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 조회 수 2130
- 댓글 수 2
- 추천 수 0
장미 12. 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스님의 책은 언제 어디서부터 읽기 시작해도 정갈하고 깊이가 있다.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들에 얽혀 있을 때, 어지러운 머리를 헹굴 수 있는 샘터 찬물처럼 맑다. 위로를 받는 시간이다.
스님은 육체에 병이 찾아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실 때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글을 쓰셨다. 송광사 뒷산 불일암에서 홀로사신 17년과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사신 17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마무리 글을 남기셨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스님은 오랫동안 일기처럼 쓰시던 칼럼을 통해 우리와 함께 대화하고 스승처럼 때론 친구처럼 함께 걸으셨다.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번거로운 일을 애써 피하시고 홀로 사는 즐거움을 말씀하셨지만 한결같은 스님의 일상을 우리는 글로 늘 읽고 있었다.
“우리들이 어쩌다 건강을 잃고 앓게 되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그저 그런 것인지 저절로 판단이 선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가 환히 내다보인다. 값있는 삶이었는지 무가치한 삶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언젠가 우리에게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그때가서 아까워 망설인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한때 맡아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러니 시시로 큰마음 먹고 놓아버리는 연습을 미리부터 익혀 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일도 하나의 “정진”일 수 있다.“
스님의 글을 읽다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그해 봄 길상사에서 스님을 뵈었다. 오래 살다보니 기계가 낡아서 고장이 난 것이라며 병원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하실 때 무언가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별다르게 찾아다니지 않아도 늘 익숙하게 맑고 향기로운 말씀을 자주 접하고 살 수 있었기에 스님은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그렇게 계셔줄 것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부처님 오신날, 우연히 절집 마당에서 스님의 자비로운 눈빛과 마주쳤을 때, 충만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주의 따뜻한 느낌이라고 할까? 어떤 그런 평화가 내게 전달된 것 같았다. 그래서 스님이 돌아가신 날, 도서관에서 스님의 오두막 편지를 읽으며 스님을 생각했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날씨가 참 이상했다. 낮이었지만 저녁처럼 어두웠고 폭풍 전야처럼 바람이 휘몰아쳤다. 오두막 편지에는 스님이 어느 해 겨울 영하 20도의 오두막을 떠나 바다가로 옮겨 가신 이야기가 써 있었다. 감기가 자주 들고 또 너무 추워 잠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한 채, 비워둔 지 오래여서 어설프디어설픈 그런 오두막 집으로 옮겨가실 때의 이야기다. 떠나는 마음은 우선 갈 곳을 손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살던 집에 다음에 누가 와서 살더라도 불편함이 없이 지내도록 잘 배려하는 것이 먼저 살던 사람의 그 집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의 짐을 챙기고 나니 오래 정들었던 물건들이 눈에 밟혔다. 함께한 세월만큼 정이 든 것이다. 밖에 나가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개울 물소리, 나무들 돌맹이들 모두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애착을 끊고 출가한다는 것, 출가 수행자는 크고 작은 애착을 끊어야 한다. 인정이 많으면 구도의 정신이 해이해진다고 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보살핀 인연 때문에 떠나면서도 마음이 가볍지가 않았다. 스님은 골짜기가 찌렁 울리도록, “겨울 철 잘 지내고 돌아올테니 다들 잘 있거라” 하고 큰 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엉엉 울고 말았다. 창밖엔 세찬 바람이 불고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산천초목도 나만큼 서러웠던가 보다. 그날, 사람은 가고 그가 남긴 글속에 파묻혀 그의 영혼을 느끼며 우리 시대의 참 아름다웠던 분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켜보았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자신을 삶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 두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와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