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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9일 00시 03분 등록
현재 심사정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겸재나 관아재처럼 현실과 현상을 추구하다보면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근원성 내지 철학성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남종문인화 풍속에서 보이는 작가정신의 철학적 고양과 작가적 감성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미덕을 살려내어 심사정은 그런 관념성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진경산수나 속화의 박진감과는 또 다른 미감의 세계, 즉 그림 속에서 차분하고 명상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 고양과 정서의 환기 작용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이규상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畵尙精神]”한 화가였다.
(p. 54)


능호관 이인상

노자의 말씀 중에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라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구절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은 곧 이인상 예술의 특징인 동시에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 내지는 진실에 그 근거를 둔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p. 89)

서양미학, 서양미술사에서는 하나의 작품 세계에서 그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 화가의 성격이 작품에 나타난다는 것은 개성을 말할 때 곧잘 거런하면서 인품을 작품과 연관시키는 일은 없다. 이것은 동양 미술사와 동양미학의 독특한 미적가치론이다. 서양미학의 입장에서는 비과학적인 설명이라고 외면할지 모르지만 동양미학에서는 모두가 심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지고(至高)의 미적 덕목인 것이다.
(p. 124)


<호생관 최북>

호생관 최북,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량 있는 인물이었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기걸 찬 성품이 화면 속에 녹아들었을 때는 심사정이나 이인상 못지 않은 높은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기절(奇絶)한 작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결코 그이 편이 아니었다. 미천한 신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었다. 칠칠이로서는 천분(天分)을 다하지 못하는 그 분풀이를 세상에 퍼부으며 살았다.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창조적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는 그런 기개의 소산이다. 그러나 최북의 기대라는 것이 세상도, 대중도, 역사적 평가도 의식하는 일없이 자포자기의 폭력에 빠질 때면 그것은 대책 없는 오만이었고 그는 한낱 기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인 것이다.
(p. 163)


단원 김홍도

그에게는 탁월한 그림 솜씨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대상을 정확하고 실감나게 그려내는 묘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림은 결코 손재주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단원은 사물을 형상적으로 인식하는 감성적 인지 능력이 뛰어났고, 그것을 작가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재창조하는 구성력이 탁월했다.
(p. 316)


◎ 감상 및 저자였다면....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평상시에 관심이 없는 주제이다보니 공감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굳이 우리 것이라는 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간 동양화(화투 아님) 혹은 미술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참 무미건조하게 살아 왔구나 싶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질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학창 시절 사전 지식도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 박물관에 다녀 오고 미적감각이 별로 없던 나에게 그러한 행위는 거의 요식행위에 불과했기에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다라는 정도 밖에는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다.

여하튼 이런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고, 책을 내주시고 하는 분이 계시니 참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진다. 저자가 평한 그림에서 저자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 그림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느껴졌고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것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선비정신'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는데 그 실체가 무언지 자못 궁금하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중 하나는 저자 자신은 어떤 계기로 이렇게 동양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다. 책에서 읽은 바로는 보통 애정이 아니다. 본래 그러한 안목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어떤 계기에 의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나는 어를 적부터 그러한 그림을 보고도 크게 와닿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단순한 취향의 차이인지 아니면 교육의 문제인지 궁금하다. 이미 다른 책에 그러한 것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자 자신은 어떻게 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소개해준 글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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