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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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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5일 19시 53분 등록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김석희 옮김, 살림, 2001)

EDWARD W. SAID(1935~2003.9.24).. 1935년 영국 식민지였던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1947년 예루살렘이 신생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 혼란에 빠지자 이집트의 카이로로 이주하였다.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허먼스쿨과 프린스턴대학, 하버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하버드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컬럼비아대학의 석좌교수 및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명저「오리엔탈리즘」에서 그는 동서문학과 문명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문헌학적 조사를 통해 서구가 창출해낸 동양에 대한 오랜 편견, 그 지배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그 후 20여 권의 저술을 출간한 그의 삶은 저명한 문학이론가·문명비평가에 머무르지 않고 팔레스타인 망명정부의 국회의원, 미국 언론의 영향력 있는 논객, 미국 행정부의 대 중동 외교정책의 강력한 비판자였고, 2003년 9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김석희.. 1952년에 태어나 서울대 인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국문학과를 중퇴했다.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다.「털없는 원숭이」「로마인 이야기」「프랑스 중위의 여자」「시간 박물관」「몽테뉴」「문명의 창세기」「빵굽는 타자기」「실크로드 이야기」등 100여 권의 책을 번역했고, 역자후기 모음집인「에필로그 60」을 펴냈으며, 제1회 한국번역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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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부분 병으로 누워 있을 때나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씌여졌다. 때로는 뉴욕의 집에서, 때로는 프랑스와 이집트의 친구 집이나 요양 시설에 머물고 있을 때 글을 썼다. 집필에 처음 착수한 것은 1994년 5월, 백혈병 치료를 위해 세 차례의 화학요법을 받은 뒤 그 후유증에서 차츰 회복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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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원제: Out of Place)은 기본적으로 사라진, 혹은 잊혀진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질병과 쇠약, 힘든 치료와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너지지 않은 데에는 내 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 나는 제2차 세계대전과 팔레스타인 상실, 이스라엘 건국, 이집트 왕정 타도, 나세르시대, 오슬로 평화협정 등을 배경으로 내 인생을 서술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내 회고록에 넌지시 암시되어 있을 뿐이지만, 그 존재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회고록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재의 생활과 당시의 생활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고 싶은 욕구였다. 나는 그 간격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것을 명백한 하나의 사실로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첫 번째 이야기>

아버지는 힘과 권위, 합리주의적인 규율, 감정의 억제 같은 요소들의 강력한 결합을 상징하게 되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이 요소들은 모두 평생 동안 나와 충돌하면서 바람직한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나를 억누르고 나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20대 전반까지 어머니는 나에게 가장 가깝고 허물없는 친구였다. 지금도 어머니의 오랜 습관과 견해가 나에게 각인되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다른 행동 방침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버릇, 스스로 자초한 만성 불면증,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끝없이 소모시키는 고질적인 활동성, 음악과 언어만이 아니라 외모와 양식과 형식의 미에 대한 깊은 관심, 사교계의 유행과 쾌락, 거기에 잠재해 있는 기쁨과 슬픔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버릇, 그리고 끝으로 고독을 자유와 고뇌의 형태로 즐기는 성향. 어머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고독을 개발했고, 사실상 아무 것도 그것을 억누르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된 순간부터 나의 자아상은 불명예스러운 과거와 부도덕한 미래를 가진 존재였다. 나는 영원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규율과 과외교육으로 이루어진 극단적이고 엄격한 체제 속에 아홉 살 때부터 갇히게 되었다. 그 체제의 규칙과 패턴을 벗어나 잠시 한숨 돌릴 여유도 없었고, 자아의식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에드워드’가 되었다. ‘에드워드’는 내 부모님의 창조물이다.

부모님이 ‘에드워드’를 창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그분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물이었기 때문이다. 성장 배경도 기질도 전혀 다른 이 두 팔레스타인 사람은 영국의 식민지 카이로에서 수많은 소수파 집단들 속의 소수파인 기독교도로 살고 있었다. 서로를 제외하고는 의지할 사람도 없었고,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할 때 참고할 선례도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에드워드’가 과연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까?

<두 번째 이야기>

1935년 당시 부모님은 카이로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버스나 전차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구멍가게나 노점에서 파는 음식은 절대 먹거나 마시지 말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거대한 악덕의 소굴에서 우리 집과 가족을 유일한 피난처로 생각하라고 늘 경고했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나를 구하는 것, 이것이 내가 실생활에서 체험한 역설이었다.

1942년 이후 몇 해 동안, 아버지 옆에 서거나 앉아 있는 것은 내 잘못에 대한 벌이었다. 그것은 내가 학교에 가 있지 않을 때, 또는 레바논에서 여름을 보낼 때, 내가 말썽을 피우지 못하도록 다잡기 위해 부모님이 궁리해낸 유치한 아이디어였다.

<세 번째 이야기>

학교 선생은 반드시 영국인이어야 하는 줄 알았다. 학생은 운이 좋으면 영국인일 수도 있지만, 나처럼 운이 나쁘면 영국인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1941년 가을부터 1942년 5월에 우리 가족이 카이로를 떠날 때까지 게지라 초등학교에 다녔고, 1943년 초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팔레스타인에서 오랫동안 머문 적이 한두번 있었지만, 1946년까지 그 학교에 재적했다.

나는 영국인들의 세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영어라는 언어를 창조한 데에는 감탄했다. 나는 어린 아랍 소년에 불과했지만, 영어에 뭔가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게지라 초등학교에서 영국인들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 창설한 시스템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학교는 그 체제에 맹종하는 분위기였고, 교사와 학생들의 비굴한 노예근성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학교는 배움의 터전으로 흥미로운 곳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와 광범위하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처음으로 부여해준 곳이었다. 나는 교사와 학생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순수한 영국적 특징 속에서 그것을 경험했다.

그 학교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들-수업, 선생, 학생, 분위기-가운데 나에게 용기나 도움을 준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시절의 즐거웠던 기억들은 오히려 학교가 파한 뒤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네 번째 이야기>

내 인생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힘은 아버지의 강력한 정신적‧육체적 힘이었다. 아버지는 넓은 어깨와 두툼한 가슴을 갖고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강인해 보였고, 적어도 나에게는 압도적인 자신감을 발산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버지의 신체적 특징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꼿꼿한 자세였다.

나는 매사에 겁을 내고 두려워했다. 남들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그 눈길을 되받아 상대를 똑바로 마주보는 것도 나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열 살쯤 됐을 때, 아버지가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상대의 눈을 보지 말고 코를 봐라”-이 비결을 수십 년 동안 요긴하게 써먹었다. 1950년대 말에 대학원생 신분으로 교단에 서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학생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도록 일부러 안경을 벗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거나 나 자신에 관한 글을 읽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나는 인간의 육신을 벗어 던지고 책이 되면 좋겠다는 공상에 자주 잠기곤 했다. 책이야말로 달갑지 않은 변화, 형태의 왜곡, 겉모습에 대한 비판을 면할 수 있는 행복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인쇄물은 스타일과 내용을 통한 표현, 절대적인 단단함, 완전무결한 겉모양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만약 책이라면, 손에서 손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건네지면서, 자동차 밖으로 내던져지고 서랍 안쪽에 처박힌 채 잊혀져도 나는 여전히 내 진정한 자아로(책으로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지만, 아버지는 우리 생활을 떠받쳐주는 거대한 힘이었기 때문에(우리 가족은 단 하루도 물질적인 걱정을 해본 적이 없고, 찬장에는 늘 음식이 가득했고, 우리 남매들은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옷도 잘 차려 입었고, 집은 완벽하게 관리되었고, 일손이 필요한 곳에는 고용인들이 충분히 배치되었고, 여행할 때는 항상 일등실을 이용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억압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특유의 치밀한 방식으로 나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다섯 번째 이야기>

1946년 가을, 나는 미국인이라는 의식도 없으면서 미국인 사업가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카이로의 아메리칸 스쿨에 들어갔다.

미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 속에는 나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오로지 당혹감과 불쾌감만 주는 아랍인의 정체성이 또 하나 숨어 있었다. 이 골치 아픈 정체성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전반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겉으로 나타난 사소한 세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메리칸 스쿨에 들어간 첫 해에 미국식 환경과 이집트 환경의 차이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그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두 가지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계산을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해내는 능력이었고, 또 하나는 사업에 필요한 수천 가지의 물품을 구입한 날짜와 가격을 모두 암기하는 완벽한 기억력이었다.

나는 시간을 본질적으로 원시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시간은 영원히 나에게 적대적인 것 같았다. 나는 열한 살인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손목시계(멋대가리 없는 티소 시계)를 받았는데, 처음 며칠은 시계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이 이상해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마냥 몇 시간이고 시계를 들여다보곤 했다. 나는 혹시 시계가 멈춘 게 아닐까하는 걱정을 잠시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나는 시계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은 제때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나의 초조감을 거의 모든 면에서 더욱 부채질했다.

<여섯 번째 이야기>

나는 1947년의 대부분을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보낸 뒤, 12월에 그곳을 영원히 떠났다. 때문에 카이로의 아메리칸 스쿨을 몇 달이나 결석하고 예루살렘의 성 조지 스쿨에 입학했다.

내가 태어나서 살고 편안함을 느꼈던 도시의 바로 그 구역을 폴란드와 독일과 미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차지했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들은 서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것을 자기네 주권의 둘도 없는 상징으로 삼았고, 팔레스타인인의 생활을 위한 공간을 전혀 남겨놓지 않았다. 서예루살렘은 이제 완전히 유대인 동네가 되었고, 전에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1948년 중반에는 모두 영원히 추방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간 열여덟 살 무렵의 나는 단정한 미국인 대학생과, 팔레스타인 빈민층에 관심을 가진 상류 부르주아 계층의 식민지 아랍인의 외모가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존재였다.

<일곱 번째 이야기>

부모님이 생각하는 내 인생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아버지가 선사한 정해진 틀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격언-“공명정대하게 처신해라”, “돈은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마라”, “어머니를 보살펴라”, “누이들을 보호해라”, “최선을 다해라”-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에드워드’는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될 것으로 여겨졌지만, 어머니는 내가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 좀더 멀리 나아가도록 은근히 유도했다.

내가 타고난 능력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기억력이었다. 덕분에 나는 책에 있는 모든 구절을 시각적으로 되살릴 수 있었고, 책에서 그 구절을 다시 보면 장면과 등장인물을 조작하여 책장을 넘어선 상상 속의 생활을 거기에 부여할 수 있었다. 기억력이 최고로 강화된 순간에는 무수한 세부 묘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거기에서 일정한 패턴이나 구절이나 낱말 묶음을 분간해낼 수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끝없이 퍼져 나가는 광경을 상상하곤 했다.

<여덟 번째 이야기>

열네 번째 생일을 앞둔 1949년 가을에 나는 빅토리아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나의 카이로 생활도 막을 내리게 되지만, 물론 당시에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빅토리아 칼리지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숨통이 끊어져가는 영국 제국주의의 방식을 돈까지 내가면서 배우고 있는 식민지 엘리트층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영국의 생활과 문학을, 영국의 왕실과 의회를, 인도와 아프리카를, 이집트에서는(아니, 다른 곳에서도) 결코 써먹을 수 없는 영국의 관습과 관용구를 배웠다. 아랍인답게 행동하고 아랍어를 말하는 것은 교칙을 위반하는 행동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지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사회적 집단과 관련하여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매혹시키고 흥미를 끄는 것은, 어떤 집단도 배타적이거나 물샐틈없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로 같은 혼란을 낳았다. 성격과 말투, 배경, 종교, 국적이 서로 다른 아이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영국인도 아니고 진정한 신사도 아니고 사실상 교육시킬 수도 없는 모자라는 인간-또는 근본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인적 자원-으로 이미 평가가 내려진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이것은 묘하게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마침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또는 더 열심히 공부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력은 무의미했다. 그 결과는 기묘하게 무게 없는 생활이었다. 표면 밑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인 원칙이나 도덕적 신조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신념을 떠받쳐준 것은 단순한 교육열이었다. “그것이 교육적인 거라면 얼마든지 해라”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노력해왔고, 이 책은 바로 노력의 기록이다.

<아홉 번째 이야기>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뒤, 나는 벌써 1년 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내가 1951년에 카이로를 떠난 이후, 어머니와 나는 정기적으로 편지를 쓰는 습관을 유지했다. 문득 현실로 돌아온 나는 어리둥절했고, 낭패감마저 느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막연한 충동이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백혈병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내 인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온통 빠져들어 그 충동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993년에 나는 내 인생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를 곰곰 생각해보았다. 과거로의 회귀, 지난날의 삶이나 세상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이들한테 되돌아가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이것이 점점 가혹해지는 내 질병에 대한 반응이었다. 1994년 3월에 치료를 시작했을 때쯤에는, 내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온 것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옛날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1994년 5월에 나는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기억력은 까마득한, 그리고 기본적으로 회복 불능한 과거를 집중적으로 성찰하고 고고학적으로 발굴함으로써, 이 회고록을 쓰는 데 무엇보다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이 기본적으로 불면증에 대한 책, 밤에 혼자 깨어 있을 때의 정적에 대한 책, 내 경우에는 과거를 의식적으로 회상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같은 세대의 미국인들에게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다른 언어-주로 아랍어-라는 느낌이 항상 내 마음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영어와 더불어 아랍어 속에서 살았고, 아랍어로 생각하고 느꼈지만, 그들은 아랍어를 전혀 몰랐다. 그들은 비교적 감정이 메말라 보였고, 자신의 태도와 반응을 말로 분명히 표현하는데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람들을 동질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미국 생활의 힘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어지는 낮과 밤의 미국적 속성에 물들면서 날마다 내 과거는 조금씩 마모되고, 작별인사도 없이 슬며시 떠나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느리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 번째 이야기>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나에 대한 지배력을 의미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가지면 나에 대한 당신의 지배력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섹스를 혐오하면서도 사람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습적이기도 했다.

역사가 뿔뿔이 해체한 그 조각들이 부분적으로나마 결합되어 있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사업이 성공한 덕분이었다. 우리는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 덕택에 거의 환상적이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러나 공격당하기 쉬운 변경에서의 생활이었다. 언제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 모르는 우리의 독특한 지위를 생각하면, 부모님이 고치 같은 보호막을 치려 든 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열한 번째 이야기>

씨족과 종파와 조국에 대한 감정적 충성과 지성적 신념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간격은 지금까지도 메워지지 않았다. 굳이 간격을 메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다. 나는 두 가지를 서로 대립하는 위치에 계속 떼어놓았고, 그 결과 아무리 고립된 처지에 내몰린다 해도 민족적‧부족적 의식보다는 지성적 의식이 우선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나는 여전히 어머니를 내 기준점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시작도 끝도 어머니와 함께 한다는 느낌, 어머니는 감지할 수도 없을 만큼 부드럽게 나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은 내 삶을 오랫동안 떠받쳐 주었다.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 이 흐름은 인생의 주제곡처럼 깨어 있는 시간 동안 계속 흐르고, 전성기에도 화해나 조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흐름은 점점 ‘멀어지고’ 제자리에서 벗어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항상 움직이고 있다. 시간 속에서, 장소 안에서, 온갖 기묘한 형태로.

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 거기서 엉뚱하게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된 것은 아마 그만큼 내 인생에 불협화음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옮긴이의 말>

회고록이라고 했지만,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철이 들 무렵부터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인격 형성기’에 일어난 사건과 체험들이고, 특히 1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살았던 중동 지역의 추억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한 팔레스타인 소년의 성장기인 동시에 중동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한 시대의 증언록일 수밖에 없다.

이 시절의 추억 속에는 인상적인 인물들도 여럿 등장한다. 좋든 싫든 쉽게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 ‘회전목마처럼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져’ 간다. 이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개개의 에피소드들은, 이 책의 저자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와 동일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의 사이드를 보여준다. 그것은 학문적 위업과 영광에 둘러싸인 논쟁적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라, 섬세한 감수성과 명석한 지성을 가진 뛰어난 문학자의 모습이다.

사이드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팔레스타인인이 말하는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런 기회가 거의 없었다.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담론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목소리(그리고 거기에 합세한 미국 언론)에 실려서 들려왔을 뿐이다.

팔레스타인인에게도 역사가 있고, (파괴로 말미암아 사라졌지만) 사회가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인 이야기로 제시하고, 거기에 살았던 남녀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꿈꾸었는지를 팔레스타인인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 자아의 정체성, 나아가 민족이나 국가의 주체성 획득의 과제와도 연결된다. 세계화(좀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 패권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돌아볼 반성의 거울이 여기에 놓여 있다.


***


이 자서전은 그가 태어난 1935년부터 박사과정을 거의 마친 1962년까지의 비공식적이고 내밀한 개인적 기록이지만, 그 개인의 삶에 세계가 어떻게 개입하고 간섭하고 있는지를 가족을 통해, 친척, 친구를 통해 생생하게 재생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비범한 기억의 소유자인지, 세계와 어떻게 불화했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지를 깊이 있게 얘기해 준다. 덕분에 중동의 역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상세한 그의 기억력이다. 소설 속의 묘사라고 보기에도 상당히 치밀하고, 일기로 기록했다고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을 기억해낸다. 그토록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싶을 정도다.

구석구석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화들과 흑백사진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주로 ‘중동’이라는 역사적인 문제와 관련된 환경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자신의 전공인 문학을 비롯해서 음악, 문화 등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관심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음악에 대한 애정은 음악가가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훌륭한 아마추어와 참으로 재능 있는 연주자 사이를 갈라놓는 희미한 선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선은 타고난 능력이 그어놓은 것이라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67세로 사망하기까지 반평생을 뉴욕에서 살았던 사이드는 자신의 집을 문학, 예술인들에게 개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의 예술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으로 존경받아왔다. 아랍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말과 글만이 아닌 행동으로 참여해 온 학자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재외국 팔레스타인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00년에는 이스라엘의 무력사용에 항의하는 뜻으로 레바논 국경의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당시 학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그의 행동은 콜롬비아대학의 지지발언으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당시 대학 측은 그를 징계하기는커녕, "그 돌은 특정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었기에 아무런 위법행위가 아니며, 당연히 학문적 발언의 하나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멋진 사람들이다.

사이드와 함께 문학수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샐먼 루시디(Salman Rushdie)는 그를 이렇게 표현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그는 책을 읽듯이 꼼꼼히 세계를 읽는 사람이다."

자신을 돌아본 이 회고록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한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하다. 상냥한 사람은 이 세계의 한 곳에만 애정을 고정시켰고, 강한 사람은 모든 장소들에 애정을 확장했고, 완전한 인간은 자신의 고향을 소멸시켰다.-Hugo of St.Victor ,Didascalicon-(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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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2005.06.25 20:12:19 *.229.121.147
와아, 짝짝짝... 이 뜨디더운데...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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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5.06.27 11:46:17 *.248.138.58
우리..곧 만나죠?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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