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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8일 11시 55분 등록
금빛 기쁨의 기억 -강 영희 지음-


< 책에서 캐낸 글맥 >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 백 남준과 서울의 기억
사대와 자주를 나누는 사고 자체도 식민사관의 산물임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을 지닌 민족사관의 산물이다. 우리는 세계성의 부재를 토속성의 과장으로 얼버무리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기억속의 심상’에 의지하여 시간의 흐름에 떠밀리는 세월의 무상함에 대항하는 몸부림이야말로, 인간에게 정체성의 후광을 부여하며 주체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인문적인 가치의 본령이다. 전통이란 ‘기억속의 심상’을 토대로 한 것이며, 새롭게 창조되는 오늘의 심상의 전생이다.

2. 기차가 있는 풍경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취향이란 저마다의 몸속에 자리 잡은 나름의 척도인 까닭에, 낯익은 취향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척도를 향해 침을 뱉고 낯선 취향 속에 들어있는 타인의 척도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은 결국 저다움에 대한 자기부정을 의미한다.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이처럼 습득해야 할 낯선 취향과 청산해야 할 낯익은 취향의 쌍들의 들고남으로 온통 분주했다. 여기서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형식의 후예인 우리 역시 자신의 취향을 혐오하고 타인의 취향을 선망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흔히 ‘무의식의 미’ ‘무작위의 미’ ‘무기교의 미’로 표현되는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핵심은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인의 미의식에 덮어씌우면서 그것을 미의식에 미달하는 무의식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한국 예술의 위대한 아름다움은 한국 예술 자체의 오롯한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인 일본인의 은밀한 영광을 의미한다. 한국인의 몫은 어디에도 없으며, 한국인에게는 단지 벌거벗은 임금님과도 같은 자기소외의 무의식이 주어질 따름이다.

2.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야나기가 한국 예술을 사랑한 것은 거기서 중국적인 작위를 따르는 도학의 삶 대신 일본적인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욕(人慾)의 삶을 중시하는 국학의 이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국학적인 자연주의에 토대를 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씌운 ‘무작위의 미’나 비애의 미‘와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도리어 일본인의 미의식이 한국예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로 되돌려줘야 한다.

3.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야나기가 한국 예술의 ‘저 호소하는 듯한 선’에서 읽어낸 말할 수 없는 정과 쓸쓸함의 아름다움과 동경하는 마음의 눈물이 바로 모노노아와레라고 불리는 일본 국학의 정서적 핵심이라는 것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저고리 깃, 버선코의 선, 한옥의 지붕곡선) 한국의 선들은 근엄하게 팔장을 낀 듯한 정지태에서 벗어나, 살아숨쉬며 꿈틀거리며 심지어는 슬쩍 말까지 걸어오는 듯한 움직임의 기미를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원한과 슬픔과 동경’이라고 못박은 야나기의 주장은 적어도 한국인의 미의식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4. 일본의 기교와 한국의 격(格)
흔히 격(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 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리 속의 점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 넘을 때, 바꿔 말하면 격이 맞는 변격(變格), 변격이면서 격에 제대로 맞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를 초격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변격이합격(變格而合格)’ 이요 ‘격에 들어가서 다시 격에서 나오는 격’이라 할 수 있다. -조 지훈, 멋의 연구-

‘비었다는 것은 그 형태이고 충실하다는 것은 그 정기(精氣)다. 그 정기라는 것은 제 몸뚱이의 충실한 것이 지극히 빈 가운데에서 무르녹아 맺힌 것이다. 오직 그 충실한 까닭으로 힘이 종이를 뚫고, 그 빈 까닭으로 정기가 종이에 맑게 배어나온다. -서결, 추사집-

5.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그러니까 원경에서는 아(雅)하되 근경에서는 졸(拙)한 한국 예술을 일본인의 근경의 시선으로만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로부터 발견된 것이 바로 무기교, 무작위, 무의식의 민예성이다. 그렇지만 근경의 시선으로 전모를 포착할 수는 없었음에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원경의 아름다움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터.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움 불가사의로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복하자면 그는 정신의 격이 세련된 까닭에 형식의 기교는 서투른 것처럼 보이는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를 앞세우는 일본인의 미의식으로 바라보았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 음양오행과 상의 미의식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의 미학이 아닌 원경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하기보다 아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 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2. 아졸미(雅拙美) 또는 고졸미(古拙美)
달 항아리를 만드는 도공도 형과 관련된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도록 훈련된 장인들이지만 상과 관련된 최대한의 성과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만약 상이 만족스럽다면 설령 형이 약간 허물어지더라도 너그럽게 눈감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형이 약간 허물어졌을 때 도리어 상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 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 이를 가리켜 아졸하거나 고졸하다고 하는데, 한국문화는 이렇게 상의 세련됨과 형의 어눌함이 어우러진 아졸함이나 고졸함의 형상으로 넘쳐난다.

3. 발효맛과 생기의 미감
발효음식을 요리의 시스템이나 코드로 사용한다는 말은, 특정한 몇 가지의 음식이 발효음식이라는 사실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조미료와 밑반찬이 대부분이 발효음식이며, 입맛에 맞추기 위한 마무리 단계에서 발효음식이 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발효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 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얼 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발효의 원리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그것이 부패와 관련된 미생물의 활동을 억누르고 발효와 관련된 효모균의 활동을 북돋운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금을 첨가하여 음식물을 부패시키는 균들을 죽이고 소금에 견디는 유익한 균들만 활동하도록 하는 식이다.

비보의 원리란 상극의 원리가 관철되는 무정한 자연을 상생의 원리가 숨쉬는 유정한 자연으로 바꾸려는 인문적인 자의식의 소산이다. 인과율에만 따르는 자연적인 상극을 목적률을 지향하는 인문적인 상생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랄까.

5. 해학과 신명
결국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6. 고지도와 명당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옛날 지도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땅을 뼈대와 핏줄이 갖추어진 살아있는 유기체, 생명체로 보았다.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린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평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간취향이 발붙일 자리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고유의 공간 취향을 잃어버리고 기억상실에 빠져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간취향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당신의 마음속에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과 무관한 동기에 따라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공간적 심상이 있다면, 그 같은 공간적 심상으로부터 문화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통찰을 제공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 취향이며 저다움의 미의식의 교두보라고 말이다.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는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7. 백의와 색동
한국적인 이미지의 색이란 하나 하나의 색깔에 한국적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의 색깔이 지각공간에 어떻게 구성되느냐의 정도, 이른바 상대적 가치에 의해서 형성된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미의 문제에 관한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보다는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쿨한 프리즘이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개성 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 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사용된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명(名)은 합리성이지만 실(實)은 서구성으로 명실상부하지 못했던 데 원인이 있다. 합리성을 방패삼아 서구성을 밀어붙인 것이랄까.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 내는’ 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 내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근대적인 합리성을 맹목적인 서구성과 구별 짓고 그곳에 전통적인 실질합리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한, 미의식은 물론이요 성찰 역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2. 상생 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3.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
쓸쓸함과 즐거움이 함께 한다는 것. 이것은 자신들의 몫인 인간의 문화를 천지인 전체의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기 위한 비보물로 간주한 한국인이, 어느 순간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인간적인 자의식 자체를 놓쳐 버렸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저만치 탈속의 풍류를 지향한 현세의 실존에는 어딘가 허무의 느낌이 덧붙기도 했으며, 동시에 어딘가 별유천지 비인간의 느낌이 묻어나기도 했다.

4.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한국인이 상생 지향의 사고방식에 따라 인간의 질서인 상극보다는 자연의 질서인 상생을 추구한 나머지, 정신적인 내용을 착안하는 데는 탁월한 반면 육체적인 형식을 완성하는 데는 허술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상생속의 상극, 정지태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상극의 과정을 과거의 삶의 흔적으로만 남겨두는 정태적인 상생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삶의 에너지로 확보하는 역동적인 상생 쪽으로 우리의 취향을 자꾸만 밀어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문화 창조한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미지의 유토피아를 향해 걸어 나가는 자들의 것임을 실감하게 하는 풍격이었다.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 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도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코 폴로는 세계시민이었던 반면 한반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에게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소.’라고 말한 조선인들은 은둔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5.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
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우리는 ‘고유색은 전통주의자에게로’라고 쓰인 플랭카드와 ‘현대의 난장은 세계주의자에게로’라고 쓰인 플랭카드를 번갈아 들어올리며 양자를 단호하게 구분짓는 명쾌한 단색조의 목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순일함이란 불모의 것이요 난장만이 다산의 터전이라는 것. 전통의 고유색과 현대의 난장은 불이의 묘경으로 회통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퇴행적인 저다움을 딛고서 도달해야 할 진정한 저다움인 동시에, 조선식의 순종적 예술실천을 추사식의 잡종적 예술실천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진정한 견인차인 것이다.

<감상! 그리고 내가 저자라면 >

책을 읽으면서 읽고 나서도 생각과 감정들이 뒤엉켜 꼬여버린 느낌이다. 잘 정리되지도 않는다. 한국적이라는 것에 접근하면 할수록 더 혼란만 가중되는 느낌이다. 100여년의 역사 속에 너무나 많은 내외부적 변화를 겪어버린 우리의 모습 속에 어느 것이 원조이고 어느 것이 이식된 것인가를 구분 짓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껍데기야 불필요하면 버릴 수 있다 치지만 껍질이라 한다면 벗어 버리기도 쉽지 않다.

작가의 글은 아름답고 유려하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특히, 한국인의 미의식을 전통적 사상과 철학의 바탕위에서 체계적인 재해석을 한 부분은 단연 돋보였다. 앞으로 우리의 예술품을 통해 옛 정신을 느끼고 더 깊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공이리라.

그런데 그런 좋은 느낌만 느끼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 작가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 끊임없는 질문이 뒤따랐다. 작가의 표현대로 우리의 문화는 그렇게 넉넉하고 칼칼하고 상생적이며 흥겨운 것만일까? 그러한 예술을 담아낸 우리 민족의 정신은 시련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잘 승화시켰을까?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극복했기 때문에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야나기가 느낀 비애미는 정말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미는 과연 세계인의 취향과 인류보편적인 미의식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일반적인 세계인들이라면 과연 이 작가의 미적 표현과 한국의 미를 10분의 1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를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의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의 문제일까? 식민과 분단이라는 통절한 아픔을 겪게 된 이유는 외세에 있고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점들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도 있다면 그 핵심은 무엇일까? 세계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함은 어떠해야 함을 말하는 것일까? 의문은 끊이질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한 의문이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대주의적 식민사관의 잔재들은 아닌지 묻고 또 물어보았다.

작가는 ‘미의 문제에 관한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보다는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글과 생각 속에는 ‘일제잔재의 청산’, ‘야나기즘 청산’과 같은 이념적 요소들이 적지 않게 자리 잡고 있음이 느껴졌다. 저자는 야나기의 한국미에 대한 인식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단지 일본인만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미의식을 폄하했다는 것이다. 야나기가 일본인이 더 높은 미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글을 썼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한민족의 핵심감정을 슬픔으로, 한반도를 비애의 땅으로 규정짓고 동정어린 눈으로 우리를 굽어보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을 가졌다고 해서 야나기의 미론을 전면 부정할 수 있을까?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떠나 그의 미론이 한국미를 밝히는데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는지, 본질에 근접했는지가 더 중요한 이야기일 듯싶다. 과연 야나기가 일본인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그의 미론에 대해 똑 같이 반응할까? 그가 제시한 조선예술에 대한 미론이 해방 50년이 지나서까지 왜 끊이지 않는 논란으로 계속 되고 있을까? 왜 우리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반대로 왜 우리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는 것일까? 그것을 단순히 식민사관의 잔재라고 할 수 있을까. 야나기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이 그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비뚤어진 자의식일 뿐이다. 적어도 한국 미론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야나기에게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은 야나기가 이야기한 조선예술의 특질인 비애미가 시대를 떠나 지속되는 한국미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조선후기의 예술에 있어서는 본질에 가깝거나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민족의 핵심적 감정이라고 단언할 수 없겠지만 ‘한(恨)’은 적어도 조선후기부터 근현대까지 존재했었던 중심감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시대에는 한을 넘어 흥과 신명으로 승화시킨 시기도 있었고 반대로 고통에 짓눌려 한으로 아로새겨진 시간들도 우리 역사에는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멋과 흥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겠지만 슬픔을 벗어나고 승화하기 위해 슬픔으로 빚어낸 예술작품도 있었을 것이다. 감정에 가치와 등급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슬픔은 미숙한 것이고 신명은 성숙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슬픔이 모두 기쁨으로 승화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가 병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부정’, ‘억압’, ‘회피’에 있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는 것’은 승화가 아니다. 한을 삭이는 것은 초극이 아니다. 왜 우리만이 ‘화병’이라는 독특한 정신적 질환이 있는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끌어내야 한다.

한국의 미를 생각하며 나는 일차원적인 접근은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민족 전체의 집단적 정체성, 통시대적인 미의식을 몇 마디로 규정짓기에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다면적이고 우리의 아름다움이 너무 모순에 찬 심오함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 시대와 어울리는 한국미를 찾아보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작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작업이겠지만 예를 들면,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 등 역사적 시기로 나누고 조선시대 속에서도 전기, 중기, 후기 등 어떤 식으로든 시기적 구분을 해서 미의식을 들여다보았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각각의 시대에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찾아내고 이어 전시대를 꿰뚫는 보편적 미의식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려 했다면 더 나았지 않았을까 싶다.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한국미이지만 단순화의 위험을 무릎 쓰고 굳이 한 가지를 고르라면 나는 ‘인간미’를 들고 싶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던 야나기마저 한국예술을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은 우리의 아름다움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인간미가 아닐까 싶다. 그 예들이 이 책속에는 너무 많다. 그리고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정신적 문제도 한국미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자연미속에 내포된 순응성’라고 생각한다.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이것이 현실에 안주하거나 체제에 순응하게 되는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그 순응성이야 말로 화병의 핵심적인 심리기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아쉬운 점이 있다.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 ‘소리(음악)’가 빠졌다. 우리의 음악 속에서 한국인의 미의식을 끌어내는 작업이 없어서 아쉬웠다. 우리의 소리를 좀 더 알아보았더라면 이 책은 더욱 빛날을텐데... 너무 아쉬울 따름이다.

그동안 우리는 식민사관 때문에 내 엄마를 엄마가 아니라고 거부하는 천륜을 어기는 짓도 했다. 낳고 길러주신 은혜마저 모른 척 했는지도 모른다. 그 반작용으로 우리 엄마만이 최고라고 생각했거나 엄마의 정신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 또한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의 편향을 주의하며 균형을 잘 잡아갈 때 우리는 세계사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다시 한번 말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습된 무력감(식민주의)을 끊어 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우리민족의 정체성, 중심 감정들의 큰 변화가 있어왔다. 하지만 이 작업이 자민족우월주의로 흘러서는 안 된다. 이 책은 그 위에 아슬아슬한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환부에 대해서는 애써 회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소 씁쓸한 느낌도 받았다. 물론 그러기에 앞서 우리를 더욱 사랑으로 끌어안는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시각에 대한 의사소통이 분명히 필요하다.

우리가 통합시켜야 할 것은 우리의 건강한 측면과 서구의 건강한 측면을 통합시키는 방향이어야지 우리 내부에 있는 건강하지 못한 측면까지 끌어안고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잡탕을 만드는 것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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