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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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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일 09시 17분 등록
도서정리 - 금빛 기쁨의 기억

3. 인용

1부 -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5p] 우리는 세계인의 파이와 한국인의 파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는 선택을 강요당한다. 하지만 다수의 한국인은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기 보다는, 두 개의 자화상을 동시에 간직한 채 때에 따라 하나를 꺼내어 사용한다.

[17p]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20~21p] 백남준은 예술의 성격을 ‘남을 흉내내는 것’과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것’으로 나누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25p]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회통이다. ...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이 창조적이기를 원하는가에 달려있다.

[26p] 만일 토속성이라는 오솔길이 세계성이라는 큰길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천 년이 하루와 같은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 숨쉬는 창조의 역사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토속적인 자기를 내던진 채 유행사조를 따르는 세계인의 망상은 물론이요, 유행 사조 또는 동시대적인 세계성을 향해 빗장을 걸어 잠근 채 토속적인 자기만을 다짐하는 한국인의 자폐 역시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없다.

[28p]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29p] ‘기억속의 심상’에 의지하여 시간의 흐름에 떠밀리는 세월의 무상함에 대항하는 몸부림이야말로, 인간에게 정체성의 후광을 부여하며 주체의 월계관을 씌어주는 인문적인 가치의 본령이다.

[32p] 전통이란 ‘기억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38p] 기억은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근대화란 한마디로 서구화에 일본화를 겹쳐놓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 개화, 과학, 합리, 이성과 동일시되기도 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는 데 필요한 성찰의 여백은 실종된 반면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급급한 조급함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41p] 시간과의 경쟁.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십 세기의 시대적인 과제들을 추구함에 있어 몹시도 조급하여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했다는 것이다.

[42p]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의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43p] 이같은 조급함의 한국적인 양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의 혁명이나 일본의 팽창처럼 현실에서 자신을 관철시키지 못함으로써 더 한층 강렬하게 끓어오른, 관념적인 조급함이다.

[47p]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따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48p] 기억의 상실이란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

[49p]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50p] 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취향을 겹쳐놓은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맛이 살아 숨쉬는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식탁에 발사믹 식초가 상큼한 맛을 더하는 샌드위치가 나란히 놓인 풍경은 얼마나 풍요로운 동시에 얼마나 센서티브한가. 한국적인 것의 항목에 한국화한 샌드위치라는 새로운 메뉴가 덧붙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의 취향과 타인의 취향이라는 모순을 창조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결실을 수확하는 만고불변의 공식이 아니겠는가.

2부 -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60p] 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모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같은 근대 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

[61p] 한국인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아니고, 일본인에 의해서만 제기되며 이해되며 정의되며 기능하는 존재라는 것. 한국 예술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의 장으로 초대된다는 것. 일본인은 행위자이고 한국 예술은 반응자라는 것. 이같은 오리엔탈리즘적 담론이 한국 예술에 대한 야나기의 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본질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76p] 일본의 국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질서에 동참하는 ‘세계인’이기를 거부하고 ‘일본인’이기만을 고집한, 이를테면 동북아시아 세계의 왕따(?)를 자처한 일본의 독자적인 사상이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사상의 주류인 중국사상에 대한 비주류적 자의식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요컨대 그것의 독창성이란 카라고코로(漢意 ) 즉 중국의 사상을 거울에 비친 모습과도 같이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80p] ‘일본적인 것’은 야나기가 한국 예술에서 발견한 ‘무작위의 미’나 ‘무기교의 미’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야나기가 사랑한 것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창조된 한국 도자기가 아니라, 일본인의 미의식에 따라 향유된 또 하나의 한국 도자기였다.

[94p]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경우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한옥의 지붕곡선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03p] ‘작은 것을 보살피고 큰 것을 섬기는’ 字小事大의 준말인 사대는, 동북아 세계질서의 중심인 중국과 중국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자율적 메커니즘이었다. 이같은 사대의 질서속에 비애의 정서 따위가 끼여들 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같은 동북아의 세계질서 자체도 조선시대라는 특정 시기에 국한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사대의 질서를 사대주의로 바꿔치기 하여 한국사의 전 시기에 걸친 민족성 따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분명 역사왜곡이자 식민사관이다.

3부 - 한국인의 미의식

[128P] 아름다움의 취향을 달리 말하면 미의식이 된다.

[129P]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람다옴’의 본뜻이 사호私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133p] 만일 형을 인간의 감각에 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은 일반적인 인간, 즉 明을 잃은 인간이나 또는 자연법칙을 관찰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식되기 어려운 무형을 말하는 것이다.

[146p] 비로소 우리는 일그러진 달항아리와 휘어진 대들보를 통해 ‘형의 어눌함’의 후광에 해당하는 ‘상의 세련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

[155p] 한국인이 이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생활 속에서 물질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해온 감각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발효맛이다.

[157p]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163p] 우리는 먼저 발효맛의 취향과 화해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되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 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을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166p] 넓은 의미의 부패란, 미생물의 증식르로 식품성분이 분해되어 유해한 물질이 만들어짐으로써, 가식성可食性을 잃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동일한 미생물의 작용이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유익한 생산물로 변화한 현상을 발효(fermentetion)라 한다.

[167p] 발효를 ‘썩지 않으며, 처음 그대로 유지되지도 않은 은근한 곰삭음’이라 한다.

[179p] 한국 사람은 자기 몫의 한을 ‘삭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적어도 한을 ‘삭이면서’ 살아가는 것을 윤리적 덕목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은 한을 삭이면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그 한을 즐기면서 멋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190p]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각을 체계화한 것이 풍수사상이다. 그러나 ‘주술로부터의 탈피’로 정의된 근대화의 깃발이 걸린 지난 세기 동안,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각은 지혜의 자리에서 미신의 자리로 밀려났다.

[191p] 오늘의 우리는 어제 우리의 자리로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가는 중이다.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의 경쟁’에 쫓겨 성찰의 자세를 내던진 지난 세기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195p] 구태여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산수상보한 조화, 균형의 땅에 사람의 마음을 지각상 포근히 감싸줄 수 있는 유정한 곳, 그러나 속된 기가 흐르지 않는 성소로 정리되는 듯 하다. ... 끝으로 전체적 국세는 상극, 산발, 궁진, 질단, 무정, 충사, 역세, 패역의 분위기를 일으키지 않고 상보, 상생, 생기, 변화, 환포, 유정, 순세, 취강 등 조화와 균형의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 온화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결함이 없어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주위환경, 각이지지 않는 방위와 유장한 산의 흐름, 찌르듯 달려들지 않는 물길, 그러나 변화무쌍하여 결코 단조롭지 않은 산수의 배열, 이러한 조화를 이룬 자연에 적덕한 사람들의 영원한 거소, 이것이 풍수적 이상의 땅, 길지인 것이다.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명당이란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다른 유정함을 지닌 곳’이나 ‘속기가 없는 유토피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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