 된 이상 살아야 된다. 얼마나 굴러 떨어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놈 얼굴을 한번은 봐야 한다. 내가 살아남아 이 눈으로 놀라는 그놈 면상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

날이 조금씩 밝아온다. 햇볕이 내리쬐자 어디선지 모를 힘이 조금씩 솟았다. 기었다. 기고 또 기었다. 산비탈을 오로지 나의 두 팔과 다리로 안간힘을 쓰며. 나무뿌리를 부여잡았다. 돌부리를 움켜잡았다. 올라야 한다. 살아야 한다. 복수를 해야 한다. 반드시 내가 받은 만큼 갚아주고 싶다. 그래도 안 되면 저승 못간 귀신이 되어서라도 그놈 꿈에 나타나 한을 풀어야 한다. 얼마나 올랐을까. 희뿌연 무언가가 보인다. 힘을 내었다. 그놈과 마지막 만남을 가졌던 그 장소였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아니야. 의식을 잃어선 안 돼. 내가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왔는데.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숨이 더욱 가빠오는 가운데 멀리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인다. 세워야 돼. 저차를 어떡하든지 세워야 돼. 여보세요. 나 여기 있어요. 살려주세요. 나 여기 쓰러져 있단 말이야. 살...려,,.줘…….

 

헉헉~ 미안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잘못 했다는 당신의 그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이었는데 끝내 당신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어떡해야 하지. 보는 사람이 없었을 거야. 그럼 일단 도망을 가야돼. 열쇠를 넣고 시동을 걸었으나 손이 떨려서인지 금세 꺼져 버렸다. 뭐야.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되는데. 방망이질 치는 가슴에 핸들이 돌아가질 않는다. 정신 차려야 돼. 악셀레터를 있는 대로 밟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벌였던 거야.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야되지. 일단 서울을 떠나야 되지 않을까. 아니야. 목격자가 없었기에 나만 떳떳하면 되질 않는가. 일단 명확한 알리바이가 필요해. 그전에 그래도 혹시나 그녀의 직장을 가보야야겠어. 워낙 평소에도 독하기로 소문난 년이었기에 살아 돌아온다면 필히 출근을……. 다행이다. 그럼 그렇지. 내가 흉기로 그렇게 찌르고 거기다가 그높은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 뜨렸는데 설마……. 아니야. 한곳을 더 들려봐야 겠어. 집이랑 예전 머물던 숙박업소를 확인해 봐야해. 문을 열었다. 방안은 그날 밤 나가기 전 어질러지고 황폐해진 그 모습 그대로다. 누군가 찾아온 기색도 없다. 이젠 안심인가. 갑자기 졸음이 찾아온다. 긴장이 풀려서인가. 조금 눈을 붙이고 일어날까. 아니야.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분명히 그녀가 없어진걸 알면 일차적으로 형사들이 나를 찾아올 거야. 그렇다면 그녀의 마지막 흔적을 없애야 돼. 장롱을 열어 그녀의 옷가지들과 소지품들을 있는 데로 끄집어냈다. 불에 태워야 돼. 성냥불을 긋자 그것들은 타올랐다. 새까만 연기와 함께 그녀가 묻어져 갔다. 얼굴도, 모습도, 이름도, 추억도.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을까. 사랑 이었을까. 아니면…….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감상적이 되어선 안 돼. 오히려 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당당하게 행동해야 돼. 그녀를 찾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그날 밤 싸움이후 내가 잠든 사이 도망갔다고 말해야지. 그래. 그래야 돼. 안심이다. 이제 안심이다. 이제 모든 게 끝이야.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밝은 거지. 저 사람들은 누구야. 가만있어보자. 그랬구나. 불빛을 보고 손을 흔들고 난 다음 내가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아픈 배가 당겨온다. 살았구나. 내가 살아남았구나. 모질다. 정말 모질다. 사람 목숨이 고래 심줄보다 질기다고 하더니만 내가 그 경우구나. 그런데 이제 어떡하나. 그놈은 어찌 되는 거지.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그놈이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세상에 둘도 없는 독한 년 이라고 치를 떨까.

아니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한번만 용서를 해달라고 청할까.

아니야, 나를 이 지경까지 죽을 지경까지 내몬 놈이라면.

그리고 그런 놈 얼굴은 이제 더는 보고 싶지도 않아. 악몽 같았던 내가 살아왔던 시간을 돌이키고 싶지도 않아. 그냥, 그냥 이대로 쉬고 싶어. 그리고 돌이킬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나기전의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 새 출발 하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나의 과거를 잘라 버리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만약에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보게 된다면 마음속 정말 담아둔 이 말을 하고 싶어.

“당신이 손을 뿌리칠 때 내가 더 잡을 수도 있는데 안 잡았어요. 낭떠러지로 던지는 걸 알고는 그냥 (손을) 안 잡았어요.”

 

완전 범죄를 꿈꾸었던 안면수심 남자로 인해 파생된 한가정의 비극. 그런 가운데에서도 절망의 순간의 그녀를 무언의 메시지로 벼랑 끝에서 끝까지 잡아준 보이지 않던 그 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성 특유의 모진 생명력 이었을까.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마음 이었을까.

살아남아 복수를 해야 한다는 집요한 일념 때문 이었을까.

아니면…….

 

새로 태어난 삶을 시작하게 되는 그녀 앞에 한마디를 올린다.

살아남아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그런데 부끄럽다. 모든 남성이 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은데, 나도 누군가와 똑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공격적인 본능을 가진 가해자인 한 마리 수컷의 입장이기에.

 

 

▶ 이 이야기는 2011년 7월 남편에게 복부를 4번이나 흉기에 찔리고 100m가 넘는 절벽 아래로 버려진 여성이 20여
    시간의 사투 끝에 살아남은 기사를 극화한 내용 입니다.

IP *.117.11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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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호
2011.09.12 11:26:05 *.69.159.155
엄청 긴장하고 읽었더니.....
승호씨 이렇게 글쓰는 연습하는 것 새로운 도전이군요.
몇번 더 올리고 독자들 반응을 함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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