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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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 돌궐족 비문 중 -
돌궐족은 6세기에 현재의 만주에서부터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세력을 넓힌 북아시아의 유목민이다. 그들은 북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다. 그 문장이 이것이다. 놀라웠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굳어진 내 관점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저축하고, 가진 것을 지켜야 살아남는 다는 것이 삶의 규칙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할까? 일단 선입관을 접고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끊임없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가벼운 몸과 마음이 필수다. 최소한의 소유물을 가지고 오직 경험과 지식, 관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축적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유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그들에게서 정착민보다 더 강인한 생존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인가? 그런데 성을 쌓은 자들에 의해 문명이 생긴 것이 아닌가? 불확실한 유목의 삶에서 계획적인 삶을 살게 된 정착민으로의 전환이 발전이 아니었던가? 의문은 계속된다.
이렇게 정착민으로서의 삶이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것은 "정주성(定住性)은 아주 잠깐 인류 역사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인간은 중대한 모험들 속에서 노마디즘으로 역사를 이루어왔고, 다시 여행자로 되돌아가고 있다." 는 주장이다. '노마디즘(Nomadism)'은 우리말로 하면 유목주의 정도로 해석이 가능한데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모든 방식'을 말한다. 자크 아탈리는 여행자들이 모든 문명의 토대를 발명했다고 단언한다. 불(fire)과 예술에서부터, 글자에서 야금술, 농경에서 음악까지, 신에서 민주주의까지 여행자들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인류는 6백만 년을 여행자로 살았고, 정착해서 산지는 1만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착민으로서 사는 것이 인류 역사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짧은 지식으로 생긴 착각이었나?
<Tokyo_1>
<Tokyo_2>
복잡하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그만하고 내 인생에서 체험한 것부터 살펴보자.
내 인생 전체를 통 털어 나를 발전시킨 경험들 말이다. 첫 번째는 인생 최초로 북한산 정상에 오른 일이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높은 산 정상에 올라 내가 다니던 학교와 매일 다니던 길들을 바라 본 경험은 충격적이었다. 최초로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던 우주비행사들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두 번째는 학력고사 시험을 마치고 친구와 무작정 떠난 속초여행에서 터덜터덜 걷다가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를 만난 일이다. '세상은 넓고 지구는 둥글다'라는 지식을 내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세 번째는 아무 계획이 없이 아내와 인도를 여행했던 일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떠나고,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고, 새롭게 알게 된 곳을 찾아가는 불확실함의 연속이었지만 내 생애 최초로 자유로움을 만끽한 순간이었다. 이 세 가지 외적 여행의 경험은 내 삶을 다음 단계로 도약시켰다.
내적 여행도 있었다. 첫 번째는 대학생시절 '문화인류학' 과목을 듣고 '모든 문화는 다를 뿐 우열이 없다'는 문화상대주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의 지적 충격이다. 비슷한 지적 충격은 그 외에도 몇 번 있었는데, 그 경험의 계기는 새로운 책과 사람을 알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 요가를 처음 접했던 순간이다. 처음으로 내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서 감동의 눈물이 저절로 흐르던 사건이었다. 이러한 내적 여행이 외적 여행과 마찬가지로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은 물론이다.
여행자의 모습인 새로운 곳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내 삶을 도약 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가진 것을 지켜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오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 인생에서 가진 것을 지키며 살았던 시간은 지금의 나에겐 큰 가치로 남아있지 않다. 그저 학습된 선입견이었고 나의 타고난 성향이었다. 난 어디서나 규칙을 지키고 다툼을 싫어하는 하는 보수적인 성격이다. 이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지켜야하는 가치도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벽을 높이 쌓고 가진 것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전제로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진 것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의심으로 타인과의 교류는 사라지고, 결핍의 마음은 상대적 빈곤감에 분노와 무력감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더 나은 삶의 모습을 꿈꾸기보다 쉽게 지쳐버린다. 세상이 어둡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위에서 말한 빛처럼 환하게 다가온 체험들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여행'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이 '여행' 체험은 새로운 사람들을 환대하게 했고, 가진 것을 공유하면 모두가 풍요로울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니 돌궐족이 남긴 유산인 "끊임없이 '여행'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는 말은 나같이 잠시 정착해 사는 현대인에게는 다시금 곱씹어 봐야 할 인류의 지혜다. 돌궐족에게 축복이 있기를.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을 더 정리해 보자. 가족을 이뤄 정착한 지금의 나에게 여행은 내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 같은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먹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생각을 나누는 것이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다. 그렇다고 산업화된 관광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팩키지 여행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불확실하고 번거럽더라도 내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여행을 좋아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기기 때문에 지금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백만 년 동안 축적된 유목의 유전자가 내게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여행은 새로운 생각을 샘솟게 한다. 여행은 현실의 걱정거리의 무게를 가볍게 하며, 더 나아가 인생 자체를 가볍게 만들어 준다.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 좋은 여행의 좋은 점들을 언제나 잊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리하면 여행을 통해 내 삶이 계속 도약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Tokyo_3>
<Tokyo_4>
지난번 글에서 난 "내가 하려는 이 여행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 여행에 대한 기대를 말했었다. 그런데 다시 고쳐 묻고 싶다. "내 인생의 키워드는 무엇일까?"라고. 그 대답은 바로 지난번 질문 속에 숨어있던 "여행"이다. 난 그냥 여행 자체를 즐기는 여행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나의 영역을 밖으로, 또 안으로 넓히고 싶다. 더 나아가 '나'라는 영역도 없이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전체로서 사는 삶을 꿈꾼다. 그래서 불쑥 '가족 여행'을 첫 책의 컨셉으로 잡았고, 글과 사진이라는 여행자의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그것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게다가 미래 풍광으로 그린 '삼층집'-그림책 카페와 숙소, 사무실로 사용할-도 여행자를 위한 공간인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로 개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되 공존하는 것' 이라는 가치는 이 여행의 모습을 말한다. 좀 정리가 된 느낌이다. 내 가슴을 뛰게 했던 모든 것들 속에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숨어있었다는 깨달음에 다 달았다. 나도 모든 것을 한 곳으로 모으는 깔때기를 찾게 된 건가? 나에겐 모든 것이 '여행'이 가지는 가치로 귀결된다. 그렇다. 여행은 나에게 삶의 정수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여행을 꿈꾸는 모든 이들과 짧은 여행길이지만 꼭 만나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싶다. 함께 나눌 빵과 이야기만으로도 얼마나 풍성하고 기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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