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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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퇴근해서 돌아왔으니 아마 10시 반 경이었을 겁니다. 집에 불은 환한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집안을 다 뒤지고 전화를 막 해보려는 찰나 딸아이를 업은 엄마와 아빠가 들어오셨습니다. 응급실에 다녀왔다고 하네요. 출근하기 전 머리를 한다고 썼던 매직기의 코드를 빼서 정리해 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어요. 어쩌다 그것이 다시 켜졌고, 제 방에 들어갔던 아이가 왼쪽 엄지손가락을 데인 것이지요. 커다란 물집이 자리하자 바로 옆 병원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데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병원에 몇 번만 가면 나을듯 했어요. 그다지 심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몇 번 가니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예약을 잡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께서 매우 온화하고 평온하신 목소리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엄지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을 수도 있대요. 날짜를 잡고 아이를 입원시켰습니다. 이제 막 15개월을 맞이할 아이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수술대에 올라갔을 당시 아이는 낮잠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마취도 했었겠지요. 학원에 아이가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었기에 그날도 출근 준비를 한 저는 샤방한 치마를 입은 채로 아이를 들여 보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저만 들어가라고 하더군요. 커다란 침대에 알 수 없는 선들을 주렁주렁 달은 채 딸아이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마취가 덜 깨었는지 목소리는 가르랑 거리고,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아이에게 다가다는 발걸음마다 눈물이 묻어나왔습니다. 가서 엄마라고 손을 잡아주고 싶었는데 한 손에는 수술을 한 손에는 바늘을 꼽고 있는 아이에겐 잡아 줄 손이 없었어요. 제 말을 알아들을 정신도 없었을 겁니다. 아이는 저한테 달려들지도 않고 그저 축 늘어져 엄마도 아닌 듯한 울음도 아닌 듯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어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엄마야. 엄마가 왔어. 우리 하은이 잘 했어. 이제 집에 가자. 미안해.” 이런 말들만 계속 되풀이 했었던 듯 합니다. 작은 몸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것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어른들의 실수로 고생하는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요.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 누워 있음을 얼마나 바랬는지요. 그 이후 우리의 병원 생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발바닥의 피부를 조금 떼어 손가락으로 이식하는 수술이었다고 합니다. 병원 피부과에서는 그다지 큰 수술이 아니래요. 하지만 15개월의 아이이다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손도 발도 못쓰도록 아이를 하루 종일 눕혀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아이 제 자신도 그런 것들이 아마 많이 짜증스러웠던가 봅니다. 아이는 잘 먹지도 않았어요. 집에서는 그리 잘 먹던 플레인 요구르트도 한 숟갈 받아먹지 않았지요. 먹지 않으니 자연히 응가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배가 아픈지 울어대고 결국은 새벽에 관장을 하거나 다른 방법을 써보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작은 장난감들을 사주기도 하고, 과일과, 요구르트들을 꾸준히 가져다 주었지만 아이는 먹지도 않았고, 볼일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학원에 출근해서 수업을 하고 돌아와 아이와 함께 병원에서 잠들고 엄마와 교대해서 다시 출근 준비를 하는 생활을 약 2주간 했었을 겁니다. 몸은 피곤했고 아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짜증스러운 상황이었지요. 그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아직 어린 아이라 조심이 되지 않아, 그저 휠체어에 앉혀놓거나 침대에 눕혀 놓는 것 뿐이었지요. 어느 날 집에 잠시 데려갔더니 기어이 일어서서 발바닥의 봉합 부분을 터뜨려놓아 다시 마취하고 봉합하는 일이 이루어졌거든요. 팔에 감아 놓은 붕대는 자꾸만 풀려서 새벽에도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몸도 힘들고 아이를 보는 마음도 아픈 시간들이었지요.
그때 저는 매일 열시만 되면 아이를 재우려 아기띠에 아이를 않고 링거병을 밀며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병원의 대기실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다른 곳들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항상 아무도 없었어요.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아이를 안고 돌며 아이를 재웠지요. 원래 밤에 잠투정이 있던 아이였거든요. 많은 노래를 불러주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이 동요였을 거예요. 매일 그 시간에 나타나서 한 시간씩 노래를 부르니 누가 보면 동요귀신이 출현하는 줄 알겠다며 그렇게 아이를 안고 노래를 하며 한 시간 정도를 대기실을 뱅글뱅글돌았어요. 병실에 계시는 분들이 드라마 보는 것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돌았지요. 저희 엄마는 힘들다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재운 버릇하면 나중에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며. 하지만 그 시간이 우리에게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나지막히 노래를 들려주던 시간이요. 그 한 시간이 없었더라면 병원의 생활 도중 짜증을 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저 역시 화가 많이 났겠지요. 저 애가 무슨 잘못이 있냐며 하늘을 보고 따져물었을지도 모릅니다. 잠이 오는 아이를 안고 같은 자리를 멤돌며 불렀던 노래는 어쩌면 저를 향해 불렀던 노래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렇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사람도 아니지요. 그저 병원에 지쳐서 서로가 지쳐서, 편안히 잠이라도 들라고 걸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 행위는 제 자신에게도 평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걸으며 노래를 부르는 행동이 제 자신을 놀랍도록 평화롭게 만들어 주더군요. 많은 상황들이 걷히고 시간이 정지한 양 아이는 평화롭게 잠들고 그런 아이를 안고 돌아와 저 역시 평화롭게 잠들었습니다. 밤엔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평온하고 평화로운 따뜻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래란 참, 치유와 재생의 효과가 있나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힘든 삶의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셨지요.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할 때도, 자신의 삶이 서러울 때도, 몸과 마음이 힘들 때도 언제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노동요라는 이름으로 민요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경기도 아리랑은 참 애달픈 노래입니다. 떠난 님을 따라서 가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노래에 담고 있지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가지 못하는 것을 님의 발병으로 마무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나마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 말하는 노래지요. 진도 아리랑을 천천히 부르다 보면 참으로 한이 많이 느껴지는 노래입니다. 굽이굽이가 눈물인 문경새재. 그저 당연한 듯이 자신의 동네에서 살았던 그 시절에 그 문경새재를 넘어가야 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노동요는 어떠했을까요. 우리네 어머니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잠깐 들어와서 아이를 낳고 다시 밭으로 나가셨다는 말도 있으니 그 당시의 일이란 지금의 우리처럼 출근과 퇴근이 없는 반복의 일상이었을 겁니다. 때로는 쉬고 싶은 날이있어 비오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비가 오면 또 오는대로 집안에서 일을 하셨겠지요.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노동요입니다. 고된 현장에서 너와 내가 부르던 노래 그것이 우리가 노동요라 부르는 것일겁니다.
얼마 전에 서울의 한 공고에서 3학년 들이 시집을 내었습니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라는 이름의 그들처럼 정열적인 빨간 옷을 입은 시집이었지요. 그 학교의 국어 선생님께서 도무지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 시킬 수 없자 생각해 낸 궁여지책이라 합니다. 밤에는 일을 하며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걱정하거나 당장 오늘을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도 있고, 많은 무시에 상처를 받은 아이들도 있었지요. 생각보다 시 수업은 호응도 좋고 잘 이루어져 아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시집이 출간되었습니다. 시는 언제나 하나의 노래였지요.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들려주는 하나의 노래가 그 아이들의 인생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물으신다면 우리는 모두 구체적으로 할 말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를 통해서 그들이 위로 받았음을 시를 읽는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위안이 되는 노래를 한 곡씩 만들어낸 것이지요.
남들이 읽어줘야 시입니까. 남들이 들어줘야 노래입니까. 지금 지치고 힘든 당신에게 노래를 들려주세요. 가만히 앉아서 나지막히 노래를 불러보면 그 때 제가 느꼈던 평온을, 우리의 어머니들이 느꼈던 위로를, 우리의 아이들이 느끼는 희망을 느끼실 겁니다. 노래는 시대를 거슬러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 대한 슬프도록 찬란한 찬가이며, 시리도록 눈부신 현실의 승화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입원해 있을 때 자다가도 불려 나와서 우리 딸아이의 붕대를 다시 감아주시던 당시 인턴이었던 ‘주연희’ 선생님께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은 어엿한 의사선생님이 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신 것이겠지만 피곤한 일상에 잠시 쪽잠자던 몸을 일으켜 “너 때문에 내가 자다가 나왔잖아.”라며 붕대를 다시 감아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자주 붕대가 풀려 민망하리만치 찾아갔음에도 언제나 따뜻하게 아이를 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희에겐 정말 좋은 의사선생님이셨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것 같아. 물론 키워본적도 낳아본적도 없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작년에 노래방에 유독 많이 갔었어. 내 생에 가장 힘든 한해라고 생각했거든. ㅋㅋㅋ..
1년 365일 중에 300일은 맥주를 마셨던 것 같고, 그 중에 절반이상은 술자리가 노래방으로 이어졌었지.
그렇다고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매번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왜 노래방에 갔다 나오면 기분이 좋아졌는지 몰라.
그런거보면 올해가 작년보다 덜 힘든가 싶기도 하고. 술도, 노래도 덜 부르고 있으니 말이야.
이태리의 광장에서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는구나..ㅎㅎㅎ (깔때기다.. 무슨 얘기를 하든 이태리로 귀결.,.ㅋㅋ)

아니면 매우 잘 지내던 아이를 만나면 노래방엘 가거나
이게 내가 노래방엘 가는 순간이지
방방거리고 버럭거리고 오만 쇼를 다하고 나올 때쯤엔
뭔가가 후련하고 즐겁다. 알수 없는 일이지
그제서야 그래 그까이꺼 못할게 뭐있어? 이런 자신감이
이건 술때문인지.. 노래 때문인지.. 객기인지....
너의 깔때기 마음에 든다.
나도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내 주제로 돌아오는 깔때기를 만들어야 겠다.
각종 재료들을 넣고 잘 흔들어 가열을 하면 엄청난 관을 따라따라서 그 깔때기 끝에서 한방울씩 한방울씩 엑기스가 떨어지는 거지.
그게 한 병이 되면 그게 내 책이 되는 거야. 왠지.. 연금술사의 삘이 나지 않냐?
마녀 모자를 쓰고 시꺼면 망토를 뒤집어 쓰고 커다란 주걱을 들어야 겠군.
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면서 주문을 외우는 거야~아브라카타브라~
왠지 즐겁군~ 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