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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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 밤의 프롤로그]
앞으로 나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전개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싶어지게 된 내 자신의 마음이 아마도 그 답이 되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Kings of convenience의 곡을 듣고 있다. 나의 글 역시 이렇게 편안함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 사람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냥 나도 기타를 시작하고 싶어지고,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예술이 흘러넘치면 좋겠다. 예술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면 그냥 영혼의 언어라고 해두자. 그건 그냥 마음의 울림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러한 예술조차 소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도너츠를 먹어치우듯이 소비하고 말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예술은 일상이다. 사랑이고 영혼의 언어이다.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시간이다. 누가 뭐라해도 사수해야 하는 시간들이다. 순간들이다. [서문]
잠이 오지 않는 밤 헤르만 헤세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위안같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말들을 전한다.
다행이다.
다시 희망이 살아숨쉬고, 나의 글들에 날개가 달린다.
형편없는 시를 쓰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해준다.
-에세이 '시에 관하여' 1918년-
나는 시를 쓰려는 충동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충고합니다.
출판을 기대했다가는 대부분 실망하게 되므로 출판을 고려해서 쓰지 말고,
일상생활에서는 펼치지 못하는 영혼의 힘을 각성시키기 위해 시를 쓰십시오.
-카트린 그로스 탈롬네엑 보낸 편지 1956년 10월-
삶에 대한 숙고 속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속에서
비로소 인간의 삶은 아름다움과 광채와 의미를 얻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삶의 성찰이 아니라면
모든 문학, 모든 예술, 모든 철학, 모든 사랑의 행복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메모들 1958년 8월-
'네가 나를 셰익스피어로 만들었어.'
무슨 마법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작품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상을 받거나 어워드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그러한 작품다운 작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솔직한 고백들이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실 진정한 예술이란 목적을 벗어난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사랑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우주와의 대화인 것이다. 그렇기에 내 삶에 더 이상 시가 흐르지 않고 노래가 흥얼거려지지 않고 그림과 멀어져 있다면 한 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영혼이 병들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 난 예술 예찬론자이다. 아니 그것을 꼭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다.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라고해도 좋다. 성찰의 시간도 좋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럴때에야 비로소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의 난 눈물이 날만큼 불행했다. 내가 텅비어 있는 나의 삶이 그 아침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내 삶에 내가 없었다. 그러한 마음의 병을 방치해 두었거나 해결할 방도를 모른채로 시간만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스스로는 가장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편안한 길이 결국은 자신과 멀어졌던 길이였다. 뭔가 분주하고 바빴는데, 무엇을 위한 바쁨이였는지 돌아보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흐느끼던 내 안의 영혼이 내게 말을 다시 걸었다. 아니 어쩌면 거의 최후통첩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나의 대화 시도를 무시하다가는 네가 위험해 질 수 있어.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나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글이 써지고 음악이 들리고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척'하기 선수들이다. 병을 인정하기 싫어서 거부하다가 병을 키우는 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솔직해지면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들에 감사하게 된다. 우리들은 자신의 행복이 없이 누군가의 행복이 될 수 없다. 스스로가 불행한데 어떻게 또다른 누군가의 행복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행복을 강요 받았었다. 아니 자기 스스로 그렇게 주입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꿈꾸던 그 순간을 깨어나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수 있다.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행복을 다시금 알게 된다. '행복이란 어느 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으면서 자신을 깨닫는 일이다.'라는 그 말을 몸으로 익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폐해져 있다. 특히 직장인들의 경우는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리면서 자신의 삶을 박탈당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잘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인데 그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막막하고 또 두려워진다. 그러면서 병이 깊어지는 것이다. 자아실현을 위해서 꿈꾸던 그 때의 폐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자아상실의 나날이 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예전의 아침처럼 행복하지 않거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이 떠지지 않는다면 이 방법을 써보라는 것이다. 웃어서 복이 오는지 복이 와서 웃어지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한 번 해보는 것이다. 삶 속에서 자신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결심하는 것이다. 결심을 하고는 한 번 잠깐이라도 시간을 쏟아보는 것이다. 삶 속에 다시 사랑이 샘솟을 수 있도록 말이다. 멀리서 찾던 행복을 가까이에서 스스로에서부터 촉발되도록 해보는 것이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일상에서 예술이 흐르도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자신과 대화를 해보면 아니 가만히 들어주기만해도 답이 나온다. 그리고 여행자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름 휴가나 특별한 시간을 내어야만 여행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여행자의 마인드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지는 죽을뻔한 아찔한 사고의 경험자나 죽을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 경우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관점의 변화나 사고의 변화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바로 지금 행복해질 수 있는데, 머뭇거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의 산을 오르는 길은 무궁무진하게 많이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하던가는 자신의 마음이다. 하지만 행복과 사랑이 가져오는 변화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산 정상에서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어떤 길로 정상에 이르던 그들의 얼굴에서는 홍조가 느껴진다. 몸에 피가돈다. 사랑이 온 몸에 펄떡이며 도는 사람에게서 자연적으로 예술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소나무가 장미꽃의 삶을 부러워만 한다고 그 삶을 살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럴려면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어느 날 죽음의 문턱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래 내가 지금껏 장미꽃을 보며 그 삶을 부러워한 소나무였구나 후회해도 소용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푸를 수 있는 자신의 본성을 잊고 그 초여름 한 때 붉지 못했다고 좌절하며 살았었다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다. 가슴이 아플 뿐이다. 여행자의 마인드로 삶에서 예술이 흐르게 하라.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내가 터널을 빠져나온 경험담이기도 하다.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삶이 아닌 자기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다시금 전하고 싶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시를 쓰게 되고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고 다시 노래가 흥얼거려진다면 그러면 되었다. 새 삶의 시작을 함께 축하해주고 싶을 분이다. 나 덕분에 셰익스피어가 되었다던 그 사람은 여전히 시를 쓰고 있을까. 사랑이 넘쳐 흐를까 궁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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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예술은 무엇인가 vs 무엇이 예술인가
지난 연구원 과정은 삶에 대한 물음을 전자에서 후자로 개별화하는
시간들이었던 셈이네요. ㅎㅎ 일상속에서~~
사람들에게 '예술'은 너무나 익숙한 단어가 됐어요. 예술가라는 단어도.
일반 사람들이 예술을 찬미하지만 친숙해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죠.
'소비하지만 스스로는 생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샤의 책은 그런 선입견에 똥침을
놓는 시도가 되는 셈인가요. ^^그 똥침 한방이 제대로 약효를 발휘했으면 좋겠네요.
그런 면에서 일상을 시인으로, 화가로, 사진작가의 시선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컨셉은
신선한 시도로 보여집니다. 샘플로 제시된 칼럼에서 사샤가 기진 고유의 느낌을 훌륭히 살렸구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2%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척하며 사는 삶에서
자신에 충실한 삶으로의 전환. 문제의식은 공감이 갑니다. 헌데 일상에서 예술이 흐르게 한다,
자신의 삶을 산다, 여행자처럼 세상을 바라본다는 방법론에 잘 동화가 되지 않네요.
다른 사람의 언어라는 느낌이 듭니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기의 언어로 정제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언어가 <글자들의 공중부양>이라는 사진만큼 사샤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아요.
샘플로 제시된 칼럼들에 힌트는 충분히 제시된 걸 봤습니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서 화끈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드러내 주었으면.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해서 버퍼를 두지 말고 날것을, 욕망을, 상처를, 슬픔을,기쁨을
토해 주었으면. 드러난 것들은 나중에 정리하면 되지만 표현되지 않은 것들은 있는 것조차 모를 수 있잖아요. 모닝페이지 한다고 했었죠.ㅎㅎ 거기에 많은 식재료들이 잠자고 있을 것 같은데.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울렁증을 적나라한 자기 사례를 통해 다독여 주면, 독자들은 그 끈을 믿고 동굴속으로
발을 디딜 용기가 나지 않을까. 유전이 뿌리에서 만나듯 가장 적나라한 것이 우리가 한 뿌리임을 깨닫게
해 주는 단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양한 촉수는 상황에 따라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땐 사샤라는
정체성을 버렸으면. 역설적으로 나는 박주선, 나는 사샤라는 의식을 잊었을 때 가장 사샤다운 언어가 그 텅빈
공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간 발견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므로.ㅎㅎ
평상시에 못 챙겨주고 낮도깨비처럼 나타나 송구하기 그지 없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하지만 한 해의 농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마당이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잠시 출현했습니다.
농부로서 보낸 지난 일년에 부러움과 축복과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매듭을 잘 맺으시길.
그리고 또 처음이듯 시작하시길.
p.s : 책제목에는 예술을 쓰더라도 칼럼을 쓸 때는 예술을 사샤식으로 재정의해 두면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예술'하면 만주벌판에 홀로 선 것처럼 좀 막막한
느낌이 와서...
지난 연구원 과정은 삶에 대한 물음을 전자에서 후자로 개별화하는
시간들이었던 셈이네요. ㅎㅎ 일상속에서~~
사람들에게 '예술'은 너무나 익숙한 단어가 됐어요. 예술가라는 단어도.
일반 사람들이 예술을 찬미하지만 친숙해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죠.
'소비하지만 스스로는 생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샤의 책은 그런 선입견에 똥침을
놓는 시도가 되는 셈인가요. ^^그 똥침 한방이 제대로 약효를 발휘했으면 좋겠네요.
그런 면에서 일상을 시인으로, 화가로, 사진작가의 시선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컨셉은
신선한 시도로 보여집니다. 샘플로 제시된 칼럼에서 사샤가 기진 고유의 느낌을 훌륭히 살렸구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2%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척하며 사는 삶에서
자신에 충실한 삶으로의 전환. 문제의식은 공감이 갑니다. 헌데 일상에서 예술이 흐르게 한다,
자신의 삶을 산다, 여행자처럼 세상을 바라본다는 방법론에 잘 동화가 되지 않네요.
다른 사람의 언어라는 느낌이 듭니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기의 언어로 정제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언어가 <글자들의 공중부양>이라는 사진만큼 사샤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아요.
샘플로 제시된 칼럼들에 힌트는 충분히 제시된 걸 봤습니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서 화끈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드러내 주었으면.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해서 버퍼를 두지 말고 날것을, 욕망을, 상처를, 슬픔을,기쁨을
토해 주었으면. 드러난 것들은 나중에 정리하면 되지만 표현되지 않은 것들은 있는 것조차 모를 수 있잖아요. 모닝페이지 한다고 했었죠.ㅎㅎ 거기에 많은 식재료들이 잠자고 있을 것 같은데.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울렁증을 적나라한 자기 사례를 통해 다독여 주면, 독자들은 그 끈을 믿고 동굴속으로
발을 디딜 용기가 나지 않을까. 유전이 뿌리에서 만나듯 가장 적나라한 것이 우리가 한 뿌리임을 깨닫게
해 주는 단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양한 촉수는 상황에 따라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땐 사샤라는
정체성을 버렸으면. 역설적으로 나는 박주선, 나는 사샤라는 의식을 잊었을 때 가장 사샤다운 언어가 그 텅빈
공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간 발견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므로.ㅎㅎ
평상시에 못 챙겨주고 낮도깨비처럼 나타나 송구하기 그지 없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하지만 한 해의 농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마당이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잠시 출현했습니다.
농부로서 보낸 지난 일년에 부러움과 축복과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매듭을 잘 맺으시길.
그리고 또 처음이듯 시작하시길.
p.s : 책제목에는 예술을 쓰더라도 칼럼을 쓸 때는 예술을 사샤식으로 재정의해 두면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예술'하면 만주벌판에 홀로 선 것처럼 좀 막막한
느낌이 와서...

상현
'나답다', '사샤답다'는 게 내가 확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뒤돌아 보니 그게 나를 옥죄는 감옥이더군요. 길이 숨어 있다기 보다는
마음을 따라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게 아닐까.
연구원과정을 통해 나를 많이 알게 됐겠지만 그건
다만 시작입니다. 손에 잡힌 한 움큼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았으면. 손에 쥔 밀가루 한줌과 물고기 한마리는 이정표이되,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책 한권이 되는 건 아니겠지요.
또 하나, 멀쩡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술의 사바나로 불러들이기에
사샤의 선동은 아직 꽃단장한 문명같습니다. 첫사랑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설렐뿐더러 돌아선 연인을 돌이킬 만큼 애틋했으면 좋겠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되고 싶었던 친구. 사샤가 지금 그 친구의 입장이 된 거잖아요.
굶주린 사자가 영양을 만났을 때 세상엔 오직 포식자의 심장소리와
먹잇감의 숨소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두근두근 심장소리에 귀기울여
보세요. 바람에 실린 피냄새에 몸을 맡겨 보세요.
최루탄 깔 준비됐나요?^^
뒤돌아 보니 그게 나를 옥죄는 감옥이더군요. 길이 숨어 있다기 보다는
마음을 따라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게 아닐까.
연구원과정을 통해 나를 많이 알게 됐겠지만 그건
다만 시작입니다. 손에 잡힌 한 움큼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았으면. 손에 쥔 밀가루 한줌과 물고기 한마리는 이정표이되,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책 한권이 되는 건 아니겠지요.
또 하나, 멀쩡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술의 사바나로 불러들이기에
사샤의 선동은 아직 꽃단장한 문명같습니다. 첫사랑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설렐뿐더러 돌아선 연인을 돌이킬 만큼 애틋했으면 좋겠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되고 싶었던 친구. 사샤가 지금 그 친구의 입장이 된 거잖아요.
굶주린 사자가 영양을 만났을 때 세상엔 오직 포식자의 심장소리와
먹잇감의 숨소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두근두근 심장소리에 귀기울여
보세요. 바람에 실린 피냄새에 몸을 맡겨 보세요.
최루탄 깔 준비됐나요?^^
wow!!!
선배님~~~ 저의 멘토님~~~~
어디가셨다가 이제 나타나셨어요 ^^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ㅠㅠ
안그래도 지금 일상속의 예술 그 한 두 단어를 마음에 두고
여기저기 방황하던 중이였답니다
좀더 나 답게 사샤답게 주선답게가 무엇인가를 고민에 고민하던중이였어요
내용에 대한 따뜻한 조언 감사드리구요
앞으로도 계속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2%부족할때의 그 따뜻한 응원과 조언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요새 소설 공부는 잘 되시는지요... 말씀 나누고 싶은게 많아요~
용기가 사라질까 두려울때쯤 나타나주셔서 감사하구요
다시 한 번 마음 가다듬고 써보겠습니다 ^^
추운데 건강 조심하시구요~~
VR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