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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2일 13시 26분 등록
"세계화에 대한 한국인의 심리보고서"


앨퍼드 지음 | 남경태 옮김 | 그린비


1. 책이 내게로 왔다.(감상)

정치학자 앨퍼드가 쓴 이 책은 ‘Think No Evil’이라는 다소 난해한 제목이어서 한국어판에는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라는 다소 생뚱한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실상은 심리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세계화(Globalization)’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세계화의 개념과 수용의 문제를 ‘악’의 개념과 관련하여 풀어내고 있다.

‘악’에 관해 저자는 한국인에게는 ‘사디즘’, ‘악마성’ 같은 서구적 개념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한국에는 악의 개념이 없는 것일까? 한국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악은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이며, 혹은 관계의 배반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현실적 관계에 단단히 얽혀 있어서 오직 관계의 관점에서만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을 악이라 부르면 자신을 둘러싼 소중한 관계에 있는 모든 것이 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세계화는 ‘정’으로 표현되는 한국인들의 관계를 막스 베버의 합리성과 애덤 스미스의 경제성의 도구적 관계로 재편하기 때문에 ‘악’의 개념과 유사하다. 세계화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부정적인 사건, 즉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나에게도 세계화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이 있다. 그것은 오랜 도피 끝에 최근에 구속된 김우중의 방만한 ‘세계경영’과, OECD에 가입하고 소득 2만불을 외쳤으나 끝내 IMF 구제금융으로 막을 내린 김영삼 정부의 허울 좋은 세계화 명분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화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어중간하다. 저자에게 있어서 세계화는 칸트가 말한 ‘대화로서의 계몽’의 개념이다. 남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남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지혜이다. 세계화는 서구의 문화가 아니라 경제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수단이며 매체이다. 또한 세계화는 통합시키는 개념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추가해주고 병렬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한국에는 ‘악’의 개념(즉 세계화)을 받아들일 적절한 수용체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화가 과연 기존의 문화와 가치체계를 변화, 통합시키지 않고 단순히 추가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을까? 세계화가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한다면 결국은 경제적, 정치적 힘의 논리에 의해 전개되지 않을까? 세계화를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대로 이해한다면 단순하게 바라볼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물론 세계화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의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서만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책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대목 중의 하나는 세계화 시대에서의 한국적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앨퍼드는 ‘정체성은 문화와 전통의 형식과 틀 내에서 형성된다. 형식과 틀이 없으면 정체성은 해체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형식과 틀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호소한다. 세계화의 장점을 선택, 수용할 수 있는 원칙을 발견해야 하며 저자는 ‘정’을 권고한다.

결국 지난 ‘금빛 기쁨의 기억’,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고민했던 세계화와 한국화의 문제가 또 다시 벽에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 세계화를 강조하면 관계의 파괴로 이어지고 한국화를 강조하면 피상적 이해에 그치게 된다. 과연 그 경계의 지점은 어디인가? 어떻게 해야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조화시켜 나갈 수 있을까? 역자 서문에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적인 것을 보존하고 세계화에 접목시키려 하는 시도는 기본적으로 옳다. 하지만 문제는 악의 경우도 그렇듯이 올바른 세계화를 위해서는 세계화의 본질에 정면으로 접근해야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철학적 개념인 보편과 특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컨대 분명한 점은 세계화의 문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깃들어서야 나는 것처럼 다 지난 후에 미온적으로 대처할 문제는 결코 아니다는 점이다.


2. 역지사지(易之思之)-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그렇게 읽기 편한 책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몇 번이고 팽개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책으로 알고 읽었는데 갑자기 ‘악’에 대해 한참 이야기 하다가 ‘세계화’로 귀결된다. 참으로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의 전개 방식에 있어서 몇 가지 지적을 아니 할 수 없다. 첫째 문장의 전개가 논리성이 없이 갈지(之)자로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든다. 문장과 다음 문장의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 물론 번역상의 애매함도 들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목차의 구성, 그리고 각 목차마다 내용 전개가 일관성 있게 펼쳐지기 보다는 파편화된 조각으로 인식된다. 앞 부분의 목차는 다 생략하고 7장의 결론 부분만 읽어도 책에 대해 십분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한국인은 악의 개념이 없고 세계화를 악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의 정체성의 형식과 틀을 세계화의 기준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설명이 필요했을까?

둘째 핵심 단어의 개념이 불명확하다. 이 책은 개념의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인데 내가 악의 개념이 없어서인지 ‘악’, ‘세계화’의 개념도 몇 번씩 곱씹어봐야 간신히 머릿속에 상이 잡힐 정도이고, ‘정’, ‘자아’, ‘관계’, ‘계몽’ 등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 애초 논문 형식으로 집필이 되었고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정치학, 철학 등 여러 학문분야에서 사용되는 개념이 등장하다 보니 다소 어렵게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책을 쓰기 위해 저자가 사용한 방법론은 인터뷰, 동화나 문학작품 연구, 논문 등이다. 문제는 저자가 한국인의 심리가 장년, 학생 등 대상에 따라 상이하다는 점을 책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데 어떻게 한국인의 악, 세계화, 관계, 정에 대한 개념을 일반화시킬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글의 전개방식과 조사 방법론의 미흡한 점보다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바로 ‘세계화’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세계화’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세계화’는 합리성에 기초한 계몽이며 한국인들은 세계화를 ‘악’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통에 기반한 세계화의 형식과 틀을 구축하여 정면으로 부딪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면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세계화를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이다.

세계화를 자본주의가 세계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세계화 즉 상품, 서비스, 화폐, 자본유통의 급격한 자유화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과 노동과정을 세계적 차원에서 '합리화'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세계화가 촉진하고 있는 자유무역은 리카도(D. Ricardo)의 비교우위설에 따른 국제적 균등발전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함축하듯이 국민적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을 심화시키고 있다. 또한 세계화 국면에서 국민국가를 매개로 한 경제적 경쟁의 격화는 정치군사적 대립 및 전쟁과 테러의 세계화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즉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면 세계화는 전혀 양상이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은 퍽 인상적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항상 정복할 새로운 땅이 있어야 한다면,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자본의 지배가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아닐까?’ 자본주의 여행의 종착지는 세계화이며 문화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가지 더 조선시대 역사를 보는 시각에 대해 꼭 집어 들추어 내자. 제 6장에는 일본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면서 조선시대 왕궁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데, 왕궁에 대한 언급은 역사의식의 부재 또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 시대는 봉건제, 문화적 빈곤, 관료제의 지배, 여성에 대한 억압, 군사적 취약성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표면적으로 조선시대 역사가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며 또한 위에 언급한 모습을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악’에 대해 서구인들이 개념 정의 하듯이 정확히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항상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제도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정치학자가 왜 한국인의 심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있었지만 어디서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점이 못내 아쉽다.


3. 책에서 끌어다 쓰기(인용)

한국적인 요소를 보존하고 세계화에 접목시키려 하는 시도는 기본적으로 옳다. 하지만 문제는 악의 경우도 그렇듯이 올바른 세계화를 위해서는 세계화의 본질에 정면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데 있다. 단말마적으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만을 외치는 것으로는 곤란하다. – 옮긴이 서문 (P19)


[제1장 “관계를 말해주면…”]

한국에는 확실히 서구적 악의 개념이 없다. 한국은 동양이다. 악은 존재와 생성, 형태와 공백 등과 같이 서구적 이분법의 소산이므로 동양인들은 납득하기 어렵다. 나의 관심은 악의 부재가 아니라 그 부재의 의미에 있다. (P25)

“한국형 모델이란 없다. 한국의 역사만이 있을 뿐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케이건, 1998). 하지만 이 말도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의 역사 ‘들’이 있다고 해야 옳다. 무릇 역사란 타협과 투쟁의 역사다. (P33)

세계화의 악은 세계화가 가져오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매력에서도 나온다. 세계화는 자유와 계몽을 약속한다. 스스로에게 타자가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동시에 더 풍요롭고 복잡하게 중첩된 자아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P41)

특수성과 다양성은 균질화의 관점에서 타자와 차이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그럼 특수성과 다양성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게 아니라 특수성과 다양성이라는 추상적 이념 자체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특수성과 다양성이라는 추상적 이념 자체를 존중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그것은 균질화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여 특수성과 다양성을 보되 균질화를 위험으로 보는 관점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P45)

진정으로 다양한 삶의 방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차이와 다양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세부를 이야기한다. (P45)

방법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한가지 삶의 방식, 즉 자신의 방식만을 보게 되며 자신의 민족만을 인류와 동일시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여기게 된다. 반면 너무 멀리 떨어지면 광대한 차이의 바다(균질화와 차이를 결합하는 명백히 모순된 관점), 온갖 특수성만이 남게 된다. 모두들 현실이 아니라 특수성의 개념 자체에만 몰입하는 것이다. (P46)

세계화 과정은 막스 베버가 합리화라고 부른 그 유용성의 기준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연장되는 것이며, 세계화의 분석은 그 과정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P47)

세계화를 바람직스럽거나 불가피하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라 특수성을 이상화함으로써 오히려 특수성을 무시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세계화 이론가들이 세계화가 파멸과 단절의 경험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상 그들의 글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가 마치 세계의 합리화인 것처럼 쓰고 있는 것이다. (P47)

비교문화적 사고는 다른 문화에 관해 뭔가 중요한 새로운 것들을 배운다는 의미에서 계몽에 기여하는 게 아니다. 비교문화적 사고는 우리 삶의 기본적 경험들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을 배운다는 의미에서 계몽에 기여한다. (P48)

미셀 푸코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놀랄 만큼 전통적으로 대답한다. 계몽이란 정체성의 경계선을 뛰어넘음으로써 우리가 누군지를 정의하는 기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극복해야만 우리가 누군지를 알 수 있다. 계몽은 지식체도 아니고 낡은 것에 대한 비판도 아니다. 이러저러한 경계에 대한 비판은 계몽이 아니라 거의 본능의 일부다. 계몽은 낡은 정체성으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푸코는 계몽적 태도가 사회의 가장자리나 틈바구니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P53)

관계를 미학으로 바라보면 한국에 악이 부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악은 나쁜 타자가 아니라 조화의 부재일 뿐이다. (P54)

악은 문자 그대로 무이다. 즉 무에 대한 공포, 모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의 절대적인 소외감이다. 악의 경험은 심지어 자아조차 인간으로 여기지 못하는 절대적인 타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 폴 리쾨르 ‘악의 상징성’ (P59)

한국인이 악을 믿지 않는 이유는, 어떤 것을 악이라고 부르면 자신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을 악이라 부르게 되는 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인의 악의 개념을 쓸 수 있다면, 아마 세계화를 악이라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화는 전통적 관계(부담스럽긴 하지만)를 엄격히 도구적인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이며, 내가 세계화를 스스로에게 타자가 되는 경험이라 부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61)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는 파괴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새로운 계몽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P62)


[제2장 자아는 연속이 아니라 대립이다]

“한국인은 집단적 자아를 갖고 있다. 그들은 ‘나’를 행위의 중심으로 삼지 않고 ‘우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집단 속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고민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심리학적 오리엔탈리즘의 한 사례라고 생각될지 모르겠는데, 사실 그런 점이 있다. (P63)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이 과도기 시점에서 우리에게 특히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개별성을 되찾는 일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각 개인의 개별성을 성장시키고 충족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 윤태림 (P64)

이러한 해석은(사람 人에 대한 해석) 동양 사상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이런 예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본성상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는 똑 같은 전제로부터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그리스인들이 최초의 서구적 개인주의자라고 간주되는 점을 고려하면 그 점은 매우 중요하다. (P71)

한국의 젊은이들은 ‘우리 한국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이라는 말 대신 ‘제 생각에는’ 이라는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이 말은 그들이 개인주의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할까, 아니면 단지 ‘말은 우리라고 하면서도 행동은 나로 하는’ 위선을 의식한 탓일까? (P73)

인간본성에 관해 가장 명백한 사실은 그것이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그 두 가지는 하나의 자아 속에 거의 동시에 공존한다. (P74)

한국인들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집단주의적이다. 한국의 문화, 모든 한국인의 심리의 중심에는 바로 개인주의적 자아와 집단주의적 자아간의 대립이 있다. (P75)

한국 사회는 비록 가족 중심적이지만, 한국인들은 가족 구성원들이 한데 뭉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우리 사회는 가족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나이와 성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가족에게서 멀어져 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 박명석 (P86)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한 살이라면, 아이가 지니는 개인으로서의 지위는 어머니와의 분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미 자궁 속에서부터 개인이 되어 있는 것이니 세계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집단적인 ‘우리’인 셈이다. (P96)


[제3장 한국인들은 왜 늘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로 행동할까?]

고립된 자아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것이라고 말한다. (P100)

‘평등은 개인을 동료 시민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들어주었으나 동시에 개별적으로는 개인을 홀로 있게 만들어 다수의 고립과 소외의 위협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뜻이다. – 토크빌 (P101)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고립과 고독이 최악이라는 생각은 그저 자명할 뿐이다. 한국인들과 토크빌이 말하는 미국인들과의 차이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상호의존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견해와 믿음을 억눌러가면서까지도 집단에 들어맞도록 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까지 집단에 어울리려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갈등이라 생각할 뿐이다. (P104)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치심은 집단주의 문화의 특징이고, 죄의식은 개인주의 문화의 특징이다. (P107)

수치심-죄의식 구분의 나쁜 측면에서 보면, 수치심 문화권의 사람들은 부정 행위를 저질렀을 때 낭패하거나 ‘체면을 잃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면 그런 기분은 없다. 그런 점에서 수치심 문화는 미성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P108-109)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란 다른 사람들에게 발산할 공격성을 강력한 권위자인 아버지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자아에게로 돌리는 것을 뜻한다. 문명의 불만은 곧 죄의식의 불만이다. (P110)

소년들은 어머니에게 깊이 의존한 나머지 어머니의 이념과 기대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 뒤, 그것이 좌절되면서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관계의 덫에 대한 분노를 어머니에게 터뜨리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공통적인 특징은 아버지의 부재다. 아버지는 일에 바빠 어머니와 아들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P114)

아버지의 권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사랑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녀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남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그래야만 강력한 자아와 강력한 초자아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P115)

한국에서 보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율적인 집단적 자아다. (P115)

물론 그것은 한국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지만, 변두리에서 주류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일이 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훨씬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류를 정의하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주류로 들어오는 관문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P116-117)

한국에서는 창조적인 일이 주변적인 분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조적인 분야에서는 관리할 인간관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P118)

상사들은 자신들의 리더십을 집안의 아버지에 비유하고, 젊은 직원들은 충실한 아들이나 딸처럼 처신한다. 모두들 재벌이 한 가족과 같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젊은 사원들은 그런 태도가 승진의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또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며, 상사들은 그게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모두들 점차 자신들이 곧 끝날 연극에서 연기하는 배우들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공연 중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자넬리의 관점은 겉으로 보이는 집단주의의 배후에 개인주의적 요소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P119)

한국인들이 가장 좋게 생각하는 것은 조화, 호감, 정, 기타 이념적 목표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데서 느끼는 가족적인 집단적 소속감 등이다. 이것들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높은 형태의 우정을 정의할 때 사용한 용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P121)

만약 문화를 유지하는 역할로서 법과 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한국인들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정을 택할 것이다. 한국에서 정의 중요성은 그것이 사회적 안정과 질서의 원천으로 기능한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정은 사회 통제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전통적 지혜는 가족이 응집적이고 안정적이어야만, 나라와 세계도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 함병춘 (P126)

한국인은 한의 자궁에서 태어나 한의 젖을 먹고 자라고, 한을 견디며 살아가고, 한을 남기고 죽는다. – 고은 (P134)

미국의 경우 사회가 구성원들을 짓누르기보다는 낙오시키는 데 따르는 정신 장애가 더 일반적이다. 그 결과 낙오된 구성원은 무의 무탁의 회복 불능 상태가 되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사회의 구석으로 밀려나게 된다. (P139)


[제4장 악은 무관함이다]

실상 그들은 관계가 바로 판단의 근거이며 그 관계에 관해 잘 알지 못하면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P153)

그들은 관계를 제3의 실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P154)

정보제공자가 운명이라고 말한 그 밧줄에 묶여 있을 때는 미워하는 사람을 악으로 여기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것은 이 불가능성이 더 먼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된다는 점이다. 한국에 악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는 현실적 관계가 긴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전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P160)

한국적 관점에서 본다면 악은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게 아니라 관계 자체이며, 혹은 관계의 배반이다. (P161)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의 상관물인 소외와 고독을 두려워할 따름이다. 그것은 물론 서구인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문제는 왜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처럼 두려움에서 악으로 추상하지 않는가에 있다.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한국인들은 현실적 관계에 단단히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상이 생겨나려면 두려움으로 경험되는 관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한데,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그게 없는 것이다. (P168-169)

자기도취적 자아-대상은 거울과도 같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보고자 하는 대로,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커다랗고 강력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최초의 자기도취적 자아-대상은 대개 어머니다. 코후트는 그것을 경멸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관념화된 자아-대상은 고상한 이념을 나타낸다. 그것은 추구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지만 불가능할 만큼 멀지는 않다. 최초의 관념화된 자아-대상은 대개 아버지다. 코후트는 어머니화 아버지가 보통 두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고 지적한다. (P171)

천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으로 인해 멀어진다. – 논어 (P183)


[제5장 한국인들은 악을 믿어야 할까?]

서구의 솔로몬은 죄가 없음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구분하려 한다. 한국의 솔로몬은 양측의 관계를 묶는 방법을 만들어내서 그러한 구분을 미연에 없앤다. 달리 말하면 한국의 솔로몬은 과거의 차이를 현재의 관계 속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창출함으로써 그 동안 감춰지고 소홀히 여겨온, 그러나 늘 존재해온 상호관계를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바로 이 감춰진 상호관계의 발견에 있다. (P192)

눈치란 눈 짐작으로 상대방의 ‘기분’과 의 도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눈치의 좋은 점은 말하지 않고도 안다는 것이다. 차이를 말하거나 인정하지 않고도 아는 셈이므로 대단히 이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P198)


[제6장 세계화는 악이다]

세계화는 막스 베버와 애덤 스미스의 결합이다. 세계화는 원자화, 고립화, 파편화, 상실감의 위험을 뜻하며, 한국인들을 자기 땅에서 이방인이 되도록 만든다. 어느 중년의 정보제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고 있다. 누구나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한 마디로 세계화는 많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정’을 파괴한다. (P229)

한국인들은 세계화라고 하면 예전에 겪었던 제국주의 시대,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한 시대를 생각한다. (P235)

‘세계화’는 임금 인상과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를 억제하는 정치적인 구호로도 쓰인다. 그 덕분에 한국은 최근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해온 직접투자 모델로도 경제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P235)

사실 한국인들은 흔히 사대주의라 할 때, 다른 민족들의 생각을 차용하여 토착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연상한다. (P236)

그들은 마치 한국의 신체가 그 근본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외국의 생각을 소화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환상이며, 사대주의에 대한 자기도취적 방어다. (P237)

한국인들은 서구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지 않고 서구의 상업과 기술을 이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러한 응용은 피상적이 되기 쉽다. (P237)

세계화를 경영하려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합리적인 사회를 끌어안아야만 한다. “베버가 비합리성의 전형이라고 간주한 ‘정’은 바로 한국인들에게 삶의 가치를 주는 것이다. 정은 사람들 상호간의 헌신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함병춘 (P242)


[제7장 세계화는 계몽인가?]

나는 지금까지 계몽에는 타자와의 만남이 포함되며, 그 만남은 악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 경험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모종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은 남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지혜이며, 타자의 것을 적절하게 빌리는 지혜다. (P259)

더 나은 계몽의 이미지는 칸트처럼 발언으로서의 혹은 대화로서의 계몽이다. 우리의 생각은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면 모습을 갖출 수도 없고 쓸모도 없다. 비록 우리는 혼자서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칸트가 말했듯이 ‘남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가장 잘 생각할 수 있다. (P260)

세계화는 서구의 문화가 아니다. 세계화는 경제적 합리성이 이끄는 전달 수단이자 매체일 뿐이며(아마 경제적 합리성이 곧 세계화인지도 모른다), 당분간 절충적으로 묶어왔던 것을 곧 동질화할 것이다. (P265)

세계화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인간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준다. 세계화는 통합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추가해 주고 병렬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슨은 그것이 일본에게 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응집력을 부여해 준 일본 종교의 혼합이며 절충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인들은 모든 것을 통합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웠던 것이다. 만약 로버트슨이 옳다면 한국은 아직 기회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P278)

정체성은 문화와 전통의 형식과 틀 내에서 형성된다. 형식과 틀이 없으면 정체성은 해체된다. 중요한 것은 형식을 폭발시키지 않으면서 그 문을 개방하는 데 있다. 그 방식은 바로 추가이므로 먼저 자신의 문화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P279)

한국에는 악을 받아들일 적절한 문화적 수용체가 없기 때문에, 이를테면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들 내부에서도 튼튼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다. (P280)

만약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형식과 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점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겁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을 뜻하는 한국어가 있다면 그것은 세계화일 것이다. (P285)

계몽으로 이어지는 실험이 되려면 틀과 형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선택과 배제의 원칙만이 아니라 유형이 필요하다. 물론 모든 것을 그 유형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택의 원칙을 만들기 위해 유형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것이 중요한지도 알지 못하는데 좋은 부분을 어떻게 고를 수 있겠는가? 세계화가 위협적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세계화는 삶이 아니라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니체는 그것을 가리켜 가치의 상호 평가라고 불렀다. 선이 악이 되고 선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니체는 선택의 원칙이 무엇인지, 그리고 윤택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한국인들은 선택의 원칙을 잃었기에 상실감을 느낀다. 외국인이 간섭해도 좋다면, 나는 정을 권고하고 싶다.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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