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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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행 8일째 되는 날이다. 미나와 그 일행들은 오페라 ‘투란도트’를 보기 전 저녁을 먹기 위해 루카로 향했다. 마을 안으로는 커다란 버스가 들어갈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마을에서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걸어 가기 시작했다. 내리쬐는 햇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아니 무슨 동네에 버스도 못 들어가?”라며 투덜대며 걷는다. 길을 건너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너무나 고요하게 늘어서 있는 정성스레 손질한 정원과 잘 어우러진 예쁜 집들이 보인다. 그리고 더 걷다 보니, 저기 멀리 왠 성벽이 보인다. 몇 천년 전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여느 이탈리아의 도시들처럼 루카도 이천년 전 로마의 성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어 2000년 전 로마 사람들의 살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곳이 바로 루카였다. 루카로 들어가는 아치형 성벽 입구 위로 작렬하는 햇빛과 시원한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조깅하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치형 문으로 들어갔더니 파란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다. 드넓은 잔디 위를 걸어가는데,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서울 시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차 소리도, 음악 소리도, 사람들 소리도. 사부작 사부작. 사람들이 잔디 위를 걷는 소리와 온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전부다. 미나는 두 팔을 벌려 바람을 온 몸으로 느껴본다. 팔을 스치는 바람의 촉감. 그리고 눈을 감아본다. 팔과 목, 다리 그리고 온 몸에 감기는 바람이 루카에 왜 이제 왔냐며 투정 부리며 품속으로 뛰어드는 어린 아이 같다. 미나에게 루카의 첫 인상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해맑은 미소로 신나서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와 같다.
눈을 뜨니, 다시 현실이다. 홍대 놀이터 앞 2층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뜨거운 태양 아래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또 다시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루카가 생각났다. 카페 아래 좁은 길에서 들려오는 차와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멀리 들려오는 북소리, 사람들 소리에 루카의 바람이 또 다시 그리워졌나보다. 이탈리아 여행의 후유증이 쉽게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람과 태양만 있으면 루카에서의 느꼈던 바람이 금새 미나를 찾아온다.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와서 5개월 간 다녔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또 다시 백수가 되었다. 사실 ‘또 다시’가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면 그녀는 백수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02년 대학에 입학하고, 그 흔한 휴학 한번 하지 않은 채, 4년만인 2006년 2월에 졸업을 했다. 구직기간 대략 6개월. 5월에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를 하고 4년 8개월간 일 하다가 2010년 12월 말에 회사를 정리하고,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벤처기업에서 일을 시작했다. 월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5개월 만에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운이 좋은 건지, 일복이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퇴사와 동시에 라임 파는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여행을 가기 전에 사장님한테 꽤 많은 금액을 여행경비로 받았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회사를 때려치워 버렸다. 8월 중순. 그녀의 ‘진짜 백수 라이프’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첫 직장을 그만 둘 때도, 두 번째 직장을 그만 둘 때도, 주변 친구들이 그녀에게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일을 하는게 어떠냐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과연 쉴 수 있을까? 쉬면 몸이 근질거려서 금새 일하고 싶어 질텐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백수생활을 해보니 이거야 말로 ‘체질’이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저녁까지 버틸 수 있게 최대한 많이 먹는다. 엄마가 돌려 놓고 간 빨래를 널고, 쓰레기도 좀 치운 후, 노트북과 책을 가방에 넣고서는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집 근처나 홍대에 있는 조용한 카페를 찾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켜 놓고, 혼자 놀기 시작한다.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을 펼쳐 이것저것 끄적거리면서 말이다. 엄마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도서관에 가서 놀기도 한다. 저녁 7시나 8시쯤 되면 고기를 찾아 나서는 하이에나처럼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누구랑 술을 한잔 할까…. 연락이 닿는 사람들과 만나서 술 마시고, 마음껏 수다를 떨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 집에 들어가면, 밀린 드라마를 한 두 편정도 보고 잠자리에 든다. 이런 일상의 반복이 어느 새 익숙해 져 버렸다. 그리고 너무 편안해졌다. 그렇다고 놀고 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몸담았던 회사에서 일을 할 때부터 해 오던 주말 저녁 아르바이트는 최저 생계비 마련을 위해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과년한 나이에 놀고 있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이기가 미안하니 말이다. 일을 하기 위해 인터넷 창을 열고 검색창에 ‘하반기 공채’를 검색한다. 하반기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대기업들을 포함 해 공채 예정인 기업들의 리스트가 보인다. 나이도 적지 않은 그녀를 받아 줄만한 기업이 많지 않을 것이란 건 알지만, 그녀 역시 지원해 보고 싶은 회사도 많지 않다. 문득 그녀의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다. ‘기업 문화가 좋은 회사에서 일 해 보고 싶어.’ 그리고 떠오르는 회사들이 몇 개 있다. 백신프로그램으로 유명한 회사, 무료 압축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회사 등이다. 채용 정보를 찾아보니, 그녀가 지원할 만한 부서가 많지 않다. 그래도 그녀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부서에 지원을 한다. 졸업한 이후 5년 만에 써 보는 이력서가 만만치는 않다. 열심히 이력서를 작성해서 제출을 했지만, 그녀를 받아 주는 데가 없다. 그러다가 문득 작년 트위터에서 채용공고가 인상적이었던 비누 파는 회사가 생각났다. 채용 공고를 검색해 보니, 본사 직원 채용 공고는 보이지 않고, 판매직 사원을 뽑는 구인 광고 밖에 없다. 일단 지원을 하고서, 인사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입사 지원한 이미나라고 합니다.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한번 만나 뵙고 싶은데, 차 한잔 할 시간 되실까요?’ 몇 분 후, 전화가 울린다. 당황한듯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시죠? 제가 이미나씨를 만나야 할 일이라도?” 그녀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한다. “아니, 회사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서요. 궁금한게 있어서 만나 뵙고 좀 여쭤 볼려구요.” 인사 담당자는 떨떠름하게 대답한다. “아, 그럼 이따 3시 반까지 파주에 있는 금릉역으로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고 보니, 오후 1시다. 자주 다니지도 않는 경인선 기차를 타고 제 시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후다닥 씻고, 짐을 싸고 집을 나선다. 간발의 차이로 금릉역에 3시 36분에 도착하는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담당자에게 늦겠다고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드디어 금릉역 도착! 담당자와 근처 카페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도대체 나를 왜 보자고 한거냐?’라는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어색한 인사를 하고 회사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이것저것 물어본다. ‘본사 직원 채용 공고가 보이지 않던데, 본사 직원은 어떻게 채용하는건지?’ 본사 직원은 주로 판매직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 중에 뽑는다고 한다. ‘글로벌 기업이라 세계 곳곳에 회사가 있던데,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도 있느냐?’ ‘아직까지 사례는 없지만, 일본에서 온 사람이 있다. 원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 요즘 공격적으로 매장을 오픈하고 있는 것 같다는 둥, 기업 매출이 생각보다 꽤 크다는 둥, 미리 알아 본 회사의 정보를 이것저것 애기 해 본다. 회사 매출 정보를 얘기했더니 담당자 눈이 동그래진다. “지금까지 그런 것까지 알아 보고 오신 분들은 없었다.”며 수첩을 펼치더니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다시 적는다. “늦어도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면접 일정에 대해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 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그녀는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일주일 후, 주말 오후에 그녀가 일할 매장의 매니저와의 면접 날이다. 노란 머리에, 비비크림을 바른 얼굴에, 커다랗고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깎은 듯이 뾰족한 턱선을 가진 첫인상이 꽤 매력적인 남자 매니저다. 매장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그는 카운터 맞은편을 가리키며 ‘저기 가서 자리 잡고 계세요.’라며 커피를 사러 간다. 미나는 흡연실 가기 전에 비어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커피를 주문하고 온 매니저가 그녀를 보지 못하고 흡연실로 들어간다. 그를 따라 들어가니, 흡연실 구석의 빈 곳에 자리를 잡는다. “담배 피세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대답한다. “아, 네…” “그럼, 담배 피면서 얘기하시죠.” “네, 근데 제가 지금 담배가 다 떨어져서…”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담배를 내민다. 그녀는 가지고 온 이력서를 그에게 건넨다. 그녀의 이력서를 대충 훑어보고 그녀의 신상에 대해 질문을 한다. 그리고 회사와 하는 일, 매장 분위기 등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그녀에게 “뭐 궁금한 것 없어요? 되게 사소한 것도 괜찮으니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글쎄요…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뭘 물어봐야 할지…” “아무거나 괜찮아요. 점심시간에 밥은 어떻게 먹는지. 이런 것부터.” 사실 그녀가 알고 싶었던 정보는 지난 주 인사 담당자를 통해 다 들어서 그녀는 궁금한 것이 별로 없었다. 매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야, 어차피 일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한 시간가량의 면접을 끝내고, 일어서면서 매니저가 시계를 보며 얘기한다. “와~ 얘기 굉장히 오래 얘기했네요. 저 원래 면접 5분이면 끝인데. 매장 잠깐 들러서 책 하나 줄게요. 합격 여부는 빠르면 오늘, 늦어도 월요일까진 연락 갈 거에요” 카페에서 나와 두 사람은 매장으로 간다. 매장 앞에 있던 회사에서 만든 신문을 그녀에게 건네며, “친구 만나기 전에 시간 날 때 한번 읽어 봐요.” “네…” 신문을 받아 들고 나오는데, 그녀는 왠지 느낌이 좋다. 왠지 빨리 합격 소식이 들려올 것 같다. 그런데 월요일 오후가 되었는데도, 들려와야 합격 소식이 감감 무소식이다. 저녁부터 그녀는 ‘아… 불합격이구나..’라고 직감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인사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미나씨, 연락이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저번에 얘기했듯이, 미나씨에 대한 기대가 꽤 크고, 회사에 아주 잘 맞는 사람인 것 같은데, 이런 결정이 나서 매니저님한테 불합격 이유를 물어보느라 좀 늦었어요. 그런데 정말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매장별로 매니저 개인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하는데, 그 기준이랑 좀 맞지 않았나봐요.” “아, 네…” “아쉬워서 그런데, 혹시 다른 매장으로 면접을 보는 것 어때요?” “아… 그건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 해보고 연락 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카페에서 책을 보다가 전화를 받은 그녀는 통화가 끝나고, 한참을 멍하니 하늘을 봤다. 그리고 그녀의 볼을 타고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린다. 머리 속에 온갖 생각들이 떠 오른다.
‘신은 내게 또 어떤 문을 열어 주시려고, 이러시나…’
‘정말, 한국을 떠나야 할 운명인건가?’
‘이제 좋은 회사, 좋은 일 따위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 정말 한국 떠날 준비나 해야겠다.’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약속이 있다. 친구를 만나 술집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 순간, 전화가 울린다. 얼마 전에 사업을 시작한 선배에게서 온 전화다.
“여보세요.”
“어, 미나야. 너 오빠 사무실에 오지도 않고, 잘 지내냐? 요즘 뭐해?”
“아, 네. 저요? 저야 뭐.. 그냥 잘 놀고 있어요. ㅋㅋㅋ”
“왜 놀아? 젊은 애가 일을 해야지. 너 오빠 회사 와서 일 해라.” “네? 무슨 일이요?” “와서 니가 하고 싶은 일 해. 영업을 해도 되고, 마케팅이나 기획을 해도 되고, 아니면 블로그를 하던지. 아무거나 니 하고 싶은 것 하면 되.”
“앗, 정말요???”
“그래. 아무거나 너 하고 싶은 것 하면 되니까. 사무실에 한번 찾아와.”
“네. 사무실로 한 번 찾아 갈게요.”
신기한 일이다. 그녀에게 기회는 항상 이런 식으로 찾아온다. 그녀를 향해 열렸던 문이 하나 닫히면, 또 다른 문이 그녀를 향해 열린다. 어쩌면, 면접을 봤던 회사는 그녀가 애써 먼저 찾아가 문을 두드렸기에 열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열정적으로 일해 보고 싶은 회사에서 그녀를 받아들여주지 않자, 금새 시들해져 버린 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을 ‘그냥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겠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 왔다.
이틀 후 목요일 오전, 그녀는 선배의 회사를 찾았다. 이제 막 생긴 회사치곤 사무실이 꽤 크다. 13명의 직원을 뽑겠다던 선배의 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14개의 책상이 마련되어 있다. 선배와 함께 일하기로 한 2명의 동업자와 4명의 직원이 자리에 앉아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들어서는 순간 그녀를 보는 6개의 시선들. 그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면접 보러 오셨죠?’라며 그녀를 회의실로 안내한다. 선배와 두 명의 운영진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면접보다는 어떤 회사인지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갔던 그녀이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중간에 앉아 있던 선배가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전반적인 온라인 광고 컨설팅을 하고 있는데, 기존에 인지도가 있는 아이템을 결합해서, 꽤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마침 그 전에 했던 일과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광고 기획과 마케팅 또는 광고 영업에 대한 업무였다. 영업은 5년간 해 왔었고, 비슷한 아이템 사업도 해왔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렇게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다. 거의 5년간 정장을 입고 다니다가 일을 그만두고 8개월간 캐쥬얼하게 입고 다니는 게 금새 익숙해지고 편해져 있던 터라, 정장을 입고 다니기 싫다는 이유로 영업은 배제하겠다고 앉은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사업 전반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주까지 대답을 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울로 돌아 오는 지하철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내게 열린 이 문을 향해 그냥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야 할까? 아니면 다른 문들을 좀 더 두드려 봐야 하는 걸까?’ 고민을 하다가 나중에 하자며, 잠시 고민을 접어두고는, 오랫동안 못 본 친구와 만나 6개월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폭풍 수다를 떤다. 못 본 사이에 친구에게도 참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관계에서의 변화, 신상의 변화, 외모의 변화 등등. 너무 많은 고민들로 살이 쪽 빠져 버린 친구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 남들과 달리 뛰어난 언어 감각을 되살려 다시 영어 강사로 돈벌이를 시작한 친구가 삶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고 하니 마치 그녀의 일처럼 기뻐한다. 고민의 내용도, 각자 추구하는 바도, 삶의 모습도 다르지만, 친구도 그녀도 삶이 저항할 수 없는 파도에 휩쓸리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비슷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얘기했다.
“나 있지. 이번 열흘간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이 내게 무척이나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어. 삶에서 얻는 행복을 과거나 미래의 어떤 모습이 아닌, 현재에서 찾기로 했거든. 그 동안 현재의 모습에서 즐거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아. 항상 내 주변에 있었던 소소한 행복들을 너무 놓치면서 살고 있었던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항상 내 곁에서 내 결정에 지지를 보내주고 있었던 가족들, 친구들과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얻는 위로와 격려, 쓸만한 노트북과 핸드폰,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한 몸이 있더라. 비록 돈은 없지만, 그냥 무엇이든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굳이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목 매야 하거나, 놓기 힘든 화려한 커리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한국에서 돈을 버나, 해외의 어딘가에 나가서 돈을 버나 별로 다를 게 없는 거지. 물론 언어가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 말이야 뭐. 나가기 전에 열심히 배우면 될 것 같아. 이태리 가서 살려고. 내년 상반기쯤? 이태리의 루카라는 마을이 있었어. 옛 로마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작은 마을인데, 너무 평화로워 보이더라. 그냥 그 곳에서 조용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졌어.”
한참을 그렇게 떠들고 나서, 헤어지기 전에 버스를 기다리면서 친구가 그녀에게 한 마디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서 살겠다고 하면, ‘무슨 해외야. 여기에서나 제대로 잘 살 것이지.’라고 콧방귀 뀌었을텐데, 너는 왠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태리어도 재미있게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말이지. 다 잘 될 거야. 걱정 마.”
너무나 큰 힘이 되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친구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녀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이탈리아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홍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얘기했다.
‘그래, 난 잘 할거야. 잘 할 수 있어. 니가 지금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가족? 돈? 직업? 아무것도 없어. 스물아홉의 나이. 어쩌면 수 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었어야 하는 나이지만, 남들과 달리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너에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게 거침없이 나아가라고 주는 기회일지도 몰라. 그 기회를 잡자. 멋진 정원? 세상이 너에게 만들어주는 멋진 정원 따위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을지도 몰라. 멋진 정원이란 니가 만들기 나름인걸!!! 파이팅!! 이미나!! 잘 될거야!!!’
멀리 보이는 한강도 ‘이 곳은 이제 니가 있을 곳이 아니야. 진짜 니가 있어야 할 그 곳으로 가. 어서.’라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