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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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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7일 10시 00분 등록

#. 그 여자의 집

우리 가족은 몇 해 전부터 가을이 되면 장모님의 기일에 맞추어 여행을 떠난다. 논산의 외진 무덤가에서 노래와 기도를 드리고, 이번엔 삼각대를 놓고 가족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함양의 시골집에 사는 그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분은 나와 아내가 인도의 요가 대학 숙소에 머물 때, 바로 옆방을 썼던 누님이시다. 지금 변경연 연구원을 시작한 것은 이 누님의 소개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누님은 때때로 요가도 가르치고, 또 가끔은 책 만들기 등 돈버는 일을 한다. 그러나 주로 집 안밖에 조금씩 있는 텃밭을 돌보고, 자기식대로 그림도 그리며, 가까운 '지리산학교'에서 사진도 배우는 등 돈 안 버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저녁 식사시간에 맞추어 도착해서 된장국, 고소한 두부부침, 시큼한 고추절임에 현미밥 한 공기를 뚝딱 먹었다. 그리곤 싸들고 간 와인과 함평 막걸리, 그리고 사는 얘기와 주변 사람들 얘기를 안주삼아 술판을 벌였다. 그러던 중 난 이번 주에 사부님의 '필살기'라는 책을 읽었기에, '누구나 필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런 질문을 했다.

"누님은 본인 책은 안 써요?" 질문을 하며 내가 책을 읽으며 정리한 생각을 말하려고 했다.

"별로 쓰고 싶지 않아. 컴퓨터 앞에 앉으면 몸도 안 좋아지는 것 같고, 그냥 요새는 노는게 좋아..." 누님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체념이 담긴 말 같기도 하고, 초월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누님은 글쓰는 재능이 있으니까, 매일 매일 열정을 가지고 쓰고, 거기에다 시대적인 흐름을 타면 이름을 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젊어서부터 준비해야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 늙어서 고생하지 않을 것 아니냐. 그러니 의지를 가지고 집중해야 하지 않겠느냐.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남들이 원하는 것을 팔면서 직업적 유토피아를 만들자!" 물론 말 못하는 내가 이렇게 술술 얘기하지는 못했겠으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얘기를 꺼낸 것이다. 그런데 누님의 짧은 대답에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오히려 그런 모범답안 같은 말을 하려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왜 그랬을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의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 때 쓴 글이 생각나 찾아보았다.

"그 무렵의 나는 부유했습니다. 돈이 아닌 햇살 가득한 여름날의 시간들을 넉넉히 지니고 있었으며, 그 시간들을 사치스러울 정도로 써버렸던 것입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누님은 지금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바닷가의 낮잠 자는 어부에게 왜 더 큰 배를 사서 먼 바다로 나가 더 많은 고기를 잡고, 부자가 될 생각을 하지 않냐고 묻는 사업가의 일화도 떠오른다. 어부는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한다. 사업가는 그래야 더 많은 돈을 벌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어부는 대답한다. 난 이미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어부는 다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청했다. 누님은 이미 자신의 삶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문제로 돌아오고 말았다. 난 그 사업가처럼 머쓱한 얼굴을 하고 머리를 긁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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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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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의 취향>

#. 그 남자의 집

다음날 책 만드는 마무리 작업을 위해 서울로 향하는 누님을 터미널에 내려주고, 함양의 명소 상림(上林) 숲으로 향했다.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라는 아름다운 이곳을 크게 한 바퀴 산책하고 우린 무주로 향했다. 무주엔 연구원 유끼 선배인 신*철 선배가 시골집을 빌려 혼자 살고 있다. 혼자 살고 있다고 식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형수님은 가까운 전주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계시고, 아이들도 열심히 학교에 다니고 있다. 선배는 무주의 자연환경연수원에 올 초에 취직했다가 지금은 그만두었다고 한다. 1년간 빌린 시골집에서 남은 6개월을 채우며 글도 쓰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식구들의 양해를 받은 것이다. 2년차 연구원의 강한 열정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선배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글만 쓰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슬렁슬렁 놀고 생각하는데 쓰면서 가끔 글을 쓰는 시늉을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땀으로 바랜 추리닝에 양말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우리를 마중 나온 선배는 마당에 거하게 점심상을 차려놓으셨다. 산국을 와인병에 꽂아 테이블을 꾸며놓고, 텃밭에서 딴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 풍성한 밥상이 탄생했다. 어렵게 읍내에서 구해온 두부까지 숭숭 들어간 된장국은 최고였다. 강한 가을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먹은 그 환상적인 밥상을 어찌 잊으리. 6살 민호도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마당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민호는 방울토마토도 따먹고, 마당 입구에 세워진 오토바이도 타면서 가을을 즐긴다. 편했는지 화장실에서 큰일도 봤다.


우린 식사 후 시골집에 너무나 어울리게 원두커피를 내려 먹으며 두러 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는 얘기였다. 유끼 선배들의 소식도 들으며 그들이 지금 홈페이지에서는 조용하게 느껴지지만 얼마나 2년차 과정을 성실하게 보내고 있는지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유끼들의 문자가 연신 들어온다. 역시 끈끈한 유끼 들이다. 선배는 내가 '사진에세이'를 쓰려고 한다는 얘기를 듣고, 책꽂이에서 몇 권의 책을 뽑아 보여준다. 이런 책도 있고, 저런 책도 있다며 내 상상력의 울타리를 무너뜨려 준다. ‘뭐든 다양하게 해볼 수 있는 것이고,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으면 된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난 밤이면 별들이 잘 보인다는 툇마루에도 앉아보고, 사진도 찍으며 집 구경을 했다. 선배는 가끔 나가기 시작했다는 낚시 얘기를 하면서, 옥수수수염과 배추 몇 포기도 싸주신다. 게다가 무주에 가족이 갈만한 곳 브리핑까지 받으니 어느덧 일어서야 할 시간이 되어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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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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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의 취향>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 집엔 의자가 세 개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또 하나는 우정을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교를 위한 것이다." 라는 말도 했다. 그 날 선배의 집에도 우정과 사교를 위한 의자들이 마당에 놓였다. 난 그 의자 위에 앉아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상을 떠나 다른 이들의 삶을 가까이서 살펴보니 확실히 보였다. 정해진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로리 앤더슨이라는 행위 예술가가 말했듯이 미래는 긴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이 아닐까? 삶은 내가 선택한 데로 펼쳐지는 것이고, 어떤 삶이든 살아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의 직장을 떠나든 안 떠나든, 내가 사진에세이를 쓰든 안 쓰든, 내가 전원의 삶을 선택하든 안하든 결국 나의 선택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조급한 선택의 압박도 내 스스로 만든 것이지, 누구의 강요도 아니다. 함양의 누님 앞에서 느낀 머쓱함의 이유는 내 스스로 정해놓은 삶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렇게 살아야 옳은 것이라는 정형화된 생각이 자꾸만 나를 굳게 만든 것이었다. 이번 가을 여행을 통해 난 살짝 풀린 나사처럼 느슨한 마음이 되었다. 아예 풀려 버릴까봐 불안하기도 하지만 너무 꽉 조여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난 뭐든지 할 수 있으며, 지금의 내 삶도 충분히 풍성하다는 것. 그런 깨달음이 날 더 부드럽게 만든다.


이왕에 소로의 글을 인용했으니 마무리도 그의 말을 빌린다.

"혹시 가진 것이 많거든 대추야자나무처럼 아낌없이 남에게 주되 가진 것이 없다면 삼나무처럼 자유인이 되어라." 가진 것과 상관없이 우린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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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10.17 12:19:29 *.38.222.35
가진 것이 없다면 자유인이 되어라...^^ 저한테 하는 말씀이신듯..ㅋㅋㅋ..

어제 무릎팍도사 마지막회를 보다가 발레리나 강수진과의 인터뷰 장면이 잠깐 나왔는데,

사람들이 볼때 강수진의 삶은 너무 심심하다고 얘기한다는 강호동의 말에 강수진 왈,

"사람들이 봤을 때는 심심한 생활인데, 그 생활이 저한테는 단 한번도 심심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발레를 하면서 항상 저는 자유스러워요.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세계에 오는 거고 내 세상을 가질 수 있고,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른 누구보다 자유를 즐길 수 있어요. 그래서 바깥 세상에서 자유를 찾을 필요가 없는거죠. 복이죠. 저한테는"

이 말이 너무 가슴에 팍 꽂혔다는.. 이런게 필살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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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10.17 14:23:51 *.166.205.131
미나도 칼럼을 쓸 때 푹 빠져서 자유로움을 느끼며 쓰는 것 같아.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이어가는 것도 너의 필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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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11.10.17 12:42:57 *.119.126.191
오영애 집사님은 참 좋은 삶을 사셨네요.
친정엄마와,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가는 나, 고령화된 삶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정말 부러운 모습입니다.

'미래는 긴 것이 아니라 넓은 것'!
이 구절도 고마워요.
가끔 내 글에서도 인용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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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10.17 14:31:08 *.166.205.131
정확하게 그 구절은
"미래는 넓은 것일까, 아니면 긴 것일까?" 
라고 미국의 행위 예술가인 로리 앤더슨이 퍼포먼스 도중 관객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필살기' 135페이지에 인용이 되어 있어요~

좋은 글, 좋은 생각은 이렇게 널리 퍼져 나가는거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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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7 15:46:53 *.34.245.172
참 따뜻한 한 주를 보냈네요^^
글에서 그 여자와 그 남자 옆에서 망글망글하게 웃고 있는 오빠의 모습이 그려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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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09:29:36 *.112.98.122
당연 도와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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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09:12:08 *.166.205.131
ㅋㅋ 망글망글!~ 어감이 좋구나.
가족이 함께 가을여행을 하니 즐겁기도 하고,
그 경험으로 글까지 썼으니
더 좋았지~ㅋ

미선아, 이번 오프모임 저녁 프로그램 하나 할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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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2011.10.17 21:40:12 *.143.156.74
경수의 사진에세이에 사람 내음이 담뿍 담겼구나.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삶이 참 보기 좋구나.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 분주히 움직이는 내 모습이 부끄럽구나.
나같은 인간은 삼나무는 되지 못할 것인가?
그렇다면 대추야자나무가 되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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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09:14:11 *.166.205.131
그럼요. 다들 삼나무로 살면 어쩌나요.
대추야자나무 꼭 필요해요!
최고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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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10.18 06:40:42 *.23.188.173
역시 오빠는 자유로운 영혼이야
오빠의 글이 사진이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준다.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는 우리들에게 힘이 되어 준다.
오빠의 글은 마치 쌀쌀한 가을 바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햇살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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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09:15:40 *.166.205.131
고마워, 루미!

아직도, 진철선배네 마당에서 밥먹으면서 느낀 가을햇살이
잊혀지지 않네~~
 무지 뜨거웠거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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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10.18 13:22:35 *.33.245.98
무주를 다녀갔었구나. 나도 어제 늦게 돌아왔는데...
향적봉에서의 느낌이 아직도 선선하다.
경수야, 힘껏 쓴 글이겠지만 읽기에 아주 수월하고 바람처럼 좋다.
너가 받은 느낌들을 나도 넉넉한 여백처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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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10.18 14:01:03 *.166.205.132
향적봉 케이블카는 안탔는데, 조금 아쉽네요~^^
형 어제 전화했었는데, 알고 있는거에요?
카페에 오프모임 공지사항 봐주세요~
형이 해줄 일이 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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