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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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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1일 21시 58분 등록

수요일 오전 8 30.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서고 나니 북적대던 집이 갑자기 텅 비었다. 틀어놓은 FM 라디오에서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집을 둘러보니 난장판이다. 아이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있고 침대 위 이불은 지난 밤의 몸부림을 암시하는 듯 어지럽다. 불현듯 언젠가 읽은 기사가 떠오른다. 자는 동안 침구에 묻은 땀을 말리려면 침대를 정리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도 좋다. ‘그래 오늘은 햇살이 좋으니 침구를 말리는 것도 괜찮아라고 중얼거린다. 그래도 식탁 위의 반찬 그릇들은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고 밥 먹은 그릇들은 개수대에 쓸어 넣고 물을 부어 놓는다. 설거지는 하루에 한 번만. 매 끼니마다 설거지를 하는 것은 프로 주부의 자세가 아니다. 이제 나갈 준비가 다 되었나? 아침밥은 아이들과 함께 국에 말아 후루룩 먹었으니 대충 씻은 얼굴에 스킨과 로션만 간단히 바른다. 비비크림이라도 바르면 나을 텐데 그조차 귀찮다. 누굴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어때하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매일 입는 트레이닝복에 외투를 걸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니 푸른색 애마가 나를 반긴다. 남편이 타던 중고차지만 나는 이 차가 아주 마음에 든다. 늠름하고 과묵한 남자친구가 새로 생긴 듯 하다. 창문을 열고 미끄러지듯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가니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그래, 이게 바로 백수, 아니 전업주부로 사는 맛이지.

 

내가 향한 곳은 집 근처 멀티플렉스 영화관. 오늘 영화는 9시 정각에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두 남녀 배우가 주연한 멜로물. 부산 국제영화제 개막작인데다 평점도 나쁘지 않고 벌써 100만 관객이 본 영화라니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관은 한산하다. 가끔 삼삼오오 함께 온 아줌마들이 보일 뿐이다. 하긴 평일 오전이 아닌가? 평일 오전에 영화관에 있는 나의 모습이 낯설다. 지난 14년 동안 직장인으로, 워킹맘으로 살면서 나는 조조영화는커녕 영화관도 거의 찾지 못했다. 물리적 시간이 없었다기보다는 마음이 여유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은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영수증에 찍힌 관람료를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마음 속으로 역시 난 알뜰주부야라고 외친다. 원래 관람료의 반값인데다 카드 할인까지 받으니 단돈 몇 천 원에 영화를 즐길 수 있다. 평일 오전 혼자 보는 조조영화, 요즘 내가 즐기는 나만의 아티스트 데이트이다.

 

상영관에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젊은(?) 시절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당시 나의 남자친구는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다. 내 키가 160cm가 조금, 아주 조금 모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와 내가 함께 있는 풍경은 그다지 조화롭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MC 유희열이 가수 성시경과 박정현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듯이 거인 걸리버와 요정 팅커벨의 조합이랄까? (믿기지 않겠지만 약 20년 전 나는, 지금보다 10kg 정도 덜 나가는 날씬한 몸매에 사과같이 바알간 얼굴을 가진 아가씨였다. 그러니 팅커벨과 아주 조금, 조금은 비슷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면 고전적인 표현으로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의 모습이랄까? 우리는 둘 다 어리고 순수했던 대학 1학년 생이었다. 그 날은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가 있던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그와 나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조조영화를 함께 보기로 했다. 당시 우리집은 청주 시내 번화가에 있었는데 근처에 동강백화점이란 작은 백화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백화점 꼭대기 층에 영화관이 있었다. 그 때는 한 영화관에서 많아야 한 두 개의 영화가 상영되고 영화관 간판에는 무명의 화가가 그린 주인공들의 어색한 얼굴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영화관 근처에서 그를 만났는데 웬일인지 친구를 데리고 나왔다. 친구는 키가 크고 뚱뚱한데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의아했다. 인사만 하고 가려니 했던 그는 상영관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리곤 우리 둘이 앉은 자리에서 좀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얼마 안 있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여류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일 텐데 아쉽게도 영화의 줄거리나 장면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어색한 숨결, 처음 느낀 입술의 감촉, 각도가 맞지 않아 부딪혔던 단단한 앞니. 그리고 그것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불안하고 불편했던 첫 키스였다. 뒤쪽에 앉은 그 남자가 훔쳐보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처음 해본 입맞춤은 낭만적이기는커녕 입술이 찢어질 듯 아리기만 했다. 누군가는 첫 키스를 하면서 종소리를 들었다는데 내 귀에 들린 것은 서툴고 어색했던 그와 내가 만들어 내는 서로의 앞니 부딪히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래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상영관에 앉아 있기는 했는데 영화의 내용이 머리 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와 나는 그 곳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오늘 선택한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영화 속 청춘남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그들이 하는 사랑은 애잔하지만 해피엔딩이라서 흡족했다. 그리고 영화 속 대사 하나가 내 마음 속으로 쏙 들어와 깊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 대사를 읊조리며 나의 조조영화의 추억을 되새김질 했다.

그녀의 눈은 말을 하고 있구나.

나는 대답을 해야지.

-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에서

오직 그대만.jpg 

 

행복의 중심, 휴식의 저자 율리히 슈나벨은 휴식의 의미는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즐기는 조조영화는 나에겐 휴식이다. 조조영화를 보면서 옛추억을 떠올리고 메마른 마음 속 감성이 촉촉히 젖어 들었으니 말이다.

 

당신의 휴식은 어떤 모습인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면 거창하지 않아도 휴식일 수 있다. 휴식이 반드시 엄청난 비용을 들여 떠나는 해외여행일 필요는 없다. 또한 물리적 시간이 충분해야 쉴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즐기고 있다면 그것은 휴식이다. 아니 다른 이와 함께 해도 휴식일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와 함께 하는 즐거움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가을이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낙엽이 깔린 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휴식의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떠한가? 거기에 가을과 어울리는 음악이 함께 하면 더욱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음악을 들으며 그 길을 걸으면 금상첨화이지 않겠는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 낮잠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낮잠에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피곤하면 쉬어야 하지 않은가? 대영제국의 영웅 처칠은 매일 낮잠을 자고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신이 낮잠을 잔다고 해서 게으르거나 허약한 것은 아니다. (내가 낮잠을 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당신의 휴식, 그것은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휴식은 남 눈치보지 말고 네 멋대로 해라.

IP *.143.15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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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2011.11.21 22:01:47 *.143.156.74
어제 올린 칼럼을 수정해 다시 올립니다.
조언해주신 한선생님과 뎀뵤양, 그리고 땡7이들에게 감사 인사 올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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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11.21 23:20:02 *.246.70.188

ㅋㅋㅋ 언니. 재동이가 살아나고있어.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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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11.22 09:25:19 *.163.164.179
<당신>에서 <나>로 돌아왔구나. 
재미를 찾아서 드러내 주었구나.

대부분 직장인들이 일하는 시간에...영화를 보는 매력, 아니 마력같은 충전의 기분.
느긋함. 여유로움...거기에 커피한잔, 오가는 사람들...내가 느끼는 행복.
재경이의 글을 읽다보니,
직장 다닐때 꿈꾸던 장면 중 하나를 생각나게 한다. 
그것이 너의 글 속 얼굴을 살짝 감추고 있다.

확!!!! 드러내었으면 하는 아쉬움.
영화의 내용 보다도 휴식에 대한 재경이의 느낌이 파릇파릇 묻어났으면 하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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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11.11.22 20:57:58 *.12.219.227

팅거벨과 같은 몸매와 빨간 사과같은 얼굴이 상상이 가지는 않지만...
앞니 부딪히는 소리에 한참 공감의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나저나 요즘은 앞니 부딪힐 일이 없어서 걱정이네요. 글, 재밌게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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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11.23 09:57:23 *.166.205.131
첫 키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구만요 ㅋㅋ
그 뚱뚱한 남자는 왜 따라왔을까?

누님의 유머가 슬슬 살아나네요^^
프로 주부는 하루에 한번만 설거지 한다!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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