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경
- 조회 수 4648
- 댓글 수 10
- 추천 수 0
휴식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휴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항상 그리 생각했다. ‘놀면 뭐해?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일하고 공부하면 뭐라도 남지 않는가? 그게 남는 장사가 아닌가?’ 시간은 돈이고, 인생은 효율과 효과라는 두 개의 바퀴를 이용해 남보다 빨리 결승점에 도달하는 경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항상 마음이 급했다. 휴식보다는 일에 대해서 고민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휴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휴식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다. 이름하여 휴식에 대한 네 가지 오해와 진실이다.
첫 번째 오해, 우리는 시간이 부족해 쉬지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 휴식은 시간의 양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시간만 충분하다면 제대로 쉴 수 있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오해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았다. 작년 말 안식년 휴가를 시작하기 전, 나는 장작 14년 동안 쉬지 않고 직장생활을 해왔었다. 직장을 다니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았지만 정작 휴식이라는 것은 제대로 갖지 못했다. 나의 인생 시계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점점 빨라졌다. 하루 24시간은 직장인으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기엔 항상 빠듯했고 언제나 발을 동동 구르며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다면 안식년인 지금은 어떠한가? 휴식을 위한 물리적 시간은 직장에 다닐 때에 비해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좀처럼 쉬지 못한다. 휴식을 위해 떼어 놓은 시간은 직장 다니느라 못해본 것들을 ‘해치우는 시간’이 되었고 직장인의 짐은 내려 놓았지만 아내이자 엄마인 나의 하루는 빡빡하기만 하다. 직장에서 보내던 시간은 나만의 야심찬 프로젝트로 빼곡히 채워졌고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이런저런 일들은 점점 많아졌다. 시간이 많다고 잘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휴식은 시간의 양보다는 삶의 방식과 태도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해, 잘 쉬려면 익숙한 일상을 탈출해 특별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결혼 10주년. 나는 누구보다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은 괌 가족여행. 10년 동안 아이 둘을 맡아 키워주신 시어머님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어머님도 모시고 가기로 했다. 성인 3명과 어린이 2명의 항공료와 숙박료를 포함한 여행경비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래도 눈을 질끈 감았다. 10년 만의 휴식이 아니냐? 어디 그뿐인가? 이 여행을 위해 나는 우리 가족에게 적합한 여행지 조사부터 시작해 여행사를 선택하고 여행 상품을 결정하느라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졌다. 사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식구 수대로 짐을 꾸리고, 늦은 오후 비행기에 몸을 싣고 4시간이 넘게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집 나오면 고생’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리조트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나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느라 결혼 기념일을 즐기기에는 너무 고단했다.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시어머님의 도움을 은근히 기대했지만 어머님은 나도 무서워 몇 번 못 탄 물미끄럼틀을 여러 번 즐기며 나보다 더 잘 노시는(?) 것이 아닌가? 돌아와서는 어떠한가? 세탁기를 두 번 돌려 밀린 빨래를 해서 널고 짐 정리를 하고 고단한 몸을 누인다. 그래도 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나를 감싼다. ‘역시 집이 최고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나에게 도착한 것은 수백만 원짜리 카드 명세서뿐. 근사한 곳에 큰 돈을 들여 여행을 가야만 잘 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말 오후, 거실 소파에서 즐기는 느긋한 낮잠이 더 큰 휴식이 될 수도 있다. 휴식에 대한 허영과 거품 또한 걷어낼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오해,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신이 탁월한 공상가라면 당신은 몇 시간이라도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보통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금새 고역이 될 것이다. 당신은 휴식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아니 질문을 쉽게 바꾸어보자. 당신은 여가 시간(주말)에 무엇을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자거나 TV를 본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TV 시청이나 수면이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라 할 수 있을까? 『내 몸이 다시 태어나는 시간, 휴식』의 저자이자 수면의학 전문가인 매튜 에들런드 박사는 ‘휴식은 생물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회복의 과정이며 우리 몸이 재생하고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면은 휴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수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수면은 낮에 소비된 일부의 생명을 회복해서 유지하기 위해 미리 빌려 쓰는 소량의 죽음이다.’ 참으로 거창하지 않은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울고 웃으며 즐겁게 보냈다면 이 또한 휴식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돕는 자원봉사 활동이 휴식일 수도 있다. 나는 주변을 깨끗이 치우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정신적 충전을 느끼곤 한다. 남편은 이른 새벽 하얀 입김을 불며 치는 테니스가 최고의 휴식이라고 한다. 이처럼 휴식은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의 재충전을 위해 하는 모든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휴식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네 번째 오해, 일과 휴식은 선택의 문제다.
일 또는 휴식. 우리는 이것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을 할 때는 일에 충실하고 쉴 때는 쉼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일을 하면서 짬짬이 쉬거나, 쉬엄쉬엄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정말 죽도 밥도 되지 않는 것인가? 일을 하면서도 간간이 휴식을 취하면 일의 능률이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 한 예화가 있다. 수확을 앞둔 두 농부가 있었다. 한 농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벼를 베였고, 다른 한 농부는 중간중간 쉬면서 벼를 베었다. 누가 더 많은 벼를 베었을까? 정답은 중간중간 쉬면서 일했던 농부였다. 일하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텐데 그 농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쉬면서 일했던 농부가 말했다. “나는 쉬는 동안 무뎌진 낫을 갈았다네.” 구본형은 그의 저서 『코리아니티』에서 서양인들은 일과 생활의 균형(work-life balance)을 ‘교환(swap or trade off) 또는 ‘선택과 선택되지 않는 것들의 포기’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이것은 어느 것을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선택은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서 일어나지만 조화와 균형은 중요한 둘의 모순적 상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일과 휴식 또한 그렇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받치고 있는 중요한 기둥이어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삶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일과 휴식은 선택이 아닌 조화와 균형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당신의 휴식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휴식을 모르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 헬가 노보트니는 휴식을 ‘자기만의 시간’이라고 표현하며, “휴식은 나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 사이의 일치를 뜻한다”고 말한다. 『행복의 중심, 휴식』의 저자 율리히 슈나벨은 휴식의 본래 의미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들은 왠지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자신만의 휴식의 정의를 만들어 보라. 그것이 당신에게 꼭 맞는 휴식을 시작하는 첫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지금이 쉴 때인가? 휴식보다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커진다면 다음의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 보라. 나에게는 효과가 그만이었다.
어떤 일생
천양희
부판(蝜蝂)이라는 벌레가 있다는데 이 벌레는 짐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 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