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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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치의 모의 비행> 두 번째 서문 쓰기
대학교 1학년. 전 학년에서 유일하게 노란머리였던 나는 과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은 많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 이름은 잘 몰라도, ‘아, 노란머리?’라고 누구나 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자유를 오매불망 그리며 시작한 대학 초기에 나는 흔히 적어보는 ‘To Do List’를 적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는 사람 최대한 많이 만들기”
이다. 아는 사람을 정말 많이 만들기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활동들을 했다.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근로 장학생’을 신청해서 기독교 학교여서 존재했던 교목실에서 근로를 하게 되면서 타학과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고, 동아리와 학회 활동 등에 이어 자연과학연구실에 연구원이 되었다. 엄청나게 다양한 활동들 덕분에 교내를 걸어다니다 보면, 두 걸음마다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는 학교 들어 온지도 얼마 안됐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은 거냐?”고 말이다. 친한 선배들은 내게 늘 “내가 너처럼 학교 생활 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보내왔고, 동기나 후배에게는 어느 새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늘 꽉 차 있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자만감도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나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즐겼으며, 내 삶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 4학년이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알찬 대학 생활을 하는 후배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을 하고 취업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저 사람보다는 잘 되겠지.’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기도 했다.
어느 날 후배 한 명과 차를 밥을 먹고, 차를 한잔 할 기회가 생겼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어느 새 내 지난 경험들을 후배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활동들을 했었고, 이 활동들을 통해 이런 걸 얻었으며, 이런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이다. 대화의 90% 이상은 나의 이야기였고, 후배는 내 질문에 간간이 대답을 할 뿐 자신의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재미가 없어’ 혹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리고 ‘난 이미 너보다 더 잘 살고 있거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후배의 대화가 끝나고 혼자서 캠퍼스를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거지?’라고 말이다.
당시 그 후배는 혼자서 떠나는 배낭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처럼 학과나 교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교외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름의 계획이 있었고, 나름 즐거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내 눈에는 ‘그 후배의 활발한 활동들이 눈에 띠지 않았고, 후배가 하고 있는 생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배에게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 내 좁은 시선과 짧은 경험들에서 느끼고 보았던 것들을 어느 순간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와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들어 주다가 카페를 나오자마자 도망치듯이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내 멋대로’ 살고 있으며, 나름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 주변에 내 또래 친구들 역시 각자의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후배와의 대화 이후로 내 삶을 누구에게 강요하거나, 함부로 조언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와 내 또래들을 ‘아픈 청춘’,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가진 망원경을 통해 우리들을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며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그들의 잣대로 만든 눈을 통해 쳐다보면서 우리를 자기들 마음대로 정의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들 나이 때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얘기하면서 안타까워하고, 미안해 하며, 힘을 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힘들지 않다. 아프지도 않다. 그저 나름의 방식으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 선택의 순간에 ‘내가 가장 즐거울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서 오는 장애물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으며, 그 순간들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 인생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선택에 대한 결정이 매번 즐겁고 기쁠 수만은 없다. 선택으로 인해 힘들 수도 있고, 더 좋지 않은 상황이 되기도 하며, 그로 인해 좌절하기도 한다. 이러한 순간들은 지금 20대라서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10대 때도 이런 좌절감을 맛 보았던 순간이 있었고, 앞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때의 고민과 선택에 따른 또 다른 좌절의 순간들이 나를 찾아 올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생각들과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살면서 겪고 있는 선택의 순간들과 그 속에서 느끼는 나의 감정들, 그리고 내 삶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당신들이 걱정 해 주지 않아도 이렇게 잘 살고 있음을 얘기하고 싶다.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당신의 삶과 당신과 동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생각과 선택들로 지금의 삶을 만들어 왔듯이, 나 역시 나만의 생각과 선택들로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를 포함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내 삶이 표본이니, 너희도 이렇게 살아보지 않으련?’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가진 것도, 이룬 것도 하나 없지만, 나는 여전히 나만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며, 나의 고민들에 누군가는 공감해 주고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삶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고, 공감 받고, 이 책이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통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니? 우리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고 있구나?’라는 교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흔히 세상이 정해놓은 ‘청춘’이라는 카테고리에 함께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눈이 부신 한 줄기 빛이 프리즘을 통해 수백만가지의 색으로 나누어지듯, 우리들의 삶도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의 삶에서 공감을 느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감흥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시대의 수많은 청춘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지난 8월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는 여름에 열흘 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내 삶에서 선택의 기준이 ‘책임’에서 ‘자유’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자유로운 삶’과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삶’을 꿈꾼다. 4개월 단기 계약직으로 일을 하면서 도시락을 싸다니면서 점심값을 아껴가며 모은 돈으로 내년에는 이탈리아 루카로 떠나 그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누군가는 내게 ‘철없다’, ‘결혼은 언제 할거냐’라고 물어본다. 나는 ‘남들이 사는 대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결혼을 의무감으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내 삶이 흘러 가는 대로,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다가 내 마음이 멈추는 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싶다. 그곳이 꼭 대한민국일 필요는 없다. 세상은 넓고 내 발길이 머무를 수 있는 곳도 많다. 내 삶이 어디로 갈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따라 가다 보면, 그 곳에 내가 원하는 삶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내가 살아가는 이 모습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난 그 순간 내 인생의 맞춤형 답안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 역시 각자의 답안지를 완성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후회 없이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
#10. 신치가 사는 법
<꼭지7. 30세 이하 자녀는 부양가족이라고?>
내가 태어나자마자, 돌도 지나기 전에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셨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생활비는 줄어들었고, 다섯 식구가 먹고 살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어느 시점부터 정부의 돈을 받기 시작했다. 두 다리 길이가 달라 걸을 때 절룩거리긴 하셨지만, 평소에는 잘 걸어 다니기만 하시던 아버지가 왜 동사무소 사람들만 오면 전혀 걷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지 어릴 적엔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수 많은 편법들을 하나 둘 알아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시에 했던 그 행동들이 우리 가족의 생활비 중 일부였던 그 정부의 돈을 받기 위한 일종의 연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애등급이 그렇게 받기 힘들다는 장애 1급이라는 것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연례 행사처럼 치러지는 엄마아빠의 쇼를 보고 있자니, 언제부턴가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꼭 저렇게까지 해서 돈을 받아야 해?’ 라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또 가슴의 다른 한편에는 ‘우리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빨리 돈 벌어서 저 돈 안 받아도 될 정도로 잘 살아야지.’와 같은 기특한 생각도 어린 마음에 하곤 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연기까지 해서 돈을 받아보려는 엄마와 아빠가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창피함은 결국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의 불씨를 지핀 이유 중에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나를 괴롭혀오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을 전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내게 필요했던 것이다. 오로지 ‘나’로써만 보여줄 수 있는 세계, 그것이 바로 대학이란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학이란 공간에 있으면서 어릴 적의 내가 그토록 창피해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행동으로 받아왔던 정부의 돈 중의 일부가 매달 생활비가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당장 내 눈 앞에서 보여지는 창피함은 사라지고, 창피함에 대한 결과인 돈만 내 통장으로 들어오니, 어느 새 죄책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리지고, ‘당연히 받는 것’이 되고 말았다. 대학교 4학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존재’ 했기에 그나마 정당하게 받을 수 있었던 그 돈이 끊겨질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고시원 하나에 여동생과 내가 제대로 된 방 한칸 없이 2평 남짓의 고시원에 살고 있던 서울로 남동생과 엄마가 이사를 오기로 결정을 하면서 우리 집,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에게는 비상시국이 되었다. 당장 먹고 사는 것도 걱정인데, 그 돈마저 끊기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다. 여동생과 나는 원래부터 고시원비만 집에서 도움을 받았고, 생활비와 학비는 아르바이트와 장학금 그리고 학자금 대출로 각자 해결을 하고 있어서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당장 고3인 남동생이 문제였다. 그래서 엄마는 서울에 집 한 칸이라도 얻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에 갈 결심을 하게 된다. 젊은이들이 워킹할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가서 농장일이나 소시지 공장 등에서 일하면 한국에서 버는 것보다 최소 2배 이상을 벌 수 있는 것처럼 일본에 가면 50대인 엄마가 한국에서 하루 종일 손에 물 묻혀 가면서 한달 꼬박 일을 해서 벌 수 있는 돈의 최소 두 배 이상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불법체류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고, 우리 3남매는 서울에서 고시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동생과 나는 예전처럼 같은 고시원 방에서, 그리고 남동생은 남자들이 있는 방들 중에 하나를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구에 있는 사촌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남동생이 옆방에 사는 대학생 남자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고3이고 수능 시험을 몇 달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방음이 잘 안 되는 고시원 방이라 한창 술 마시고 놀면서 소음을 만들어 내던 옆 방 사는 대학생 남자아이에게 동생이 한 마디를 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경찰서까지 갔다 왔다는데, 가까이 있었던 나와 여동생은 남동생이 싸웠다는 것도, 맞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자기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 때의 사건도 결국 대구에 있는 사촌오빠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다행히 한 성격하고, 법대 교수였던 사촌오빠 덕분에 일이 잘 마무리 된 모양이었다. 남동생에게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미안해서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일 때 찾아와서 얘기할 수 없는 누나라는 사실이 미안했고, 찾아왔다고 한들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고3일 때 가족들에게 받았던 ‘돌봄’을 지금 고3인 남동생에게 해 줄 수 없다는 현실이 미안했다. 그 동안 말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남동생은 ‘별일 아니라’며 오히려 누나를 안심시켜주려고 애썼다. 일본에 가 있던 엄마에게 가끔 전화가 왔다. 엄마는 소세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우리들 살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면서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랑 다르게 음식도 참 깔끔하게 먹는다’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가끔 들려주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가 함께 사는 사람들과 트러블이 있어서 마음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당시만 하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휴학을 하고 1년 정도 어학연수를 다녀오던 때였다. 하지만, 나는 휴학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는 빨리 졸업을 해서 돈을 벌어서 엄마의 경제적인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2005년 가을, 엄마가 일본에 가기 전에 해당 공무원을 만나서 이야기를 잘 한 덕분에 아빠가 살아 계실 적에 누리던 혜택을 다행히 계속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운이 좋게 지금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엄마는 일본에서 고생하면서 모아 두었던 보증금 300만원을 우리에게 보내주었고, 그 돈으로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엄마는 서류 상으로 아픈 사람이고, 우리는 그 덕분에 나라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10대, 20대 초반이라서 엄마를 부양할 수 없었던 아이 셋은 각자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매해 한 두번씩 임대아파트에 살 자격을 검사하는 그 날이 돌아왔다. 지금까지는 서류로만 대체했는데, 이번에는 아파트로 직접 사는 모습을 보러 왔다. 정말 서류에서처럼 엄마 혼자서 살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실사를 하러 왔던 사람이 돌아간 저녁, 엄마가 내게 말했다.
“30세 이하의 자녀가 부양가족이라는데, 그게 말이 되? 요즘 자식들이 부모를 어떻게 부양해? 자기들 앞가림이라도 잘하면 감지덕지지. 요즘은 50-60대 취업률이 더 높다잖아? 다 큰 자식들이 취직을 못해서 걔네 먹여 살려야 하니까 말이야.”
엄마의 이 말을 듣는데, 쓴웃음이 나온다. 그렇지, 30세 이하의 자녀들. 내 주변 친구들만 봐도 취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에게 매달 일정 금액의 생활비를 꾸준히 드리는 친구들은 보기 드물다. 정말 엄마 말처럼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바쁘니 말이다. 취직 못해서 부모님께 손이라도 안 벌리면 다행인 세상이다. 1년 내내 원서 내고 취업 준비만 하다가, 결국 군대로 다시 들어간 친구가 생각이 난다. 그 친구가 처음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서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
“야, 아직 젊은데, 조금 더 시도해 보면 안되? 군대는 언제든지 갈수 있잖아?”
하지만, 친구가 많이 지쳤던 모양이다. 알고 있지만, 졸업하고 1년 이상 지난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로만 연명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이 되자 결국 친구 자신으로써도 힘든 선택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결국 군대에 다시 입대했다. 하지만, 몇 달 후, 그 친구는 사회에 대한 미련이 남아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사회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1년. 취직을 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보는 면접마다 족족 떨어지고 또 다시 지친 친구는 얼마 전 다시 군대로 돌아 갔다. ‘이번에는 진짜 말뚝 박을거다’라는 비장함을 남기고 말이다.
나는 여전히 사회적 소수의 빈곤한 가정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항상 가슴 한 켠에는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아 간다. ‘내가 조금 더 잘 살았더라면,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을텐데, 졸업하고 6년이 지나고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혼자 살기에도 벅찬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더 어려운 이들이 누려야 할 사회적 혜택을 내가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말이다. 그리고 나는 꿈을 꾼다. 언젠가 지금껏 내가 받아왔던 이 모든 혜택들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멀리 그리고 거창하게 꿈꾸자면, 재단을 만들어 지금껏 내가 받아온 혜택들을 과거의 나 혹은 현재의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돌려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회적인 이슈들과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혜택들을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30세 이하의 자녀가 부양가족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진단할 수 있고, 그에 적합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사회의 리더로 뽑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꼭지8. 돈 안 쓰고 버티는 법>
나는 평일 9시30분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고, 매달 13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그것도 이것저것 세금을 제하고 나면, 내 통장에 실제로 들어오는 급여는 12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일 것이다. 광화문으로 출근한 첫날, 과장님, 차장님과 함께 근처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메뉴판의 점심메뉴 중에 가장 싼 게 7,000원이다. 일주일에 팀점심이 있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내가 써야 하는 점심값은 28,000원이다. 한달이면 거의 10만원이다. 지난 5년간 일하면서, 그리고 돈을 적게 벌 때, 일을 전혀 하지 않고 놀았던 두 달간 썼던 신용카드 값과, 인터넷, 전화요금 그리고 학자금 대출 등을 내는데만 최소 60-70만원의 돈이 필요하다. 월급날 과거에 썼던 돈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내 수중에 남는 돈은 거의 없다. 그나마 조금 남는 돈도 사람들을 만나면 금새 사라지는 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생활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게 되었다. 회사에 들어가서 처음 두 주동안에는 내 돈을 쓰지 않고 점심을 먹을 수 있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나머지 요일에는 밥을 먹지 않았다. 점심 때는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에 가서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랬더니 배가 고파서 오후 근무 시간에 집중이 되지 않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기진맥진해서 집에 가면 점심에 못 먹은 밥까지 먹으면서 본의 아니게 폭식을 하게 되고, 기운이 없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방법을 달리 하기로 했다. 점심에 도시락을 싸 다니기로 한 것이다. 사무실에 도시락을 싸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처음에는 회의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것이 조금 꺼려졌으나, 하루 이틀 점심을 싸서 가다 보니 점점 혼자 먹는 점심시간에 익숙해 지기 시작했다. 11시 50분이 되면 점심약속이 있는 사람들이 슬슬 밥을 먹으러 나가기 시작한다. 12시쯤 되면 사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그제서야 나는 도시락을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간다. 점심을 다 먹고 나면 10-15분 정도 지난다. 12시 15분. 밥을 다 먹고, 책을 챙겨 1층 카페로 내려간다. 1층 카페가 넓다고 하지만, 커피를 시키지 않고 앉아 있으면,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잔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는 12시반쯤 되면 슬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밥값도 아까운데, 커피값은 더 아까워 어떻게 하면 눈치 보지 않고 카페에 앉아서 편하게 책을 볼 수 있을까를 궁리하던 중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월요일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내려가 가장 저렴한 커피를 주문한다. 그리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카페에서 받은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책상 위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다른 날의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빈 테이크아웃 잔에 회사에 있는 커피를 담아 카페로 내려간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본다. 이렇게 점점 나의 낯은 두꺼워지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내 삶을 즐겁게 영위하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다. 한동안은 저녁에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게 되면, 그 동안 아꼈던 돈이 한번에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부터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약속이 있던 어느 날 저녁,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서 늦을 거야.”
엄마 왈, “니 돈 쓰니?”
“아니 얻어먹어. ㅋㅋㅋ”
엄마 왈, “다 빚이다”
그렇다. 사실 요즘은 매번 만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얻어 먹는데, 얻어 먹는 마음도 무척 씁쓸하다. 내가 요즘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나마 마음이 좀 편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만나면, 앉아 있는 자리 자체가 가시 방석이다. 사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는다. 특히 학교 행사처럼 많은 재학생들을 만나는 자리에 졸업생으로 가야 하면 더욱 참석하기가 꺼려진다. 돈이 있건 없건 거의 매일 술 마시고, 택시 타고 집에 오는 것이 일상이었던 예전에는 몰랐다. 그 때는 어떻게든 카드 값을 낼 수 있는 돈을 벌었고, 지금처럼 자금줄이 꽉 막히지는 않았기에 그저 나 하고 싶은 대로 마시고 놀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꽉 막혀 있는 자금 상황이 현실로 닥치자, 이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흥청망청, 놀고 싶은 대로 놀고 먹고 싶은 대로 먹을 때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자, 도시락을 싸서 다닐 수 있게 되었고,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무한 리필하면서 카페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차비와 담뱃값 말고는 돈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근무시간에 담배를 못 피면서, 점심시간과 퇴근 길에 한 두대 피는 담배가 전부라 담뱃값도 줄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 맨다 하더라도, 내게 마지막 즐길거리인 담배와 어쩌다 한번 마시는 카페에서의 여유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이 시간만이 요즘 내게 유일한 유흥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내내 회사와 집만을 왔다갔다 하다가 주말에 유일하게 내게 선물하는 카페에서 몇 시간 죽치고 있는 시간이 일주일을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이다. 그 시간만 있으면 지금처럼 1년, 2년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처럼 술 마시고, 사람 만나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시기였다면, 돈 때문에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지금의 내 삶을 너무 우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놀만큼 놀았고,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만큼 만났으며, 돈도 쓸 만큼 썼다. 그리고 그때 흥청망청 살았던 여파로 지금 무척 힘들어하고 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지금의 내 삶이 ‘안 됐다.’ ‘답답하겠다’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 삶이 너무 만족스럽다.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 ‘좋은 사람들과 보내는 술자리’ 등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 대신 ‘혼자만의 시간’을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책과 커피로 충분히 즐기고 있다. 지금의 이 시간이 내게는 인생에서 한번쯤은 꼭 겪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지금도 어느 정도 카드 값을 메울 수 있는 정도의 자금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흥청망청 놀고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이 내게 주어졌기에,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얻지 못하는 혼자만의 시간에서 찾을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돈이 없어도 충분히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일요일 저녁 제주도로 놀러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함께 모임을 하는 다른 친구가 많이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괜찮은지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다. 월요일 오전,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 저녁에 술을 한잔 하자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홍대에 가서 친구를 만났다. 하루 종일 울다가 온 친구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와 두세시간 그 동안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요즘 돈이 없어서 사람들을 거의 안 만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깊이 공감하며 내게 말했다.
“나도 그랬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애써 외면하면서 돈도 안 되는 일들로 연명할 때 쌓였던 빚을 얼마 전에야 겨우 다 청산하고 플러스 인생이 된지 얼마 안 됐거든. 야, 오늘 내가 쏠 테니까 마음껏 먹어!!!!”
그 친구처럼 나도 지금의 이 생활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지금의 마이너스 인생이 플러스 인생으로 돌아서는 시점이 내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처럼 힘들어 하고 있는 친구에게 마음껏 마시라고 얘기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고,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훌쩍 떠날 수 있는 날들이 찾아 올 것이다. 단지 그 때가 오면 그 상황을 더 감사해할 수 있고, 더욱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지금의 상황이 온 것 뿐이다. 누구에게나 살다가 한번쯤은 힘든 상황이 찾아온다. 다가오는 그 상황들 자체를 컨트롤 할 수는 없다. 상황이 오는 것을 애써 막을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단지 그런 상황들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처지를 선택하지는 못해도, 그 처지에 대한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는 칼리 피오리나의 말처럼 말이다.

- 미나의 이야기, 군대가는 젊은 청춘의 이야기가 확 다가와서 들린다.
- 동생의 에피소드는 주제와 어떤 맥락에서 같이 하는지...
- 30세 이하 + 부양가족의 기준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 하나의 꼭지에 한가지 주제, 그곳에 너의 이야기와 비슷한 청춘의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은
공감의 폭을 넓혀주는 좋은 방법인듯하다.
2. 돈안쓰고 버티는 법.
- 안쓰럽다는 생각이들지만, 재미있게 풀어내었다. 실제 경험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꼭지. 좋다.
- 어머니의 "다 빚이다." 짧지만 강한 메세지. 좋다.
- 밝음을 드러내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환하다. 좋다.
미나야 서문은 사부님이 말씀하신 '코'를 꿰는 것 같은 '한방'이 쬐금 덜 느껴진다.
그래도 벌써 3차 시도에 들어간 너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주말같은 월요일 아침에...

뭔가 엉성하기만 한 나의 글이 조언을 듣고 고치니 뭔가, 내가 봐도 조금은 일맥상통한다는 그런 느낌?? ㅋㅋㅋ...
아.............서문은 아직도 잘 모르겠음..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이번주 서문을 쓰기 전에는 사부님 말씀처럼 다른 책 서문들을 좀 많이 봐야겠다는 결심만 해 볼 뿐....
저의 열정은 다 동기들이 옆에서 박수쳐주고 응원해줘서 나오는 것인듯.. 고마워요.. 땡7이 다들 너무 감사감사~~
지금쯤... 열심히 글을 수정하고 계시겠군요!!ㅋㅋㅋ.. 오라버니 화이팅!!!!!!!!!!!!!!!!!
주말이었으면 하는 화요일 저녁에....

웅. 30세 이하 부양가족. 다시 읽어보니,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ㅋㅋ.. 그래서 수정했습니다.
아예 말을 바꿔서. 다시 한번 읽어봐주세용. ^^
내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새롭다니...ㅋ..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일으킬수 있을 것 같다니.
언니 말 들으니까. 왠지 책 쓸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배가 부르지? ㅋㅋㅋ..
고마워요 언니!!!
언니, 요즘 송년회 준비에 글 쓰느라, 애들챙기고 가족들 챙기느라 정신없죵?? 기운내요. 화이팅!!!

대학교 1학년,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꼭 이게 아니어도. 짧고 중요한 한문장.)
이렇게 가는 것이 이야기 몰입도가 높아질 것 같은데. 그냥 내 생각. ㅎ
서문에 후배 이야기는 약간 으잉? 하게 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이 부질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건가?
글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낭. ^^;
꼭지글은... 읽을 때마다 조금씩 들었던 생각인데.
분량을 늘려 써야 하는 부담이 있는건가? 하는 느낌이 있어.
어떻게 뭘 고쳐야 할지는 나도 글쎄. ㅠ 미안. 대안없는 비판이라소.
그리고 미나야.
몇개는 문장을 짧게 끊어 써 보시옹. ^^
미나체는 기본이 2-3 문장 조합이야. ㅋ
고쳐 쓸 때는 이것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긔~ ^^

서문은 왜이리 어려운건가요??????? 깔끔하게. 나답게. 확 와닿게 써보고 싶은데. 뜻대로 안되요.ㅜㅜㅜㅜㅜ..
몰입도가 높아지는? 것에 초점을 잘 맞춰볼게요..
후배얘기와 .. 처음 주절주절한 이야기들을 싹 다 빼버렸음.ㅋㅋ.. 다시 읽어보니.. 내가 봐도 뭔가 앞뒤 맥락이 연결이 안되서 말이죠...ㅎ..
꼭지글은 분량을 늘려써야하는거에 대한 부담은 없어요. 그냥 쓰다보니 길어지는거에요.ㅋㅋㅋㅋ... (뭔가 질보다 양으로 채우려는 마음도 없진 않은듯???ㅋㅋㅋ)
언니 말 듣고 보니, 뭔가 질질 느려서 문장을 길게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 일단 이번주에 쓴 것중에서 고칠 수 있는 것들은 짧은 문장들로 써봤어요. 이번주 글 쓸 때는 의도적으로 짧게 짧게 써볼려구요.ㅋㅋㅋ..
고마워요 언니~~~~~~~~~~~~~~~~~~~~~~~~~~!!!!!!!!!!!!!!!!!!!!!!!!!!!!!!
언니 덕분에 수정한 글을 보니 왠지 뿌듯함.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