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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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화 되어 버린 삶의 아침]
종이 울리면 음식을 주고 나중에는 종이 울릴 때에 음식을 주지 않아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 P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그런 매일의 조건화 실험 속에서 살고 있다. 오늘도 자명종 소리에 맞춰서 눈을 뜬다. 회사에 갈 시간이다.
오전 7시 습관처럼 집을 나선다. 벌써 똑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노선을 따라서 5년반을 다닌 회사를 가기위해서다. 나서는 그의 걸음속에 '왜'라는 질문은 없다. 오히려 그의 이름이 왜 P인가라고 묻는게 어색한 것처럼 7시 출근은 이제 더 이상 설레임도 새로운 질문도 파고들 틈이 없는 그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거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화분같은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것처럼 현실이 자신을 답답하게 조여올 때도 있었다.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질문을 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면 던질 수록 더 무기력해지고 거대한 삶의 벽 앞에 놓여있는 기분이 들곤했다. 그리고는 언제부터인가 질문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어진다. 그냥 피해버리고 만다. 마치 옥수수를 먹고서 한 번 체한 사람은 옥수수를 굳이 찾아서 사먹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버스는 만원이다. 하지만 괜찮다 곧 붐비는 강남역만 지나고 나면 이 차의 절반은 내리니까 회사까지 앉아갈 수 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들에 문득 그는 불편하다. 한 때 그래도 산악부도 하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탐험을 즐기던 그였는데 왜 자신도 이렇게 안락함과 편안함만을 삶의 기준으로 찾고 있는지 문득 모르겠는거다. 가장이 된 이후로 찾아 본 부담 때문일까? 어쨌든 자리가 난다. 다행히다. 앉아서 갈 수 있다. 삶에서 바라는 것들이 하고 싶은 것들이 예전에는 하늘을 가릴 만큼은 지구를 쌀만큼 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 빨간 좌석 버스 의자 시트만큼 작아진 것 같아서 아주 잠깐 우울했으나 금새 눈을 감고 편안함에 몸을 맡긴다.
서서히 따뜻해져 오는 냄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청개구리를 생각하면 P의 일상은 적색 경보가 울려야 마땅하다. 두근 거림이 없는 아침 편안함이 삶에서 추구하는 전부라고 한다면 물의 온도는 지금쯤 80정도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익숙하게 혹은 습관처럼 책을 꺼내든다. 그래도 자신의 나태해진 일상을 만회해보고 싶은 시간 중에 버스에서의 독서는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어느덧 다시 감겨오는 눈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이렇게 열심히 해봤자 일상에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 이후로는 책도 잘 읽혀지지 않는다. 대체 어디서부터의 문제일까 책을 손에 쥔채로 어느새 잠이 든다. 어제 본 '나는 가수다' 방송에서의 가수들을 떠올린다. 무척이나 자신의 무대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그 자세에 지금 나는 어떤 열정으로 살고 있나 아주 오랜만에 질문을 던져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잘 수 있을때에 자 두는 것이 바쁜 월요일을 견딜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해버린다.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아침에 읽으려고 가져 온 책에 대한 후회가 밀려든다. 그냥 무겁고 귀찮기만 하다. 매사 의욕이 없고 회사에가서 그 어두운 얼굴의 사람들을 보려니 가기 싫어진다. 예전에 신입사원일 때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었던 선배들의 모습을 이제는 P 자신의 얼굴에서 읽고 있다. 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죽음을 무릎쓰고 적진으로 향하는 사기 충전한 장군의 모습이 아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모습이라니.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의 무대를 열정으로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더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 온다. 애써 마음의 병을 감추고서 사무실을 들어선다. 창문을 열수도 없는 18층 사무실은 그야말로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감옥이나 다름없다. 새삼 5년반을 이곳에 매일같이 출근을 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직장인 사춘기의 3년이 지나고 무기력의 2년반이 지나고 있다. 오늘 아침 문득 책상 한 쪽에 붙여놓은 친구가 예전 여행지에서 스케치해서 보냈던 엽서가 눈에 들어온다. 유리창이 열리지 않는 사무실 공간에서 그 엽서는 P에게 산소를 공급해주는 마음의 창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그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람이 오늘따라 너무나 감사하다. 인터라켄의 공기만큼이나 신선하다.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믹스 커피를 준비한다. 그러다가 문득 얼마전에 읽었던 '클린'이라는 책을 떠올리면서 내 몸을 한 번더 생각한다. 믹스 커피를 내려두고 시원한 생수를 한 컵 마련한다. P의 친구 S도 한 때는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네팔로 여행을 떠난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야겠다면서 한 달 휴직을 하고는 떠나버렸다. 이 엽서는 S가 그곳에서 보내 온 그림 엽서이다. 엽서에서 바람이 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해준 그런 귀한 마음 전함이다. 엽서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 문득 일상의 경보 온도가 80도나 되어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어제 죽어간 많은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한 오늘의 신선함에 대한 모독의 온도가 90을 넘어가고 있음에 자신이 싫어진다. 그 때 무작정 회사를 떠나 네팔로 날아간 S가 무모하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90도의 물에 끓기 직전의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 있자 어쩌면 무모한건 열정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조연처럼살고 있는 P 자기 자신이 아닌가 뒷늦게 생각해본다.
S가 문득 보고 싶다. 그를 떠올리자 네로와 함께 이 산 저 산을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파트라슈가 생각난다. 자신은 파블로프의 개이고 그는 자유로운 파트라슈. 꾸욱 눌러왔던 삶에 대한 질문들이 봇물터지듯이 올라온다. 일상속의 습관적인 당연함에 대해서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 질문을 놓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놓아버려서는 안되겠다고 마음 먹는다. 자신의 삶을 사실로서만 받아들였지 그 안에 이야기를 담을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누가 자신의 삶을 사서 읽어줄 것인가 싶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런 무미건조한 사실들만 나열된 하루하루는 따분하기만 하다. S를 따라 억지로 웃어본다. S는 아무리 힘들어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었다. 삶과 여행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여행가 같았다. 이제 이곳은 있을만큼 있었으니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떠나듯이 또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새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P는 알고 있다. 자신이 지금의 이러한 마음 상태로 어디를 간다한들 그 곳 역시 같은 무기력과 습관적인 일상으로 탈바꿈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생각한다. 파트라슈와 파블로프의 개의 차이를.
습관적인 일상의 조건들에 대해서 하나씩 원하지 않는 종소리를 제거할 것이라고. 종소리가 아닌 자신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문득 바람을 닮은 S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네팔은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그의 삶은 어떤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는지 말이다. 자신의 하루에도 이제 이야기가 흐를 수 있도록 P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자 한다. 웃음을 불러낸다. 처음에는 억지 웃음이였는데 지금은 진짜 웃음인지 억지웃음인지 모르겠다. 웃고 있다. 아직 그에게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음에 감사한다. 그는 S 에게 그가 보내 준 엽서를 사진찍어서 보내준다. 네팔의 상쾌한 공기덕분에 오늘 아침 무기력한 자신의 삶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왠지 오늘은 퇴근 길에 노래하면서 퇴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삶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으니 말이다.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마치 왕자가 키스해 주는 것 같은 깨어남의 아침이다.
[에필로그]
평소에 늘 있어왔던 엽서인데도 보이지 않는다. 늘 거기에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그 무기력이 깊어질 때 쯤에 엽서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자동화된 조건이 아닌 살아있는 삶의 메세지가 다가온다. 이것도 다행이다. 이 메세지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100도의 물에 있으면 삶 속에 매몰되어서 그렇게 전사할 수도 있다. P의 일상이 낯설지 않다면, 위험신호라고 보면 된다. 삶의 의미를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찾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에는 사실만이 점처럼 나열된 일상에서 누군가와 공감할 수 없는 로보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사라진 삶에 이야기를 불어넣어주자. 열정이 사라진 삶은 존재할 수 있지만 열정이 사라진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P에게 다시금 예술이 흐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오늘 그는 콧노래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점점 더 삶의 많은 부분들이 그의 창조성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직감을 신뢰하기 시작하려면 일단 무기력에서 벗어나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건 그 자신만 열정과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다면 가능하다. 다니엘 핑크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관심있게 생각하던 '창조성 회복을 통한 내 삶의 르네상스'와 접목해서 생각해 본다. 창조성 회복이란 어찌보면 다니엘 핑크가 말한 이야기와 닮았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샘솟는 그것, 열정의 회복, 그것은 삶에 예술이 들어올 때에 가능하다. 공감이 함께할 때 가능하다. P의 무기력하던 일상에서 조금씩 창조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기대가 된다.
당신의 직감을 신뢰하라.. 이는 낚시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 폴 사이먼
BILL EVANS - peace piece
http://www.youtube.com/watch?v=Q4R9l2AJ3og

정해진 시간안에 몸을 정해진 그곳으로 옮기기 위해 분주하다.
마음은 그 터벅거림, 종종거림 보다 항상 몇 미터 뒤에서 마지못해 따라온다.
돌아보니 때묻고 생기없는 얼굴 하나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시간을 세고 있다.
봉지 속에 남아있는 과자 개수를 세어보는 어린애의 안타까움처럼
그렇게 생의 시간을 세고 있다.
사샤의 글 첫 대목에서 나의 지난 날 출근길을 회상해본다.
마음이 몸보다 앞서 달리며 나에게 빨리 오라 손짓하는 그런 출근길을 꿈꿔본다.
사샤야. 글이 참 좋다.
일상에서 죽어있는 본성을 깨치는 그런 순간들의 이야기를
그런 본성을 깨치게 하는 일상에서의 작은 기제들을
너의 감성과 세심함과 밝음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주 근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G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