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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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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3일 07시 12분 등록
205 - 내게 독서와 꿈과 글쓰기는 책 속의 경험을 배워 원래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던 근본을 이해하는 학습이다.

그리고 아주 작은 골방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무 바닥에 벽은 전부 황토로 만든 방이면 좋겠다. 작은 나무 책상 하나에 나무 의자 하나, 그리고 바닥에 놓은 꽤 큰 방석 하나가 이 방을 채운 소품의 전부이다. 나는 이 방을 '삶의 방'이라고 부르고 싶다.

살다 보면 관성을 이기지 못하는 때도 있다. 이 방은 어제와 결별하는 방이며 특별한 오늘을 부여받은 곳이다. 매일 이 방에 들어와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살다 보면 탐욕에 젖을 때도 있다. 이 방은 탐욕의 때를 벗는 곳이다. 살다 보면 인간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감정적 변이를 겪을 수 밖에 없다. 이 방은 분노를 죽이는 방이고 질투와 자만을 죽이는 방이다. 살다 보면 무기력해질 때도 있다. 이 방은 무기력을 툴툴 털고 걸어나오는 방이다. 살다 보면 무서워지고 비겁해지는 때도 있다. 이 방은 그것들을 벗어버 리 는 방이다. 그리하여 용기를 얻는 곳이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슬픔을 줄 때도 있다. 이 방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곳이다. 이 작은 방은 늘 내가 새롭게 태어나게 도와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나중에 누군가 이 방을 '기도의 방'이거나 '면벽의 방'이라고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방에서 나는 늘 나와 만나고 싶다. 이것이 오랫동안 내가 바라던 집이라는 공간이었다.

213 - 지금까지 나는 도시생활에서 물러나 시골에 가서 농사지으며 사는 것을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복귀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문명의 뿌리로 물러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명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오래 전 문명의 시작 상태로 퇴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지나쳐온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다.

214 - 밭을 재배한다는 것은 자신이 심고 싶은 것을 심는 것이다. 심고 싶은 것, 즉 욕망을 따른다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서 자라난 또 다른 욕망들을 뽑아낸다는 점에서 반자연적이다.

유사한 욕망들로 점령된 밭을 묵정밭이라고 하고, 그 밭의 소유자를 게으른 농부라고 말한다. 키우려고 한 것 외에는 모두 잡초다. 이것이 기준이다. 나는 왜 하나의 욕망이 그렇게 중요한지, 동시에 왜 다른 욕망들은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지, 뜨거운 날 잡초를 뽑으면서 생각해보았다.

나는 마흔이 넘어 내가 키우려고 마음먹은 작물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전히 다른 작물들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작물을 선택했다. 해야 할 일은 잡초를 뽑고, 자양분을 제공하고, 훌륭한 밭을 제공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욕망이 자랄 수 있도록.

하나의 욕망.... 가장 나다운 내가 되는 것, 그저 생긴 대로 자라 가장 아름다운 내가 되는 것, 내가 만일 소나무라면 아름다운 소나무로 자라는 것, 만일 느티나무라면 아주 정정한 느티나무가 되는 것, 이것이 내 욕망이었다.

219- 그래서 나의 무거움의 대칭점에 서 있는 벚꽃의 화사함을 좋아하나 보다.

가방 하나 들고 천지를 옮겨다니는 가벼운 여인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1주일쯤 마을을 떠들썩하게 하고는 돌연 다시 손가방 하나 들고 떠나는 다방 여인 같다. 담담한 일상과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하기 그지없는 우리는 가볍고 환한 가슴의 상처를 입고 봄날을 보내게 된다.

264 - 하루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나의 두 번째 커리어도 없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르레상스를 바랐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에서 과감한 전환을 하고 싶었다. 완벽하게 새롭게 구성된 인생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시인 김현승은 이런 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해주었다.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 굴러라.
건너뛰듯
건너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을 뛰어라.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 굴러라 발 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267,268,269,270,271

282 - 열정이란 심장과 감정과 창자로부터 생겨난다. 참다운 자신이 되는 자유는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킨 허파의 외침'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감동이며 환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서 위대한 힘을 감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속에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주는 터무니없는 위로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자신이 희망적 현실주의자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가능한 꿈을 꾸는 현실주의자, 나는 이것을 희망적 현실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른 사람들의 특징은 꿈으로 가는 길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내 앞에 놓인 냉혹한 현실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310 - 하루는 물결처럼 사라지고 물결처럼 다시 생성된다. 모든 하루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상징이다. 이 속절없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물결은 부침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바다로 남는다. 질서와 변화는 바다와 물결처럼 공존한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의 존재방식이다. 또한 우리의 존재방식이다.

그 날 잠에서 깨어나자 아름다운 충동이 거부할 수 없이 나를 덮쳤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임무는 '나를 탄생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이 물결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창조는 바로 그 물결처럼 내 발로 일어서는 것이었다. 나의 하루, 나의 역사, 이것이 바로 그 물결이었다. 이제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못하게 하리라. 다시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것이다. 이것이 내 첫 번째 계획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계획이었다.
내 일을 찾을 것이고, 매일 그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햇빛같이 눈부신 생각이었다.

311 - 이 시간의 강물 위에서는 내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이 흐름 속에서 나는 나의 세계를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며 즐긴다.

320 - "나는 지금 내 앞에 걸어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안내자가 멈출 때까지 계속 걸어갈 것이다."
《역사, 위대한 떨림- Movements in European History》D.H. 로렌스가 쓴 유럽사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몰락하는 로마 대신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할 때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322 - 하루 자체를 빛냄으로써 인생 전체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목적이다. 내겐 좋은 하루 그 자체가 목적이다.

324 -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늘 가난과 부유함이 같이 있곤 했다. 가난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한가의 문제에서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가 개인적 관심사였다. ........... 나는 돈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일을 가지고, 내 일의 특성으로, 다른 사람이 스스로 삶을 불지를 수 있도록 잠시 '쏘시개 불꽃 - ? unexpected sparkle' 역할을 할 수 있다.

1인 기업이든 대기업이든 기업은 반드시 먼저 본업으로 고객을 도와야 한다.
돈만 추구하는 기업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번 돈의 일부를 사회기금으로 내놓았다고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큰 범죄를 위한 사소한 속죄의 형식일 뿐이다.

325 - 언젠가 한번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스스로 설계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깨끗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햇빛 가득한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아름다운 인생 하나를 건설해야 했다. 아름다운 그 날 하루를 내 삶의 국경일로 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인을 닮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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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이 나온다는 흥분에 지난 봄에 서점으로 달려가 사가지고 무슨 애인편지라도 받은 듯이 호들갑을 떨며 내용이 궁금해 퇴근길 버스안에서 책장을 넘기던 내 모습이 지나간다. 나는 멀미가 심한 사람이고 활자들을 버스에서 읽을 생각은 더더욱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내용보다 누군가 다 쓰고 가버린 시간에 대한 추억과 되짚음이 아닌 현재도 계속 그리되어져 익어가는 싱싱한 열매를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계속 이어지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가만히 건네는 친절한 손을 잡는 듯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 다음날 뛸뜻이 기뻐하는 내 자신에 놀래면서 한 친구에게 이멜을 썼다. 새벽까지 내쳐 단숨에 읽어내린 후 평강이네 화장실 거울앞에서 나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미소띤 얼굴을 지어보였다.
맥없이 사그라들었던 어떤 긍정 하나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지난 구정 터키여행때 나를 배웅나온 세 명의 여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돌려가며 읽은 소장님의 책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읽어가는 내내 감회는 새로왔고 하루와 일상을 대하는 애정은 더 깊어진다.

신기하게도 치열한 전투의 과정으로서 하루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하루는
빛줄기가 흘러내리는 오전 열한시반쯤에 강물위에서 기다리다 보면 낮에도 뜨는 별을 만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 하루란 언덕에서 바라보면 저기 먼산, 작은 산을 헤치고 찾게 되는 한 점 집같은 것이다. 봄이 한창일 때부터 여름이 더디 오거나 해가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는 산속에서는 요즘에도 무수한 ROBO의 원형을 매달고 있는 단풍나무들을 볼 수 있다. 그 비행체들이 바람을 타고 어디엔가 뿌리내릴 한 점을 찾아 여행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루이다.
그리고 이미 내린 한 점 뿌리를 어둠속에서 썩어지게 하여 마침내 빛에게만 집중하게 할 건강한 첫 싹을 틔우도록 그 어둠속에서 푹 썩어짐을 견디고 또 견디며 참아내는 것이다.

선생님의 다른 책,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를 읽고 난 다음 기도문을 만들어 지갑속에 넣고 다녔다. 그런 짓은 유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아직도 그 기도문은 미완성이다. 미완의 상태로 계속 들고 다녔다. 아마 '보이지 않는 안내자'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다. 지갑속에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선언같은 짧은 다른 문장을 적어놓고 엘리베이터에 혼자 탈때면 꺼내 읽어보곤 한다. 그리곤 잠깐 눈을 감는다. 그곳이 땅속인 것 마냥. 언젠가 빛을 만나 어둠속에서 연습한 미소를 던지기 위해, 얼굴에 덮인 수건을 벗어버리기 위해.
그리고 2003년 11월말쯤 친구 희정이와 밤늦도록 나의 재능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 보기위해 쓴 글을 놓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명함속에 박힐 영문이름도 그때쯤 생각해 두었다. imagineer - Emagineer

2004년 3월에 만난 이 책을 2005년 6월 평창에서 돌아온 날 읽어내는 나의 하루는 어떻게 바뀌었고, 지난 나의 상흔들은 오늘 어떻게 변했는가. 빛나고 있는가? (SCAR → STAR) 책을 읽는 내내 행간속에서 수 많은 질문들과 만나는 나는 이마에 손을 대고 생각한다.

인용된 글중에 페이지만 적어놓은 것은 혼자만 새겨 다시 읽고 싶어서이다.

투가리의 밥이 탄다. 어서먹고 출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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