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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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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일 06시 02분 등록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 (프레드 앨퍼드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00)
Korean Valu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nk No Evil, b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C. FRED ALFORD.. 칼리지파크 메릴랜드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며 아홉 권의 책을 썼는데, 가장 최근의 저서는 코넬 대학교에서 출간된「악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이다.

남경태.. 1960년 서울 출생. 1984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자유 기고가이자 출판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위기의 지구」,「철학으로 본 바둑 에세이」,「현대 철학은 진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한눈에 보는 세계사 오천년」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1.5평의 문명사」,「고고학 풍경29가지」,「명화이야기 시리즈-르네상스」,「인터넷, 디지털 문명이 열린다」등이 있다.

<옮긴이 서문>

한국을 테마로 한 책이 한국인인 우리가 읽기에 어렵다? 여기에는 최소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책은 한국인을 독자로 상정하고 쓴 책이 아니다. 원래 연구보고서로서 이를테면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학’ 서적에 속한다. 따라서 개념이나 서술 방식이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낯설 수밖에 없다. 둘째, 이 책의 주제인 ‘악’을 생각한다면 심리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떠오르겠지만 그뿐만 아니라 철학, 인류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역사 등등 다양한 개념과 사고들이 얽혀 있다는 점이 이 책을 읽기에 쉽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셋째는,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은이의 결론은 한국인에게 악은 곧 세계화라는 것이다. 물론 개념 자체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인은 악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로 세계화를 대한다는 것이다. 실체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은 없다. 실제로는 있지만 말로는 없다. 이런 악의 관점은 세계화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세계화는 자기 것을 하나도 내주지 않으면서 외부의 것을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세계화는 실패할 것이며, 오히려 내부의 악을 더욱 조장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악의 경우도 그렇듯이 올바른 세계화를 위해서는 세계화의 본질에 정면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데 있다. 단말마적으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만을 외치는 것으로는 곤란하다. 말은 옛 것을 보존해야 한다면서도 풍납토성 같은 문화 유적의 관리에는 소홀히 하는 우리의 이중적 잣대를 버리는 게 우선 시급하다. 그래야만 실제로는 이원론, 아니 너무도 많은 다원론에 가까우면서도 겉으로는 일원론을 가장하는 위선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다.

1. "관계를 말해주면…"

악은 사람과 생각 사이에 이원론과 대립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난다. 한국인들은 악 대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관계는 워낙 긴밀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악과 같은 개념들이 존립할 수 있는 이중성이 생겨날 수 없다. 악이 생겨나려면 일종의 분리와 구분이 필요한데, 한국인들은 그것을 너무 두렵게 여기므로 악이 존재하도록 놔둘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악을 믿지 않게 되고, 설령 믿는다 해도 우발적으로 믿을 따름이다.

나는 악의 부재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 그림은 기본적으로 서구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동양이 서양과 다른 점을 보여준다. 나는 그게 서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내가 인식하고자 하는 또 다른 점은 문화만이 갈등을 겪는 게 아니라 그 문화에서 숨쉬고 살아가며 그 문화를 만드는 자아 역시 갈등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세계화에 관해서도 커다란 갈등과 동요가 있다고 본다.

악의 부재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아를 바라보는지, 어떻게 더 큰 세계와 통합되는지, 그러한 통합이 얼마나 흥미롭고 놀라운 것인지를 말해줄 수 있다. 개념과 개념을 잇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따르면 될 뿐, 그 실마리가 처음인지 끝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악, 자아, 세계화라는 개념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연관은 내적인 일관성과 같은 게 아니다.

미셸 푸코는 “계몽이란 정체성의 경계선을 뛰어넘음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기획”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극복해야만 우리가 누군지를 알 수 있다. 계몽은 지식체도 아니고 낡은 것에 대한 비판도 아니다. 이러저러한 경계에 대한 비판은 계몽이 아니라 거의 본능의 일부다. 계몽은 낡은 정체성으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푸코는 계몽적 태도가 사회의 가장자리나 틈바구니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만약 악이 스스로에게 타자가 된다는 위협을 뜻한다면, 악의 경험은 새로운 두려움과 공포만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자아를 재건하고 개혁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악을 부정하거나 다른 데로 투사하기보다 직접 경험하는 것이 계몽에 더 큰 도움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악을 긍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국인들은, 서구에서는 악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세계화라 부르는 타자성의 공포를 직면해야 한다.

2. 자아는 연속이 아니라 대립이다

“한국인은 집단적 자아를 갖고 있다. 그들은 ‘나’를 행위의 중심으로 삼지 않고 ‘우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집단 속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고민한다.”
권력이 어떻게 지식으로 위장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 푸코의 관점을 취한다면 앞의 말은 동양인을 무시할 뿐 아니라 개인화하지 않으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볼 때 한국인은 서양인과 다르다. 그들은 자신을 개인으로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개인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

나는 한국인의 자아가 지극히 집단적이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자신감에 차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적 자아’란 것은 없으며, 오직 한국인의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내가 이야기할 것은 구체화된 자아가 아니라 한국 문화의 이념을 반영하는 이념적인 자아다. 비록 한국인들은 이 이념적인 ‘집단적 자아’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겠지만, 집단적 자아와 끊임없는 긴장 관계에 있는 개별적 자아의 또 다른 측면을 더 잘 볼 수 있는 것은 서구인이다.

한국인들은 분리된 개인이 아니므로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개인주의적 경쟁은 실상 개인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가족들 간의 경쟁이다. 개인은 늘 자기 자신 그 이상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의 뒤에는 거의 예외없이 가족들이 따라온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경제적인 토대가 있다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까지도 가족 중 한 명이 여유있는 중산층에 편입되면 나머지 가족들도 함께 편입될 수 있었다.

오늘날 서구의 훌륭한 인간은 내면적 지향성과 절제를 갖춘 사람을 뜻한다. 오늘날 한국의 훌륭한 인간은 좋은 대인관계를 지닌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도 의미한다. 즉 그의 자아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과도기적 공간에 위치해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미다. 이것은 집단적 자아와는 다르다. 그러한 인간의 개념은 아직까지도 비교문학적 사회심리학을 지배하고 있는 일반적인 연속선 방식보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관계에 대해 더 풍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누구나 심리적으로 집단주의적이다. 우리의 심리는 무수한 짝들의 미로를 이루고 있다. 다만 차이점은, 어떤 문화에서는 다른 문화에서보다 개인이 ‘자아-대상’과 더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추상적인 관계가 개인적 자율성에 더 잘 부합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일 수도 있다.

***

2장까지 읽는 동안은 자못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하지만 3장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해가 힘들었고, 읽는 자체도 부담스러웠다. 지금부터는 나를 힘들게 했던 부분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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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인들은 왜 늘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로 행동할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치심은 집단주의 문화의 특징이고, 죄의식은 개인주의 문화의 특징이다. 수치심-죄의식 구분의 나쁜 측면에서 보면, 수치심 문화권의 사람들은 부정행위를 저질렀을 때 낭패하거나 ‘체면을 잃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면 그런 기분은 없다. 그런 점에서 수치심 문화는 미성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치심 문화의 사람들은 그 문화의 가치들을 죄의식으로 내면화할 수 없으며, 오직 부정이 폭로된다든가 하는 공개적 수모를 당했을 때에만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그 수모는 곧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부터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죄의식 문화는 개인적 자율성에서 진일보한 점이 있다. 이 문화의 사람들은 사회의 가치들을 제대로 내면화하고 있으므로 설사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았다 해도 뉘우침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자비로운 인간애의 고귀한 이념을 따르지 못한 데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태도와, 공격성을 내면화한 결과로 마치 정복당한 도시의 요새처럼 죄의식이 자아를 지배하는 태도,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심오하고 성숙할까?
집단에 어울리기 위해 뭘 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한국인들과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알고 있는 미국인들 중 어느 측이 더 집단에 대해 의존적인 걸까?

미국인들에게는 공공의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나 개념이 없다. 물론 그들도 그런 행위를 자주 하지만, 상호적 헌신이나 공유를 뜻하는 공식 언어가 없기 때문에 한국인의 경우와는 다른 의미다.

명예는 격렬한 집착이다. 나는 사회로부터 명예를 인정받지 못한 것 때문에 몹시 초조해하는 한국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얻을 수 없고 오로지 사회적으로 주어질 수만 있는 것을 찾으려다가 끊임없이 좌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한국인들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명예가 아니라 정이다. 그 결과 한층 격렬한 갈등이 일어난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론에서 갈등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단순해질 테고 우리 자신도 더 따분해질 것이다. 갈등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한국인’이 연속선의 집단주의적 극단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집단적 가치관이란 유교 이데올로기일 뿐이고, 권력이 지식으로 위장하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다만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아는 모든 인간적 가능성들이 담겨 있는 저수지와 같다. 문화가 심리를 형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양 극단이 아니라 극단 사이에 위치한 여러 가지 갈등의 유형들을 이해해야 한다. 갈등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극단은 해당 문화에서 낮게 평가되고 있는 쪽의 극단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문화가 조직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그것은 개인주의와 자기과시이고 미국의 경우에는 집단주의와 소속감이다.

내 의도는 전형적인 장애, 즉 양 극단을 밝히려는 데 있다. 한국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연결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 얽혀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은 너무 많은 반면 진정한 연관은 너무 적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한과 화병의 근원이다.

4. 악은 무관함이다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악의 개념이 부재한 이유는 그들이 최근에 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악을 수용할 문화적 요소가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토착 문화 속에 외국의 개념을 수용할 만한 요소가 없을 경우, 다시 말해 그 개념을 맞을 ‘주인’이 없을 경우 외국의 가르침은 제대로 흡수되고 토착화되기 어렵다. 한국에는 서구적 악 개념을 맞을 문화적 주인이 거의 없는 것이다.

서구에는 악한 타자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싸울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말했을 때 많은 미국인들은 위협은커녕 안도감을 느꼈다. 서구의 경우 악한 타자는 환영을 받으며, 우리의 두려움에 얼굴과 장소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생각이 환영을 받지 못한다. 북한을 악이라 부르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준다. 한국인들은 북한을 외부의 악으로 소외시킬 만한 모종의 거리감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말 그대로 여전히 가족이다.

한국인들이 북한을 악이라 여기지 않는 것은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두려움에 젖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악하지 않다고 여기는 편이 북한에 대해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기가 더 쉬울 것이며, 실제로 북한과 남한 간의 폭력 사태는 소외된 악을 세계 속에 풀어내는 게 아니라 심한 가족적 갈등처럼 전개되어 왔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악이라고 할 것인가?” 거의 대부분이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북한은 우리에게 핵무기를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다 같이 한국인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제법 세련된 대답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건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예요. 당신네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하죠.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것도 될 테니까요.” 그러한 믿음은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북한과의 평화로운 관계 모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북 갈등에 대해 한국인들이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고 미국을 비난하게 됨으로써 더 위험한 관계로 빠질 수도 있다. 또한 그 반대로 북한과 남한이 궁극적으로 서로간의 차이점을 해소하기에 더 쉬워질 수도 있다. 두 가지 측면이 모두 가능할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해요.” 이렇게 말하는 정보제공자들이 많았다. 아주 간단한 감정이었는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들은 마치 부자들이 친척이라도 되는 양 그런 이야기를 했다. 계급의식은 거의 없었고 어려운 상황임에도 민중주의적 분노가 별로 표출되지 않았다.

5. 한국인들은 악을 믿어야 할까?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흔한 형태는 다른 문화의 결함을 과장하는 게 아니라 그와 거울 이미지를 이루는 자기 문화의 결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구의 성향은 악을 보는 것과 아울러 인간의 분리를 부정하고 무엇보다도 상황에 의존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 서구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강요된 힘에 휘둘리는 희생자를 가장 나쁜 인간으로 간주한다. 아마 서구적 악 개념은 보잘것없는 인간의 취약성에 거대한 우주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만약 악이 없다면 그것을 발명하기라도 해야 한다.

현재 한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을 갖춘 경계선이 남북을 가르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이원론’의 사례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국인들에게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경계선이 사실은 서구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대답했다. 소련과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 결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부의 힘이 없었다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그런 것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한국 사상을 포함하여 동양 사상은 이원론을 부정하기보다 조장하며,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대표하는 신으로 표현되는 더 큰 전체 속에 이원론을 재배치한다는 사실이다. 도교 역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인간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상은 전체의 일부분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원론을 재배치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양면성을 제한적으로나마 허용하는 것을 뜻하기보다는 더 높은 형태의 양면성을 뜻한다.

한국인들은 악에 관해 침묵하며, 그들의 침묵은 뭔가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부정한다. 서구인들은 악에 관해 침묵하지 않는다. 이 말이 곧 서구가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서구가 부정하는 것은 다른 것, 즉 ‘악’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어떤 것이다. 무엇보다도 악은 세계가 하나라는 무서운 생각, 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는 신이 실은 피조물의 행복에 관해 전혀 무관심하며 오히려 겁만 주는 악의적인 존재라는 공포스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해준다. 한마디로 악은 서구를 괴롭혀왔던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6. 세계화는 악이다

세계화는 한편으로 한국인들에게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안겨주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적 유대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안겨준다. 사탄과 마찬가지로 세계화는 파괴의 으름장을 놓으면서 한국인들에게 영혼을 싼 값으로 팔아넘기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특수성과 다양성은 동질화의 관점에서 타자성과 차이를 바라볼 때 생겨난다. 세계화 자체는 과도기적 대상이면서도 단조롭게 만드는 힘이다. 즉 세계화는 새롭고 놀라운 것을 실제보다 더 낯익은 것처럼 만든다. 멀리서 바라보면 무엇이든 차이가 없이 고르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통합력을 과신한다. 그 과신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하는 변화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이기도 하다. ‘한국의 신체에 서양의 도구를’이라는 말은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은유다. 그들은 마치 한국의 신체가 그 근본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외국의 생각을 소화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환상이며, 사대주의에 대한 자기도취적 방어다. 강대국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강대국을 섬기고 강대국에게서 취할 것을 취하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만약 한국이 진작에 민주화를 이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몇 년 동안 미국이 다르게 행동했더라면(즉 더 긴밀하게 개입했더라면), 한국에는 독재자들이 출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민주주의가 더 일찍 그리고 더 철저히 자리잡았더라면 한국인들은 세계화의 선택에 관해 더 상세히 토론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확실치는 않다. 많은 한국인에게 세계화는 결코 선택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택사항으로 여긴 것은 세계화냐 경제적 퇴보냐, 승리냐 패배냐, 전부냐 무냐 하는 문제였다.

가족, 학교, 지역적 연고의 ‘우리’와 ‘우리 한국사람’의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다. 이 틈에서 한국인들은 자유를 느끼고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다. 이후에 자기 행동에 대해 설명할 수만 있으면 된다. 이런 문화는 무책임성만 조장할 뿐이다. 그 속에서 개인은 마치 뇌물을 받는 자아가 공적 신분으로 활동하는 자아와 같지 않은 것처럼 여긴다. 그러한 문화는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틈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분리를 더욱 조장한다. 정은 단지 관계인 것만이 아니라 분리이기도 하다. 그 분리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양측이 사랑을 교환하는지 아니면 돈을 교환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한국인들은 대개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정의 체제는 지나치게 긴밀하고 지나치게 반사회적이다. 갈수록 넓어지는 전통과 법 사이의 틈이 빚어낸 혼란은 다른 문화들로부터 만이 아니라 자체 문화로부터도 소외되고 단절되어 있다. 이 틈에서 벌어지는 행동은 오로지 무책임한 것일 뿐, 창조적인 무책임성 다시 말해 비전통적인 생각, 이념, 사람에 대한 책임성은 구현하지 않는다.

***

6장부터는 책을 읽기가 조금 덜 힘들었다. 익숙한 내용들을 냉정하면서도 예리하게 지적해 주었다. 이제 마지막 장이다.

***

7. 세계화는 계몽인가?

우리는 타자로부터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해야 하며,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부정할 것은 부정해야 한다.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가 활용해야 하며,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물론 나는 비물질적인 것, 특히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남이 내 생각을 받아들일 때 나는 빈곤해지지 않는다. 남은 내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남을 소개해줌으로써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다.

세계화는 경제 영역에서 그랬듯이 세계를 승자와 패자로 나눌 것이다. 승자는 문화의 충돌과 혼동을 활용해서 계몽을 육성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패자는 단지 혼동만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세계화는 서구의 문화가 아니다. 세계화는 경제적 합리성이 이끄는 전달 수단이자 매체일 뿐이며, 당분간 절충적으로 묶어왔던 것을 곧 동질화할 것이다. 그게 진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게 얼마나 진리이며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문화 내의 전위적 인자들은 자신들을 해방하기 위해 밖으로 눈을 돌릴 것이며, 때로는 뒤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억압된 요소들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달라붙은 문화가 적절한 수용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적절’하다는 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적 적합성의 문제, 즉 관련된 외국의 경험들을 이해할 만한 사전 개념들이 존재하느냐의 문제다. 한국에는 악을 받아들일 적절한 문화적 수용체가 없기 때문에, 이를테면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도들 내부에서도 튼튼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다.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형식과 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겁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을 뜻하는 한국어가 있다면 그것은 세계화일 것이다.

어느 것이 중요한지도 알지 못하는데 좋은 부분을 어떻게 고를 수 있겠는가? 세계화가 위협적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세계화는 삶이 아니라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선택의 원칙을 잃었기에 상실감을 느낀다. 외국인이 간섭해도 좋다면, 나는 정을 권고하고 싶다. ‘우리 둘만’의 정이 아니라, 상호 애정과 중첩적인 자아, 우정만이 아니라 ‘옛 한국’의 권위마저도 아우르는 토대로서의 정 말이다.

침묵은 금이다. 나는 침묵 속에서 한국 친구들과 깊은 친밀과 친교를 경험했다. 그러나 침묵은 위선일 수도 있다. 서로의 침묵이 부정과 환상의 침묵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을 때 자신들의 가치관을 놓고 서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 역시 계몽이겠지만, 빛의 계몽이 아니라 대화의 계몽이다. 회한 역시도 계몽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이 책의 의도를 모르겠다. 읽는 내내 궁금했지만, 내용을 이해하기에도 벅찼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침묵은 금이다. 그러나 침묵은 위선일 수도 있다.’

이 느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 침묵하고 싶지만, 위선이 될 수도 있으니 중얼거려 보겠다.
‘지식’자본보다 ‘관계’자본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는 한국에서, ‘생산’에 투자되어야 할 돈이 ‘부동산’ 투기로 몰리는 한국에서, 스무 몇 살 건강한 청년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도 포기한 채 발가벗겨져 단체로 기합을 받는 군대라는 조직을 가진 한국에서, 그 군대를 나온 남편을, 아버지를 가진 불구의 가정이 존재하는 한국에서, 그 어떤 가능성을 말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고, 대한민국의 주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냉소주의를 배설할 곳은 그 어디에 있는가?

괜한 짓을 했나보다. 몸이 힘들단다. 그냥 침묵하자.

이 책의 맨 뒤에는 조사방법으로 사용했던 질문들이 있다.
끝으로, 나도 그 물음에 답해 보고 싶다. 조용히.

<세계화에 관한 질문>

1. 세계화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세계화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3. 세계화가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꿨으면 좋겠습니까?
4. 한국의 미래와 관련해서 무엇을 가장 원합니까? 또 무엇을 가장 걱정합니까?
5. 당신은 당신 부모님과 어떻게 다릅니까?

<악에 관한 질문>

6. 죄 또는 악과 관련된 개인적 경험에 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7. 죄와 악이라는 용어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8. 죄를 저지르면 언제나 벌을 받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9. 가장 나쁜 일(끔찍한 일)은 무엇입니까?
10. 천벌이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을 믿습니까? 대다수 한국인들이 그렇습니까?
11. 서구적 악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12. 사람들은 왜 나쁜 짓을 합니까?
13. 종교가 있습니까? 전엔 있었나요? 부모님은요? 당신이 영향을 받는 종교는 있습니까?

<자아에 관한 질문>

14. ‘당신은 누굽니까?’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15. 당신은 어디에 속합니까?
16. ‘우리 한국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7.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무엇입니까?
18. 한국인들에게 ‘집단적 자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집단적 자아’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19. 한국인들은 왜 ‘우리’라는 말을 즐겨 씁니까?

<기타>

20.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면 악한 것입니까?
21.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한 군인들은 악합니까?
22. 화병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원인이 뭔가요? 화병에 걸린 사람을 알고 있나요? 그것은 한국병입니까?

23. 경제 위기 이후 당신은 어땠습니까?
24. 한국에서 당신의 미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25. 경제 위기의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IP *.39.22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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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1 16:49:31 *.60.5.131
솔직히 이책 우연히 대강 읽어 봤는데 정리 잘 하셨네요. 되게 복잡한 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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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5.07.01 20:40:49 *.39.220.99
이해 못한 부분들이 더 많습니다..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이론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한국을 이토록 관심을 가지고 파헤친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자는 분명히 미국인이고, 정치학 박사라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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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ooda
2008.11.01 16:47:03 *.42.7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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