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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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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6일 11시 18분 등록

“그래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마지막에 내뱉던 이 대사. 깨닫게 된 사랑도 떠나고 딸아이도 죽어버린 폐허 같은 집에서 스칼렛의 이 대사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았지요. 이 대사는 흔히 희망을 말하고자 할 때 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일 태양이 뜨는 것이 희망인 걸까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니 라고 마음 편하게만 있으면 그것이 희망인 걸까요? 우리는 오늘의 최악인 하루를 그저 어딘가에 던져놓고 다가올 내일의 희망을 꿈꾸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아니요. 그건 아닐거예요. 저에게는 수없이 많은 내일의 태양이 왔었죠. 이 시기만 잘 넘기면 될 꺼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희망의 봄날이 보일꺼야.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돼. 희망을 믿고 기다리면 돼. 아니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희망이 오지 않았어요.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을 믿고 그저 가만히 기다려 보았자 지금 이 순간을 인내해 보았자 희망이란 놈은 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희망이라는 놈을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와서 내 옆에 앉혀두고 싶은데 말이예요.

그럼 스칼렛은 어떻게 그런 희망의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무도 없는 처참한 폐허 위에 무엇이 그녀가 그 말을 내뱉게 만들었을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이제는 옆에 누구도 없는데. 영화 속 그녀는 천천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둘러봅니다. 모든 상황과 현실을 직시한 그녀는 사랑하는 그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지요. 그리고 고향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며 이 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의 희망인 것이지요. 그를 찾아야겠다는 것.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지금은 방법을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은 그를 찾아야 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것. 이것이 그 폐허 위해서 스칼렛이 찾은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야 겠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내일의 태양은 그 길로 향하는 희망이 되어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책 <강의>에서 희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희망이란 앙상한 나무 끝에 달려 있는 감 하나라고 말씀해주셨지요. 이 말만 들어서는 쉽지가 않지요? 절망적인 순간에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내고 자신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그 감 하나가 바로 우리의 희망이라는 거지요. 그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결국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볼품없는 앙상한 가지를 만나야 하는 군요. 정말 보기 싫은 앙상한 가지 말이예요. 그날 아침 스칼렛이 보았던 그 폐허를 볼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언젠가 미스토리를 써볼 기회가 있었답니다. 그때 저는 55페이지에 달하는 미스토리를 작성해 내었죠. 별 생각없이 나의 이야기를 쓰는 거라 생각하며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정말 하기가 싫더군요. 그래도 했습니다. 한 번은 과거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느낌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았지요. 하루 이틀을 미루다가 어느 날 맥주 캔을 옆에다 잔뜩 쌓아놓고 “그래. 시작해 보자.” 마음먹었던 때가 생각나네요. 빈 맥주 캔을 하나씩 늘려 가며 이야기를 토해내던 밤이었지요 밤을 꼬박 새워 많은 것들을 토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쳐박아 버렸지요.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그냥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이제 와서 그것들을 봐서 뭐할 꺼냐는 생각도 들었지요. 아니, 봐서 뭐할꺼예요. 그렇다고 과거가 바뀌나요? 그래요 못났어요. 그래서 어쩌라구요. 이런 생각들이 들어서 그냥 쳐박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으로 남아 있었지요.

얼마 후 저는 그것들을 다시 꺼내어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왔을까요? 누가 그리 살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복받은 가정에서 잘 자란 사람인데 어쩜 이리 못난 선택들만을 하고 살아왔는지.

지금은 나았지만 꽤나 심했던 아토피를 앓고 있었던 작은 여자아이. 그래서 아직도 버릇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팔을 쭉 펴지 않습니다. 그때의 흉터가 마음에도 남아 있는 것이지요. 제법 공부를 잘 했지만 언제나 제 오빠 뒤였던 중, 고등학교 시절.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오빠를 단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큰 상처를 남겼던 몇 번의 철없던 사랑. 그 때문에 겪었던 몇 번의 중절 수술 끝에 결국은 얻은 딸아이. 그리고 아이 아빠와의 헤어짐. 그 안에 얼룩져 있는 술과 담배의 흔적들. 이런 것들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실은, 이 따위 과거보다도 싫었던 것은. 그 안에 비겁하고 잔뜩 모나 있는 내 모습이었습니다. 어쩜 그리 한 순간도 당당한 적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어쩜 그리 한 순간도 멋진 순간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그렇게도 비겁하고 또 못난 모습일 수 있을까요. 왜 단 한순간도 마음에 드는 장면이 없을까요.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질척거리는 과거, 그 안에서 눈치를 보며 눈속임과 거짓으로 살아왔던 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지요.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과거를 바꾸고 싶었지요.

어떻게든 수정을 해서 55페이지의 나의 역사책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많이 담담해져 있었고, 끝냈다는 느낌에 홀가분해 졌지요. 그래요. 이게 내 모습이었는데 어쩌겠어요. 정말 싫어도 이게 내 모습인데요. 진짜 못났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하나의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도 너는 지금 이 자리에 있잖니.”

그래요. 평생이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지금 이 길에 있었어요. 내 모습이 실수와 실패로 얼룩진 것을 알고 변화하기 위한 자리에 와 있었지요. 과거에 그런 모습이었어도 저는 희망을 꿈꾸며 지금 이 자리에 있답니다. 사랑에 실패해도 아직도 사랑을 꿈꾸며. 몇 명의 아이를 보냈어도 한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려 하며. 내 안에서 고여서 썩어 가고 있는 과거를 끄집어내어 햇볕에 잘 말리며. 이 자리에 서 있지요.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네가 출발하는 자리라는 말을 저는 끔찍이 싫어합니다.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시작하고 싶은 걸요. 이런 질척거리는 과거 위에서 이런 못난 모습만 가득한 모습으로 시작하는거 싫어요. 하지만 그 말이 정말 싫었던 것은 그 말이 사실이라서였을 거예요. 사실이잖아요. 내가 시작하는 건데 내 모습이 아니면 어디서 시작하겠어요. 내가 잘 쌓아놓은 과거라는 탑 위에서 시작하는 거죠. 그것을 무슨 수로 부수고 다시 짓겠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그 앙상한 가지, 그 처참한 폐허를 보고 생각합니다. 썩은 물이 흐르는 강가에도 그래도 이제는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꿈틀대는 작은 새싹이 있군요. 사랑에 실패했기에 더욱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신감을 꿈꾸는 제가 있구요. 몇 명의 아이를 보냈기에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주고 싶은 제가 있네요. 그러기에 더욱 웃으며 살아보고 싶은 제가 있어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요. 세상 안에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당당하게 깔깔대고 싶어요. 슬플때는 울고 기쁠때는 웃으며 그래도 언제나 나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어요. 이것이 바라는 것이자, 저의 희망이지요. 스칼렛이 사랑하는 그를 찾기 위한 내일의 태양을 바라보듯이 저는 더욱 사랑스러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내일의 태양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마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마주해야 할 가치는 충분히 있는 일입니다. 어떤 순간에건 우리는 알고 있어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그것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니까요.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치며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 말해주는 순간에도 우리는 다른 대안이 있었음을 알고 있지요. “최선을 다했으면 됐어.”라고 말해주는 순간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들이 보이는 부분을 알고 있지요. 다른 이들에게 잘 숨기면 나 역시도 잊어버릴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자꾸만 생각해내려 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잘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기억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더욱 후미진 곳을 파고들어 서서히 썩게 만들고 있었지요. 다른 대안도 있었는데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이런 건 다른 사람이 위로해준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예요. 내가 그리 느끼지 않는다면 백 명의 위로도 괴로움이 될 뿐이지요.

나만 입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수 있는 자신의 과거입니다. 아무도 내 역사를 기록해주지 않으니까요. 유일한 사관인 나만 조용히 있으면 되는 거지요. 하지만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내 자신이 알고 있어요. 그러니 기록해야 하는거지요. 기록하고 수정해야 하는 거지요. 역사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의 시점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에서 배워오기 위한 것입니다. 잘한 것은 더 장려하고 못한 것은 다시 그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찾는 희망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우리는 희망이라 부르지요. 어느 날 자신의 역사를 적어본 당신이 정말 못났다는 생각이 들때 스칼렛의 대사를 기억해 주세요. 그래도 내일의 태양이 뜬답니다. 적어도 이제 당신은 그 못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도 하겠지요. 제가 그랬듯이 말이예요. 그 자리가 희망입니다.


팁1
쓰다가 보면 어느 장면에서 계속 같은 말만 내 뱉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몰라요.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과거의 한 부분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며 혹은 자신을 비난하며 같은 말을 쓰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재구성이 필요한 법입니다. 처음에는 토악질 해내듯이 써보고 나중에는 잘 다듬어 보는 식이 좋은 듯 해요. 빛의 속도로 내뱉은 말을 나중에 잘 추스르는 거지요. 무엇이 나에게 그리 많은 감정을 갖게 했는지 잘 생각해보고 잘 정리하는 거지요.

팁2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행위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하루 밤에 단 몇 장으로 끝내놓고는 “다썼다.”하며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슬픈일입니다. 당신이 몇 년을 살아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역사가 그렇게 단 몇 장으로만 기록될만큼 별 것이 없나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최대한 솔직히 생각나는 일들을 써 보세요.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글이니 이 순간만은 좀 솔직해져 보자구요. 저도 제가 가진 저의 역사를 누군가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답니다.

팁3
엄청 쓰기 싫은 순간이 올지도 몰라요. “내가 왜 이딴 짓을 하고 있어야 돼?”라는 생각도 드실께예요. 그래도 써 보세요.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글이라도 나를 위해 필요한 글임을 마침표를 찍는 순간 알게 될 거예요. 형식은 자유입니다. 멋진 비유와 단어 따위도 필요 없어요. 이제 우리는 쓰는 것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IP *.23.18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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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12.07 15:12:08 *.32.193.170
훔........ 뭐야.. 첫번째 서문보다 훨씬 이해가 잘된다. 역사를 써보라는 메시지도 더 전달이 잘 되고.. (내가 국어가 약해서 이해력이 딸려.;;;) 사실 어제는 고친 서문을 올려두고, 칼럼쪽은 일부러 안봤어. 휴식이 필요했거든.ㅋㅋㅋ.. (알지 내맘?)

그리고 오늘 오후가 되어서야 이제 여유가 좀 생겨서 읽은 글을 찬찬히 보는데...

훔. 엄청 용기있게 많은 것들을 끄집어내놨네. 옆에 있었으면 뼈가 으스러지게 한번 안아줬을텐데. ㅎㅎㅎ.(다행인줄알아!!ㅋㅋㅋ)

고생하셨소~~~!!!!  좋구만요. 글이. 가슴 깊이 전해지는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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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12.08 07:56:54 *.111.51.110
"용기있는 자만이 가슴 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 말이 떠오른다. 그게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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