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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1일 01시 00분 등록
화인열전 1, 2 -유 홍준 지음-


< 책에서 캐낸 글맥 >
화가의 전기는 인물사로서 미술사이기 이전에 인간학으로서 미술사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에게 신념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문학의 줄기는 문화사이고,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학이며, 미술사학의 열매는 예술가의 전기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화인열전은 인문학의 실천으로서 미술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1. 연담 김명국: 아무도 구속할 수 없던 어느 신필의 이야기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오묘하고, 크면 클수록 더욱 기발하여 그림에 살이 있으면서도 뼈가 있고, 형상을 그리면서도 의취까지 그려냈다. 그 역량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으니, 그가 별격의 일가를 이룬즉,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

2. 공재 윤두서
그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회화관과 새로운 화법에 입각한 새로운 경향의 그림을 제시한 한 시대 회화의 선구였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면확히 인식하면서 대담한 자기 결단과 자기 갱신으로 종래의 화가들은 생각지도 못한 ‘속화’까지 그리면서 18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길을 열었다.

그의 회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남종문인화의 적극적인 도입이고, 또 하나는 ‘속화’라는 리얼리즘적 장르의 개척이다. 회화에서 그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배경처리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남아 있어 주인공의 리얼리티가 그만큼 약하게 표현됨으로써 아직 관념의 태를 확연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3.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인물화의 대가로 그가 이룩한 예술 세계는 한마디로 사실정신과 선비정신의 만남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비약해서 말하면 단원은 서민의 심성에서 서민적 정서로 그렸다고 한다면 관아재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서민의 삶을 관조하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화가로 비유하면 오윤은 단원에 가깝고, 박수근은 관아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관아재의 그림에는 사실성과 함께 현실성이 흥건히 배어 있고, 나아가서는 조선적인 것을 추구하는 민족적 화풍이 있었다.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복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4. 겸재 정선
그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고, 또 그것은 후대에 두고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실경을 즉물적으로 사생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이형사신(以刑寫神)의 미학에 있다는 것을 <박연폭도>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해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5. 현재(玄齋) 심사정: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현재는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 분으로 관념적 화풍의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의 국제적 조응력을 한층 끌어 올렸다.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쇠외되었던 심사정은 겸재처럼 사생의 현장인 천하명승을, 관아재처럼 속화의 현장인 시정을 활보하면서 다닐 처지가 못 되었다. 현재로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화폭에 옮길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긍정이나 애정이 있기 힘들었다.

그는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진경산수나 속화의 박진감과는 또 다른 미감의 세계, 즉 그림 속에서 차분하고 명상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 고양과 정서의 환기 작용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6. 능호관(凌壺觀) 이인상: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모든 문인화가들은 기본적으로 시서화가 분리되지 않는 경지를 지향하지만 능호관처럼 그것이 일치된 예는 아주 드물다. 그의 그림은 문인적 삶의 표현이자 인격의 드러냄이었다. 그의 문인화는 문인화풍을 그렸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문인적인 삶이 그대로 농축되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다른 화가들과 다르다.

서양미학에서는 하나의 작품 세계에서 그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 서양 미학에서는 비과학적인 설명이라고 외면할지 모르지만 동양미학에서는 모두가 심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지고의 미적 덕목인 것이다. 그림이 인격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은 문인화라는 독특한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말하는 아마추어리즘과 달리 직업화가가 아닌 교양 있는 문인들이 프로다운 기량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직업화가와는 전혀 다른 미적 가치를 나타낼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문기(文氣)이고, 문기는 곧 인격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격조라고 했다.

7. 호생관(毫生館) 최북: 붓으로 먹고 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낭만적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흔히 예리한 감성은 이성의 힘을 능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호생관에겐 그런 호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감성이란 이성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는 사실상 객기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낭만적 반항의 허점이다. 그런 면에서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을 더 더욱 몰랐다.

8. 단원 김홍도: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정조시대 문예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단원의 작품에 가짜는 있어도 태작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자기 작품에 책임을 졌다. 단원은 사물을 형상적으로 인식하는 감성적 인지 능력이 뛰어났고, 그것을 작가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재창조하는 구성력이 탁월했다.

그 동안 공재, 관아재, 강희언 등이 그린 속화는 서민을 그렸건 사대부를 그렸건 대상을 관조적으로 파악한 것이었음에 비해 단원의 속화는 서민의 심성으로 파고들어 거기서 나온 그림이니, 단원은 그 말뜻의 참된 의미에서 진실로 민중화가라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그 대(對)가 있을 때 본체가 더욱 자명해짐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단원이 행동파라면 혜원은 심리파이고, 단원이 본질파라면 혜원은 무드파이다.

나는 단원의 남다른 천재성을 생각해본다. 그는 남들과 나누어 쓸 수 있는 폭 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는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는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을 남들과 분유(分有)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양식을 창출하는 데 발휘했던 것이다.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상이다.


<감상! 그리고 내가 저자라면 >

나는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잘 그리지도 못했고 좋은 그림이 무엇인지 구별해낼 안목도 없다. 하지만 남도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주변에는 그림이 많았다. 특히 동양화 그림. 우리 집만 해도 갖은 액자, 병풍, 도자기 등이 집안 곳곳에 있었다. 아버지는 값 나가는 그림들은 깊숙한 곳에 따로 보관하고 계셨는데 솔직히 나는 그 그림들이 왜 값어치 있는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남농 허건, 의제 허백련 선생 등의 작품이었는데 그분들께 죄송하지만 아마 지금 보아도 그 값어치를 읽어내지 못할 것 같다.

한 귀퉁이에 알 수 없는 한시들이 쓰여 있고 세속을 떠난 산수에서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이 점경인물로 등장하는 그 그림들이 나에게는 도대체 구분되지 않았다. 막눈이어서인지 몰라도 정말 한 작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어린시절부터 동양화는 내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과연 내 또래의 세대들이 자라나도 과연 그러한 작품을 고가를 주고 살 사람들이 있을지 심히 의심이 들었고 그런 작품을 소장하는 사람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화인열전을 보면서 정말 내가 얼마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경험을 했었는지 알게 되었다. 중국풍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선의 정신과 숨결을 불어넣어 조선의 화풍을 만들어 나간 여덟 화인들의 삶과 작품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저력을 느꼈다. 이 작은 땅덩어리의 작은 민족이 그 오랜 세월동안 흡수당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끝없이 유지해오고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새삼스레 대단하게 여겨졌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작가와 그림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지만 그 작가들의 성장과정과 삶의 배경도 알게 되어 더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서 좋았다. 소개된 여덟 사람이 모두 좋았지만 역시 제일은 겸재였다.

그림은 현실을 묘사할 수도 있다고 본다. 기록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면 예술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술로서의 그림이란 현실의 사생(寫生)이 아닌 작가의 마음에 반영된 사심(寫心)으로 그려져야 하며 대상의 이면을 꿰뚫거나 재해석하는 사사(寫思)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형사신의 미학으로 소개된 정선의 그림은 역시 제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 속에는 저자가 일권의 부제로 달았던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라는 화인의 의지와 열정이 스며있다. 한여름의 녹음과 나무를 감고 올라가 하강하는 넝쿨의 묘사가 으뜸인 <인곡유거도>는 이 여름의 무더위를 일순간 잊게 해 주었다. 남의 나라 산이 아니라 정말 우리나라 바위산의 특성을 장쾌한 필치로 잡아내 탄성을 짓게 하는 <인왕제색도>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교과서에 소개가 되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연담 김명국의 작품도 새롭고 묘한 느낌을 주며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특히 <박쥐를 날리는 신선>, <죽음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단원은 그림보다도 사제관계를 보며 그 만남에 감탄하였다. 특히 사제의 합작품인 <송호도>를 나란히 그리는 모습을 연상이라도 할라치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옛 건국신화나 큰 역사적 사건을 그려낸 화가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신화나 대서사시와 같은 그림이 있다면 그 느낌이 남다를 텐데 너무 자연과 풍속만을 소재로 그림들이 그려진 것 아닌가 싶어 그 소재선택의 다양성이 아쉬웠다.

너무나 일천한 학문적 토대위에서 조선 회화사 연구에 큰 획을 남긴 저자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이 출판을 계기로 그 자구적 해석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오류를 지적해준 많은 학계의 인사들이 좀 더 학문의 대중화에 힘써 주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저자가 문화재청장이 되고 나서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좀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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