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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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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1일 12시 33분 등록
도서정리 - 화인열전

3. 인용

1. 연담 김명국 - 아무도 구속할 수 없던 어느 신필의 이야기

신필이란 천재성과 기존의 격식을 뛰어넘는 기격이 뒷받침되어야 붙여지는 칭호이다.
김명국, 장승업 오직 이 두 명만이 신필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오직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필력이 굳세고 묵법이 중후하며 배움을 더하여 얻은 바 무상의 상을 취할 수 있었으니 당당한 명가이다. 기질이 거칠고 호방하여 마침내 환쟁이의 나쁜 버릇을 떨쳐버렸으니 이야말로 화단의 이단이었다. -공재 윤두서의 평에서

김명국은 화단의 흐름을 거역하고 홀로 개성을 지키면서 술과 그림으로 살아가는 예술적 오만이 태작을 남발하는 부정적 요소로서 작용하였던 셈이다.

호방한 필치, 거칠고 분방하다는 특징, 호방한 기상, 힘차고 대담해진다.

그는 무엇이든 취흥에 따라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 그는 시류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그것이 김명국의 영광이다.

2. 공재 윤두서 -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내력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그때의 현실적 과제가 무엇이었고, 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처신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실수 없이 집어낼 수 있겠지만, 바로 그때 그 순간에 그렇게 향동하는 삶은 매우 적은 법이다. 이런 이를 일컬어 선구라 부르는 것이며 그렇기에 선구자에게는 남다른 외로움이 있고, 망설임 또는 기다림의 고뇌가 뒤따르곤 하는 것이다.

본래 자화상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의 자의식 없이는 그려지지 않는 장르이다.
그렇다면 공재가 ‘불변의 증명’으로서의 초상인 자신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꿋꿋한 선비로 살아가고자 했던 의지와 자신의 뜻을 좀처럼 실현하지 못한 선각자의 쓸쓸한 고독이었다.

반계-공재-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한 줄기에 공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재는 화가이기 이전에 당당한 실학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염증을 느끼고, 그것을 버린 지 수년이 되었다. 이제 옛 화첩을 펼쳐보니 기운이 약하고 힘이 없으며 불만스러운 것이 많다. 잘된 부분이 나온 때도 있으나 대체로 화도에서 보면 보잘 것 없다. 정말로 이를 이루기가 그리도 어려운가. 공재가 자평한다.

회화에서 그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공재가 간접적으로 조선 후기 회화 전체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다.
속화는 그가 개척한 바를 관아재 조영석과 단원 김홍도가 계속 발전시켜 마침내 가장 조선적인 장르로 완성된다. 또 그가 시도한 문인 화풍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조선적으로 정착되었다. 또 그가 시도한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에 의해 완성을 보았다.

3. 관아재 조영석 -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은 영조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분으로 인물화에서는 당대의 제1인자였다.

무릇 시는 성정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며, 그림은 문장과 글씨로 해낼 수 없는 것을 이루는 것이니 진실로 취할 바 있다. - 그림이 지닌 정서적 가치와 사회적 효용에 대하여

사대부로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시·서·화가 있었다. 그것은 관아재가 인간적 역량과 자기를 실현하는 보람이었다.

왕의 병중이 심중하여 투약을 의논해야 할 처지라면 까닭없이 사양하고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만일 사대부로 하여금 반드시 고름을 빨고 치질을 핧으라고 한다면 아무리 왕의 병환이 위중하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있겠는가? 의리에도 모름지기 경중이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보고서 그림을 베끼는 것은 잘못이며,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

송의 정협은 기근으로 인한 유민들의 참상을 아뢰기 위해 [유민도]를 그려 바침으로써 신종을 감동시켰는데, 그림보다 나은 것이 없었는가?

마음껏 수묵을 쳐내니 원기가 웅혼하고, 좋은 그림 이루어질 때는 온갖 근심 사라진다네.

관아재는 스스로에게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한 원칙이 있었다. 四慾論이 그것이다.
生慾, 色慾, 官慾, 財慾이다.

관아재가 남긴 노년의 최대 명작은 [설중방우도]이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관아재 작품 중 가장 큰 대작으로 그 묘사의 사실성, 소재의 현실성, 인물의 조선풍, 그림 전체에 풍기는 문기로 한국회화사상 불멸의 대작으로 손꼽힌다.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조선적인 산수는 겸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한다.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조선적인 인물화는 관아재로부터 시작되었다.

4. 겸재 정선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는 줄곧 민족적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 그러니까 진경산수는 율곡학파가 추구한 조선 고유색의 결과라기보다 병자호란 이후 국제적 질서의 변화속에서 생긴 새로운 문화적 자각의 결과였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겸재의 이름과 공적은 그림이라는 천한 재주에 있었지 사대부로서 명망과 경륜에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 신분 질서에 대해 아주 보수적인 사대부 입장에서는 그림 그리는 것을 모두 ‘잡로발신’으로 볼 수 있었다. 다만 관아재와 표암은 조심했고 겸재는 그런 것에 대의치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그림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예술적 열정과 의지가 있었다.

겸재가 섣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작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 평가란 준엄한 것이다. 또한 역사적 평가란 너무 잔인하고 때론 경박한 면도 없지 않다.

위대한 장편소설은 어느 쪽을 펼쳐 읽어보아도 재미있고, 위대한 건축은 외형 봇지 않게 내부가 아름다우며, 위인의 삶은 선이 굵은 만큼 작은 일에도 따뜻한 마음씀이 있다는 것을 이 [금강전도]에서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겸재는 그림에 관한 한 그런 위인이었다.

금강전도는 사실寫實에서 사의寫意로 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겸재 진경산수의 가장 큰 매력이며 미학이다. 실경의 사생화寫生畫가 아니라 실경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한 이형사신以形寫神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대상에 충실하면서 박진감을 잡아낸 작품이라면, [박연폭포]는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사실성을 뛰어 넘어 곧바로 회화미로 나아간 명작이다.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선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 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한국미술사상 이런 위대한 화가는 겸재 이전에는 없었고 겸재 이후에도 그와 짝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단원 김홍도가 있을 뿐이다.

5. 현재 심사정 - 고곡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딱다구리] 심사정의 능숙한 필치와 완벽한 구도, 뛰어난 설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미술사의 기념비적 명작이다. 그림 전체에 감도는 맑은 서정의 뒤쪽에서 어딘지 고독의 그늘이 느껴져 그림에는 조용한 명상적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국제적 유향 양식을 추종하는 것에 급습하여 자기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음에 비해, 수화 김환기와 고암 이응로가 보여준 예술 세계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가장 빛나는 부분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듯이,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6. 능호관 이인상 -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진경산수에서 겸재 정선, 속화에서 단원 김홍도라면 문인화에서는 능호관 이인상이다.

능호관의 [설송도]를 보면 그림이 담박하고 고아할 뿐 아니라 그림의 기술면이 그림 속에서 조금도 강조되지 않고 무슨 묘한 심회랄까 하는 인상이 풍깁니다. ... 선비 그림의 본도는 그림에 기량·솜씨가 보이면 속하고 천하다고 합니다. 소위 화가다운 능숙한 맛이 있어야 그림이 좋을 것 같은데, 선비의 그림은 그런 능숙, 혹은 화가다운 태가 나면 부질없다고 여깁니다. 그림을 못 그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충분히 심의를 전할 만한 기술과 화법의 능숙이 있어야 되지만, 그것이 눈에 띄면 안 되고 고결한 선비의 품격을 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림에 능하긴 차라리 쉬워도 능하면서도 능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여느 선비 하가나 더군다나 환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 이동주선생의 말중에서

7. 호생관 최북 -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최북은 스스로 호를 지어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다. 즉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낭만적이고 어찌 보면 겸손함이 어린 대단히 멋있는 호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 속사정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먹고살 것이 넉넉한 문인화가가 이런 호를 썼다면 멋이라 하겠지만 천한 신분에 빈한하기 짝이 없었던 최북이고 보면, 호생관이란 “나는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쩔 테냐”라는 저항적 냉소가 서려 있는 것이다.

[공산무인도] 호생관의 그림 중 최고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호생관의 거침없는 성격이 작품상에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는 이처럼 모든 규약으로부터 일탈한 선화의 경지에로 나아가곤 했다. 반행半行의 흘림체로 쓴 화제 또한 그림 못지 않은 울림을 갖고 있는데 그 내용은 “빈 산에 사람이 없으나, 물은 흐르고 꽃이 피네”이다. 그러나 호생관의 이런 명작이 아주 드물다는 데 이 기인의 불행이 있다.

8. 단원 김홍도 -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사람들은 단원 김홍도라 하면 대개 뛰어난 풍속화가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김홍도가 이룩한 예술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 겸재의 진경산수, 공재와 관아재의 속화, 현재와 능호관의 문인화를 모두 소화하여 끊임없이 연찬과 수련 속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냈다. 그리하여 그를 일컬어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가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 정조시대 문예 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표암의 말을 요약하면, 처음에는 사제 관계로 만났고, 중간에는 직장의 상하 관계로 만났고, 나중에는 예술로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나이를 반으로 꺽는 ‘절년이하지折年而下之’하면서 나이를 잊고 지내는 벗[망년지우忘年之友]으로 지냈다는 것이다. 단원에게는 그런 스승이 있었고, 표암에게는 그런 제자가 있었다.

담락재湛樂齋 : 담담하게 즐기는 서재

조선시대에는 많은 기록화가 제작되었다. 카메라가 없던 시대에 그림이 기록과 기념의 기능을 대신한 것이다.

40대까지는 수련과 연찬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50대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가들의 이런 모습은 이 시대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단원의 작품에 가짜는 있어도 태작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자기 작품에 책임을 졌다.

그는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는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을 남들과 분유分有하고 공유公有할 수 있는 양식을 창출하는 데 발휘했던 것이다.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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