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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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숙-무사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특히 화창한 월요일 아침. 문득 '폴'의 마술봉이 생각난다.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벽면에 대고서 마술봉을 치면 새로운 세계가 열려서 시간을 잠시 멈추게하고서 사라져버리는 상상 말이다. 물론 무책임할 수도 있다. 잠수타기는 그 안의 어린아이 생각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고 그는 가끔 어른의 세계에서 실종되곤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럴때는 내면의 어린 아이 말이 현실이 되는 꿈을 상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벽면에 마술봉을 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해버리는 유치하지만 신비로운 방법을 선택해 보고 싶은 것이다. 습관처럼 잠수를타는 것은 좋지않겠지만 때로 무언가 골똘히 궁리할 것이 있거나 답답할 때면 잠수도 꽤나 효과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수도 없다. 오늘은 아침부터 CEO 보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센스 없는 사람이 월요일 아침부터 그런 중요한 보고를 잡는건지 온 우주에 걸쳐 있던 짜증이 한꺼번에 폐부 속으로 깊숙히 찔러들어오는 것 같다.
'누구긴, 나잖아 사장님 출장가신다고 그 때 밖에는 안된다고해서 잡았던거잖아.'
주말 동안에는 그렇게 회사의 모든일과는 결별하는 그의 머릿속 철저한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 때문에 오늘 아침 회사 모드를 켜자 정상화 작동까지 잠시 혼선이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쉽지만 완전한 해결법이 아니다. 내가 창조해 낸 생각들은 여전히 그렇게 남아 내가 보듬어 주기를 기다린다. 그렇다. 언제나 원인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결과도 자신에게 배달되는 것이다. 아이였을때에도 그러한 진리는 그대로였지만 그때는 잠시 부모님이나 대신해 줄 어른들이 그 배달물을 때로 받아두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들 모두는 원인을 통한 결과가 도착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이 주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결정 밖에는 할 수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오늘 아침이 그런 케이스이다. CEO 보고는 스케쥴 변경이 어렵다. 비서와의 통화를 거쳐야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분이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월요일 아침이 조금 버겁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라면 까뮈의 '이방인' 속의 주인공이 해변에서 총을 발사한 것 만큼이나 어이없고 황당한 일일 것이다. 유독 오늘 아침은 강도가 세다. 이름 붙이는 순간 존재감이 더욱 살아난다고 했던가. 월요병이라는 말로 그 짜증의 존재감을 더욱 키워주었다. 평소의 짜증에 몇 만배는 되는 것 같은 괴로움을 눌러보려하지만 되지 않는다. 그냥 쌓아두고 멀쩡한 것처럼 아침을 맞이했던 지난 모든 월요일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괴로움이나 짜증이라는 것도 수용을 해버리고 혹은 아이처럼 달래주고 넘어간다면 괜찮을텐데 쌓아 두었다가, 내것이 아니라고 밀쳐두었다가 한 번에 해결해 보려하니 그 힘이 너무 커버린 것이다.
'내가 A형이라서 그래. 이런 감정들을 누르지 말았어야해 진작에 스트레스 관리를 더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무단 결근이라도 하고 싶군.'
그는 말도 안되는 이유들을 붙여가면서 스스로 더욱 깊은 절망의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유독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의 햇살과 시소오 놀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어떻게 내가 이 힘든 월요일들을 10년이나 견뎠었더라. 현기증이 날 것도 같다. 그는 한 회사에서 10년 이상을 무단 결근 없이 다니고 있는 평범하자면 평범한 직장인이자 회사원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노무 월요일 아침은 변함도 없이 고통스럽다. 아니다. 신입사원때에는 약간의 설레임과 긴장도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곧 부장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에서도 여전히 버거운 월요일은 수치스럽기까지하다. 아니 인간적인 것 아니냐며 스스로 위로해 보기도 한다. 문득 자기 연민에 빠진다.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그 푸른 창공은 내것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것인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말이다. 한 때 시란 천재적인 몇 사람만의 소유물이였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새장 속에서 창공을 꿈꾸는 것과 시인이 되려고 했던 그 때의 꿈이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보았다.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때의 결론이였고 그래서 끝까지 국문학도의 길을 가지 않았다.
'그래 시로 무슨 밥을 먹고 살겠어. 내가 무슨 시를 쓰겠어. 간혹 위로 삼아 시 한 편 읊조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면 돼. 삶은 장난이 아니잖아. 아이같은 생각은 버리자고. '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꿈을 접어버리는 건 자기 자신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있다고한 말이 처칠이였던가 링컨이였던가. 누구면 어떠한가. 그 누구도 이 허무한 월요일 아침에 나의 꿈을 창공에 퍼덕이게 할 수 없다. 지난 세월이 빠르게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의 아름다운 월요일이 어쩌다가 이렇게도 끔찍한 괴물처럼 모습이 바뀌게 된 것일까. 대학시절 그는 국문학도였다. 당시 그에게 월요일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을만큼 기대가 되는 날 들이였다. 아름다운 월요일이라 이름 붙였던 것은 비단 그 월요일 아침 수업에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밥한끼 먹여주지 못하던 시에 대한 사랑과 낭만 때문이였다. 왜냐하면 시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들수도 있구나 깨달음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종종 땡땡이도 치고, 주말이되면 진탕 술을 마시기도하고, 국문학도랍시고 술한잔에 시한편 지으며 대학 잔디밭에 누워 잠이 들었던 적도 있다.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도 있지만, 유치한 낭만의 시절을 생각하니 잊혀지지 않던 그 대학교 때의 시 수업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사진 한 장처럼 잊혀지지 않고서 남아 있는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에게 그 월요일 아침이 그랬다.
남자는 죽어 가지
꽃은 부서지지
그리고 돈은
돈은 굴러 가지
끊임없이 굴러 가지
해야 할 일이란 그토록 많아.
-꽃집에서 (쟈끄 프레베르) 중에서-
그 때 그의 짝사랑하는 여학생은 이 시를 낭독했고 집중되지 않던 혼란한 생각들이 마지막 이 구절을 읽는데에서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했다. 시지프스의 끝도 없는 바위 올리기와 겹쳐지면서 삶의 고단함과 지금의 이 사치같은 여유들 닥쳐올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오던 그 날 아침을 말이다. 아름답게 너울거리는 하얀 파도의 모습이 언젠가는 자신을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겨울 밤바다를 응시해 보지 않았던 이들은 절대로 모르리라. 그 반짝이던 아침이 심각하고 무겁게 흑백사진처럼 남겨져 있는 것은 그 여학생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했던 자신의 용기 없음이 오버랩되서도 아니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늘 옆집 할아버지 같은 쟈끄 프레베르의 읊조리는 아름다운 시어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월요일이 계속 되지 않을 것이라고. 삭막한 세상의 월요일은 시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시인의 마음으로는 그 삭막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회사 생활 10년 만의 월요일 아침 왜 이토록 느닷없이 그 날의 아침과 오버랩되는 것일까. 그는 견딜 수 없이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속에서 보고 있다. 끊임없이 굴러가는 하루하루와 밥벌이의 지겨움 사이에서 꽃이란 한낱 사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도 순간순간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꿈을 꾸기도 했다. 10년전에는 그나마 젊음의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주의자인 탈을 벗어던져버렸던 적도 있다. 10년전의 그는 프레베르의 시를 들으며 결코 자신은 그 시 속에서 죽어가던 남자와 같이 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다짐도 삼켜버릴만큼 밤바다의 흰파도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문득 그 때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해졌다는 것은 저 멀리서 오고 있던 그 하이얀 밤바다의 아름다운 파도가 그를 송두리째 삼킬 만큼 가까이 왔다는 징조이다.
차라리 이러한 초라한 모습으로 사느니 장엄하게 그 파도 속에서 삼켜지는 것도 꽤나 매력적이라 모처럼 시인다운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리고 남는 잔해는 누구의 몫으로 돌릴 것인가. 낭만적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실종과 나타남을 반복하고 있다. 멀쩡하게 10년을 이상없이 돌아가던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이 왜 오늘따라 버그를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그는 혼란스럽다.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도 오늘의 월요일만큼이나 무겁고 괴물같다. 아니 문득 주인공이 벌레로 변해버렸던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난다. 찬란했던 월요일이 벌레만큼 작아지고 사라지고 싶게 만들어 버린 10년의 견딤에 대해서 부채를 묻고 있다.
그는 이 물음이 왜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그저 열심히 일했다. 착실하게 10년의 세월동안 시지프스처럼 바위를 굴렸고, 한 눈 팔지 않고 하루하루를 저금했다. 삶이 자신을 사도록 내버려 둔 것 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었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는 시간만을 생각했던 것 같다는 깨달음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시와 낭만이 밥보다 소중했던 그 철없던 시절을 생각하다보니 어느 덧 심장을 덮고 있는 굳은살이 느껴졌다. 답답했다. 심장에도 굳은 살이 박힐 수 있구나 싶었다. 나는 누구로 살고 있나 묻고 싶어졌다.
굳은 살로 덮여 버린 심장은 어쩌면 아주 잠깐이라도 말랑 말랑 해지면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수많은 칼날들에 찔리고 피나고 괴로워질 수도 있기 때문에 미연에 한꺼풀씩 단련시킨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을 10년간의 회사 생활과 사회 생활에 대한 자연스런 삶의 지혜이자 결과라고 생각했다. 기계와 인간의 차이가 없어지는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무뎌진 삶에 대한 환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더 이상 꽃에서 희망을 찾지 않고 시에서 위안받지 못했다. 아니 말랑 거리는 심장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 수 없을거라는 생각들로 자신 속의 시인의 눈과 귀 입을 막아버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월요일의 찬란한 햇살 보다는 CEO 보고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10년차 과장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능력있는 사원의 자세이다. 그는 그 자신이 자랑스러웠지만,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비어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 아이 실종이 아니라 어른된 자신의 모습이 실종되었다는 그 막막함이 그 원인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감상은 어느덧 사치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월요병으로 잠식된 자신의 병든 가슴도
'괜찮아, 매월 돈으로 보상 받고 있으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는 그렇게 파우스트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삶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스스로 원인의 씨앗을 심고 있다. 그도 그랬다. 어디에도 불평할 수 없다. 스스로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삶은 그 어디에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데, 두리번 거리며 부유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있지 않은 월요일에 대한 투명한 증오만이 몸을 무겁게 내려앉히고 있던 것이다. 끊임없는 생각의 강에서 그에게 문득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 때의 그 여학생의 목소리로 이 시의 전문을 한 번 들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러면 좀 답답함이 사라질 수도 있을텐데... 그 친구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그녀도 나처럼 시와는 멀어진 일상 속에 매몰되어서 월요병에 걸려 있을까?'
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그는 감상적인 시인의 마음은 사치라고 못박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묵묵히 그저 견뎌냈다. 무엇을 위한 하루인지도 모른채 그냥 남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다고 위안하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죽여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대학 4년간 배웠던 공부인 국문학과는 당연하게도 관계없는 재무팀에서 10년을 보내고 나니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자신이 거울속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시와 돈은 그렇게 관계 없는 듯 관계가 있었다. 돈을 굴리는 일을 해오면서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프레베르 시 속의 남자처럼 말이다. 시 속의 그 남자보다 더 비관적인 것은 자신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꽃을 사러 꽃집에 조차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돈도 굴러가고 삶도 굴러가고 있었지만 무엇을 위해 구르고 있었는지가 빠져 있던 것이다. 그렇게 월요일 아침의 거울 속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보니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다. 짜증이 아니라 회한같은 것이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다행스럽다.
그 생각들을 밀쳐두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나니 조금 더 편안해졌다. 밀린 빨래를 다 해 치우고 난 그런 기분이다. 허리는 뻐근하고 팔 다리는 욱씬거리지만 가슴은 후련한 그런 기분이다. 치유의 작은 첫걸음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서도 흐느낌이 사라진 것 같다. 사실 맘껏 울어보지도 못했다. 늘 꾹꾹 눌러 버리고 애써 태연한 척 맞이했던 그 수많은 아침들이 다시금 반기를 든다. 나 좀 봐 달라고 말이다. 외면했던 시간들이 결국은 불안이고 걱정이였다. 그것들을 스스로 쌓아오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고 있던 자신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일까. 그 시끄럽던 소란함이 잦아들었다. 한 순간의 일이였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였는데 왜 그렇게도 가슴과 머리는 멀리에만 있었는지. 심장에 굳은 살이 박힐 때까지 내팽겨쳐 두었던 자기 자신에게 조의라도 표해야 할 판이였다. 정중히 장례라도 치르고 새 삶에 대한 예우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촐한 장례를 위해 조문을 적는다. 조용히 종이 한 장을 꺼내서 예전에 끄적이던대로 연필로 시를 쓴다. 잠시 국문학도의 시절로 돌아간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자신의 월요병에 대한 처방전을 적고 있는 것이리라. 오랫동안 자신의 행세를 하던 그 페르소나에게 안녕을 고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시인이다.
쟈끄 프레베르의 시
'꽃집에서' 죽어가던 그 남자의 굴러가던 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순간
나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
끝도없이 펼쳐지는
해야할 수많은 일들
하지만 나는 시인이다
시인의 세계에서
꽃은 그 남자의 품으로 되돌려줄 수 있고
돈으로 살 수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적어도 지쳐있던 월요일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요일의 아침을 산다
끝도 없이 굴러가던 모든 것들이
멈춘채로 나의 미소를 기다린다
나는 시인이다
10년의 세월이 증발해 버린다. 선의 시간이 아니라 모두 이 자리에 있다. 일렬 종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한 자리에서 그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분과 10년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던 오늘 아침의 이 경험을 누군가와 나눌 수가 있을까? 그 안의 어린아이를 통해 숨어 있던 시인을 다시 발견했다. 특별한 누군가만이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던 행복한 월요일 아침이 조건없이 온전히 그의 것으로 다가왔다. 빚을 청산해버린 부채자의 기분이 이런걸까.
빛의 속도로 적어내려간 그 시를 가슴 속에 고이 접어서 넣고는 집을 나선다. 늘 걷던 아침의 출근길인데 다르다. 만물 속에서 지겨움이 아닌 두려움이 아닌 아름다움을 본다. CEO와의 미팅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긴장도 월요일의 재발견 속에서 사라진다. 삶이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마치 타인의 시선으로 살아온 사람같다. 문득 낯설다. 혼란스럽다. 시끄러운 말과 명령만 남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시가 다시 흐를 수 있다니 슬퍼보였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당신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즉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에게 진리인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진리임을 믿는 것, 그것이 천재성이다. 당신의 보이지 않는 확신을 말하라 그것이 우주의 감각이 될 것이다.
-랄프왈도에머슨-
다이어리 하단에 적혀져 있는 명언의 귀절에 시선이 간다. 오늘은 에머슨이 내게 지혜를 한 수 던지는구나. 다이어리 하단마다 적혀져 있는 명언의 구절들이 오늘처럼 이렇게 내 자신의 화두와 딱 맞아 떨어지는 날이면 운세가 적중이라도 한 듯이 기분이 참 좋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는 몇몇 소수의 인문학적 천재들만 써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 번도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시간이 잠시 멈춰버렸던 오늘의 경험이 다시금 시를 쓸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것 같았다. 에머슨의 말이 맞았다. 천재만이 시를 쓰는 건 아니다. 나의 삶이 진리가 되는 순간이 시가 되고 우주의 감각이 되는 것이다. 시는 삶으로 쓴다. 시는 위안이다. 시는 다시 싱그러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한다.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나오는 그 생각들 확신들 꽃 피어나던 아름다움을 다시 확인한다.
CEO에게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이던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시처럼 프레즌테이션을 하리라. 필요한 말들만으로 군더더기 없이 가슴에 남을 수 있는 내용을 전하리라. 빨리 회사에 가고 싶다. 그는 다시 태어난 것 만큼이나 신이 난다. 폴의 마술봉이라도 얻은 기분이다. 잠수가 아니라 비상이다. 이런 마음이라면 오늘 시집 한 권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수북히 쌓여 있던 먼지들을 털어내고 짐을 덜어내 버린 것 같이 가볍다. 10년간 집나갔던 자신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수많은 편견과 판단들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용기와 시인의 마음을 되찾았다. 새로 얻은 연필 마술봉으로 수북한 먼지들을 시어들로 다시금 풀어내리라.
'퇴근길에 노트 한 권을 사야지. 다시 시를 쓸 것이다. 나는 시인이니까.'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누군가의 바램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다시 살기 시작한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던 굳은살을 벗겨낸 것만 같다. 생채기가 날 것같아 두렵던 마음도 삶의 환희 속에서 무의미해진다. 가슴 가득히 퍼지는 이 기쁨을 잊고서 살았던 10년의 부채를 한 번에 갚아버린 기분이다. 새 삶을 위한 시작선 위에 서 있다. 코 끝을 뻥 뚤리게 만드는 늦가을의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삶에 대해 진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더 영악한 도피였다. 자신의 흐느낌을 직시하고서 달래주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여전히 시가 밥먹여주지 않을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숨막히던 일상에 다시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그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느낄 때는 밥 먹을때가 아니라 시를 쓸 때였다. 어려운 일도 아니였다. 그냥 다시 결심만 하면 되는 일이였다. 밥 먹는 것을 멈출 필요도 없었다. 밥 먹으면 시를 쓴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심장의 굳은 살만 제거하면 될 일이였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새장의 창살만 걷어내면 창공이였다. 날개를 재차 확인할 필요도 없이 창살이 없어지니 날기 시작한 새들이 보였다. 아니 그것은 그 누구의 전유물이 아닌 날고자 한 모두의 창공이였다. 가을 하늘이 푸르디 푸르다 못해서 호수같다. 바보같이 눈물이 난다.
아마 까뮈의 '이방인' 속에 나오는 주인공에게도 그 순간 시 한편 함께할 여유가 있었다면 방아쇠를 당겼을지 의문이 든다. 그는 시인으로 월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그는 시인이다. 삶이 사람을 사는게 아니라 사람이 삶을 산다. 사람들이 제대로 살기 시작하면 삶에서 시가 흐른다. 아니 삶이 그 자체로 시가된다. 시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냥 그처럼 다시 옹알이부터 시작하면된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면 된다. 두려움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확신을 믿는 순간 그것이 우주의 감각이 된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믿으며 집을 나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는 이제 아침마다 시를 쓰며 잊고 있던 자신을 되찾을 것이다. 스스로의 처방전을 따라 시를 짓고 삶에 새로운 바람이 불게하는 약을 복용할 것이다. 네루다에게 어느 날 시가 찾아왔듯이 지루했던 10년간의 월요일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것은 시였다. 누구나에게 그것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시를 택했고, 그것은 용기있는 선택이였다. 원인을 만들 수 있는 존재라면 결과에 책임도 질 수 있고 그 사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용기도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는 원래부터 시인이였다. 거창한 작품이 아닌, 잠시 끄적임을 통해서 삶에서 예술이 흐르게 했다. 몇 백만원짜리의 만년필이 아니라 그저 종이 한 장과 연필만 있으면 가능했던 일이다. 자신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되었을 일이였다. 길을 잘못 들었으면 가장 빠른 길은 멈춰서서 바른 길을 찾고 다시 그 길을 가는 법 밖에 없다. 스스로 걷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걸어주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삶의 시작을 선언했다. 그저 원래 있던 그것을 제대로 보았을 뿐이다. 용기있게 작은 실천을 했을 뿐이다. 그의 노트에 적힐 수북한 시들은 어쩌면 그에게는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를 부수고 제대로 현재를 살 수 있게할 망치가 되기도 하고 답답하던 일상에 산소 호흡기가 될 수도 있다.
시가 절로 읊조려진다. 발걸음마다 시가 밟힌다. 어떻게 이 많은 마음의 노래를 짊어지고 살았던가
문득 자신에게 미안하다.
하루의 무겁던 일상이 한 줄 한 줄 읽어나갈 수록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심장이 펄떡이는걸 느낀다. CEO 보고가 잘 마무리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가 다시 찾아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삶이 사람을 살던 시간 속에서 탈출해서 그가 선택해서 사는 삶속으로 놀라운 공간이동을 했기 때문이다.
실종된 삶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무사귀가한다. 페르소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찾았다.
어쩌면 꽃집에 들러 꽃을 한아름 안고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세계에서는 겨울이 오고 있는데 그의 신세계에서는 꽃이피고 새들이 난다.
봄이다. 가을에서 봄으로 가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버스를 타고 퇴근길 새로 구입한 노트를 꺼내든다. 노트 표지에 제목을 적는다.
'하루'
그는 이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10년을 훌쩍 건너 뛰어 버리는 아까운 짓을 하지 않을거라 다짐한다.
인생을 담보로 저금을 하는게 아니라 그저 묵묵하지만 자신다운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라 선택한 것이다.
하루는 일본어로 '봄'이라는 뜻도 있다.
그 길었던 하루 속에 봄이 녹아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의 길에 잠시 찾아오는 더위가 인디언 써머라고 하던가,
인디언 써머 대신 인디언 스프링이라는 신조어라도 만들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덥다고 하기에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그의 마음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아니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다.
펄떡이는 심장도 되찾았다.
인디언 스프링과 함께 찾아온 그의 펄떡이는 심장은
다시 찾은 청춘은 이미 노트 첫 장을 넘겨 시를 적기 시작한다.
시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는 시인이다.
원래 그들의 공간
새들에게서 창살을 지우니
창공속을 스스로 날고있네
그 누군가가 그려놓았던 창살인가
부끄럽네
더하기만 생각했던 지난 날
비우기가 살아나는 삶 속에서
먼지처럼 작게만 여겨지네
무엇을 더해보아도 창공아래 먼지인 것을
자유를 얻으니
긴긴 방랑의 끝에서 심장 벌떡이는
하루가 시작되네
낡은 구두굽에서도
버스 손잡이에서도
10년 넘게 다닌 출퇴근 길 위에도
봄이네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것이 방황이라면
도달할 곳을 위한 필연적 순례의 길이 방랑이라면
그래서 이토록 귀가의 길이 포근한 것이라면
그 긴 시간이 걸려 다다른 귀가를 후회할 필요없네
어떤 시인이 구름 한 점 그리면 하늘이라고 했던가
난 오늘
구름을 타고 무사귀가한
손오공이다
수많은 분신들은
머리카락 속에 숨기고서
본연의 모습과 마술봉만이
내 곁을 지키네
-무사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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