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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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라니... 제목이 없는 그림은 싫다. 너무 많은 생각을 던져주니까.
안 그래도 회사일로 머리아파 잠시 머리 식히려고 온 갤러리인데, 그녀는 또 생각하고 고민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뭐 '무제'니까 오히려 그냥 가볍게 넘어가면 어때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직업병인지 꼭 그 작가의 의도가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한참 상사의 의중을 잘 헤아려야하는 대리 말년차다. 언젠가부터 직관대신 생각이 중요해지고 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역시 생각을 비우는데에는 그냥 뻔한 헐리우드 영화가 최고였는데 그랬나 싶다. 하지만 이 멋진 가을날 영화관에 틀어박혀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다지 매력적이지가 않다. 사실 주말에 집을 나선것도 오랜만이다. 주말은 그냥 잠에게 양보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집에만 있다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그냥 어딘가라도 가야했다. 그런데 '무제'라는 제목을 보니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그림탓하는 마음도 결국 고요하지 못한 자신의 불평이리라.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니 무엇하나 들어 올 공간이 없다. 사실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4분기 마지막 프로젝트 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전 부장님과의 미팅때 들었던 이야기가 귓가에서 꽹과리 소리처럼 울린다.
'이봐 이건 자네가 책임을 지고서 끝내기로 한 프로젝트가 아닌가. 이렇게 무책임해서야 어디 원 승진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대체 요즘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거야? 투자나 적게 들어간거냐고, 이제서 없던일로 할 수도 없고 말이지.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래도 한 번 믿고 맡겨본건데 지지부진이니 답답하구만. 앞으로 한 달만 더 시간을 주겠네. 그때까지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구.'
꽹과리 소리가 이제 파동을 넘어 실체로 다가온다. 파편처럼 문자들로 튀어 나와 머리를 두드린다. 머릿속에 딱따구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승진에 목숨걸고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어짜피 회사라는 곳은 실적으로 평가받는 곳이 아니던가. 이번 프로젝트는 자신의 이력상에도 중요한 정점이 될 수 있는 건이라서 아무리 쿨한 그녀이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사실 무리수가 있기는 했다. 부장님 말씀 중에서도 가장 거슬리는 단어가 '불가능'이다.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한 번 넘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마케팅부서에서 벌써 4년차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현실가능한것만 관용적인 것들만 하고 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장되는 아이디어들이 오늘도 수백개이다. 그 와중에 아주 어렵게 따낸 건인데 진행이 잘 되지 않고 있다. 그녀는 직감을 믿고 추진을 했는데 다들 냉담하니 혼자서 힘에 붙이는 건 사실이다. 주변도 역시나 그럴줄 알았다하는 눈빛들이다.
'혼자서 창의력 운운하더니만 역시 현실과의 싸움에서는 부딪힐 수 밖에 없구만. 여기는 꿈과 희망의 놀이공원이 아니라구 냉혹한 현실이지.'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이건 가능성이 있고 마케팅계에서도 이슈가 될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들 그렇게 고리타분한지 답답하기만 했다.
'내 편이 없다. 내 직감에 대한 회의가 든다. 그냥 다 엎어 버리고 싶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화가가 캔버스를 찢어내듯이 프로젝트를 엎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아님을 그 누구보다도 알고 있다. 도전과 모험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사랑하는 그녀가 아니던가. 정작 자기 편이 없는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약해진 그녀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무제'라는 작품의 제목이 갤러리안을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제목이 없다는 무한한 제목의 자유. 너무 많은 자유는 지나친 고민이 되기도 한다. 고민할 사이도 없이 지나간 자유를 저당잡힌 세월이 대변한다.
'그래 어쩌면 '무제'라는 제목처럼 내 생각만을 주입하지말고 열린 질문처럼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보자. 뭔가 새로운 관점을 수용해본다면 지금의 사람들의 두려움들도 무엇인지 정리를 해보면 답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겠어.'
이런 생각을 하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다음 그림이 혼란스런 머리를 더욱 부채질한다. 제목 'dk0187al' 아니 무슨 그림 제목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제목이 없어서 불평하던 마음은 이제 제목이 어렵다고 짜증내기 시작한다. 마음한 번 참 간사하다. 그녀는 간사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갤러리옆 커피숍을 선택한다. 커피로 감성을 깨워보겠다는 심산이다. 때마침 우물안으로 동앗줄이라도 내려주듯 갤러리밖으로 그녀를 유인할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어디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오늘 저녁에 초등학교 동창들 모인다는데 너도 올래?'
초등학교 친구다. 생각많은 날은 이상하게 찾는이도 많다. 오전에도 몇 건의 약속을 거절하고 꿋꿋이 혼자 갤러리를 찾았는데 말이다. 물론 당연히 전화 한 통 와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외로운 날에는 전화는 커녕 문자도 한 통 안온다. 이게 무슨 머피의 법칙인지 말이다. 오랜만에 연락 온 초등학교 동창회 건이라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고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또 거절한다. 쉽지 않은 거절을 해야 했던 긴 전화를 받느라 조금 식어버린 카푸치노를 마신다. 커피향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 마음의 짐을 잠시 놓고 자신을 느껴보라고 말거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 연인들 팔짱끼고 걷는 모습, 가족 나들이, 오래된 노부부의 아름다운 뒷모습까지도 그녀 빼고 모두 행복해 보인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는 아까 커피숍에서 받은 냅킨 위에 그림을 그려본다. 지금의 아름다운 풍경을 스케치한다.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는 풍경스케치는 하나의 작은 예술이다. 사실 습관처럼 그리기 시작했던 스케치만 모아도 이미 책 한권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림들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카푸치노 위의 거품 그림 만큼이나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그려볼까하고 그리기 시작한 스케치가 냅킨을 다 펴고 꽉 채울 만큼이 되었다. 얼마나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시간도 생각도 사라져버린다. 존재 존재 존재만이 남으니까...
흘러감이 없는 그대로의 존재.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정 살아있는 순간이라 생각해본다. 생각 밖의 경계로 나와서 감시하지 않고 생각과 하나되는 바로 그 순간들 말이다. 문득 완성된 냅킨 스케치를 보니까 어려운 시절 답배케이스 안쪽의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중섭 화가가 생각난다. 황송하다.
'내가 뭐 화가도 아닌데 ... 이건 낙서고 그 분이 한 건 예술이지... '
그러다 문득 생각해본다. 예술이 뭘까. 그분은 그 작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며 무슨 고민을 잠재웠을까. 타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했을까. 예술은 쓸데없는 두려움과 고민을 잠재우는 게 아닐까. 왠지 오늘의 냅킨 그림은 버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가방에 넣는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무릎을 친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었지? 그림을 통해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해 보는거야!'
커피의 각성 효과인지 아니면 풍경과 하나되게 해주었던 시간 덕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찾았다. 얼른 노트를 꺼내 기록한다. 한 번 얽혔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니까 막혀 있던 샘물이 솟듯이 신이난다.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사실 잠과 바꾸고, 친구들과의 잡담과 바꾸고, 쓸데없는 자투리 시간들과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그렇게 매력적인 존재의 시간들과 멀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의 원천 영감의 근원에서 멀어져 버렸던 건 어쩌면 그녀 자신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직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는 오늘의 경험을 통해서 다시 느꼈다.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를 켜고 앉았다.
'무제'
아니 그것도 제목이지.
'난 그냥 그림이 자신의 제목을 말하도록 할거야.'
그녀는 제목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과 그녀는 분리된 듯 보였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여백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가렸다. 그러고나니 그림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졌다.
'Dreams come true.'
마음에 든다. 제목없음의 자유 속에서 그녀는 복잡한 생각의 미로를 걷기도 했고, 다시금 자유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제서야 아까 갤러리의 그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였는지 알듯 말듯 윤곽이 잡혔다. 열림의 미학이였다. 월요일이 기다려진다. 난 4분기 마지막 프로젝트 이름으로 '무제'를 적었다. 그러고나니 본래 가고자하던 방향이 더 명확해지는 걸 느꼈다. 그 프로젝트 자체에서 길을 알려주었다. 마치 '무제'의 그림이 자신의 모습을 더욱 자유롭게 나타냈듯이 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내일도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 아름다운 직관의 시간에 이미 매료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오늘 밤 그녀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자리할 그림 한 점이 참으로 소중하다. 스스로 화가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화가라는 말 자체가 무엇이 중요한가. 그녀는 이미 그림이 주는 휴식과 매력의 시간을 맛보았으니 말이다. 시간 속에서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오랜만의 휴식이다.

Dreams come true by Sa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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