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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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이란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고, 만약 가질 수 없다면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삶에 열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 수 있게 한 번에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외부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인 동기였다. 스스로 어떤 일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을 건성건성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대로 시작하고 마음대로 끝내버려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고, 설사 우려 섞인 말을 듣더라도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말 뿐이었다.
무엇인가를 꼭 이루어야만 한다는 절실함이 없었던 나는 어느 한 과정을 밟아가는 도중에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동안 해온 것들이 아깝다고 여기지 않았다. 더 이상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기에 그것을 마무리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무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텐데 그 끝내지 못한 일들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막심한 후회로 다가왔다. 나는 현재 어느 곳에 집중해야 할지를 잘 판단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현재 해야 할 일에 에너지를 쏟기 보다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며 그것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았고, 그러다보면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별 볼일 없이 느껴지곤 했다. 거기에 때론 충실하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한 후회까지 얹어지기라도 하면 과거를 넘나드는 시간은 더 길어지게 되었다.
이런 후회가 하나씩 쌓이게 되자 행동은 더욱 둔해지게 되었고, 내 안의 에너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흩어지게 되면서 해야 하는 일들에 제대로 몰입하지 못 하였다. 지금 당장 내 모습이 부끄러워 남들 앞에 나를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저 하는 척만 하며 그 순간만 을 모면하려 했던 행동들이 결국 스스로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난 알지 못했다.
맹자는 “무릇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기고, 집안도 반드시 스스로 망친 후에 남이 망치고,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뒤에 남이 공격한다.” 고 한다.
내 나름대로 나를 방어하며 보호하려 했던 행동들이 결국 스스로를 아주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지만 스스로 하는 행동이 자신을 얼마나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을 스스로 업신여기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것인데 내가 어떤 꼴로 있는지 모르면서 남들의 시선에 쪼그라들고 있는 거라 오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의 비난 앞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은 집단 상담에서 리더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피드백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어떤 집단원은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나는 당황하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저 사람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나보다 라고 생각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집단 상담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야 그 상황이 다시 떠오르면서 그제야 화가 나기 시작했고, 억울했다. 그 앞에서 그게 아니라고 한 마디도 못한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리더의 밑 마음에는 나의 철없는 발언들에 대해 정신 차리고 세상을 살아가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독한 피드백을 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래도 억울하다고 그렇지 않다고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건 아니었다.
삶에서 무엇인가를 반드시 이루어야만 한다는 마음이 없었던 나는 지금껏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일상의 반복에 때론 숨 막혀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내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았고 한다는 행동은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타인들의 시선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그토록 신경 쓰고 있으면서도 결국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방법으로 나를 보호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열등감이 그토록 질기게 달라 붙어있었던 원인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 없음과 타인과의 끝없는 비교, 그리고 만족스럽지 못한 학벌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 스스로의 꼬라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하던 미덥지 못한 것이 마음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내가 보기에도 난 뭐하나 충실히 과정에 집중하고 끝마무리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앞으로 무엇을 하던 지난날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으니깐 말이다.
지금까지 풍족했던 환경에 괜한 원망을 던질 필요는 없다. 나와 같은 환경이 주어졌다고 다 나처럼 살지는 않으니깐. 그렇다고 환경적으로 일부러 간절한 상황을 만들 필요도 없다. 인위적으로 상황을 조성한다면 누구보다 그것은 만들어진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 테니 말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진정 나를 위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일이다. 타인의 비난에 뒤에서 발끈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런 일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타인의 비난은 그 순간일 뿐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지금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불쾌한 순간을 또 만나게 될 것이 뻔하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과거에 대한 아쉬움을 되새김질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놓인 일을 어떻게든 넘겨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느껴질까에 대해 고민하며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적우가 부르는 어떤이의 꿈
http://www.youtube.com/watch?v=Rmvs0iDobc4
요즘 ‘나는 가수다’를 볼 때마다 적우라는 가수에 눈길이 많이 쏠린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녀에게 그 무대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매번 무대에 오를 때마다 초긴장하는 모습이 TV로 전해지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녀는 그 무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야 했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그 무대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누군가는 그 간절함을 통해 인생에 기적을 여는 열쇠를 만들 것이다. 당신에게는 지금 간절하게 원하는 무엇이 있나요?

포근한 둥지가 있으니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던 거지요.
근데 스티브 도나휴가 최근 낸 <인생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에 보면
가장 첫 번째가 둥지를 떠나는 거예요.
나의 경우는 간절함이 찾아오던 순간이 그랬던 것 같아.
둥지를 떠나지 않을 수는 있었지. 언제나 그 둥지가 우리 부모님이니까.
그런데 내가 둥지가 되어야 했던 거 였어요, 내가 부모가 되었으니까.
그때부터 였던 것 같아. 내가 간절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거.
많은 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이글을 읽다가 ‘미치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젊음’ 이라는 스승님의 책 제목이 생각난다.
‘이름대로 산다’고 그대의 이름만큼이나 선한 그대의 글을 읽고 있자니 마음 속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분노와 광기가 있다. 이 사람은 숨겨진 내 양면성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대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있었던 세계의 고통이 새로운 세계의 모험’ 보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때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가질 수 없는 하나’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다.
개인의 혁명은 존재를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재구성해서 개선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새로운 미래란 곧 개선된 과거 즉 기존의 사고와 경험과 태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의 글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떤 간절한 심정을 느낀다. 자신의 생각과 과거를 분해하고 분석하고 또 바판하면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한 젊음의 몸부림을 느낀다.
그대가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를 붕괴시키고 새롭게 재건을 하기를 바란다.
‘새출발이 있었던 세계와의 단절이 아니라 있었던 세계의 대해 좀 더 충실히 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빌린다면 변화를 위한 그대의 노력과 간절함에 도움이 될거라고 믿는다.
그런대로 남의 눈에 보이는 ‘최소한의 안정과 유지’라는 삶을 지탱해주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져진 탄탄대로가 아닌 천길 낭떨어지와 같은 벼랑끝에서 ‘한 걸음만 더!’ 라는 걸어왔던 모든 발걸음 보다 더 무거운 한 걸음을 내 디뎌야 했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천길 낭떨어지는 높으니까 죽는데도 시간이 걸려! 밀려서 떨어질거라면 난 스스로의 의지로 뛰어내릴 것이다. 죽어도 적어도 나는 스스로 체념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가다 죽은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
그렇게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고 머리털이 치솟는 그 순간을 넘었다. 나의 경험과 기억이 만들어 내는 그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대의 칼럼 하나 하나가 그렇게 비장하고 통곡하는 심정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이 이미 벼랑끝을 뛰어내렸고 갈수록 분명해져간다는 것이다.
목표설정은 위대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바로 칼럼 하나 하나를 쓰는 것이며 이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그 대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아... 그 어려운 연구원 과정을 마치셨군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