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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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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7일 19시 01분 등록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지음, 신승철‧이종만 옮김, 열음사, 2004 개정판)
The Road Less Travelled.. 1978 by M. Scott Peck, M.D.

M. 스캇 펙 (M. Scott Peck, M.D.).. 1936년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에서 위학박사를 취득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악과의 투쟁을 다룬 <거짓의 사람들>, 안락사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영혼의 부정>,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사랑과 구원의 문제를 깊이 탐색한 장편소설 , , 크리스찬적 세계의 여러 차원에 관한 , 공동체와 평화의 문제를 다룬 등이 있다.
현재 미국 코네티컷 주에 살고 있으며 밀퍼트 종합병원 정신건강 치료센터의 책임자로 있다. 1997년 '안락사'에 관한 본격적인 정의와 문제를 제기한 책 <영혼의 부정 (Denial of The Soul)>을 발표하여 의학계는 물론 대중과 언론에 집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현재까지 이 분야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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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실제로 매일매일 환자를 치료하는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즉 환자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과 씨름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성숙해 나가는가, 또는 그런 씨름에 실패한 환자들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를 관찰하면서 얻은 기록이다.

몇몇 사람들은 나를 전도사라고 부른다.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는 그 호칭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전도사가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징후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그 점을 강조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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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훈련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들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만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 태도가 바로 정신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드물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는 셈이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이 되고, 그것이 가치가 있게 될 때, 우리는 거기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것을 즐기며 보호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할 때에도 즐겁게 그들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느낌은 정신건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자기 훈련의 주춧돌이다. 이것은 부모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신념은 어렸을 때 얻어져야만 한다. 어른이 되어서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귀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돌보고 가꾸게 마련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도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도를 만드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을 감수하고 파악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지도는 정확하게 될 것이다. 지도 제작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지도를 고쳐 그려야 한다는 데 있다.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는 피하게 마련이다. 우리 자신의 지도를 개편하려면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런 훈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 현실의 편안함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들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한다. 개인적인 불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며, 현재의 진실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 불편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정신건강은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오늘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하고, 동시에 진실로 우리의 책임이 아닌 것은 거절할 줄 아는 능력도 소유해야만 한다. 규모있고 효과적이며 현명하게 생활하려면 우리는 매일매일 즐거운 일들을 뒤로 미루고 미래를 내다보아야만 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므로,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과정에 장애가 생기면, 그 우울증은 비정상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 결과로 우울증은 오래 계속된다.

성숙한 깨달음이란 지난 세월 내가 갖게 된 선입견과 편견을 이해하고 개선할 때만 가능해진다. 나에게 내재한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곧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많이 얻게 된다. 자기 훈련이란 자기 확장의 과정이다.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출생이다. 우리가 새롭고 더 좋은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를 발육시킨다는 것은 옛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부 사랑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 희생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나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보다는 확대시키고,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그 목적이 항상 정신적 성장에 있으며, 사랑이 아닐 때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는 것이다.

마음을 넓게 가지고 좀더 발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공포에 저항하고 게으름이라는 타성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게 된다. ‘노력’이란 마음을 넓게 가지려 애쓰고 게으르지 않고자 애쓰는 것을 말하며, 알지 못하던 마음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공포감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것은 ‘용기’이다. 그렇게 보면 사랑은 일종의 노력이나 용기다.

우리가 자신을 확대한다는 것은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익숙하지 않던 일들을 시도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으로 인한 위협에 그저 저항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뛰쳐나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행동이다. 어떤 단계의 정신적 성장이든, 사랑이든 항상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래서 모험이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심리적 독립과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을 선택해 나가는 사람만이 자유로이 정신적인 성장의 길을 따라 전진해 나가면서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적인 자유 선택에 있는 것이지, 남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분리된 개체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결혼을 포함한 모든 친근한 관계들도 방해한다.

제3부 성장과 종교

세계는 근본적으로 혼돈스럽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는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때그때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느낀다. 또 세계란 비정하게 먹고 먹히는 곳이라 믿는 환자는 세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무자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혹은 세계란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며 따라서 그곳은 좋은 것만 생겨나므로 장래에 대해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던지 세상은 살아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은 견고한 도덕이 지배하는 우주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얻어맞고 쫓겨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의 종교성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들의 문화인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믿는 것을 따라서 믿는 경향이 있으며, 어린 시절에 자아형성 과정에서 세계의 본질에 대해 들은 것을 그대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우리의 성장 발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는 가족 문화이고, 우리의 부모는 그 ‘문화의 지도자들’인 것이다.

삶의 의미, 목적, 죽음이 문제가 될 때에는 간접적인 지식은 소용이 없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만의 개인적인 언어와 특수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신적 건강과 정신적 성장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교를 발달시켜야만 하며 부모들의 종교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가끔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이 이상하리만치 혼란스러운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을 대하게 된다. 즉 이 환자들은 그들 바로 앞에 있는 아주 좁은 영역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초점을 맞춘 것 외에는 왼쪽이나 오른쪽에 있는 그 어느 것도 볼 수 없으며, 위나 아래에 있는 것도 볼 수 없다. 그들은 두 개의 사물이 서로 동시에 엇갈려 있는 것을 볼 수 없으며, 오직 한 번에 한 가지 물건만 볼 수 있고, 다른 것을 보려면 머리를 돌려야만 한다. 그들은 오직 좁은 동굴 속에서 바라보는 작은 빛만을 볼 수 있고, 끝에 확실히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이 증세를 즐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눈에 직접 보이는 것, 또는 그들이 주의를 갖고 선택해서 보는 것 이상의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제4부 은총

웹스터 사전에서는 초능력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귀중한 것을 뜻밖에 찾아내는 재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은총을 붙잡을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애써 구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선물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졌을 때 그 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가 어렵듯이 말이다. 바꿔 말하면 초능력적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이 초능력과 관계있는 것임을 간과하기 쉽다. 그런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아래로 흘러내리기만 하여 마침내는 모양도 없고 질서도 없는 점액질이 되어버려 더 이상은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완전 해체와 미분화의 상태를 엔트로피라 부른다. 엔트로피의 상태를 향하여 에너지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엔트로피의 힘이라 한다. 진화의 흐름은 바로 이 엔트로피의 힘과는 정반대이다.

원죄는 존재한다. 그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실재하는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있다. 아기들, 어린이들, 청소년들, 장년들, 노인들, 게다가 현명한 자든 우매한 자든, 불구자이든 정상인이든 우리 모두에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덜 게으를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야심만만하고 정력이 넘치며 영리한 사람들조차도, 진정으로 스스로를 성찰한다면 자기 속에 게으름이 잠복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게으름은 우리를 끌어내리고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 속에 숨어있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이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다. 즉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현실 세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케케묵은 지도를 개정하기 위한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일을 싫어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기보다는 그것이 대항하여 싸우는 경향이 있다. 이 저항은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지만, 그 밑바닥에 분명 게으름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 앞에서의 두려움이다.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게으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게으름을 줄여 나가는 첫걸음이다.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덜 게으를 수 있는 사람이다. 엔트로피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

사랑이란 영적 성장을 위해 자아 영역을 확대하려는 의지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곧 성장하는 사람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린이나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어른다움에 따르는 자유와 권력이 우리들의 것임을 알면서도 그에 따르는 책임과 자기 훈련은 별로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자신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는 그런 권력의 정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사랑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또한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훈련하여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만들어 감으로써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보답을 받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 없이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잘 보살핀다면 우리는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고 굳이 구하려 하지 않았던 사랑의 보답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우리 자신과 의식적 의지를 넘어서 우리의 성장과 진보를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느낌을 뒤엎을 수 있다. 이러한 힘의 존재는 인간의 영적 성장이 인간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존재에게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은총의 실재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우주라고 하는 도약대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뛰어넘어야 한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따뜻이 맞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하느님’과 그 ‘은총’에 대해 아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 책은, 같은 종교 신자가 아니어서 읽기에 다소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무 살이 되도록 정신을 놓고 살았던 나는 이런 종류의 책에 관심이 아주 많다.

손가락을 다쳐서 손톱이 빠졌을 때, 사랑니를 뽑을 때, 아빠에게 혼날 때, 뛰어가다 넘어져서 다쳤을 때, 계단에서 미끄러졌을 때, 팔꿈치를 의자에 부딪쳤을 때, 그리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그 언젠가의 나는 정신을 놓고 기절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기억이 끊어졌는지 어릴 적 기억은 거의 없는 편이기도 하다. 차멀미가 심해 외출이 잦지 않았던 나는 주로 집 안에서 그렇게 쓰러져 있곤 했었다.

내가 나를 치료하기 시작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기절할 때마다 귓가에 들리는 그 소리를 찾아냈고, 꽤 많은 눈물과 함께 귓가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얘길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간혹 스무 몇 살 정도로 착각하곤 하는 나는 아직도 사랑을 배우고 있고 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관심이 아주 많다.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저자가 정의하는 사랑이다.
지금의 나는 나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이 정의대로라면 내가 훈련하고 있는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아니, 사랑이고 싶다.

책 중간쯤엔 결혼생활에 대한 칼릴 지브란의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서로 사랑하되 구속하지 말고,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되 각자 따로 있게 하라고 한다. 기타 줄이 따로 있듯이 너무 가까이 함께 하지 말라고. 참나무도 사이프러스도 서로의 그늘에선 자라지 못한다고.
따로 또 같이 산다는 건..나의 풀지 못한 숙제다. 가능한 일이라니 더 노력해 볼 일이다.

끝으로, 이 책을 추천해 준 신 재동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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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동
2005.07.08 23:31:06 *.111.251.128
제 이름을 언급해 주시니 저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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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5.07.09 11:14:27 *.224.55.112
별 말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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