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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30일 21시 19분 등록
유홍준 지음/역사비평사

이 책을 쓰는데 나에게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의 줄기는 문화사이고,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학이며, 미술사학의 열매는 예술가의 전기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화인열전』은 인문학의 실천으로서 미술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Ⅰ. 인용

『화인열전1』

<연담 김명국>
- 아무도 구속할 수 없었던 신필의 이야기

김명국은 확실히 인조시대 화가로서 당대의 이단이었고, 기인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취흥에 따라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의 절묘한 작품을 보고 상찬해 준 사람들이 없었고,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모습은 더욱 없었다. 오직 두 차례 일본에 갔을 때 그 영광을 누렸을 뿐이다.

그는 시류 속에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매력과 미덕이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연담은 훗날 17세기 화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작가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것이 김명국의 영광이다. 세상이 바뀌고 반세기도 안되어 숱한 찬사 속에 그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결국 그의 삶과 예술은 시절을 잘못 만나 기인이 되고 만 한 신필의 자랑스런 반항의 이야기인 것이다.


<공재 윤두서>
-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내력

그는 숙종 연간에 활약한 대표적인 선비화가였다. 당대의 평가를 봐도 그렇고 오늘의 시각에 봐도 1700년 무렵 화단의 상징적 화가로 그를 지목하는 데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그는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넘어서는 전환기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회화관과 새로운 화법(畵法)에 입각한 새로운 경향의 그림을 제시한 한 시대 회화의 선구였다. 그는시대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대담한 자기 결단과 자기 갱신으로 종래의 화가들은 생각지도 못한 ‘속화(俗畵)’까지 그리면서 18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길을 열었다.

공재의 <자화상>은 얼굴만을 그리는 일종의 소조(小照)라 할 수 있는데, 상투 위와 수염 아래 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만 부각시키는 구도가 파격적이고 박진감이 있다. 본래 이 자화상은 철선묘(鐵線描)로 풍만한 어깨선을 희미하게 그려넣은 것이었는데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예 지워져 버렸으니 마치 허공에 떠오른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의 상을 한 준수한 얼굴은 육색(肉色)에 윤기가 역력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자못 삼엄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압도해버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 역정이 이 작은 화폭에 완벽하게 담겨 있다.

그리하여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자화상인 이 그림은 우리나라 초상화 중 최고 걸작으로 손꼽혀 회화로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공재 그림 중에서 우리가 회화사적으로 크게 주목하고 실학자로서 그의 면모를 드높여주는 것은 단연코 속화이다.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는 조선 후기 속화의 탄생을 알리는 3점의 기념비적 작품이 들어있다. <나물 캐기> <목기 깍기> <짚신 삼기>등이 그것이다.

<짚신 삼기>와 <나물 캐기>는 모두 농민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서민이다. 회화에서 그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제까지 조선시대 회화에 나오는 인물의 주인공은 선비와 신선 아니면 고작해야 미인 정도였다. 공재가 그린 낮잠 자는 선비, 담소하는 선비, 거문고를 타는 선비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서민의 모습이란 동자와 마부, 뱃사공 또는 일하는 농부나 어부 등이 배경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물 캐는 아낙네와 짚신 삼는 농부가 선비의 자리, 신선의 자리를 밀어내 당당히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것은 회화적 혁명이다.


<관아재 조영석>
-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관아제는 영조시대 회화, 한국회화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명화가였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의 작가적 환경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는 그림을 진실로 사랑했고 그림의 사회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시 현실 속에서 그는 그림에 전념하거나 여기에 성심을 바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림이 지닌 정서적 가치와 사회적 효용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무른 시는 성정(性情)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며, 그림은 문장과 글씨로 해낼 수 없는 것을 이루는 것이니 진실로 취할 바 있다”
그러나 관아재는 자신의 인생 목표를 화가에 두고 살지는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사대부로서 체통을 유지하며 품위 있게, 바르게 살기를 원했다.

논지인즉, 그림은 시로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아내는 독자적 기능이 있으며, 또 산수화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거기에 화가(인간)의 마음이 더해지기 때문에 그림이 더 위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관아재는 그림 속에서 인문정신을 찾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속화에 능하였는가는 『사제첩(麝臍帖)』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이 화첩은 관아재의 실물의 실물 스케치 14점을 모아 엮은 것으로, 그 제목으로 ‘사향노루의 배꼽’이란 뜻의 ‘사제(麝臍)’라는 관아재의 친필이 적혀있어 『사제첩』으로 불린다. 사향노루는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의 배꼽에서 나오는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배꼽을 물어뜯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제첩』 오른 쪽에는 나중에 따로 쓴 관아재의 자필 글씨로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라는 엄중한 경고문이 씌어 있다.

『사제첩』의 존재는 조영석의 작화 태도를 여실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상들이 한결같이 서민들의 일상사이고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었다는 점에서 사실정신의 의의를 더욱 깊게 해 준다. 비록 완성된 작품으로 마무리 한 것은 아니지만 <우유 짜기>와 <작두질>에서는 시선의 방향처리가 화면에 긴장과 유머를 동시에 연출하고, <메추라기>와 <두꺼비와 산나리>에서는 채색의 사실성이 시험되고 있으며, <마구간>에서는 말 세 마리의 채색과 먹선으로 표현한 구유의 표현이 어울려 채색과 선묘의 맛이 조화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관아재 조영석은 타고난 인물화가였다. 그 스스로 겸재에게 말하기를 “산수의 웅혼함을 표현함은 그대가 낫겠지만 머리카락 하나 틀림없는 인물 그림에는 그대가 나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도화서 화원들이 그리는 원법(院法)에 선비화가들의 문인화에 배어있는 유법(儒法)을 발현하여 그림의 격조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겸재 정선>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겸재(謙齋) 정선(정(鄭敾, 1676~1759)의 예술에 대해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 이룩한 예술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이룩한 예술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고, 또 그것은 후대에 두고 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는 줄곧 민족적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했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 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고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위업은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문인들의 상찬과 존경을 받아왔다. 그로 인하여 시와 그림은 더욱 가까워졌고 그림의 사회적 지위도 한껏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많은 화가들이 추종하는 바 되어 그의 제자는 물론이고 화가라 지칭하는 사람으로 겸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화풍’이 형성되었고 진경산수는 마침내 하나의 회화 장르로 확립되었다.

한국미술사상 이런 위대한 화가는 겸재 이전에는 없었고 겸재 이후에도 그와 짝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단원 김홍도가 있을 뿐이다.



『화인열전2』

<현재 심사정>
-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겸재나 관아재처럼 현실과 현상을 추구하다보면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근원성 내지 철학성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남종문인화 풍속에서 보이는 작가정신의 철학적 고양과 작가적 감성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미덕을 살려내어 심사정은 그런 관념성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진경산수나 속화의 박진감과는 또 다른 미감의 세계, 즉 그림 속에서 차분하고 명상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 고양과 정서의 환기 작용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이규상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畵尙精神]”한 화가였다.


<능호관 이인상>
-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능호관의 그림은 그의 문인적 삶의 표현이자 인격의 드러냄이었다. 그의 문인화는 문인화풍을 그렸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문인적인 삶이 그대로 농축되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다른 화가들과 다르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곧 인격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림이 인격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은 문인화(文人畵)라는 독특한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말하는 아마추어리즘과는 달리 직업화가가 아닌 교양 있는 문인들이 프로다운 기량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직업화가와는 전혀 다른 미적 가치를 나타낼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문기(文氣)이고, 문기는 곧 인격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격조라고 했다.

능호관이 도달한 그 높은 격조의 그림 세계는 그의 시와 글씨에서 똑 같은 평가를 받았다. 능호관의 시에 대하여 그의 둘도 없는 단짝인 이윤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능호관의 시는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다.

이는 그의 글씨와 그림 모두에 통하는 비유이다. 이것이 능호관의 예술세계이다.

이인상의 묘처(妙處)는 기름진[濃]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淡]데 있으며, 익은[熟] 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生]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호생관 최북>
-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최북은 스스로 ‘호생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결국 호생관으로 일생을 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서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현하면서 그림으로 세상과 얘기할 때는 명작을 낳았다. 그러나 그저 ‘호생관’이라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에는 호생관이라는 것이 한낱 노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호생관 최북,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량 있는 인물이었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기걸 찬 성품이 화면 속에 녹아들었을 때는 심사정이나 이인상 못지 않은 높은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기절(奇絶)한 작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결코 그이 편이 아니었다. 미천한 신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었다. 칠칠이로서는 천분(天分)을 다하지 못하는 그 분풀이를 세상에 퍼부으며 살았다.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창조적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는 그런 기개의 소산이다. 그러나 최북의 기대라는 것이 세상도, 대중도, 역사적 평가도 의식하는 일없이 자포자기의 폭력에 빠질 때면 그것은 대책 없는 오만이었고 그는 한낱 기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인 것이다.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정하였다. 그것은 낭만적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흔히 예리한 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감성이란 이성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는 사실상 객기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낭만적 반향의 허점이다. 호생관에게는 그런 허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 더욱 몰랐다.


<단원 김홍도>
-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김홍도는 조선 왕조의 문예 부흥기라 일컬어지는 정조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였다. 정조시대의 문화적 생산과 소비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난숙했다. 이 시대가 요청하는 미술적 생산은 전에 없이 다양했고, 그것은 종래의 상투적 화법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새로운 현실, 새로운 내용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김홍도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조금도 모자람 없이, 오히려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능숙하게 수행했다.

거기에다 단원은 앞시대 화가들이 이룩한 예술적인 성과를 남김없이 이어받았다. 겸재의 진경산수, 공재와 관아재의 속화, 현재와 능호관의 문인화를 모두 소화하여 끊임없는 연찬과 수련 속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냈다. 그리하여 그를 일컬어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예술적 성취 속에는 그 자신의 예술의지가 작용했든 시대적 요청에 의해 촉발된 것이든, 어는 것이나 인문정신의 표상이었다. 정조시대 문예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탁월한 그림 솜씨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대상을 정확하고 실감나게 그려내는 묘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림은 결코 손재주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단원은 사물을 형상적으로 인식하는 감성적 인지 능력이 뛰어났고, 그것을 작가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재창조하는 구성력이 탁월했다.

화가로서 그의 회화적 역량은 어느 한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르에 따라, 관객의 신분적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함으로써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예술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하여 김홍도의 예술은 조선 4백 년 역사 곳에 축적되어 온 모든 예술적 업적을 한 몸으로 끌어안아 하나의 전형을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냇물이 호수로 모여들고 그 호수에서 발원한 냇물이 다시 여러 갈래로 흘러가는 모습이니, 앞 시대의 예술은 단원이라는 호수로부터 흘러나와 너나없이 단원을 본받는 형상이 되었다.


Ⅱ. 감상

이 책은 조선 시대 이후의 한국미술사를 대표하는 화인(畵人) 여덟 명의 전기(傳記)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화가가 아니라 화인으로 이들을 지칭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단순하게 화가의 일생을 연대기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그 예술적 성취를 그들의 인생 역정 속에서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같은 위대한 우리 화가들의 일생에 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이 불과 서너 마디에 지나지 않으며, 어쩌면 반 고흐나 피카소 같은 서양 화가보다 모른 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무지를 이 책을 통해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역사 속의 위대한 화인들을 새롭게 접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자 노력한다.

그의 안내를 통해 우리 선현들의 옛 그림들을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감동,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사랑하면 알게 되면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는" 모양이다.

저자의 설명을 통해 우리 선현들은 아름다운 것보다는 참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겉 모양이 아닌 정신의 문화와 높은 안목의 문화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은 선인들의 고아한 마음과 생활, 풍습 등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동안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고유의 예술과 풍습, 마음에 대해 외면하고 살아온 셈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호생관 최북의 발끈한 한마디가 이런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정약용: 한번은 어느 재상 댁에서 그림을 펼쳐보는데 그 집 자제들 말이 “우린 도무지 그림은 모르겠어” 하고 말하니, 최북이 당장 발끈하면서 “그림은 모르겠다니, 그럼 다른 것은 안다는 말이냐” 하고 쏘아붙였다. (p.138)

그렇다. 나는 그 동안 다른 것도 모르면서 우리의 정신이 담긴 그림마저도 외면하며 살아온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저자의 말대로 『화인열전』은 인문학의 실천으로서 미술사는데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는 마음이다.


Ⅲ. 저자의 입장에서

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3원 3재’ 여섯 분을 꼽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중 3재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이 책에서 이야기 하고 있으나,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과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두 화인의 행적과 자취가 자못 궁금하다.

저자가 미처 설명하지 못한 두 화인의 전기(傳記)를, 그들의 예술적 성취와 인생 역정 등을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로 새롭게 접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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