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이선이
  • 조회 수 230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5년 8월 1일 16시 30분 등록
1부 자본주의 새로운 프론티어

1.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
근대 이후로 재산과 시장은 줄곧 동의어로 씌였다. 18세기 말이 되면 시장이라는 용어는 공간적 지시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물건을 사고 파는 추상적 과정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 시작한다. 시장은 어른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운다. 우리는 확고 부동하게 시장을 끌어안는다. 시장에 대해 악담을 퍼붓는 사람을 훈계하면서 시장의 찬가를 부른다.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는 추세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물건이 아니라 개념, 아이디어, 이미지가 실리를 가져온다. 부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나온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적 자본은 여간 해서는 교환되지 않는다. 공급자는 지적 자본을 단단히 거머쥔 채 제한적으로 임대하거나 사용권을 빌려준다.
산업 생산에서 문화 생산으로 탈바꿈하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노동 의식이 유희 의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순간을 온갖 형식으로 상품화할 경우 그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이론적으로 따지는 값이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잘게 분할된 상업 구역에서 사들인다.

그런 세계에서는 믿음, 공감, 연대의 감정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상호 의무와 기대가 회원, 등록, 입회, 수임료, 요금에 기반을 둔 계약 관계로 바뀐다.

문화적인 시간-상품화되지 않은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접속 관계에 치우친 하이퍼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우리의 시간이 거의 모두 상품화된다.

문화적 시간은 기울고 인류는 영리적 고리를 통해서만 문명을 지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탈근대 사회의 위기이다. 불과 20년도 못 되는 사이에 세계 시장은 지금까지 정부가 관장했던 영역을 상업 영역 안으로 성공적으로 흡수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 활동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독립적 영역인 문화 자체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상품화된 문화 체험에 점점 무게 중심이 놓이는 지구 네트워크 경제에서 문명의 생명수라 할 수 있는 풍요로운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고 끌어올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것이 새로운 세기의 으뜸가는 정치적 숙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2. 시장이 네트워크에 밀리는 날
전기가 바꾸어놓을 세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은 1851년에 이런 글을 썼다. <전기 덕분에 물질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신경이 되어 순식간에 수천 마일을 오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둥그런 지구는 지성으로 가득찬 거대한 머리요 뇌란 소리! 아니, 지구 자체가 사고, 그야말로 오로지 사고일 뿐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실체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 호손의 상상은 극소 전자공학, 컴퓨터, 원격통신이 단일한 통합 통신망, 세계 전체를 감싸는 일종의 글로벌 신경제로 통합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통힌 형식이 바뀌면서 수렴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현대 과학 기술은 상거리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첫째는 설계 활동에서 부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의 투입 요소들에 대해서 기업들이 하청 관계로 엮이는 공급자 네트워크이다.
둘째는 생산 시설, 자금, 인력을 공유하여 상품과 서비스의 품목을 확대하고 시장을 넓히며 선생 투자에 따르는 위험 요인을 줄이는 생산자 네트워크이다.
세째는 제조업체, 도매업자, 유통 경로, 소매상, 최종 사용자를 연결하는 소비자 네트워크이다.
넷째는 주어진 분야에서 업계의 선두 주자가 확립한 기술적 표준으로 가급적 많은 기업을 끌어들이는 일반적 의미의 연합체이다.
다섯째는 기업들이 연구 개발 부문에서 가치있는 지식과 기술을 공유하는 기술 협력 네트워크이다.
*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가 확인한 네트워크 유형

인터넷은 네트워크들의 네크워크이다. 인터넷이 사물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저 만인의 컴퓨터를 연결한 것, 그것이 인터넷이다. *제임스 글레이크

접속의 시대에 기업의 가장 큰 불안은 경제적 기회를 낳는 거미줄 같은 상거래망에 끼여들지 못하는 것이다. 동맹 관계가 끝없이 변하는 새로운 세계에서 네트워크로부터 탈락한다는 것은 곧 낙오를 의미한다.

문화 산업은 물리적 제품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경험을 상품화하고 포장하고 마케팅한다. 문화 산업이 재화로 쌓아두고 거래하는 것ㅇ느, 현실을 모방한 세계와 의식을 고양시키는 세계로 잠시 접속할 수 있는 권리이다.

물건과 서비스를 상품화하던 것에서 경험 자체를 상품화하는 단계로 변모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이것은 더없이 이상적인 모델이다.

우리는 시간과 정신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가 상품으로 판매되는 지적 자본주의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3. 무게 없는 경제
물리적 경제는 움츠러들고 있다. 물리적 자본과 재산의 축적이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새로운 시대는 정보와 지적 자산의 뭉치에 얹혀 있는, 눈에 안 보이는 힘을 중시한다. 산업 세계에서 오랫동안 부를 재는 잣대로 군림해 왔던 물질 제품은 탈물질화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유럽에서도 옛날에는 소를 돈처럼 여겼다. 소를 뜻하는 은 동산(動産)을 뜻하는, 자본을 뜻하는 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지금도 소를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쓰는 나라가 있다.
ㅁ 줄어드는 부동산
새로운 환경에서는 공간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면서 타인을 배제하는, 무조건 소유하고 보겠다는 발상은 금물이다. 접속의 시대에는 동료에게 거리낌없이 바로 다가갈 수 있는 구조가 중요하다. 호텔 예약 방식을 통해 사무실을 공유하다. 종이로 된 서류가 전자 서류로 바뀌면서 사무 공간의 탈물질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ㅁ just-in-time 재고 관리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영역, 모든 단계에서 재산 형태의 물리적 자산은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있다. 재고만 해도 그렇다. 기업은 원자재를 쌓아두기 위해 거대한 창고를 운영했다. 하지만 지금은 물건이 소매점에서 판매되면 즉시 재 주문 정보가 공급자에게 온라인으로 입력되고, 제조업자는 몇 시간에서 길어야 2,3일안에 물건을 소매점에 공급한다. 창고는 불필요하다.

ㅁ돈의 탈물질화
월터 조엘 커츠먼에 따르면 탈물질화한 새로운 돈의 형태는 <전화선을 통해서, 광섬유 고속도로를 통해서, 위성을 통해서, 전파 중개소를 통해서 전송되는...... 연산의 기본 단위, 곧 0과 1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커츠먼은
이 새로운 돈을 그림자에 비유한다. <이 차가운 잿빛 그림자는 불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 감촉이 없다. 무게나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돈은 이미지다.>

ㅁ 저축의 감소
다양한 형태를 띤 재산의 보유보다 상거래 기회에 대한 단기적 접속 권리의 확보가 더 중요해지는 새로운 사회에서 실제로 저축은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 재산 형태의 저축보다는 신용 대출이라는 단기적 접속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만큼 신용 카드 사용도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ㅁ 빌린 경험
많은 기업들은 이제 자본 설비를 구입하기보다는 필요한 물리적 자본을 빌려 쓰고 단기 비용이나 경상비로 처리한다. 사실상 모든 종류의 생산 자본이 임대되고 있다. 리스 안에서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는 판매 후 리스 계약이다.

ㅁ 아웃소싱 방식의 소유
기업은 물리적 자산과 기능을 벗어 던지고, 사내 위계 구조를 평면화하며, 갈수록 치밀한 네트워크와 관계로 얽혀가는 외부 하청업체들에게 업무를 위임하고 있다. 아웃소싱은 경영진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수단이 되었다.
제조업 전문 컨설턴트 얼 홀은 접속의 시대에 <제조 회사는 (사실은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고립된 생산 시설이 아니라 공급업자, 소비자, 엔지니어링, 기타 서비스 기능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의 한 접점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경영 컨설턴트 윌리엄 데이비도와 언론인 마이클 말론은 『가상 기업』이라는 책에서 <가상 기업은 안팎이 뚜렷이 구분되는 사업체가 아니라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는 공통된 활동들의 덩어리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크워크에 바탕을 둔 사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경제 활동의 공유라고 할 수 있다.

ㅁ 무형의 자산
불과 40년만에 소유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물리적 자본의 임대와 업무의 아웃 소싱이 대세를 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재산의 장기적 소유를 고집하기보다는 생산 자본에 대한 단기적 접속을 중시하다. 네트워크 경제를 염두에 두고 개발된 새로운 회계 모델에서 물리적 자본은 회계 원장의 자산의 항목으로부터 비용 항목으로 이동하여 경상비로 처리될 것이고, 무형 자본은 자산 항목으로 이동할 것이다.

ㅁ 물질을 넘어서는 정신
사업의 성패를 아이디어가 좌우하는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다.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확장하여 보편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산업 활동을 이끌어나가겠다는 원동력이다.

상업권에서 아이디어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인간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단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다면, 중요하지만 상업성이 없는 사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 인생의 길잡이가 될 만한 생각을 상업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문명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관점, 의견, 관념, 개념이 존립할 수 있는 여지가 과연 있을까?


4. 지적 재산의 독점

ㅁ 체인점 ; 소유가 아닌 접속 소규모 독립 사업체에서 체인점으로
ㅁ DNA 임대
살아있는 생명체의 일부분-유전자, 염색체, 세포, 섬유-도 특허를 낼 수 있으며 누구든 가장 먼저 그 성질을
분리해 내고 기능을 묘사하고 상품화에 성공하는 사람은 지적 재산권에 준하는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기본 정책 방향을 밝힌 것이다. 업계에서는 수억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생물이 진화하면서 공동으로 축적해 온 유전자 암호의 상당수가 앞으로 25년 안에 분리되고 규명되어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포장된 뒤 소수의 거대 다국적 생명과학 기업에 의해 장악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새로운 경제의 원료에 대한 특허 발급은 자원 거래의 방식을 크게 바꾸어놓는다. 원료의 판매자와 구매자는 공급자와 사용자로 바뀐다. 다가올 시대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물질로 부각될 생물학 자원은 빌려주기만 할 뿐 팔지는 않을 것이다. 공급자-사용자 관계로 바뀌는 네크워크 시대에 이들 다국적 기업은 종자를 약간 변형하거나 개발 유전자 특성을 없애거나 새로운 유전자를 종자에 덧붙인 다음 <발명>을 했다며 특허를 딴다. 그 목적은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자를 송두리째 장악하는 데 있다.
종자 생식 세포에 대한 세계적인 지배와 특허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석기 시대의 농업 혁명 이후 지금까지 농부들이 항상 자신의 종자를 소유해 왔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농부와 씨앗의 이러한 근본적 관계가 처음으로 깨져나가고 있다. 수확을 해서 얻은 새 종자의 소유권은 특허권자에게 있기 때문에 농부가 이듬해 농사에 마음대로 쓸 수 없다. 농부는 타인의 지적 재산에 잠시 접속할 수 있을 뿐이다. 델타 앤드 파인 랜드와 미국 농무부는 농부가 종자를 재사용할 수 없게 하는 종자 불임 기술의 특허를 따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지금까지는 한번 구입하면 계속 재상용이 가능했던 종자를 농부들이 해마다 <접속>료를 물고 사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씨앗을 모아놓았다가 이웃과 나누어 가지면서 근근히 농사를 지어가는 전세계 대다수의 농민더러 소수의 다국적 생명과학 기업에게 일일이 접속료를 지불하라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를 바 없다. 미시건 대학의 사회학자 로렌스 부시는 <하루아침에 종자의 씨를 말릴 수 있는 전쟁이나 내란, 엄청난 자연 재해는 다반사로 일어난다. 만약 농민이 씨앗이 없어서 파종을 못하고 특허 종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면 대규모 기아는 눈앞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던 생물 종자의 소유권이 몇몇 기업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농업의 역사에서 일대 분수령이 될 만한 사건이다. 농부와 연구자는 동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특허를 받은 복제 동물에 대한 접속권을 구입하는 셈이며 새끼가 태어날 때마다 로열티의 형태로 추가 접속료를 물어야 한다. 법적으로는 특허 동물의 공급자가 동일한 유전형을 가진 모든 후손을 소유한다. 네트워크가 앞으로 이렇게 시장을 계속 제거한다면, 그것은 종래의 시장을 보호한다는 유일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반독점법을 위반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업들이 아이디어와 지식 자본에 대한 지배력을 앞세워 네트워크를 독점하고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새로운 법적 규제를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세스 슐먼은 『미래의 소유』라는 책에서 <우리는 지식 경제에서 반독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슐먼도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위험천만한 권력의 집중 양상을 드러내는 독점, 곧 기본적 정보에 대한 독점을 확실히 규제하기 위해서 반독점법을 활성화시키자>고 제안한다.

5. 서비스 세상
시티카 클럽 홍모물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모름지기 사물의 진가는 지닐 때 보다는 쓸 대 발휘되는 법이다> 앞으로 경제 생활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물건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서비스와 경험에 대한 접속이 될 것이다.

6. 인간 관계의 상품화
현대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삶의 다양한 국면을 상업 관계망 안으로 강제 편입시켰다는 점이다. 접속의 시대는 한마디로 모든 인간 경험의 상품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이다. 사이버스페이스 경제에서는 물건과 서비스의 상품화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인간 관계의 상품화다.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변하는 네트워크 경제에서 고객의 관심을 묶어둔다는 것은 그들의 시간을 최대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던 불연속적 시장 거래로부터 시간위에 무한히 펼처진 관계를 상품화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상업 활동의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우리의 일상 생활은 점점 이해 득실과 타산의 노예가 된다.

7. 삶으로서의 접속
이동성이 늘어난다는 것은 임대나 구입의 결정 시점이 그만큼 자주 돌아온다는 뜻이다.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고 접속만 하게 될 때 우리는 타인에게 훨씬 더 의존하게 된다. 우리가 자꾸 남들과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이 되면 우리의 자기 충족감은 약화되고 외부의 압력에 쉽게 허물어지는 것일까? 소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좋지만 그 바람에 아예 우리가 만들고 쓰는 것에 대한 책임 의식마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상호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교감하는 것은 좋지만 그 바람에 칼자루를 쥔 기업들의 막강한 네트워크에 더욱더 의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접속의 시대에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 생물학적 토대와의 깊은 교감을 잃어버리고 방향 감각을 상실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는 이들도 있다. 지리는 좌표이고 제약인가 아니면 고려해야 할 수많은 요소 중의 하나에 불과한가?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

8.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
인류학자는 의사 소통을 텍스트의 전달을 통한 사회적 의미의 생산으로 이해한다. 스위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피어스가 선구적으로 개척한 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의미를 확립하고 공동의 가치를 생산하며 사람을 사회적 관계로 묶는지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주의자는 언어, 신화 같은 상징 체계가 공동의 사회적 경험에 의미를 불어넣는 데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문화를 표현하고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을 표현단다는 말이 성립한다.
문화 생활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늘 접속과 포함의 문제에 직결된다. 민주주의적 참여와 개인적 권리라는 관념은 소비자 주권과 소비자 권리로 변신하여 시장에서 다시 태어났다.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 땅으로 몰려든 이민자들이 못내 부러워한 것은 교실과 공식석상에서 찬양하던 시민적 참여의 이상이 아니라 탐나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궁전처럼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가서 원하는 물건을 마음껏 사는 것이었다. <참여>는 정치적 영역의 고매한 횃대에서 굴러 떨어져 상업적 영역에서 소비자로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 격하되었다. 최근 들어 관광은 낯선 문화의 체험이라는 성격보다는 주도면밀하게 연출된 상업적 공연의 성격을 짙게 띠어간다. 체험 학습의 기회라고 요란하게 선전되지만 관광은 점점 공연물에 가까워지고 있다. 관광과 연예는 진정한 체험 그 자체라기보다는 체험의 모방에 가까운 문화적 상품으로 융합되고 있다.

9. 문화의 광맥을 찾아서
이제 마케팅 산업에서 문화 노동자의 일차적 임무는 대중 문화로부터 의미의 단편을 뽑아내고 음악, 영화, 디자인, 광고 같은 예술의 힘을 빌려 특정한 문화적 범주에 어울리는 정서적 반응을 소비자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제품을 포장하는 것이다. 제품은 정교한 문화적 의미가 그 위에서 공연되는 발판 내지는 배경이 된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무한히 열리지만 네크워크 밖에서는 점차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몰린다. 이 세상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인류가 쌓아온 지적 성취와 살아 있는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웨이드 데이스는 언어의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10. 탈근대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기자라고 생각하고 근면하다는 말보다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더 뿌듯해한다. 임시직에 익숙하고 과제 해결을 중심으로 편성된 조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현실이라는 것은 시스템을 통해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라는 발상에 익숙하다. 이들의 세계는 점점 가상의 행사와 순간적 경험으로 채워진다. 근대인은 신앙을 버리고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과학은 객관적 현실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기술은 객관적 현실의 결과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사유 재산은 정복에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근대 과학이 궁극적 진리와 근본적 입자를 찾았다면, 새로운 과학은 돌발적 가능성과 패턴 발생의 원리를 찾으려고 한다. 물리학, 화학, 수학에서 나온 새로운 관념이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기는 분야는 인문학이다. 기호학자들은 우리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내는 이야기, 우리가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에 의해 이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이 노출시킨 자연이다.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연구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자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 탈근대의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진지하지 않다.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더 관심을 보인다. 규칙성과 기능성에 중점을 두었던 근대 건축의 진지함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탈근대 건축은 아이러니와 즐거움을 중시한다. 충격과 자극,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탈근대 건축가들은 역사적 양식을 짜깁기한 건물을 짓곤 한다. 누적된 노력을 통해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자아가 부단한 과정 속에서 각성되고 발견되고 실현되는 현재 지향의 자아로 변모하는 양상에 주목한다. 역사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살아가지만 치료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위해 살아가며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요즘 사람은 개인적 구원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는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일신이 편안하고 건강하며 육체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 혹은 그런 유의 일시적 환상뿐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선조나 후손을 위해 살지 않는다. 책이 단선적이고 경계선이 분명하고 고정되어 있다면, 하이퍼텍스트는 연결 지향적이며 원리적으로는 딱히 경계선을 정할 수가 없다. 텍스트가 한 개인의 저작이라는 의식이 희박해지면 자연히 창조 활동을 하는 저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안으려는 추세가 강해진다. 이제 자아는 더 이상 개인의 사유 재산이 될 수 없다. 어빙 고프먼이 말한 대로 자아는 <그가 공유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에 의해 한 인물에게 부여된 감각>에 가까워진다. 자아는 실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소통이 야기하는 <일종의 허구적이고 구성적이며 교감으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하는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11. 접속자와 비접속자
지리에 기반을 둔 항구적 공동체보다는 가상 세계 안에서 어울리면서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일시적 공동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한 나라가 통합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 오래전부터 여겨져 온 땅과 국토에 대한 애정과 집단적 연대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가 시민이 국가 바깥에 세우는 무한히 많은 연합체들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제 정치가 사회생활을 조직하는 원리라는 소리는 그야말로 옛말이 되어버린다. 정치는 현대 세계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기만 한 인위적 구성물로 전락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아무튼 주변적 지위로 밀려난다.>

세계 인구의 부유한 1/5이 문화체험과 개인적 변신을 찾아 소유를 과감히 포기하고 있지만 나머지 4/5는 아직도 초라한 살림살이 속에서 더 많은 재산을 갈망하고 있다. 통신 혁명과 미래의 네트워크 세계에 대한 대담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세계 인구의 65퍼센트가 평생 전화를 걸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들이고 40퍼센트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에서 살고 있다. 뉴욕의 맨해튼 한곳에 있는 전화기 수가 사하라 사막 남쪽의 전체 아프리카에 있는 전화기 수보다 많다. 유엔 개발 계획이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358명의 억만장자들이 세계 인구의 절반이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인이 화장품 구입에 쓰는 돈(연간 80억 달러)과 유럽인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 쓰는 돈(연간 110억 달러)은 학교 교육을 못 받고 공동 화장실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세계 20억 명의 인구에게 기본 교육, 깨끗한 물, 위생 시설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돈보다도 많은 액수이다. 오늘날 접속의 문제는 예전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디지털 혁명은 첨단 기술 통신이 실어 나르는 음성, 데이터, 비디오를 하나의 웹으로 통합하고 있다. 이런 매체를 통해야만 문화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접속의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이다. 같은 인간끼리 연락을 주고받고 거래를 맺고 관심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새로운 전자 통신의 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종래의 장소와는 성격이 다를지 모르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엄연한 사회적 교류의 장이다. 앞으로 인간이 영위하는 문명 생활의 상당 부분은 전자 세계에서 일어날 것이다.

12. 문화와 자본주의의 생태학을 향하여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 다시 말해서 접속의 권리는 컴퓨터가 매개하는 상업적, 사회적 네트워크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세계에서 갈수록 중요해진다.
네크워크 세계에서 자치를 고수한다는 것은 단절과 고립을 의미한다. 반면, 배제되지 않을 권리, 곧 접속의 권리는 개인적 자유를 재는 잣대가 된다.
우리의 공공 생활은 상업공간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가고 있으며 이것은 장기적으로 문명의 미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상업적 관계는 문화적 관계의 대용물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인간의 삶에서 이념성이 줄어들고 연극성이 늘어난다면, 거창한 줄거리나 웅장한 세계관의 비중이 줄어들고 수십억 가지에 이르는 개개인의 드라마가 상업 네트워크와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자기 나름의 각본에 따라서 공연된다면, 그때 우리는 인간이 처한 조건,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생의 목적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상업 광고만이 난무하고 그 사이사이에 간헐적으로 <본방송>이 끼여드는 세상으로 바뀌지 않을까? 사회 자본을 수립하고 시장과 교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막중한 역할이 문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문화라는 제3부문을 당연시 하며 시장을 제1부문으로 정부라는 제2부문을 중심으로 공공 정책을 운용한다. 문화에 의해 생산되는 사회 자본은 경제의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사회 자본이 고갈되면 문화와 상업의 섬세한 균형은 무너져버린다. 시장과 네트워크는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 시장과 네트워크는 사회적 신뢰감과 공감대가 형성된 강력한 사회 공동체가 먼저 존재하고 나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파생물이다.

문화를 소생시켜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문화 생산하는 데 원료가 되기 때문이어서만도 아니고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문화가 만들어내기 때문만도 아니다. 문화는 다른 이유를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생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는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소생하면 시장도 분명히 득을 보겠지만 문화가 단순히 시장의 원료로 사용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문화에서 흘러나와서 인간성을 창조하는, 인간과 인간이 공유하는 의미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고, 개인적 오락과 치유의 형식으로 체 험을 상품화하는 초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를 격하시키는 발상이다.

문화는 자연을 이루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한결같은 외경과 헌신에서 탄생했다. 문화는 자연에 우리가 진 빚을 이야기하며 우리를 더 큰 생명의 힘으로 이끈다. 이런 생명의 긍정이 바로 내재 가치의 핵심이다. 따라서 문화는 모든 현상이 효용성으로 환원되고 편의와 징발이 행동의 표준으로 수용되는 상업 영역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치적으로 각성된 지역 문화는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에 저항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의 존립에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놀이는 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의 목적은 징발하고 죽이고 가공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생산은 언제나 사물을 고갈시킨다. 문화 영역의 순수한 놀이는 인간적 결속의 숭고한 표현이다. 우리는 남과 어울리고 싶어서 놀이를 한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깊이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집단적 신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놀이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잠시 동안 경계심을 접어두고 자기를 내던지면서 남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의 희열을 경험한다. 남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희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놀이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놀이도 희열도 결국은 경험의 공유이다. 숲을 혼자 거닐 때 느끼는 잔잔한 희열도 나를 둘러싼 생명과 혼연 일체가 된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다.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IP *.229.121.147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