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김미영
  • 조회 수 3045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05년 7월 14일 03시 36분 등록
하얀 가면의 제국 (박노자 지음, 한겨레신문사, 2003)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 동방학부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춘향전의 나라'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다가 생계를 위해 시작한 번역, 여행가이드, 통역 일을 통해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며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나를 배반한 역사>,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하얀 가면의 제국>, <우승 열패의 신화> 등이 있다.

1부 하얀 나라를 아십니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 러시아>

“러시아인과 기타 슬라브 민족들이 서로 비교라도 될 만한가? 러시아는 슬라브의 각 민족보다 위대하고,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도 그들보다 위대하다. 거인이 난쟁이들에게 평등을 설교해봤자 쓸데없는 일 아닌가? 우리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은 영원히 우리만의 도시로 남아야 하고,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지역, 그리고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해협을 지키기 위해 육‧해군을 주둔해야 한다.”
이 정도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도덕성의 절대성과 인간의 심층적인 심리를 매우 깊숙이 아는 작가’로만 알고 있는 한국의 일반 독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념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광적인 수구주의로 기울어졌다고 해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천부적 재능에 고생과 고민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저변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외부의 훈육’에 대한 기대 심리, 국가 권력에 대한 거의 맹목적 시각 등을 제대로 이해해야 작가로서 그의 위대함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거인의 명암을 다 아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거인에 대한 존중이 아닌가 싶다.

노예로 부림을 당하고 수시로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해지는 제19사단의 병사들은 왜 인권을 주장하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 재학생이나 비공식적으로 약 8천 달러(한화로 약 1천만 원)의 뇌물을 줄 재력가(지방 도시는 2천~3천 달러)의 자식이 아닌 그들은 보통 사회의 최하층에 속한다. 체첸 전쟁으로 보내진 병사면 더욱더 그렇다.
2000년 봄 19사단에 들어온 6,531명의 신참 병사 중 1,590명이 ‘저능아’ 판정을 받았으며, 1,173명이 결손가정에서 자랐고, 480명이 상습적 마약 복용자이며, 930명이 ‘정신질환 환자’ 진단서를 갖고 있다. 그들 중에서는 초등학교 중퇴자로 대포 사용 설명서도 못 읽는 자들이 허다하다. 모두 충분히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을 만한 사람들인데도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빈민층에 속한다는 이유로 코카서스로 끌려간 것이다. 어디에도 호소할 곳 없는 그들을 폭력과 죽음의 위협으로 ‘체첸 야수들을 모조리 없앨 우리의 전사’로 키우는 것이다.

몇 해 전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대도시들에서 ‘스킨헤드’(즉 파시스트)라는 새로운 부류의 정치색 강한 불량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히틀러와의 전쟁으로 약3천만 명이 희생된 나라에서 히틀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외국인을 죽이는 부류가 생겼다니, 말 그대로 서산에서 해가 뜬다는 것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스킨헤드의 ‘갱’들이 방어 능력이 없는 외국인 학생들을 재미로 때려잡고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신의 좌절‧분노‧공포를 여러 형태의 아동학대로 푸는 것이 ‘자본주의를 건설하는’ 러시아의 뒷모습이다.

<유럽의 옷은 깨끗한가>

현재 세계 의류 생산의 약 5분의 1을 담당하는 중국. 저임금 노동력이 뒷받침하는 ‘눈부신 성장’은 중국의 관료, 기업인 엘리트와 중국에서 하청업체와의 거래를 통해 천문학적 이득을 챙기는 미국‧유럽 대기업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면 옷을 만드는 직접 생산자의 몫은 어떨까. 구미 대기업들의 하청업체들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절대 다수(90~95%)는 국내 이주 노동자, 즉 가난한 내륙 지방에서 해안 지방으로 당국의 허가 없이 이주한 사람들이다.

1년에 몇 만 건이나 되는 노동자의 과로사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하청업체 주인들과 지역 관료들이 뇌물‧특혜 거래로 유착된 중국 해안의 ‘개발도시’ 상황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역만리의 원귀가 된 시골 처녀의 해골 위에 중국 권력 엘리트의 부가 축적되고 중심부 국가의 풍요는 지속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는 수백만 명의 미국‧서구‧한국 시민들은 일주일에 80시간 일하며 쓰러지는 중국의 20대 초반 여성들의 손에서 나온 ‘세계적 브랜드’ 옷을 입고 다닌다.

세계의 소비 중심인 ‘선진국’ 시장을 거대 자본이 휘어잡는 한 세계의 생산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준주변부‧주변부 영세 자본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고, 주변부 노동자들은 절대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비뚤어진 불평등 구조가 중국 여자들을 16~17시간씩 일하다 쓰러지게 만든다. 그들은 50달러의 월급도 몇 달째 받지 못하다 죽어가지만, 의류 시장의 ‘왕’으로 군림하는 월마트의 최고경영자 데이비스 글래스는 1년에 45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 이것이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현실이다.

아직까지 세계에서 약 절반의 수출입 거래가 달러를 기준으로 이뤄지고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 외환 보유고의 3분의 2가 달러다. 그러나 국제금융계에 대한 유럽연합의 영향력 강화는 미국의 이와 같은 ‘제국의 잉여소득’을 크게 위협한다. 사실 이라크가 선두에 선 제3세계의 ‘반달러 친유로화 반란’은 미국에게 1천 개의 ‘알카에다’보다 더 위험하다. 만약 달러가 유로화에 밀려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20~30% 정도로 평가절하된다면, 미국의 국채와 증권에 투자된 엄청난 외국 돈이 빠져나와 미국이 드디어 국가 파산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라크의 유로화 선택이 미국의 침공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의 경우 미국 침략에 대한 개인적 반대 의지를 전국적 규모의 ‘달러 팔자’로 표명해도 어렵지 않은 이유는 유로화로의 전환이 이미 대세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외 거래의 40%가 유럽연합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반면, 미국과 이루어지는 거래는 8%에도 미치지 못한다. 종합적으로 대유럽 의존성이 강한데다 최근 미국 경제의 거품이 얼마나 큰지 언론 보도를 통해 눈치 챘기에, 이라크 침략이 없다 해도 러시아인들의 달러 보유 기피 현상은 어느 정도 나타났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외환 보유고도 달러가 주를 이루는데다 대미 수출 비율이 20%나 되니 ‘달러 제국주의’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타격을 입히지 못할 뿐 아니라 미국 경제 악화가 한국 경제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면을 버린 사람들>

전선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되도록 멀쩡한 몸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 생활인이었지, 신성한 전쟁에 몸을 바칠 ‘공산주의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을 ‘애국적인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과 군 당국은 일탈 행위를 무자비하게 처벌하면서 조금이라도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아주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신문‧라디오‧문학작품‧영화 등을 통해 ‘적개심과 애국심’의 분위기를 훌륭히 조성해내었다. 결국 일탈이나 다름에 대한 의식‧무의식적 공포와 사회적 분위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만들어진 정체성은 군인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희생할 욕구를 자아내게 했다. 나중에 사회학자로서 지노비예프는 그람시 못지않게 이 ‘만들어낸 합의’, 이념적 헤게모니 문제에 대해서 고심했다.

미시적 집단(패거리)을 기본 단위로 하는 병영국가에서 국가의 억압‧통제 기능의 상당 부분이 구성 집단에 이양됐다는 것이 소련 체제에 대한 그의 이해의 기초이다. 미시적 집단이 체제에 잠정적인 위협이 되는 비범한 인간들을 평범하고 무방한 수준으로 끌어내림으로 인해서 체제 전체는 그만큼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는 그 안정성의 이면에 있는 위기의 불가피성을 꿰뚫어본다. 미시 집단과 타협을 가장 잘하는 둥글둥글한, 개성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출세가 잘 되는 사회는 궁극적으로 장래가 밝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의 이론을 현재 우리 남북한 사회의 분석에 적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소련 체제의 위기와 붕괴를 정확하게 예측했던 지노비예프는 부시의 ‘무한한 전쟁’이 세계를 점차 잠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에 따르면 이슬람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러시아의 매판적 엘리트의 매수에 열중하는 미국‧서구는 러시아의 괴뢰화, 이슬람 세계의 무력화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 ‘대(對)중국 정벌’ 준비에 착수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괴뢰화된 러시아가 침략의 공범이 될 것을 우려하지만, 무엇보다 필자에게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한반도의 미군 기지들이다. 이미 반세기 전에 미‧중 충돌의 측면도 지닌 6‧25전쟁으로 쑥밭이 됐던 한반도가 미국의 새로운 침략으로 사막이 되는 것은 말 그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다.

2부 제국의 가면

<미국의 운명>

아시아‧태평양에서 패권을 놓고 벌인 태평양전쟁에 대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정전(正戰)’이라고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의 원자폭탄 투하는 적어도 인식이라도 하지만, 6‧25전쟁 때 북한 지역에서 수십만 명의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인 ‘융단 폭격’이라는 인종주의적 학살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베트남 신드롬’이라는,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는 용어는 40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 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열등 인종’에게 ‘천하무적 미국’이 패배했다는 ‘자존심의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핵전쟁 준비를 요구하면서 성경에 없다는 이유로 ‘온실효과’를 믿지 않아 교토협정의 파기를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사회 곳곳에서 큰 소리를 내지만,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그들을 비난하기는커녕 제대로 분석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제1의 적’으로 보는 미국의 보수적 지배층은 이슬람 근본주의보다 어떤 면에서 더 광신적인 기독교 근본주의를 ‘우군’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사이 교회 교류와 선교 등을 통해 기독교적 근본주의의 메시지는 점차 세계화되어 간다.

1983년 12월, 미군과 시리아군이 레바논에서 소규모 교전을 벌였을 때도 미국은 시리아에 대한 전폭적인 침략을 꿈꾸지 못했다. 그러나 부시의 ‘막가파’들에게는 제3세계 국가의 주권도 동료 열강의 영향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시리아 침공이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아랍권과 이웃 이란의 반미 열풍도 가공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겠지만, 차례로 이라크와 시리아라는 ‘위성국가’를 잃은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이 군비 확장과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부시 정권의 중동 침략은 얼마든지 3차 세계대전의 서곡이 될 수 있다.

<제국의 컴백, 폭격의 컴백>

인간 생명을 홍모(鴻毛)로밖에 여기지 않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나누어 먹는 시대에, 근대국가에 의한 어떤 살육도 ‘정당한 전쟁’으로 볼 수 없다. 상대 국가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자국의 프로파간다가 이용한다 해도, 억압 체제를 위주로 하는 근대국가 중에 인륜을 존중하는 나라가 원칙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유일한 ‘정당한’ 투쟁이 있다. 비인간성의 원천인 자본주의와 근대국가, 계급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비폭력 투쟁이 그것이다.

영국 통제 아래 1920년대 이라크에서, 폭격은 그야말로 가장 일상적 통치법이었다. 지금 미국이 ‘후세인 정권의 폭압’으로부터 ‘구출’했다고 선전하는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은, 영국 공군 폭격의 가장 대표적 목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쿠르드족 지역의 유전을 이미 확보한 영국이 쿠르드족의 자치‧독립 요구를 듣고 싶지 않았고, 독립의 의지를 무조건 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쿠르드족과 같은 야만인들을 폭격할 때 반드시 화학 가스를 사용해 그들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사람은 그 당시 영국의 식민성 장관인 윈스턴 처칠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받드는 ‘전쟁의 영웅’ 처칠이야말로 현재 미국‧영국 신문들이 ‘새로운 히틀러’라고 매도하는 후세인의 스승인 셈이었다.

1958년에 ‘괴뢰왕권’을 타도해 공화국이 된 이라크를, 미국‧영국이 이번 침략을 통해 재식민화하려는 셈이다. 즉 주둔군이 지켜주는 괴뢰정권을 다시 세우려는 기획인 듯하다. 식민주의로 인해 주체적 발전의 기회를 빼앗겨 황폐화된 이라크 시민들이, 지금 재식민화를 막기 위해 침략자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역사가 다시 한 번 후퇴하지 않기 위해, 이라크의 민중이 다시 한 번 식민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전 세계 양심 있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연대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미국, 영국 침략군의 철수를 요구해야 한다.

2001년 7월 9일치 <뉴스위크>는 북한을 ‘세계 최악의 국가’로 지정했다. 국가가 의료나 교육 서비스라도 제공해주는 북한이 그런 제공조차 전무한 콩고 같은 나라보다도 더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에 대한 집중적인 ‘악마화’ 작전을 펴고 있는 미국 매체들이 서술하는 북한 사회는 베버가 묘사했던 ‘동방의 가산제 국가’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들의 북한 관련 묘사법을 보면 베버식의 19세기 유럽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모방한 듯하다.

<유대인은 십계명을 지켜라>

내가 한국에서 매우 안타깝게 느낀 것 중에 하나는 한국인들의 노벨상에 대한 아주 특별한 ‘애착’이었다. 노벨상 콤플렉스……. 물론 이것은 제도권 교육과 언론들이 주입한 결과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를 팔아 번 돈으로 만든, 불투명하고 주관성이 강한 심사 과정을 통해 주어지는 그 상이 과연 그렇게 귀중할까? 물리학과 같은 분야의 노벨상 심사는 전문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자. 그렇다면 평화상을 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수상자들 중에서 테레사 수녀나 버마의 아웅산 수지처럼 교회의 자선 사업이나 자국의 민주화에 실제로 기여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수상자 명단을 훑어보면 평화상이 아닌 전쟁상을 받았어야 할 자들의 이름이 수두룩하다.

이스라엘 건국(1948) 이전부터 아랍인의 대량 학살‧추방 등을 주도해 수많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지금도 아랍인 차별‧억압‧학살의 선봉에 서 있는 이스라엘의 경력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단일성’ 신화를 바탕으로 한 억압‧배제‧차별의 구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대족의 문화적‧종교적 다양성과 아랍권‧아프리카 등 출신 유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범죄도 결코 만만치 않다. 19세기 말 유럽의 민족주의‧인종주의 이데올로기들을 모방해서 시오니즘을 생산한 것은, 유럽의 유대인인 아슈케나지(Ashkenazi)족이었다.

아슈케나지들의 이디시어와 그 언어에 관련된 풍부한 문학‧문화유산, 세파르디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여 법적 조치와 불법적 폭력 등 여러 가지 가혹한 수단으로 ‘시오니즘적 단일민족’의 허구를 실현하려고 혈안이 된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문화와 언어의 묘지다. 아랍인들에게 폭력으로 빼앗은 땅에서 허구적인 시오니즘 위주의 ‘국사’를 진실로 알고, 인위적인 히브리어를 쓰고, 3년간의 군복무 경험을 ‘동질성’의 주된 근거로 삼는 이스라엘의 ‘단일화된 국민’들이 살고 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의 문화와 인류 보편성의 원칙에 대한 반역이요 배신이다.

미국의 ‘주류’ 교과서와 각종 매체들이 주입하는 것처럼,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이 정말 세계사의 전대미문의, 유일한, 무비의 대형 범죄였을까? 물론 제2차 대전 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유대인 학살은 매우 끔찍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500년 동안 유럽 절대왕권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비서구권에 대해 저질러온 학살은, 제2차 대전 때 유대인의 비극을 훨씬 뛰어넘는 경우들이 많다. 유럽인들이 미주 대륙의 토착 인구에 쓴 무기와 이들을 노예화한 것, 그리고 새로운 유행 질환과 알코올에 의한 대학살이 그 예다.

이스라엘의 지배층이 미국의 힘에 의존할 수 있는 한 그들로부터 진정한 평화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족‧인권운동을 지원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진정한 평화를 촉진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 중 하나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아랍인들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근세 저항운동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똑같이 제국주의 침략에 희생된-그리고 지금도 희생되고 있는-한국인과 아랍인들이 서로의 아픔을 잘 알아야 제국주의를 받쳐주는 하나의 기둥인 ‘피침략자의 상호 무지’가 무너질 수 있을 것이다.

3부 하얀 가면을 벗자

<동양을 보는 서구의 눈>

야나기가 일본의 식민지 조선을 ‘슬픔과 몰개성’의 나라로 본 것처럼, 왕리슝은 중국의 식민지 티베트를 ‘신비와 공포의 나라’로 본다. 두말할 것 없이 “신비롭고 공포감에 찼다”는 것도 서구인들이 ‘합리적인 서구’와 대조되는 ‘오리엔트(동양)’에 대해 많이 써온 언설이다.
“식민지 시절의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일본 우파의 억지 주장 못지않게, 중국 쪽도 1950년 이후 티베트의 식민화를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계속 합리화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미 침략의 고배를 마신 한민족인 만큼 지금 같은 비극을 겪고 있는 티베트에 대해 관심을 갖고 티베트 인권운동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한다.

불교권 국가 출신을 제외한 미국의 약 80만 명의 불자 중에서 흑인은 불과 몇 천 명이라는 것이 미국 불교계 안팎의 시각이다. 불교권 국가 출신을 제외한 미국 ‘토박이 불자’들 대부분이 학창 시절에 불교에 흥미를 느낀 대졸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자비의 종교를 누구보다도 필요로 하는 구미 사회의 소수자들은 포교 영역의 밖에 있고, 구도(求道)의 열성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들만이 종교의 문에 쉽게 들어온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생하는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소비주의 사회의 관습대로 돈을 주고 산 종교적 경험을 자신들을 위해서 소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본 KOREA>

사실의 왜곡이 별로 없어도 그 사실의 취사선택만으로도 역사를 만든 사람이 무엇을 선언하고 싶었는지 느낄 수 있다. 현재 우리 입장에서 고구려나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 국가’로 여기려는 중국, 김일성 가문의 혁명 활동을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으로 삼으려는 북한, 식민화를 근대화의 은혜로 보려는 일본 우파 등의 모습은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과거 해석은 과연 이해와 이념적 지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운가?

1920~30년대 극소수의 지식인만 썼던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는 바로 박정희 집권기에 보편화됐다. 동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보면, 박정희‧전두환 시대 교과서의 ‘애국‧애족‧근대적 동학혁명’과 1960~80년대 민중 지식인들이 그린 ‘민중적 혁명가로서의 동학’이 혼합되어 있다.

120년 전에 한반도에서 중국이 누린 헤게모니를 지금 미국이 누리고 있다. 갑신정변 진압 이후에 군대를 철수한 중국과 달리 미국은 군대를 주둔해놓고 있다. 120년 전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던진 세력이 러시아와 일본이었다면, 오늘날 그것은 중국이 되고 있다. 배역은 달라졌지만, 한반도가 여러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 무대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은 그대로다. 기존 국가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도전세력을 자극할 수 있는 기존 패권국가 군대의 주둔을 피하고, 열강의 틈새에 있는 한반도를 중립화해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유길준과 1960년대 혁신계의 ‘중립화 통일’ 논리였다.

운동으로 인한 구속, 수배, 공장 취업 때문에 제때에 졸업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단 서울대 학적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그 학맥이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품안이 돼주는 셈이다. 극히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현재 한국의 진보정당 내에서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학연관계가 인선(人選) 등에 있어서 주요 결정 요인으로 부단히 작용하고 있다. 만약 주류사회의 학벌 구조가 진보사회 내에서도 그대로 정착돼버린다면 이것은 한국 진보 진영의 탈(脫)계급화와 궁극적인 보수화, 주류사회로의 포획을 의미할 것이다.

<하얀 가면을 벗자>

지중해 지역의 고대 노예제나 유럽의 중세 농노제가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 상당수의 다른 지역들이 거치지 않은 한계 많은 사회‧경제 형태였듯이, 현재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도 산업사회가 취할 수 있는 수많은 형태 중 하나일 뿐 지속 가능하거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현재의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의 속도로 봐서는 근본적인 체질 변화 없이 반세기도 못 갈지 모를 이 체제에 편입하는 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감탄하고 있는가.

요즘 유럽 관광여행을 떠나 파리나 런던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바라보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 중에서, 그 순간 서구의 웅장한 수도들이 서기 위해 비참하게 죽은 식민지 노예들을 생각해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서구 국가들은 대다수 한국인에게 세계적 규모의 가해자라기보다는 ‘우리가 따라야 할 발전의 모범’, ‘합리적이며 질서정연한 낙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프란츠 파농이 썼던 비유를 다시 이용하자면 우리는 하얀 가면(서구중심주의적 세계 인식)을 아직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체제 주변부의 개발주의적 엘리트들이 중심부를 동경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고, 토착적 자본주의 발전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순기능도 있다. 문제는 ‘위’를 흠모하다 보면 ‘아래’를 아주 쉽게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일본을 숭배하면서 ‘후진적인’ 중국을 멸시한 윤치호처럼, 식민지 약탈로 치부한 서구를 흠모하는 오늘날 베이징의 젊은 엘리트 인텔리들은 중국의 식민지인 티베트나 신장, 내부 식민지라 부를 만한 내륙 지방 농민들의 극심한 궁핍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멸시한다.

주요 외신들의 한국 관련 보도는 대체로 사실에 입각하지만, 문제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상당 부분의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반쪽 진실만 반영하는 기사는 독자의 한국관(觀)을 그릇되게 한다. 예를 들면 월드컵을 앞둔 지난 2002년 5월 13일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팬들의 찢어진 월드컵: 군대에 끌려갈 위험. 일부는 한국행 포기”라는,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장문의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의 주인공은 월드컵 현장에 가서 응원하고 싶어도 군대에 끌려갈 위험 때문에 망설이는 20대 재미 한국인 축구팬들이었다. 그러나 기사에는 젊은 재미 한국인들이 왜 이토록 군대를 기피하는지 일언반구의 설명조차 없다.

‘노예정신의 동양’과 대조를 이루는 ‘자유정신의 서양’이라는 담론의 구조는 비서구 지역 지식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체화한 서구 지배층의 자만(自慢)에 찬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본 존재론적 의미의 자유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선택권’을 뜻한다. 그러나 대다수 서구인들은 그들의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제도권 교육을 받고 취직하고 생산‧소비의 순환에 빨려드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서구 중심의 세계는 우리가 지나가게 된 하나의 단계일 뿐 인류 역사의 종점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이상적인 서양’이라는 그림을 말끔히 지워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 평등의 길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의 스승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이 글로 첫 장을 시작하는 박노자 교수의 「하얀 가면의 제국」은 우리나라가 근‧현대사에 겪었던 아픔들을 포함하여 다른 곳의 타자들의 고통과 그 고통의 뒷면에 있으면서 중심부 국가들에 의해서 가려진 세계 체제의 환부(患部)들을 보여주고 있다. 참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다 싶은 생각 끝에는 나는 뭘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나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의 현실을 읽어내는 대목에서는 부럽다 못해서 부끄러웠다. 어쨌든 세계를 보는 바르고 넓은 눈 하나를 만났다.

고통의 역사를 가진 집단이 그 역사에서 어떠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타자에게 공감하고 동등하게 인식할 줄 아는 지혜야말로 그 최고의 결실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새로울 것 없는 주장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책을 읽는 동안 냉탕에 들어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이름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많은 아웃사이더들과 그들의 역사를 더듬어 정리해 보여주는 시선은 친절하다. 아니, 날카롭다. 게다가 50년이 넘는 남북한 이산가족들 간의 통신두절이 국제인권법 위반이며 이들이 남북 두 정권을 국제법정에 제소할 수도 있다는 구절에서는 한동안 멍하기도 했다.

파시스트 조직인 '스킨헤드'를 정책적으로 보호, 양성하여 사회불안요소 발생시 러시아 정권과 고위층의 안전을 보호 하려고 하는 러시아 정부의 입장. 거대한 유전지대를 가진 체첸을 소유하기 위해 아직도 끝나지 않는 체첸 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 투르크메니스탄의 처절한 현황과 이스라엘 건국의 피비린내 나는 내막사. 2차대전시 독일군 포로들에게 가했던 고문, 살육, 징용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함구하면서 독일에 끌려갔던 포로들의 비인간적인 대접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유럽의 국가들. 식민통치에 허덕이는 티베트. 미국의 침략을 당하는 이라크나 침공의 위험에 직면한 시리아. 그리고 서구인과 서구인을 닮아가는 우리가 세계를 보는 일그러진 눈 등..

사고의 범위와 영역이 복잡 방대한, 참으로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들을 건드려가며 조목조목 정리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러시아인,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제3의 눈으로 예리하게 짚기로 이름난, 비판적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끝없이 묻고 있다. 이것은 그것과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왜 다른가? 그것은 본질적인 차이인가 아닌가?

한국인들은 왜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가.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왜 체첸문제에 대해 무관심한가. 러시아 푸틴 정권에 대해서 왜 비판하지 않는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왜 성공으로만 평가되는가. 후세인은 정말 추방돼야 할 시대의 사탄인가. 북한은 정말 유교적 왕국인가. 영국과 프랑스 등 소수 서구 국가들의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과연 역사의 보편적인 모델인가. 미국과 유럽 사회는 우리의 미래인가.
그리고 또 묻는다. 그 시선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 시선을 만들어낸 곳은 어디인가.
이 근원적인 질문에 나는 무슨 대답을 들려주면 좋을까..
아마도 내가 쓰고 있다는 하얀 가면을 벗어 놓는 것이 그 시작은 아닐까 생각한다.



IP *.224.55.112

프로필 이미지
김영철
2005.07.15 14:01:25 *.238.71.233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또 다른 시야를 주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김미영
2005.07.16 12:15:37 *.224.55.112
반갑습니다..^^
제게도 또 다른 눈을 갖게 해 줬죠..
남겨주신 글..고맙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