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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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선다. 하루 종일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얼마 남지 않은 책을 마저 읽고 노트북을 펼친다. ‘어떻게 백수가 더 바쁜 거냐?’며 행복한 투정을 부려본다. 연구소 오프라인 수업일지를 정리하고, 어제 쓰다가 멈춘 글을 끄적거리다 보니 어느 새 시계는 오후 6시를 향하고 있다. ‘카톡!’하고 문자가 온다. 동네에 살고 있는 친한 학교 선배가 보낸 문자다.
“저녁에 약속 있니? “맥주나 한잔 하자고.”
“별 약속 없어요!!! 맥주 좋죠!!”
“그래, 그러면 서울대입구역에서 보자.”
“선배는 지금 어딘데요?”
“나 지금 대림.”
“아, 네!! 지금 바로 나갈게요.”
그녀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화려한 백수라이프를 즐기면서 그녀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이렇게나 많으니 말이다. 동네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맥주 한잔 생각나면 늘 연락하지만, 항상 선약으로 바빠 얼굴 보기 힘든 선배인데 먼저 연락이 오니 더욱 더 반가운 마음이 크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생각한다. ‘좋아하고, 편안한 사람들만 만나기도 부족한 시간이야.’ 이제는 여러 가지 고민들도 정리되고, 살고 싶은 삶의 모습들도 그려지니, 그녀의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왔나보다. 그 동안 잠시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여유,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 있게 된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을 사람들도 알게 되었는지 그 동안 연락이 뜸했던 이들이 하나 둘 연락을 해 온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가 보다. 그녀의 여유로움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듯 사람의 마음, 감정이란 녀석들이 다른 이들에게 서로 전해지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버스를 탄다.
드디어 백만 년 만에 선배를 만났다. 매운 쭈꾸미가 먹고 싶다는 선배와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걸으니, 그날 따라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진다. 쭈꾸미에 맥주 한잔을 하며 얼굴 못 본 시간동안 면접에서 떨어진 이야기, 백수 생활이 체질이라는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등 다양한 주제들로 이야기 꽃을 한참 피웠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그녀라, 쭈꾸미보다 물을 더 많이 덕에 배가 터질듯한 그녀와 남은 음식을 다먹어보겠다며 열심히 먹은 선배 둘 다 한껏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선다. 저녁 9시. 왠지 아쉬워 한잔 더 하자는 그녀의 말에 배가 불러 도저히 못 먹겠다는 선배를 차마 붙잡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아쉬운 마음 역시 전해졌는지 한강에 맥주 마시러 간 동아리 후배들이 그녀에게 한강으로 당장 오라는 유혹의 손길을 내밀어, 집으로 가던 발걸음은 고이 접어 한강으로 돌린다.
그녀의 삶은 늘 이런 식이다. 그 때 그 때, 큰 선택이건 작은 선택이건 그저 마음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오늘 따라 보고 싶은 이들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여의나루역에 내리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그녀를 맞이 한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 왔나 보다. 그래서인지 여의나루역 앞 한강변은 그 바람을 맞이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안주를 하나 사서 후배들을 찾아 나선다. 어렵게 사람들 틈 속에 있던 후배들을 만났다. 못 본사이에 각자가 있었던 얘기와 어쩌다 시작하게 된 각자의 고등학교 이야기에 웃음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 중 한 명은 ‘소위 지방 명문고’에서 있었던 고등학교 생활을 이야기하는데, ‘뭐야~~~ 고등학교 생활 왜 그렇게 재미없게 한거야??’라며 핀잔을 준다. 그리고는 ‘누가 더 놀았나?’ 대회가 열린 것마냥 하나 둘씩 고등학교 생활이 담긴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그녀도 고등학교 때 첫사랑과의 기억을 꺼내 놓으며, 잠시나마 행복했던 지난 날을 떠올려 본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한강대교를 밝히던 불빛들도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겨 버렸다. 다음 날,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하는 후배 하나는 눈이 절반쯤 감겨서 졸음을 애써 이겨내고 있다. 지하철역 앞에서 후배들을 한번씩 안아주고 그녀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그 동안 돈이 없어서 후배들 만나기가 조금 꺼려졌던 그녀였기에 후배들과의 이런 급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인지 모른다.
오래간만에 만난 후배들과 이탈리아 여행에서 있었던 추억들을 나누고, 이탈리아에 가서 살고 싶다는 계획을 이야기 했을 때, 후배들의 반응이 그녀에게 또 다른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 왔다.
‘언니는 정말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아요!!!’
‘아, 그래? 내가 그랬나?’
‘그냥, 항상 그렇게 사는 것 같아서 되게 부러워요.’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항인 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처럼, 동물원 우리 속에 있는 사자가 우리 속에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녀가 살고 있는 삶이 자유로운 삶인지, 그리고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로 한번씩 그녀의 자유 분방한 삶에 대해 인지하곤 한다. 사실 그녀의 삶이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운 삶이라… 내가 살고 싶은 삶이지.. 나는 어떤 자유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잠을 청한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얼마 전에 이탈리아어 교재와 함께 구입한 그림 그리기 책을 펼쳐 들었다. 하루에 30분씩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 그림이 그리고 싶었을까? 지금까지 익숙하게 사용해 온 말이나 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녀는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오랜 고민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는 편이다. 책에서 그림 그리기 방법을 워낙 친절하게 알려 주어서, 첫 장에 있는 과제들을 무사히 마쳤다. 왠지, 또 다른 예술가의 길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라 기분이 좋다. 그리고 그 동안 그토록 하고 싶었던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왠지 뿌듯하다. 그리고는 이탈리아어 첫걸음이란 책을 펼쳤다. 그 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평소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던 이탈리아어들을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책을 한번 쭈욱 훑어 본다. 그런데, 왠지 이 책 하나만으로는 이탈이아어 회화까지 마스터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술에 배부르겠냐만은, 그래도 기왕 시작한 것이라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욕심이라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몇 년 전, 친구가 알려 준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 주고 배울 수 있는 파트너를 찾을 수 있는 Language Exchange가 생각났다. 그래서 당장 노트북을 켜고, 관련 사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두 군데 정도를 찾아 회원가입을 하고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중에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이탈리아 사람을 찾는다.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이탈리아어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한 사이트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을 세 명 정도 찾았다.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에게 쪽지를 보낸다. 몇 시간 후 가입했던 사이트에서 쪽지가 왔다. 그녀가 먼저 쪽지를 보낸 사람은 아니었다. 33세의 남자이고,. 이태원에 살고 있는 러시아 사람인데 이탈리아에서 산 적이 있어서 이탈리아어도 잘 할 줄 안다고 생각이 있으면 쪽지를 달라고 한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또 몇 시간 후, 그녀가 쪽지를 보낸 이탈리아 남자에게 쪽지가 왔다. 이렇게 연락이 되어서 반갑다고, 자기도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다며, 공부도 연습도 열심히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어는 완벽하게 알려줄 수 있다고 호언 장담을 한다. 추석 연휴에는 일본 여행을 가니까, 갔다 와서 주말에 연락하자는 내용의 쪽지였다. 다다익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그녀는 그의 쪽지에도 답장을 했다. 반갑다고, 영어는 조금 할 줄 알고, 이탈리아어 실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그리고 한국어는 잘 가르쳐줄 수 있다고 보냈다. 두 명과 쪽지를 주고 받고 나니, 왠지 일이 착착 진행 되어 가는 느낌이다. 학원에 가서 돈을 주고 이탈리아어를 배울 수도 있겠지만, 백수 신세라 돈이 없기도 하지만, 서로 언어를 가르쳐주면서 배우게 되면 더 빨리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이 닿은 두 사람과 만나서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에 왠지 벌써부터 들뜬 그녀다. 두 사람이 아무리 잘 가르쳐 준다고 해도,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책을 보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든 다니면서 꾸준히 음성 파일을 듣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지식은 없지만 계속 듣다 보니 이탈리아어가 굉장히 재미있는 언어란 생각이 들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난이도가 조금씩 높아졌지만, 들어보니 이탈리아어의 체계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어를 어떻게 쉽게 잘 가르쳐줄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고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얼마 전 동생이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책 하나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이 생각나 호주에 있는 동생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페이스북을 통해 쪽지를 보냈다. “동생~ 나 곧 이탈리아 사람이랑 랭귀지 익스체인지 하기로 했어. 한국어를 가르쳐 줘야 하는데, 얼마 전에 니가 보내달라고 했던 그 책 한국어 가르치기에 괜찮아?? 어떻게 하면 쉽게 잘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이탈리아에 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그녀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 준다. 가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인지, 어떤 비자로 가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일단 언어에 대한 생각을 꽉 차 있어 이런 디테일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해 보지 않은 그녀였기에 그제서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났던 한국 가이드 분에게 메일을 보내 보기로 했다. 학생 신분이 아닌 장기체류 비자나 취업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직장이 꼭 정해져 있어야 하는 것인지, 이탈리아에서 식당 등에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 식당에서 일할 경우에 급여와 생활비는 어느 정도나 되는지 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탈리아 한인회에서 만든 웹사이트에 이탈리아에 나가 있는 한국 기업에서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 구인 광고도 드물지 않게 올라온다. 이 구인 광고를 보니, 더욱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다. 마침 일본여행을 다녀 온 이탈리아 청년 안드레아에게 문자가 와서 토요일 오후에 그녀의 집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정했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왠지 친절하고 재미있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빨리 토요일 오후가 되어서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을 통해 이탈리아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면 볼수록 1년간 이탈리아에 머무를 수 있는 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일단 가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확정이 되어야 하고, 어학 공부를 하게 되면 학생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탈리아에 있는 한 디자인 학교 웹페이지에서 발견한 정보를 보니 밀라노에서 필요한 생활비는 한 달에 거의 200만원이다. 200만원을 벌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탈리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직종에 따른 시급은, 컴퓨터 관련 된 프로그래머나 웹디자이너들이 시간당 30유로, 통역과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20유로, 서빙을 하는 사람들은 8유로 정도이다. 노동시간이 많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하루에 8시간 정도 일을 할 수 있고, 토요일까지 일을 한다고 하면 24일 정도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녀가 이탈리아에서 서빙으로 벌 수 있는 돈은 대략 170만원 정도가 된다. 살게 될 집의 월세나, 생활비를 아껴 쓰면 왠 만큼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한국에 보내야 할 돈이 전혀 없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하지만, 아직 학자금 대출도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어느 정도의 여유자금이 필요한 그녀라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벌 수 있을까. 또 다른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프로그래밍이나 다른 전문 기술을 배우는 것이 좋으려나? 라는 생각도 든다. 역시 어디서든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하나쯤은 익혀 뒀어야 하는 거라며!! 뒤늦은 후회도 해 본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아도 언어가 유창해야 가능한 법이다! 요즘 그녀는 이탈리아 청년과의 만남을 앞두고, 그와 가능한 의사소통 수단이 영어 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영어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영어 원서가 도착해서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시는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아이고, 왠일이야. 갑자기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엄마에게 이런 공부 한다고 칭찬 듣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백수로 놀고 있긴 하지만, 왠지 뿌듯해지는 그녀다. 주문한 책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영어강의 동영상을 보고, 강의 숙제를 위해 책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는 동생과 점심을 먹으러 홍대로 가는 길. 지하철을 타기 위해 마을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버스를 보고 ‘지금 당장 인천 공항으로 달려가 이태리행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홍대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건너편에 보이는 ‘밀란’이란 이름을 가진 빌딩을 보고 ‘밀라노’를 생각하게 되는 자신을 보며, 정말 고작 열흘 가 있었을 뿐인데도 이탈리아 앓이가 정말 심각하다고 새삼 느낀다.
이탈리아에서 드는 생활비를 구체적인 숫자로 접하고 나니, 가서 바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상황과 초기 정착 비용을 좀 모아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렇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불현듯 그녀의 머리를 스친다. 얼마 전 만났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주부터 일을 하겠다고 얘기했다. 계속 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고, 해야 하는 업무는 썩 내키지는 않지만, 우선 일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물론, 집도 가깝고 고정된 월급이 나오는 회사에 입사 지원을 해 둔 상태라, 그 회사가 결정되면 회사를 옮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 그녀에게 열리는 문이 있으면, 그녀는 큰 망설임 없이 열린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별로 걱정이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녀는 지갑을 두둑하게 채워줄 수 있는 연봉이나, 개인의 명예보다는 좋은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는 회사, 재미있고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 일과 회사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가 우선이었기에 일할 곳을 결정하는데 별로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역시 당장의 생활비를 충당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그것과 더불어 더 다양한 경험을 쌓음으로써 향후 가지고 있는 사업가에 대한 모습을 그 곳의 사장님들을 통해 찾고자 하는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1년 정도 해 봐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시작하긴 했으나, 일 한지 3개월이 되는 시점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이 정도면 됐다.’라는 생각이었다. 몸이 힘들고 주말에 놀지 못해서 힘들기 보다는 손님들과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찾아 오는 불쾌감들이 은근히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회사에 다시 출근하기로 결심한 그날 사장님들께 이야기를 했더니, 사장님들 역시 일과 아르바이트를 겸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판단을 하셨는지,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 아르바이트를 마지막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이어픈을 통해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지난 3개월 동안 있었던 일들과 감정들 그리고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사장님들과 나누었던 유쾌한 수다들, 스쳐 지나갔던 진상 손님들, 그리고 그녀를 살갑게 대해 주셨던 단골 손님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어 처음 경험한 써빙 아르바이트의 경험이 앞으로 그녀가 걸어가며 겪을 삶에 꽤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금요일 저녁. 3년 전에 함께 했던 단체에서 진행 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가는 길. 그 단체에서 함께 했던 활동가들의 모임이었다.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지난 8개월간 이전에는 고객이자 친구로 자주 연락하고 지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인지, 오래간만에 볼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왠지 어색하지 않을까라는 걱정과 얼른 보고 싶다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도 어떤 고민이든 대부분의 경우에 힘든 것보다는 즐거움이 더 컸던 과거의 경험들을 되살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 해 본다. 늦게 도착해서 보고 싶었던 이들의 얼굴을 전부 보진 못했지만, 역시 어색함보다는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가운 사람들이 많다.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서로의 근황도 물어보고 인사를 나누며 맥주잔을 기울인다. 그녀의 근황을 묻는 친구에게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 이탈리아 루카에서 찾은 평온함에 반해 내년 상반기에 이탈리아에 가서 살 계획을 마치 내일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사놓은 사람마냥 신나게 늘어놓는다. 그 얘기를 들은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와~~~~. 멋있다~~~!!! 그래, 왠지 너는 진짜 내년에 이탈리아 갈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아… 내 친구들에게 나는 이런 이미지인가? 무언가 하겠다고 하면 현실 상황과 관계없이 뭐든 진짜 해 버리는 그런 친구?’ 이란 생각을 한다. 이 친구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 만났던 다른 친구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터라, 그녀에게 친구의 말이 더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다시 회상해 본다. ‘내가 하겠다고, 하고 싶다고 했던 일들… 그리고 진짜 해냈던 일들…’ 정말로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그녀가 생각한대로 해내곤 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주변 친구들이 이런 얘기를 해 주는 건가 싶다. 왠지 친구의 말을 들으니 그녀 역시 내년 이탈리아에서의 새롭게 시작할 생활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두둥!!! 드디어 이탈리아 청년을 만나기로 한 토요일이다. 늦게 일어나 숙제를 하려고 했지만, 고등학생처럼 공부하려고 앉으면, 평소 보이지 않던 쓰레기가 눈 앞에 펼쳐져 있고,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가 도드라지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설거지며, 밀려있던 쓰레기 처리를 하고 나니 어느 새 이탈리아노와의 약속 시간이 코앞이다. 늦지 않게 씻고 나가려고 했는데, 이 날따라 씻는데도, 나갈 준비를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결국 약속시간을 넘기고 그녀는 급히 이탈리아 청년에게 늦겠다고 문자를 보낸다. 정확히 4시 3분에 약속장소에 도착. 기대했던 잘생긴 이탈리아노는 아니었지만, 훤칠한 키에 예쁜 노란 머리의 외국인 청년이 서 있다. 그에게 다가가 ‘Are you andrea?’라고 물었는데, ‘No!!!’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엇,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다던 안드레아는 보이지 않는다. 이상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이게 왠일!!!! 서울대 입구역, Seoul National Univerty 역에 있어야 할 이 친구가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역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길…’ 혹시나 했던 걱정이 현실로 되어 버려서, 그녀는 그냥 자기가 교대역쪽으로 가겠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근처 카페에 가서 기다리라고 다시 문자를 보낸다. 그랬더니, ‘괜찮다고. 여기서 기다리는게 더 낫겠다고 이쪽으로 와줘서 고맙다.’는 문자가 온다. 분명 서울대입구 역이라고 친절하게 한글까지 써서 문자를 보냈던 그녀이기에 ‘뭐지? 얘 일부러 자기 집에서 가까운 교대로 잘못 간 척 하는거 아니야?’라는 생각과 ‘이상한 애면 어쩌지..’ 온갖 상상에 휩싸인 채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간다. 교대역에 도착해서 불안한 마음 반, 잘 생긴 이탈리아노에 대한 기대 반으로 3번 출구로 향하는 그녀. 출구 밖으로 나오니 출구 바로 앞에 외국인이 한 명 서 있다. 이번에는 제대로 찾았다. 예전 이탈리아 여행 사전 모임에서 봤던 알베르토만큼 잘 생긴 이탈리아노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적당한 키에 노란 머리, 26살이란 나이보다는 조금 더 ‘아저씨’스러운 얼굴을 가진 이탈리아노다. 두 사람은 함께 맞은 편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잘못 찾아와서 미안하느니, 괜찮다느니 이런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가 영어를 너무 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영어를 그리 유창하게 잘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카페에서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안드레아는 녹차를 주문했다. 약속장소를 갑작스레 바꾸게 돼서 미안했는지 쿨하게 차값을 계산하는 그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에서 한국어 교재를 꺼낸다. 그녀 역시 얼마 전에 주문한 이탈리아 책을 꺼냈다. 생각보다 그는 한국어를 꽤 잘 하는 편이었다. 글을 쓰고 읽을 줄도 알고, 간단한 한국어로 대화도 가능하다. Language Exchange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둘 다 처음이라 어떻게 할지 어리버리하게 있다가 처음에는 영어도 대화를 이어갔다. 한국에 온 지 6개월이 되었다는 안드레아는 이태리에서 공부를 마치고, 싱가폴에 있는 회사를 3년 정도 다니다가, 현재는 한국의 대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에서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단다. 같이 공부하는 이들 중에 가장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배워서, 즉 ‘우등생’인 덕분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회사에서 일대일 한국어 과외를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받고 있단다. 그 말을 들으니 ‘이 사람, 한국어를 정말 배우고 싶은 모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을 하는지, 주말엔 주로 뭘 하는지, 서로 만나는 시간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서로의 언어를 왜 배우고 싶어하는지,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뭔지 등등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짧은 영어와 간단한 한국어로 2시간 정도 떠들었다. 각자 이후 일정이 있어서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만나자고 얘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탈리아노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이탈리아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학습이 되어 있지 않으면, 이건 뭐 이탈리아 청년 한국어 연습상대밖에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 속으로 스물스물 기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