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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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11. 이틀 전 일기
몰입을 하다보면 목표, 그 밖에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을 섬세하게 배려해주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켜 사람을 바닥에 패대기쳐 버릴 때가 있다. 의식은 생생하게 살아있으나 몸이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극심한 우울을 겪었다. 오래 전부터 이런 시간을 예측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이 정도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온 뒤 향기로운 낙엽을 밟고 걸어가며 아름다운 가을을 마음에 담았다.
이틀 전에 밤을 새웠다. 다음 주가 마감이다. 새벽 동이 트는 순간, 마침표를 찍는 희열을 잊지 못해 요즈음도 그 전통을 이어간다. 마감시간이 오면 가슴이 콩콩 뛰고 피가 한곳으로 몰리며 그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고 오직 그 하나만 생각한다. 나는 이런 시간을 몹시 사랑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니 그 결과의 미진함과 허탈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점점 더 약속을 피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함께 가는 길이고 곁에 리듬을 맞추어야 할 사람들이 있었으니 전우와 어깨를 겯고 앞으로~ 앞으로~
낙원동 한옥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글씨를 썼다. 나는 지금 글과 글씨 삼매에 빠져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숙제는 <석과 불식>속에 담긴 긴 인생을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제목을 썼다. 시작이 반이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우리의 말 버릇으로 표현하자면 썰로 풀어나가야 하는 일이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 그러나 우린 이 작은 일에도 친구가 필요하다며 가을밤 내내 <밤샘 배틀>을 제안했다. 카카오 톡을 하며 인증 샷을 남기며 새벽 6시까지 함께 깨어 있었다. 물론 그 결과 작품의 완성은 없었고 다만 “어떤 가능성”만을 낚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일이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확실하고 또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정오에 집을 나와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었다. 비온 뒤의 삼청동은 아름다웠다. 정독도서관의 담벼락에 걸어둔“시”들을 읽으며 걸었다.
“말의 선량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의 가난한 저녁을 알 것만 같다.”- 이시영
통의동에서 점심을 먹고 평창동으로 갔다. 비온 뒤에 깨끗한 북악이 한 눈에 들어오고, 북한산 자락을 거닐고 있는 이 시간이 참 행복했다. 가나아트센터에서는 최종태 선생의 조각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익숙한 조각들이다. 김종영 미술관으로 갔다. 선생의 서예작품들과 드로잉 작품들이 특별 전시되고 있었다. 대체로 나의 나들이는 이곳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어제는 가을의 정취에 흠씬 빠져들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한참을 걸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글 쓰는 얘기, 글씨 쓰는 얘기를 나누다 무릎을 치는 공감 하나를 건졌다.
이틀 전의 일기를 써 보라.
치매는 먼 옛날은 잘 기억하지만 바로 어제의 일을 잊어버린 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억상실이 무차별 공격을 하는 가해 대는 시대이다. 그러니 이틀 전의 일기를 쓰도록 해보라는 말이다. 밤을 새우며 글씨 연습을 한 일이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그리고 산책을 한 일은 하루 전의 일이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글씨와 글을 써내려가는 것은 오늘의 이야기, 그리고 내일도 똑같이 글과 글씨를 써내려 가야하는 것은 내일의 이야기.....이렇게 매일매일 쓰면 천일 야화가 만들어 지겠지. 이제 그러면 다음 회기의 “이틀 전 일기”를 기약하며 오늘 아침 이상한 글쓰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