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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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민호의 결혼9주년 기념 선물>
연애 9년과 결혼생활 9년이 지났다. 아내는 연애 9년은 자신이 나를 더 사랑했었고, 결혼 9년은 남편인 내가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더 많이 사랑해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사랑의 무게 추도 왔다갔다 하나보다. 앞으로 9년은 우린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새로운 9년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1월 21일 우린 특별한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헤이리의 모티프원(motif#1)이다.
'모티프원'이란 말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과 '아름다움'과 '숭고함'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고자하는 주인장 이안수 작가의 뜻이 담겨있다. 연구원 선배님인 로이스님은 몇년전 모닝페이지 모임을 그곳에서 가진 후 남긴 글에서 '모티프원'을 말 그대로 '삶의 제1 동기'이자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최고의 이유'로 정의했다. 이안수님에게 모티프원(삶의 제1동기)은 '여행'인 듯 하다. 너무나 여행을 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여행자들을 오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분은 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났고 1년여의 북미 여행 후에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서 살림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지워지지 않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20년의 기자생활을 통해 모은 돈으로 헤이리의 땅을 분양받고, 나머지 설계와 건축은 주변의 좋은 인연들로 해결했다. 은행에서 대출도 많이 받으셨다는데 가족들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었다 한다.
<2011 모티프원, 사진/양경수>
모티프원의 공간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는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난 헤이리에 여행자를 위한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줄 곳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또 안정되게 정착하고 싶은,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 우리 부부의 갈증을 해결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왠지 우리의 또 다른 9년을 시작하기 적당한 곳이라는 느낌도 들었고, '가족여행'을 주제로 한 책을 써보려 시작하려던 때라 뭔가 영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도착한 시간은 여섯시가 넘었고, 해는 벌써 지고 있었다. 일부러 조도를 낮추어 놨다는 헤이리의 길들과 두드러지지 않는 이정표들 때문에 조금 길을 헤멘 후 '모티프원'을 발견했다. 홈페이지에서 본 그 건물이었다. 지은지 5년이 넘어가서 그런지 겉에 칠한 페이트는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프란다스에서 온 것같은 커다란 개가 마당을 지키고 있었고, 큰 유리창 안의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흰 수염의 주인장님이 앉아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늘 예약한 가족입니다."
"아, 예 먼 길 오셨네요. 충남 당진에서 출발하신다고 하셨나요?"
"예, 길이 조금 막혀서 이제 도착했네요."
"결혼 몇 주년이라고 하셨지요?"
"네, 9주년입니다."
보통의 주인장들과는 다르게 이것저것 개인적인 것들을 물어보신다. 환한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모습에 마음이 저절로 열렸다. 일단 결혼기념일 저녁식사를 거를 수 없었기에, 갈만한 식당들을 여쭤본 후 밥을 먹으러 나갔고,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있던 와인가게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TOSCANA'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는 이태리 와인이 있지 않은가! 여름 연구원 토스카나 여행을 못간 나였기에 눈이 번뜩였다. 게다가 2006년이라고 아들 민호가 태어난 연도가 떡하니 써있었다. 바로 구매를 하고 다시 '모티프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안 계시고 다른 여자분이 공동 거실 테이블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 계셨다. 여쭤보니 선생님은 마을 회의를 가셨다고 한다. 이안수 작가님은 헤이리 마을 부촌장이시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일단 옷을 갈아입고 씻은 후 무작정 거실로 가 있기로 했다. 공간은 점유하는 사람들의 것 아닌가! 와인과 안주를 들고 가 앉아계셨던 그분께 여쭤보니 아! 이안수 선생님의 아내분이셨다. (성함은 강민지, 며칠후 사모님이 올리신 '인수봉 등반기'를 통해 성함을 알게되었다.) 부엌을 뒤져 와인잔과 접시를 찾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자리를 잡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시고 등산복을 입으신 사모님 또한 낯선 여행자들을(혹은 와인과 안주를?) 반기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모님은 암벽 등반을 배우시며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계셨다.
"요새 등산에 푹 빠졌어요. 일주일에 한번 남편 허락을 얻어서 산에 꼭 가요. 요새는 암벽 등반을 배우고 있지요."
테이블 위엔 세로그립까지 달리 커다란 손때 묻은 사진기가 놓여 있었다. "사모님도 사진을 찍으시나봐요."
사모님이란 호칭이 어색했지만 성함도 알지 못했고, 다른 적당한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난 나이 들어 어깨너머로 배웠죠. 한번 올렸더니 사람들이 계속 올리라고 하네요. 올려줘야지요."
그냥 막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역시 사진가의 사모님은 달랐다.
아내가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여쭤보았다. 아내가 궁금한 것은 역시 겉으로 들어난 남편의 생활 이면에 있는 아내의 모습이다.
"이안수 선생님이 직장생활을 그만두셨을 때나, 헤이리에 이 건물을 지으신다고 하셨을 때 어떠셨어요?"
"남편은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마음은 강했지만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지요. 고민이 많을 때 옆에서 제가 그냥 그만두라고 했어요. 정말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했죠." 강한 결단력이 느껴졌다.
딸 둘에 아들 하나를 키우시면서 병원 행정일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벌써 십여년이 넘으셨다고 한다. 하루 정도는 모티프원에 와서 일을 돕는다고 하신다. 모티프원 대출금과 아이들 학자금 때문에 정년까지는 어떻게든 다녀야 한다고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신다. 하지만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때는 눈에서 광채가 나셨다. 높은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 자연 속에 서 있는 기분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나이 들어서 처음으로 느낀 그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하신다. 산에 올라가는 걸 '노동'으로 생각하는 나의 아내도 솔깃해 하는 눈치다.
아내가 말했다. "그래요? 나도 등산 좀 해볼까?" 제발 그러길 바란다.
50대줄에 들어선 사모님은 산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이 신나 하셨다. 등산 학교를 마친 경험과 북한산 숨은 절경을 찾아다닌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내년 여름에는 지리산 종주를 할꺼에요. 며칠전 남편 허락도 받았지요. 처음엔 별 대꾸도 안하더니 결국은 내 뜻을 받아주었지요."
게다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그동안의 보상을 위해 3년이란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네팔과 티벳을 가보고 싶어요. 퇴직 후에는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싶답니다."
늦은 나이였지만 간절히 원하던 것을 시작했다는 사모님의 떨리는 기분이 전해졌다. 그러면서도 넌지시 밖에 나가 산을 다니다 보면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셨다. 모티프원에는 언제나 일거리들이 쌓여 있고 누군가는 그 일을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부부 중 누군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했을 때는 누군가는 육아나 살림, 경제적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 부부간에는 조율이 필요한 것이다. 두 분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일들과 책임져야 할 일들을 잘 조절하시고 계신 듯 했다. 적어도 누군가 한 명이 치고 나갈 때는 한 명은 뒤에서 기다려 주는 지혜를 가진 부부셨다. 한 쪽이 가슴 뛰는 일을 하려고 할때 "너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발목을 잡고, 정작 본인도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자리에서 난 부부간에는 희생도 주고 받는 것이라는 것. 일시적으로는 균형이 기울어 진 것 같아도 결국 시소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걸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부를 떠올렸다.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민호가 너무 졸려해서 내가 민호를 재우러 잠시 방으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 공동 거실에는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라 있다. 이안수 선생님이 오신 것이다. / 1부 끝.

마지막 부분은 TV프로그램이 끝나면서 배경음악과 함께 다음주를 기대하게 하는 예고편이 나올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의 책에는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우리가 보통은 여행을 가지만 자기 가족끼리만의 여행이 되잖아.
(나는 대부분 그래. 우리끼리 보고, 놀고, 먹고, 즐기고...)
그런데 너는 편하게 만남을 가지잖아.
원래 여행은 멋진 풍광도 기대하지만 일상을 벗어난 소박한 만남도 기대하잖아.
너의 여행에는 그런 만남의 스토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의 특징적인 표정들이 담긴 사진과 함께...(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재미있는 혹은 의미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도록 하는 너만의 필살기를 찾는다면
(이번에 와인과 안주를 준비한 것처럼.........)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