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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4일 23시 43분 등록

완당평전 _ 유홍준 지음

1. 나에게 들어온 글들
서장] 저 높고 아득한 산
11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시대 서예가로 금석학과 고증학에 석학이었으며 세계적인 인물이었다.

12 추사체는 대단히 개성적인 글씨이다. 일반적인 아름다움, 평범하고 교과서적인 미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추사의 글씨에서 차라리 괴이함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바로 그 괴이함이 그의 예술적 개성이자 높은 경지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23 추사 자신은 문,사,철과 시,서,화를 분리 시키지 않은 총체적 지식은으로서 자신의 삶과 학문과 예술에 충실했을 뿐이다.

24 만년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하엿다. – 박규수 전집


제1장 출생과 가문 - (1~24세:1786~1809년)
명문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39 풍채가 뛰어나고 도량이 화평해서 사람과 마주 말할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그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리냐 이욕이냐 하는데 이러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같아서 감히 막을자가 없었다.

47 박제가도 영민한 추사에게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이른바 북학을 성심으로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부터 추사는 언젠가는 꼭 한번 연경을 다녀오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제2장 영광의 북경 60일 - (24~25세:1809~1810년)
옹방강, 완원 두 경사와의 만남

60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00년 역사상 보기 드문 영재 완당 김정희가 출현하여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 두 경사를 알게되고, 여러 명현들과 왕래하여 청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귀국하자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00년 내로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되었다. –후지츠카

69 홍대용과 헤어진 엄성은 어느날 홍대용이 “군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감추는 것은 때에 따른다”고 한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고향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숨을 거두었다.

73 사고전서의 편찬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본래 건륭제가 이 편찬사업을 벌인 목적은 금서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미증유의 이 학술사업으로 전국의 학자들이 연경에 모여 학술을 번창시킨 것이었다.

75 유득공의 ‘21도 회고시’는 장대한 민족 서사시라고 할 만한 것이다…. 유득공의 시에는 그런 민족적 자존이 서려 있다.

77 정조는 안목과 식견이 뛰어났다. 그는 학문의 연착과 문화의 진흥을 위해 학술의 기본 자료를 모아 학자들에게 연구케 하는 일을 지원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도서집성’ 전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98 나이 25세의 젊음에는 그런 오만은 비록 권장 될 수는 없다 해도 용서 될 수는 있는 일이 아닐까.

100 추사는 그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갖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제3장 학예의 연찬 - (25~34세:1810~1819년)
진흥왕 순수비와 무장사비를 찾아서
(※ 연찬2(硏鑽)[연ː-] ꃃ학문 따위를 깊이 연구함. ≒찬연03(鑽硏))

104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다.

108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옛것을 고찰하여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126 청나라 고증학자들이 중국의 옛 비문을 연구하듯 그는 조선의 옛 금석문을 연구하여 우리의 고증학을 발전시키며 토착화 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하면서도 현명한 학문적 정체성의 확보였다.

138 실사구시라는 구호는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에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완당은 바로 이 명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

152 완당과 초의스님의 인연, 편지

165 대저 없어져가는 것을 보존함은 仁이요, 희미해져 가는 것을 지킴은 義이며, 천하에 흩어진 것을 찾아서 간행함은 信이요, 세상이 좋아하는 바를 공개하는 것은 惠이다. 완당의 매력은 바로 이렇게 명철하게 논리의 결구를 맺는데 있다.

170 완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인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폐쇄적인 교육방식, 과거 시험이라는 입시교육, 견문의 부족이다.

171 훌륭한 문의 묘는 남의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영기가 황홀하게 찾아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러 와서 그 괴괴하고 기기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완당은 이처럼 당시 사람들이 엄격하게 따졌던 제도적 질서, 불교의 천시와 배척 같은 사회적 통념을 훌쩍 뛰어넘어 행동하였다.


제4장 출세와 가화(家禍) - (34~50세:1819~1835년)
운와몽중, 황청경해, 예당금석과안록

199 34세의 완당은 드디어 과거시험 대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이제 출세길로 들어선 것이며 이때부터 완당은 또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224 평양 기생 죽향이와 눌인 조광진과의 만남

234 ‘운외몽중’첩은 총 26편으로 신위, 홍현주, 김정희등 3인이 쓴 시 13편을 모두 완당이 기록하고, 책머리에 크게 ‘운외몽중’이라 써서 이 뜻깊은 화답을 기념한 시첩이다.

243 사대부가, 더욱이 완당 같은 명사가 꽹가리를 치며 송원하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라고 했다. 완당의 효심은 그렇게 지극했다.

247 완당은 이 방대한 저서 ‘황청경해’가 손에 닿기를 그날부터 손꼽아 기다렸다. 필요하면 반드시 구하고자 하는 완당의 극성과 정열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흠정도서집성’ 한 질을 구하고야 만 정조대왕의 열성과 비견할만한 것이다. 이런 엄청스런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250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은 진흥왕 순수비, 평백제비, 봉덕사 에밀레종 명문, 무장사비 단편 등 우리나라 고비, 고종의 금석탁본 중 유명하고 오래된 것은 거의 다 망라한 기념비적 편찬이다.


제5장 완당바람 - (50~55세:1835~1840년)
해외묵연, 원교필결후, 예림갑을록

265 완당이 청나라의 학술과 예술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은 또 완당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가는 왕희순이 완당의 글을 책자로 엮은 ‘해외묵연’에 가장 잘 나타나있다.

275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이룰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분방한 개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청나라 사람들은 入古出新이라 했다.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284 혹자는 완당이 중국을 사모함이 커서 그랬다며 완당을 사대주의, 모화주의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사대주의와는 전혀 다른것이다. 오히려 국제적 시각의 확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 할 수 있다. 사실 정보력은 그 자체가 힘이다. 완당의 정보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한 채널을 통해 얻은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289 한 서계가의 글씨가 변해가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편지글시와 해서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난다. 편지 글씨란 그가 작품이라는 의식을 갖지 않고 쓴것이기 때문에 그 서예가의 필법이 거짓없이 드러나며 해서 작품에는 그렇게 변화된 결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293 말하지 않고 깨우쳐 줄 수 있다면 침묵에 무슨 손상이 있겠으며,
중용을 얻어 말한다면 웃는다 하여 무엇이 걱정일까. 그것에 힘쓸지어다.
생각컨데, 스스로 헤아려야 그것을 모면할 수 있음을 알겠도다.

315 난초 그림은 그림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완당은 단호히 말한다. 그것은 글씨의 영역이라고.

316 요컨데 인품과 교양과 지식과 필법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 이럿이 완당이 말하는 난초치는 비결이다. 완당이 흥선대원군에게 난초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천제도 결국은 노력이다”라고 말한 것은 난초그림에 대한 그의 지론이었다.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 (55~59세:1840~1844)
세한도를 그리며

332 다산은 귀향살이를 통해 현실을 발견했고 완당은 귀향살이에서 자아를 재발견 했다고 말할 수 있다.

348 문화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충실할 때 제 빛을 발하는 버이다. 전시관을 생각했으면서 전시내용과 운영방법을 갖추지 못했음은 결국 겉껍질만 흉내내고 속알갱이가 없는 허망뿐이다.

373 어떻게 월로께 호소를 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리밖에서 내가 죽고 그대는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379 완당이 책 읽기를 얼마나 좋아했는가는 우선 그의 장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완당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394 완당은 이상적의 변함없는 사제간의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리고 그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사실을 알게된다”고 했는데 …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398 ‘세한도’는 완당의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있는 격조와 문기가 생명이다.

제7장 제주도 유배시절(하) - (59~63세:1844~1848년)
수선화를 노래하며

419 당시 조선에서 서양에 대해 완당만큼 알고 있는 학자는 없었다. … 완당의 경륜하는 자세는 이처럼 스케일이 크고 자신감에 넘쳐 있다. 그는 학문을 위한 학자가 아니라 경륜을 위한 학문을 몸으로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431 귀양와서 쓴 글씨에는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니 앞의것이 국제적 유행 감각이라면 나중 것에선 완당 개성의 체취가 느껴진다. … 대둔사의 ‘무량수각’은 중국 요리의 난자완쓰 같고, 귀양와서 쓴 화암사의 ‘무량수각’은 칼국수 국숫발 같다고 말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뜻을 보이곤 한다.

443 완당은 이처럼 여러면에서 사람을 질리게 한다. 지, 필, 묵, 벼루를 이렇게 따지고 고르다가 어떻게 완당이 붓 한번 대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완당 자신은 글씨를 쓰는데 이 모든 것이 생활화, 체질화 되어 있었다. … 역시 최고를 이룩한 사람은 몸 동작 하나도 무언가 달랐던 것이다.

454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
455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465 청명 선생은 청조학예가 완당에 의해 결실을 맺고 왜 추사체가 귀양살이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는 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완당은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에서 배태된 것이니 곧 서학의 길을 터득해 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 창의력이 합해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험준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그의 서체는 험난앴던 그의 생애 속에 만들어진 것이다.

467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모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가 괴이한 개성이 나온 것이 아니겠어요 –이동주 선생


제8장 강상(江上)시절 - (64~66세:1849~1851년)
노호의 칠십이구초당에서

573 이렇게 자기 멋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강상시절의 완당이었다. 청명 선생의 지적대로 완당의 이런 글씨에는 세상의 이치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허망속에서 나오는 조롱 같은 것이 서려있다. 인생을 순탄하게 걸어온 선비나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는 모범생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글씨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중국인 왕씩가 말한 대로 이렇게 변화가 많은 글씨 이면서도 한나라 예서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완당이 이처럼 글자의 형태를 기굴하게 변형시키면서 파격의 미를 추구한 것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글자의 의미를 형상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579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 이다.

582 완당의 글씨 또한 가우디의 건축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시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예술로서 통하고 대가는 대가로서 통하는 것이다.

584 그러나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하여 모질게 정채를 쏟아나가면 구천구백구십구분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일분의 공부는 진실로 이루기가 어려우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되는 거라네.

완당은 이처럼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가 모든 인간에게 최선을 다하라 한 충고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시권 뒤에 제하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시를 짓는 데서도 전력을 투구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나는 완당이 이렇게 말해준 것이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그것은 특출할 것이 없는 모든 인생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각성제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나같이 재주 없는 인생도 노력만 하면 무엇을 이룰수 있다는 위안이기 때문이다.

590 남들은 이런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들어넘길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잃어버린 금반지를 다시 찾은 반가움과 기쁨이 이렇게 절절하기만 한다.


제9장 북청 유배시절 - (66~67세:1851~1852년)
변방의 찬 하늘 아래서

613 완당은 서민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동정이나 이해가 없다. 아니 철저한 귀족주의나 개인주의에 젖어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이유로 완당의 인생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완당은 그 대신 한 인간의 피나는 노력과 위대한 창조력과 탁월한 개성이 낳을 수 있는 빼어난 얘술작품으로 세상과 대중에 봉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완당의 귀족주의는 속물 선민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제10장 과천시절 - (67~71세:1852~1856년)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657 완당의 평생동지, 평생지기는 역시 권돈인이다.

681 장기, 바둑, 술 같은 완당의 취미나 잡기들은 대게 맛은 알지만 즐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완당에게 진짜 취미가 있다면 그것은 독서와 글씨쓰기 였던 것이다. 이외에 또 무엇이 있었을까?

682 완당의 취미는 독서였다. 완당이 만년에 벗들과 여유롭게 노닐고 즐기면서 살았다고 해서 삶의 긴장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죽는 그날, 그 순간까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

평생을 버티고 있던 힘이
한번의 잘못을 이기지 못했네.
세상상이 삼십년에
공부한다는 것이 복임을 바로 알았네

711 열정과 관용은 선택이 아니라 불 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어질 때 비로서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와 괴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세서는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서 배웠고 이제 과천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712 바로 그것이다. 곁들여야 한다.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은 곁들여야 되는 것이다.

763 인생은 그렇게 본연의 모습을오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치이다. 그렇다면 완당의 ‘판전’글씨도 정녕 그런 근원으로의 회귀였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종장 완당의 서거와 사후의 평가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779 그 옛날의 다복솔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 저 세가닥의 가녀린 소나무만 보고도 그 아름다움을 곧잘 말하고 있으니, 오늘날 우리가 선생을 대함이 곡 그러하다는 쓸쓸한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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