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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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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일 06시 18분 등록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홍은택 지음, 창비, 2005)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뒤 국제부 기자, 노조위원장, 워싱턴특파원(1996∼2000년)으로 근무했다. 2005년 현재 미주리대학 저널리즘스쿨 석사과정에 있으며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 ‘글로벌 저널리스트’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나를 부르는 숲」「천천히 달려라」「리틀 비트와 함께한 여섯 번의 여름」등이 있다.

<책머리에 - 블루와 레드, 길에서 만난 두 개의 미국>

한국인이 미워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이고, 한국인이 기를 쓰고 가려고 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인가. 무엇보다 진짜 미국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려운 물음이다. 미국인도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외국인한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미국사회 탐험을 회피할 수는 없다.

세상일은 미국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곧 한국에도 닥친다. 이른바 세계화 때문이다. 다른 말로 미국화 이다.

한국은 IMF와 차관연장 협상에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잃었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사회처럼 될 수 있다. 아니, 되고 있다. 할리우드영화와 팝송만의 영향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본의 방임을 전제로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되어간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은 어떻게 보면 큰 규모에서 미래의 한국이다.

미국화의 최초 피해자는 미국인, 즉 미국의 노동계층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마치 새로운 발견인 양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근로빈곤계층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열심히 일하는데도 빈곤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사회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다. 미국은 더 이상 노동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

미국이 추진하는 세계화는 바로 세계를 무대로 한 자유방임주의다. 그런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니 세계 각국의 기업들도 미국식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 자본을 제일 먼저 다스려야 할 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 내에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고삐 풀린 자본을 견제하기 힘들다.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종종 '블루 아메리카(Blue America)'와 '레드 아메리카(Red America)'라고 표현한다. 대통령선거 개표방송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파란색, 공화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붉은 색으로 표시한 데서 보편화한 개념이다. 보통 공화당은 잘사는 사람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레드 아메리카는 세계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성공한 계층이 사는 지역이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지도에 붉은색으로 넓게 채색되는 곳들은 그런 성공과 거리가 먼, 대부분 못사는 농촌이거나 쇠락한 공장지대다. 블루 아메리카여야 하는 곳이 선거만 하면 레드 아메리카가 되는 것이다.

2004년 여름과 가을, 주로 그런 아메리카를 다녔다. 본질적으로 블루 아메리카인 곳을 다녔다는 말이다. 아니, 블루 아메리카의 시각에서 미국을 보려고 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 같다. 관점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하지만 관점이 있으면 다른 것을 못 볼 수도 있다. 그런 한계를 인식하고 이 책을 썼다.

01. 아기 울음소리 끊긴 지리적 중심 - 캔자스 레바논

레바논에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미국 본토 48개주의 지리적 중심이 있다.

이곳에 하나밖에 없던 레바논고등학교는 1984년에 문을 닫았다. 초등학교는 8년 뒤인 92년에 문을 닫았다.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이 마을의 평균연령은 52세다.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99%가 백인이고 22.1%가 빈곤계층이다. 학교를 폐쇄한 것은 주민들에게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돋 대가 끊기겠구나 하는 불길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을도 하나의 생명이다.

오래 전부터 미국농민들은 농사만 지어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근처 공장을 다녀 수입을 보전하곤 했다. 백스터는 그 일대의 농민들에게는 생명의 젖줄 같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1985년 공장은 싱가포르와 푸에르토리코로 이전했다. 당시에 노동조합이 없었기 때문에 저항도 없었다고 한다.

미국기업들이 값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이전하면서 단순히 제조업 노동자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을 레바논이 말해준다. 대평원에 흩어져 있던 공장들은 농민이 농토에서 떠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지지대 역할도 했던 셈이다.

02. 아직도 서부로 가고 있는 인구의 중심 - 미주리 애드가스프링스

미국은 ‘여기서 하다 잘 안되면 저기 가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곳이다. 이민자가 세운 미국이라는 나라의 출발이 그랬다. 광활한 땅덩어리가 하나의 나라로 형성됐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쭉 그랬다. 과거와의 질긴 인연을 끊고 독립된 개인으로 새출발을 할 수 있으니 실패가 두렵지 않다.

그릴리가 서부로 가라고 외친 지 150년이 지났지만 미국은 지금도 서쪽으로 가고 있다. 그것은 인구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을 보면 안다.

인구의 중심은 유동적인 개념이다. 중심은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회 전체와 경제의 움직임을 알기 위한 인위적인 지표일 뿐이다. 그런 움직임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 중 하나가 중서부의 농촌과 탄광지대다. 굳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중심을 따질 여가가 있을 리 없다. 그들에게 중심은 없다.

03. 미국 농민도 밑지고 농사짓는다 - 미주리 페이에트

“정부가 저곡가정책을 쓰기 때문에 가격이 낮고, 그래서 소출을 최대한 늘려야 수지를 맞출 수 있는데, 그럴수록 가격이 떨어지니까 계속 생산은 늘어나고 다시 가격이 떨어지는 악순환이다.”
그렇게 늘어난 잉여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 각국에 시장개방 압력을 가하고 그것이 한국에는 쌀시장 개방압력으로 나타나니, 미국내 농촌 문제가 곧 한국 농촌의 문제다. 세계화의 연결고리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저곡가정책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곡물을 사가는 다국적기업들이다. 이들이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파는 가격은 결코 싸지 않다. 예컨대 옥수수 시리얼 한 상자가 슈퍼마켓에서 3달러에 팔린다. 그중 농부에게 돌아가는 돈이 얼마인 줄 아는가? 2센트다.”

“농산물에 관해서는 각국마다 고유한 생산체계가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지금 중국이 미국식 농법을 따라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생태의 균형과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농민이 농토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04. 박제된 맥도날드 햄버거 1호점 - 일리노이 데스플레인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조립공정이 자동차 대중화와 함께 노동자 중산층 시대를 열었다고 하면, 맥도날드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은 값싼 서비스와 함께 저임금 시간제 노동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만 하면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미국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도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는 직업들이 속출했다.

레딩은 서류상으로는 맥도날드사의 직원이 아니다. 인력파견업체인 인터테크 소속이다. 달리 말해 맥도날드는 회사의 발상지격인 박물관에 하나밖에 없는 직원조차 파견업체에서 받아 쓸 만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래도 레딩은 지금까지 유나이티드항공, 모토롤라, 스피고트 캐딜락, 맥도날드 같은 굴지의 회사에서만 일했다. 어떤 회사가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에 “어떤 게 좋다 나쁘다 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직업은 건물 앞을 지키는 것이지, 건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05. 미국인이 지불하는 맥도날드 성공의 댓가 - 일리노이 오크브룩

맥도날드 본사에 가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약간의 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일주 여행은 극단적으로 말해 이쪽 맥도날드에서 저쪽 맥도날드까지 왕복하는 것이다. 어딜 가도 맥도날드의 골든아치로 시작해서 피자헛, 버거킹, 웬디스, 할리데이인, 이코노라지, 채널4 등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순서만 바꿔서 도열해 있다. 자동차를 몰고 여러 시간을 달려도 도착하는 곳은 언제나 똑같다.

이번 미국 여행지를 결정할 때 첫 번째로 맥도날드가 떠올랐다. 끝없는 세포분열을 통해 미국을 프랜차이즈하고, 나아가 전세계에 촉수를 뻗치고 있으며, 내 취향과 체질마저 보수화하고 있는 이 괴물의 정체를 모르고는 미국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심장부를 쳐들어가지 않고서 어떻게 자료만으로 맥도날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북아메리카대륙의 맥도날드에는 노조가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둘러보고 있는 본사에는 노조 결성을 와해시키는 기동타격대가 있다.

수요가 늘어날수록 그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오히려 궁핍해진다는 것은 역설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본주의적 역설이다(합성의 오류). 방치해두면 독점화되는 경향을 띠는 자본주의의 내재된 특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06. 약속의 땅에 탈산업화가 남긴 상처 - 미시간 플린트

산업공동화 또는 탈산업화라고 하면 감쪽같이 산업이 빠져나가는 것만 연상되지만, 그 산업을 품고 있던 도시에는 깊고 오랜 흉터를 남긴다. 산업화가 도시의 환경을 파괴한다고 하면 탈산업화는 도시의 생명을 파괴한다. 가슴이 미어진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작기계와 건물들이 무성한 잡초 속에서 나뒹구는 모습은 공동묘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근대화의 공동묘지.

수입의 격감은 인종분포의 역전을 가져왔다. 8대 2였던 백인 대 흑인의 비율이 지금은 6대 4의 비율로 흑인이 더 많다. 백인들이 빠져나가니 흑인의 인구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미국사회가 제도적으로 그토록 막으려고 노력했던 인종분리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교외의 백인과 도심의 흑인. 그것을 도너츠현상이라고 부른다.

대량해고에서도 흑인들의 피해가 더 컸다. 앞에서 미국은 선착순사회라고 썼지만 이 원칙은 상황이 안 좋아질 때면 후착순으로 바뀐다. 집단해고의 원칙은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이 가장 먼저 잘린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흑인들의 피해가 컸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 중 흑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동차공장의 이전은 ‘대학교육을 안 받고도 중산층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07. 자동차로 흥하고 자동차로 망하다 - 미시간 디트로이트

미시간 중앙역. 처음에는 웅장함이 시선을 끌었다. 주위에 견줄 만한 건물 하나 없는 넓은 숲에 고색창연한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한 컷 누르고 다시 차를 몰아서 다가가니 감탄은 경악으로, 경악은 탄식으로 바뀐다. 그 건물은 유리창들이 다 깨져있었다. 내부에서 강력한 폭탄이 터진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렇게 일일이 그 많은 유리창을 다 깰 수 있을까. 바로 시간의 폭탄이 터진 것이다. 더 다가가니 건물 앞 잔디광장에서 여름잠을 자던 노숙자들이 부스스 일어난다.

사실 고대의 유적, 예컨대 불국사나 첨성대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거짓이다. 오히려 그 장구한 시간 내내 계속돼온 관리와 투자의 결실이라고 봐야 한다. 방치되는 건물들의 운명을 디트로이트처럼 잘 보여주는 곳도 없다. 디트로이트는 무엇보다 자동차공장의 무덤이다.

흉가로 변해있는 이 건물들을 폭파시키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그대로 놓아두는 게 나은가. 물론 제대로 보존하는 게 가장 좋지만 사회가 그럴 여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근본적으로 과거의 건물들을 다 안고 현대를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탈산업화시대의 러스트벨트(Rust Belt)가 안고 있는 공통된 숙제다. 인류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잊어야 하는가.

08.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형 월마트 1호점 - 아칸쏘 벤톤빌

제임스 베리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월마트는 남부적 기업이기 때문이다. 월마트는 구매력이 낮은, 그리고 노조의 힘이 약한 남부의 농촌지역에서 성장해 도시를 포위해 들어갔다. 월마트가 성장한 지역은 모두 ‘일할 권리가 있는 주’에 속한다. 이 말에 조심해야 한다. 마치 노동권을 보호하는 것 같지만 실제 의미는 그렇지 않다. 이는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한 법조항을 두고 있는 주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들 주에서는 노조의 힘이 약하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미국내 노조가입률은 노조를 강력히 억압했던 레이건정부 시절의 20%대보다 더 떨어졌다. 그것은 노조를 발본색원하는 월마트가 세계 최대기업으로 발돋움한 것과 연결돼 있는 현상이다. 월마트는 기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형과 같은 것이다. 기업들이 월마트를 닮아가게 되어 있다.

월마트의 대형창고는 진짜 대형이다. 벤톤빌 외곽에 있는 창고는 크기가 28에이커라고 한다. 3만5천 평쯤 된다. 축구장, 야구장, 실내수영장, 실내체조경기장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땅이 한지붕 아래 있다는 얘기다.

전시물 중 인상적인 것은 항공편대의 사진이다. 항공편대는 벤톤빌이라는 공간의 격리를 뛰어넘는 기동력을 월마트에 제공했다. 그 첫 조종사는 다름 아닌 샘 월튼이다. 또 다른 월마트 특유의 관리기법은 인공위성을 통한 매장관리다. 전국에 산재한 3500개 매장의 실내온도는 하나하나 전부 벤톤빌 본부의 통제를 받는다. 매장 카운터 위의 스크린에는 본부의 메시지가 수시로 하달된다. 월마트는 펜타곤을 빼고는 가장 많은 위성을 쓰는 곳이다.

“월마트의 방식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월마트가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생존하기 어렵다. 오로지 가격을 낮추기 위해 노조도 없애고 임금도 대폭 낮춰야 한다.”
“미국은 이미 그 과정을 겪는 중이다.”
“월마트식의 자본주의를 견제할 첫 관문은 미국이다. 미국 내에서 견제가 되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견제하기는 더 힘들다.”
“미국에서도 제동을 걸 수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논리대로 움직인다. 누구도 견제 못할 힘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물건을 싸게 사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욕하면서도 월마트로 간다.”

09. 월마트의 본사는 왜 남루할까 - 아칸쏘 벤톤빌

살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내세의 구원이 필요한 것일까. 빈집이 늘어가는 남부의 농촌에서 자주 마주치는 교회 간판들의 행렬은 현세의 삶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가난을 하나님이 주신 시련으로 간주하고 그 시련을 감내할 때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혼자만 잘살아서 미안할 법한 대자본가나 부자가 보기에는 그렇게 고마운 종교가 또 있을 수 없다.

월마트 본사의 볼품없는 입구는 검소함보다는 어쩐지 돈만 벌면 된다는 집착이 엿보인다. 일하는 목적이 노동 자체의 즐거움에서 소비하는 즐거움, 그러다 지금은 돈 버는 것 자체의 즐거움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평생 쓰지 못할 돈을 벌었으면서도 여전히 돈 돈 돈 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쓸 줄 모른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것을 전파하는 회사가 자신을 가꾸는 것에는 전혀 소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본사 건물이 이렇게 남루한 것은 사실 월마트의 존재 이유이자 성장비결이다.

싼값의 숨은 비용에 대한 집단의 통찰력은 그만큼 형성되기 어렵다. 더구나 월마트의 소비자 지상주의에 비교해볼 때 턱없이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앞으로 3년 내에 미국의 모든 식품과 약품의 35%가 월마트에서 팔릴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현재로서는 월마트화를 뒤집을 길이 없어 보인다.

10. 닥터페퍼가 아닌 자본주의를 마신다 - 텍사스 웨이코

저소득층이고 소수인종일수록 비만해져간다. 값싼 칼로리의 최대 피해자는 저소득층과 흑인, 히스패닉이다. 원인은 사회적이다. 이민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한다. 그들에게 체중을 줄이기 위해 운동하라고 권하는 것은 무리다. 그들에게는 휴식이 더 필요하다.

닥터페퍼 박물관의 자유기업연구소에는 이런 현판도 있다.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이란 없다. 인류는 두 체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둘이 아닌 대안은 그냥 혼란일 뿐이다.

11. 미 보수주의의 본산 텍사스 그리고 엔론 - 텍사스 휴스턴

엔론은 규제완화의 붐을 타고 캘리포니아에서 전력의 도매가격이 자유화된 점을 악용했다. 전력공급을 일부러 줄이거나 때로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생산되는 전력마저 매점매석해 전력수요가 폭증할 때까지 기다렸다. 살인적인 가격으로 전력비를 받고서야 전력을 공급했다. 이득의 규모는 수십억 달러다. 사회의 필수적인 기능을 민영화하고 더구나 가격을 부분적으로 자유화한 점을 최대한 악용한 것이다. 그 모든 게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엔론의 몰락은 미국에서 ‘자유방임형 시장주의’와 정부가 일정하게 시장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는 ‘질서 자유주의’의 대충돌을 낳았다. 엔론 사태를 계기로 회계부정을 감독하는 기관이 신설되고 선거자금 개혁법이 통과됐다. 미온적이지만 과거보다 진일보했다.

레이 회장은 엔론 사태로 재산의 95%와 은퇴 연금의 99%를 잃었다지만, 아직도 수백만 달러를 갖고 있고 그 재산은 다시 불어나고 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살아남는다.

12. 세계 사형집행의 수도 - 텍사스 헌츠빌

헌츠빌은 ‘세계 사형집행의 수도’라고 불린다. 미국은 기독교국가이고 사람의 목숨을 사람이 결말짓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텐데 사형을 반대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몰리는 분위기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낙태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규정해 낙태시술 병원에 테러를 가하면서도,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는 그 모순이 이해가 안 된다.

헌츠빌의 실업률은 2%로 이례적으로 낮다. 인구 3만5천명 중 4분의 1 정도가 교도소에서 일한다. 그러니 헌츠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처벌에 대한 신념을 듣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재소자 인구로 매년 세계기록을 갱신하는 게 하나도 부끄러울 것 없고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어조다. 그게 미국 보수의 논리다. 범죄는 나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를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로 본다. 재소자들이 형기를 마치고 사회에 안착하도록 돕는 갱생시설보다는 수인을 더 많이 가두기 위해 교도소를 늘리는 데 초점을 둔다.

헌츠빌 감옥박물관은 죄수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데 3달러를 받는다. 박물관에서 감옥은 더 이상 죗값을 치르는 고통스런 장소가 아니다. 이색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놀이공간이다. 실제로 교도소를 새로 지은 뒤 ‘진짜 손님’인 죄수들을 받기 전에 일반인한테 비싼 숙박료를 받고 며칠간 개방하는 것도 하나의 개장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13. 무장강도 제씨 제임스가 우상이 되는 나라 - 아이오와 애데어

애데어 축제의 주제는 ‘우리 유산 끌어안기’다. 무장강도의 역사까지 끌어안는 것을 보면 대단한 포용력이다. 애데어가 제임스를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그가 범죄의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기록을 애데어에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애데어는 세계 최초로 달리는 열차가 털린 ‘역사적’ 현장이다. 달리는 열차를 세우고 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창조적이면서 대담한 범행이었다.

제임스 추앙은 근대와 함께 건국된 미국만의 현상일지도 모른다. 아메리카인디언을 빼면, 미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전래돼오는 전승과 전설이 없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제임스는 19세기 중엽 우는 아이도 울음을 딱 멈추게 할 만큼 공포와 상상력을 자극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설이 없어도 그렇지, 강도를 숭배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제씨 제임스가 아예 문화적 우상이라는 점이다.

14.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눈물의 길’ - 오클라호마 탈레쿠아

강제몰수와 추방,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거친 평원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저력을 보여준 체로키인들은 점점 늘어나는 백인들에게 포위되고 있다. 체로키국은 사실 특이한 나라다. 국토도 없이 마치 망명정부처럼 정부청사만 있다. 그래도 국민은 있다. 세금도 걷는다. 체로키인들은 이중국적자다. 주정부에는 세금을 안 내지만 연방정부에는 세금을 내고 체로키국에도 세금을 낸다. 하지만 주요 재원은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카지노 운영 수익이다.

아메리카인디언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다. 많은 인디언들이 사회부적응자로, 알코올중독자로, 정부의 구호대상으로 현대를 살아간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인디언들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엄연히 살아 있다.

15. ‘쇠락’한 아메리칸드림, ‘급증’한 인생역전의 꿈 - 캘리포니아 테메큘라

페칭가 카지노 리조트의 대형홀 하나가 축구장만하다. 친근한 얼굴들이 많다. 아시아인이 점령한 미국사회가 있다고 하면 그곳은 카지노다. 한국 사람도 안 빠진다. 그리고 여성 결승 테이블에서는 아시아여성들끼리 맞붙는 경우도 봤다. 그래도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자랑스럽다는 느낌은 안 든다.

카지노와 로또는 아메리칸드림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산업이다. 둘을 합쳐서 최소한 매출규모가 6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웬만한 국가의 국민총생산보다 많은 액수인 동시에 미국인들이 영화, 음반, 스포츠 관람에 소비한 돈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액수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자못 파국으로 치닫는 성장이다.

왜 한방에 인생을 역전시키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인생을 역전시키기가 갈수록 어렵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땀흘려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미국에서조차 점점 힘들어진다. 그것을 아메리칸드림의 퇴조라고 부른다. 그러나 카지노에서 한방에 인생을 역전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다.

16. 사선을 넘어 미국으로, 미국으로 - 리오그란데를 따라

리오그란데는 사선(死線)이다. 매년 최소한 300명 이상이 새 삶을 찾아 멕시코 쪽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다 목숨을 잃는다. 그래도 국경을 넘는다. 미국은 강력한 자석과 같다. 멀리 온두라스, 과테말라, 에콰도르 등지에서도 북상한다. 그렇게까지 걸어서 오는 것은 아직도 그들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마치 강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미국으로 흘러들어온다.

2050년이면 미국 전체인구 중에서 백인의 인구가 과반수 아래(46%)로 떨어질 것이라고 인구통계국은 전망하고 있다. 히스패닉 인구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으로 빼앗긴 영토를 인해전술로 되찾는 중이다.

17. 스마일리가 대신하는 미국인의 고달픈 웃음 - 아이오와 애데어

미국인의 웃음은 항상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았던 지난 역사의 유적이기도 하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세계 최강의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했다. 삶의 질은 끊임없이 향상됐다. 비명의 웃음이 아니라 절로 나오는 웃음이었을 법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책에서 소개했다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아메리칸드림은 이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백일몽이 되고 있다. 삶은 더욱 고단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전히 절로 나오는 웃음인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래도 웃어야 하는 웃음으로 바뀌고 있다.

웃을 수 없는데 웃어야 하는 것처럼 고역은 없다. 훈련된 웃음은 얼굴 주위 근육들의 이완과 수축에 불과한 것이다. 박제된 웃음이다. 소비자를 상대하는 월마트 같은 소매유통업체 직원들은 고객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계속 웃어야 한다. 웃는 게 노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면 웃음이 왜곡된다. 즐거움과 신뢰의 표현이 아니라 그 뒤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알아내야 하는 암호가 된다. 서로 웃고도 충분한 통신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난해한 신호의 교환이다.

18. 돈 주고 유권자를 살 수 있는 나라 - 워싱턴 DC

자본의 자유로운 전지구적 이동을 미국식 세계화라고 한다면 그 이동을 체계화하는 것이 미국의 정치다. 자본은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공급함으로써 그 체제를 작동하고 공고히 한다.

지금은 백악관, 상하 양원, 대법원 4대 권력기관이 모두 공화당의 수중에 있다.
그래서 콜라와 햄버거를 마구 팔아 국민의 체형이 집단적으로 왜곡되고, 다국적 대기업이 소농과 가족농을 농토에서 몰아내고, 노조가 무력화되고, 임금이 깎이고, 저임금 시간제 노동자들이 대거 양산되고, 중산층이 줄어들고, 카지노가 늘어나도 정치는 침묵하거나 방조했다. 자본의 논리를 견제할 인간 본위의 논리는 실종됐다.

19. 총성 없는 보수의 쿠데타와 장기집권 - 워싱턴 DC

미국의 기준은 그야말로 미국의 특수한 기준이다. 특히 노동에 관한 한 미국은 선진국이 아니다. 국제노동기구가 있지만 협약을 비준 안하면 그만이다. 강제할 길이 없다. 미국은 ILO협약 184개중 고작 14개만 비준했고 그중 ILO가 노동자의 권리에 필수라고 규정한 8개 협약 중 2개만 비준했다.

놀려고 일하는 것이다. 일하면서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고 어쩌고 하는 ‘설교’를 들을 때가 많은데, 나는 아무리 노동의 신성한 기쁨이 있더라도 노동시간은 절대적으로 짧아야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세상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미국 노동자들은 서유럽의 다른 노동자들에 비하면 ‘철의 노동자’들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오래 일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데도 미국노동자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 그럴수록 더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노동조합에 대한 필요성이 커져야 할 텐데 노조가입률은 12.9%(2003년)에 불과하다.

미국 동부에서 축적된 자본은 노조의 힘이 약한 남부를 거쳐 노동조건이 더욱 열악해도 괜찮은 멕시코로 갔다가 지금은 중국과 인도의 노동을 찾아가고 있다. 자본의 전지구적 자유이동을 막을 길은 정치밖에 없다. 자본이 정당한 몫을 지불하도록 법으로 제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풀뿌리운동이 언제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노동자들이 비자발적 박애를 끝장내는 것이 세계의 노동자들에게는 진정한 박애가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역(逆)의 세계화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싶다.

20. 더 붉어진 아메리카, 그래도 희망은 있다 - 미시간 디트로이트

이제 미국은 완벽히 보수가 장악했다. 총성 없는 보수 쿠데타의 완결판이다. 일시적 반동이 아니라 장기통치에 접어들게 됐다. 그것은 문화혁명이었다. 갤럽이 여론조사를 하면 응답자이 94%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 비율은 꾸준히 증가해오다가 더 이상 증가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기독교와 보수의 결합은 태생적이다. 칼뱅주의적 전통이 강한 미국기독교의 교파 대부분은 재부의 축적을 신의 축복으로, 가난을 개인의 죄악으로 본다. 그러니 빈부격차 같은 사회적 의제에 침묵하고 개인주의적 보수 논리를 합창하게 된다.

사회적 불평등과 왜곡된 분배구조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다. 어느 한 개인이나 단체가 이룰 수 없는 큰 명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믿지 못한다면, 그런 신념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정치적 해결이란 힘의 대결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힘과 돈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존중, 부의 기계적 재분배보다는 기회의 재분배, 교육을 통한 자기 존엄의 확인, 그런 가치들이 바탕에 깔려줘야 하는 것이다.


***


아쉬운 마무리다. 약한 모습이다. 막연한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이다. 강적인 미국 앞에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임을 충분히 알기에 오히려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 책의 처음에 저자는 묻는다.
“한국인이 미워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이고, 한국인이 기를 쓰고 가려고 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인가. 무엇보다 진짜 미국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들도 잘 알지 못하는 미국.
우리에게는 이미지로, 아이콘으로, 특정 상품으로 존재하는 추상적인 미국.
그곳을 직접 발로 체험하여 구체적으로 전해주었다. 참 고맙다.

“필자는 2004년 여름 주로 블루 아메리카를 다녔다.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을 다녔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또 미국에서도 세계화의 흐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을 다녔다는 말이다.
향후 십수 회에 걸쳐 그 족적을 연재한다. 이 기록은 엄격히 말해 전통적인 기사 형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단순한 기행문도 아니다. 그 중간쯤이다. 전통적인 기사 형식이 아니라고 해서, 기사로서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명기해두고 싶다.“
- <오마이뉴스> 기사 중에서 -

2004년 8월부터 인터넷 뉴스 사이트인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내용을 모아 엮은 이 책은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직접 찾아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또 다른 미국을 읽어준다. 쓸쓸하고도 황량한 사진들과 함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체로키국 최고수반 채드윅 콘터셀 스미스 추장의 국정연설문이었다.

“삶의 질이란 둑방에서 낚시하는 겁니다. 호화보트를 타고 알래스카로 원정낚시 가는 게 아닙니다. 삶의 질이란 우리의 아들딸과 손자들이 조그만 공을 갖고 마당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겁니다. 메이저리그 야구경기를 구단주 특석에서 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구상에 있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즐기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삶의 질입니다. 불평하고 남을 탓하는 불안정한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닙니다. 삶의 질은 존재하는 것이며 행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미국 안에 존재하는 아메리카인디언..땅을 소유하지 않은 공동체 부족..그 인디언의 나라를 보고 싶다..막연함이지만 나는 그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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