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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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시간을 이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시간이 멈추어선 그 순간에
오직 하나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이 길에 마음을 담았느냐?’
“독일 시합을 선택하다니, 아이구... 호랑이굴에 들어갔다 오셨군요.”
나이보다 훨씬 더 하얗게 세어버린 은빛 짧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빚어 넘긴 구 박사님이 말했다.
나는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그는 체육과학연구원의 전임연구원이다. 이 나라 최고의 명문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였으면서도 사람들이 폄하하는 체육학을 선택했다. ‘머리나쁘면 운동이나 해라! ’ 하던 그 시절에 체육학을 선택했고 스포츠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쾰른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에 체육학으로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나라는 독일의 쾰른 체육대학이 전세계에서 유일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과 함께 철저한 연구태도나 사람을 대하는 인간관계의 느낌은 마치 독문학을 접하는 듯 했다.
태능의 스포츠과학연구원의 연구실들에는 늘 늦은 밤에도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그의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포츠의 무대는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 정치, 경제, 과학의 집결지였다.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의 스포츠는 더욱 빠른 속도로 세계화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그렇게 전국체전이나 아시안 게임의 무대에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의 무대로 옮겨가고 있었다. 세계화라는 말이 우리에게 낮설 때부터 한국의 스포츠는 이미 세계 무대에 서 있었고 괄목한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런 스포츠 한국의 숨어있는 공신은 바로 스포츠 과학화를 전담하고 있는 스포츠과학연구원이었다.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그리고 국내의 우수한 대학을 졸업한 박사들이 헌신하는 곳이기도 했다. 스포츠 과학연구원은 최신 최첨단의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실전 경험과 전통적인 훈련방식으로 익숙하지 않은 현장접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그리고 다양한 종목의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 정책적인 배려와 국가적인 지원과 함께 막강한 노우하우를 축적해가고 있었다.
이미 대학원에서 스포츠 심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던 나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지도할 수 있는 일급 경기지도자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학문적인 배려와 개인적인 격려로 나는 독일 유학을 계획 했다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독일 유학을 포기하고 대만국가대표팀 총감독으로 가게 되었을 때, 운동학습과 제어의 세계적인 권위자 칼 뉴웰의 수제자였던 대만의 국립사법대학의 닥터 리우에게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생활체육을 위한 일급 생활체육지도자 과정을 하면서도 다양한 운동과학적 훈련방법론에 대한 많은 토론과 함께 나의 현장사례연구를 지원해 주었다.
그는 임의적이고 실전적인 전투력과 승리에 치중하는 나에게 체계적인 학문적 배경과 승리를 위한 견고한 초석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전통적인 펜싱에서 벗어나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한국적인 펜싱의 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경기접근법(games approach ways)을 이용한 전술훈련을 개발했는데 검토가 요구됩니다.”
벌써 오래전에 나는 유럽의 훈련방식과 사고방식의 분석을 요청했었고 구박사님의 결론은 유럽의 개인 훈련방법과 전술훈련에 관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팀 훈련의 결여와 전통적인 사고로 인한 전략적인 문제들에 대해 분석과 평가를 제공해 주었었다.
우리의 생각은 일치했다. 근본적으로 개인운동인 펜싱에 관해 그들은 팀훈련이나 전략이 없다는 것이며 개인 훈련내용도 기술훈련에 집중되어 있고 전술이나 전략은 거의 대부분이 실전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번 유럽전지훈련 기간 동안 가장 최근의 세계펜싱의 경기흐름을 고려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없는 팀 전략을 개발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훈련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실제 경기참여의 부족으로 인한 개인 전술훈련 방법을 개발했었다.
내가 구박사님에게 내어 놓은 최종 훈련계획은 A4 한 장에 집약되어 있었다.
1. 팀전략
경기 진행 순서 |
구 분 |
목 적 |
목 표 |
비 고 |
3-1-2 |
탐색 |
당일 기술,전술 탐색 |
최소 실점 |
핵심맴버 봉쇄 |
1-3-2 |
접전 |
개인 전술적인접근 |
최대 득점 |
득점 시도 |
1-2-3 |
지연및 강공 |
팀 전략적인 접근 |
실점방지 또는 |
적극적 지연 및 |
1.팀웍을 고려한 개별적 기술및 전술의 특성화 |
2. 전술 훈련 계획
주 제 |
심볼 |
포커스 |
내 용 |
비 고 |
전술적 사유 |
망설이지 않는다 |
결정하라 |
하나를위한 |
점수가 나고 돌아와 앙가드라인에 서기 전에 결정하기 |
의사 결정 |
기회가 오면 |
먼저 시도하라 |
단서 확보 |
시간적 여유 확보 |
문제 해결 |
정면으로 |
상대 강점을 |
초기 봉쇄 |
핵심기술을 붕쇄시켜 |
3. 전술 훈련 방법
주 제 |
시간 제한 |
공 간 제 한 |
목 표 |
비 고 |
시 간 |
3 초 |
1. 앙가드 라인5m |
승부 |
3-5개 동작 |
공 간 |
1 분 |
앙가드 라인5m |
지연 |
적극적인 방어:초반봉쇄 |
계획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구 박사님은 계획서를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돌려 내려 놓으며 말했다.
“수억짜리 훈련 계획서치고는 너무 간단하지만...”
그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의 눈과 발이 되어 주기에는 충분하군요..”
내가 왼손 검지 손가락으로 귀 위쪽 머리를 집어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머지는.... 여기...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미 보냈던 자료를 숙지하고 있던 그가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말했다.
“이제, 내 도움이 필요없을 것 같은데... 듣는 정도.. ”
“박사님! 적게는 몇 사람의 운명이 그리고 수 많은 사람의 펜싱 인생의 행로가 걸려 있습니다.노력했다고 해서 충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칼 날을 틈새에 꽂고 매달려 있는 저는 제대로 춤을 출려면 스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가끔씩 무협지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빗대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긴장되는 심각한 분위기를 가라 않히곤 했었다.
본래 두께보다 훨씬 두툼해진 훈련일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김 코치, 비급에 구멍나겠네... 이걸로 내공은 충분한 것 같으니,... 자..천길 벼량에 뛰어내려 틈새에 칼을 꼽았으니 솟아 오를 일만 남은 것 같소. ” ^^
난 그의 눈빛을 좋아했다. 오랜수련과 고행을 거쳐 이루어지는 맑고 깊은 눈, 그렇게 파랗게 빛나는... 어떻게 학문을 닦는 사람에게서 이런 ... 프랑스 비시의 진검마스터 같은 검기어린 눈빛이 솟아나는 걸까... 그의 눈은 전쟁과도 같은 훈련과 시합으로 지친 나를 평온하게 주었다.
“김코치가 훈련 주제를 기술적 난이도를 선택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으로 선택한 것은 창조적인 새로운 비급이요, 선수들이 비급에 적응하는데는 아직 미지수이기 때문에.... 경과를 보면서 계속 상의해서 비급을 완성시켜봅시다.”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는 휘청이는 칼 날 위에서 ....한 면은 갈채고 한 면은 비난인 그 칼날위에서 추는 제 비급의 춤사위를 한 번 보여드릴까요?”
하면서 내가 살짝 일어섯다 왼손을 머리위로 쭉 뻗어 칼을 쥐듯하며 무릎을 구부려 점프하려고 하려는 자세를 취하자. 그가 일어서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같이 춥시다.”
우리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신뢰와 존중의 눈빛을 주고 받았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밤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점검하는 것이었다. 기초 체력훈련과 전문체력 훈련의 방법들과 앞으로 남은 기간을 고려한 훈련내용의 재 배분, 지루함과 습관적인 반복을 배제하기위한 동일한 훈련의 새로운 방법들, 앞으로의 문제들...
스포츠 과학연구원에서 선수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지나온 시간을 검토하고 있을 때, 정말 까마득한 시간위에 있었다. 그렇게 그 10분도 채 안되는 그 짧은 시간이 아주 아주 먼 여행길에서 돌아 온 것처럼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운동장을 지나 선수회관을 지날 때, 문득 일찍 들어온 재린이 인사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오셨어요! 선생님! 그런데 전지훈련 한 달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죠, 몇 년은 된 것 같아요!다들 그래요...참 신기해요” ^^
훈련 자료와 렛슨 내용들을 뒤적이다 그렇게 적었다.
“그렇다. 시간이 변화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시간을 이끄는 것이다. 의식은 시간, 그 일초 앞의 일초와 일초 뒤의 일초가 같은 절대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공간위에서 이루어 낸 변화의 양을 일상의 시간으로 환산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해진 양의 훈련을 주어진 시간에 한 것이 아니라 시합과 훈련을 통해서 성장한 엄청난 변화의 양을 훈련한 시간이 있는 것이다.시합과 훈련중의 정신과 신체의 정교한 움직임과 변화를 위한 조정과 통제에 몰입해 있는 동안, 흐르지 않고 멈추어 선 ‘순간이 영원한’ 그 시간 위를 달려온 것이다.
일상으로 되돌아온 나나 재린의 의식은 그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