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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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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11일 23시 23분 등록
21세기 우리문화 (주강현 지음, 한겨레신문사, 1999)
우리문화 백년, 왜 법고창신인가

< 머리말 : 21세기 우리문화를 위한 헌사 >

백여 년 동안, 우리문화는 ‘부인된 문화’였으며, ‘강간당한 문화’였다. 그 쓰라린 첫경험의 역사적 뿌리는 깊고도 넓다. 따라서 백인우월주의의 강요된 교육을 벗어나려 했던 토박이 흑인들처럼, ‘식민의 시대, 제국의 시대, 손님의 시대’를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에게 20세기 후반은 여전히 차압당한 ‘분단시대의 문화’일 뿐이다. 포박당한 불안한 삶의 뿌리가 바로 19세기 말의 서세동점해 온 ‘서양 손님’에게서 기인함을 감지한다. 오늘의 우리문화를 규정짓는 깊디깊은 왜곡의 연대기를 점검하면서, 죽음의 문화에서 삶의 문화로 전환되길 간구한다.

나는 늘상 세계를 꿈꾼다. 수년 전의 시베리아 기행에 이어서 금년 여름에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민중 생활사를 연구하러 떠난다. 내가 주장하는 우리문화론은 복고나 국수와는 애초부터 관계가 멀다. 지난 100년간의 우리문화 결산 보고서는 적자투성이지만 이를 새롭게 법고창신(法古刱新)해야 한다. 전통은 무기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무기가 자신을 겨누는 독화살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전통을 포기하고 들여다 쓰는 ‘수입 오퍼상’ 노릇에 급급한 ‘문화 식객’들에게 나는 관대하고픈 생각이 전혀 없다.
‘손님의 시대는 끝났는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한 탓에 나의 우리문화를 위한 헌사가 끊임없이 쓰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1장 시베리아 가는 길

문화란 무엇인가. 지난 20세기 백 년 동안, 우리는 제1세계 중심의 유형문화관에 중독된 채, 오랜 기간 우리의 민중들이 의탁해 온 무형의 문화를 망각해 왔다. 구전 역사의 연연한 맥락을 포기하는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민속학은 이 부분에 대해 진지한 답변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나는 역사민속학을 일생의 업으로 이어나가면서 우리 역사에서 구전 역사의 힘, 그 힘의 근원지에서 한민족 문화의 원형질을 추적해 보고자 하였다.

지난 1세기는 바로 제국의 시대였으며, 시베리아 문화가 러시안에 의하여 ‘도륙’당하였듯이 우리문화 역시 서구적 문화관에 ‘도륙’당하거나 ‘마취’당하여 깨어날 줄을 모르고 있다. 더욱이 분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오로지 남한사회라는 갇힌 ‘섬’에서 꼬무락거리면서 ‘쪼잔한’ 문화관만을 양성해 왔다. 참으로 쪼잔해졌다! 북쪽으로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는 대륙적 안목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문화의 원형질을 볼 수 있겠는가.

제2세계였던 사회주의의 문명관도 진화론적 시각에서 한치도 못 벗어나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제3세계는 어떤가. 수많은 제3세계 역시 제1세계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으며, 제1세계의 근대화 모델을 따라서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 서구 모델을 고스란히 본따고, 이를 따르는 길만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믿게 된 우리는 이제 자신의 것을 방치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아시아의 많은 산림을 축내며 “늦게 배운 도둑이 더한다”는 격언을 실천하고 있다.
제1,2,3세계의 구분이 불필요할 정도로 과학기술 혁명에 힘입어 세계화가 이루어졌다고 말들 하지만 아직도 평등한 세계화의 길은 요원할 뿐이다. 우리가 정체성을 찾는 작업의 정당성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우리문화의 정체성 찾기에 유통기한은 없다.

우리문화의 밑바탕은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무형의 문화다. 높은 첨탑, 광대한 성벽, 드넓은 건축군 따위의 유형에서만 모든 문화적 가치를 준거하고, 문화적 우월성을 평가하는 잣대로는 우리문화의 원형질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형의 문화를 모르고서야 어찌 우리문화의 뿌리를 알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시베리아의 사크흐라 축제를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의 축제가 사라진 문화, 거대한 빌딩과 오로지 생산과 소비라는 화두로 환경을 파괴하는 장치들로 가득 찬 ‘속도전 숭배의 문화’가 어찌 21세기의 희망이 될 수 있겠는가.

근대화를 핑계로 천 년을 이어온 초가집 전통을 수년 만에 ‘싹쓸이’하였으며, 88고속도로 건설은 강압적 사회건설 분위기 속에서 매장 문화재 유적조차 보호하지 않은 채 수천 년 동안 보존되어 온 문화유산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강남 곳곳이 백제문화의 터전이었으나 강남 신도시 건설로 아파트 숲에 잠겨버렸다.
이제 우리에게는 흔히 ‘문명’이라고 예찬해 왔던 것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조금은 불편한 삶을 살겠다는 용기, 즉 ‘야생의 사고’가 필요하다. 제4세계의 현장에서 서구 중심 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명관을 발견했듯이, 우리 자신이 지난 100년간 범한 오류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판독해야만 하고, 21세기에도 생동감 넘치는 문화로 이어나가야만 한다.

2장 첫경험, 슬픈 연대기 - 백 년의 약속

지난 세기의 반성을 시작하면서 서구에 의한 강간을 화두로 올린 이유는 지난 100여 년간이 ‘제국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21세기 세계화의 담론이 무성한 가운데, 과연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서세동점하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서세동점은 용어를 다소 수정하였다. 세계화라는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서세동점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계 단일문화 체제를 만들어내려는 전략으로 고도화되었고 재편되었다.

식민 지배자들에게 광대한 제3의 대륙들은 야만인의 소굴이며, 미신과 광신에 사로잡힌 대륙이며, 신의 저주와 압박을 타고난 곳, 심지어는 식인종의 땅이었다. 식민지 전(前)시대를 인류의 암흑시기로 보는 식민주의자들의 관념은 전일적인 것이었다. 강간의 결과, 수많은 사생아가 만들어졌으며, 우리는 그들 사생아를 ‘새로운 문명’이라고 칭하였다. 그리하여 ‘식민의 시대’ ‘제국의 시대’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서구에 길들여진 익숙한 교육, 세련되고 효과적인 교육으로 말미암아 제3세계 민중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급격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분명 독자성을 지닌 선진문명이었다. 선진문명을 침범하는 식민화 과정이었기에 인디언 문명처럼 집단 혼혈이 생겨나고 방황하고 흩어지는 식의 멸종은 그나마 면하였다. 그러나 제1세계의 세계관을 극히 짧은 시간에 학습하고 모방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면서 우리의 20세기는 결정지어졌다. 20세기 반절을 식민지 나라로 보냈으며, 해방 이후 50여 년은 분단의 나라로 보냈다. 여전히 분단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우리문화도 식민과 분단의 절망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 문화의 시대, 21세기의 담론을 주창하는 순간에도 사실 한반도의 정치적 환경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결국 전통으로 되돌아가게끔 한다.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인식의 지평은 늘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일로 나아가는 데 하나의 뛰어난 교훈, 하나의 확실한 모범을 보여준다.

3장 동도서기와 문명개화 - 백 년의 경험

“한국인은 도대체 기록을 남길 줄 모른다.”
과연 그럴까. 나는 그같은 비판이 다분히 일제 식민사관에서 조장되었다고 믿으며, 실제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기록화가 훼절되었다고 본다.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거치면서 무언가를 기록에 남기는 행위는 훗날에 ‘결정적 증거’로 둔갑할 수도 있음을 반드시 고려해야 했다. 본디 우리는 기록에 철저하였다. 수많은 의궤들은 세세한 과정 하나하나를 글과 그림으로 담고 있다. 민중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별반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문화적 지향성이 일견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 자체를 하지 않는 민족은 결코 아니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우리들 기록문화의 정수 중의 정수요, 우리들 자부심의 보루다.

동도서기론은 사실상 조선 후기의 유교적 지식인들이 벌였던 서학과 서교 논쟁의 연장선이다. 물질문명은 서구 것을 받아들이되, 정신문명은 동양 것을 지키겠다는 논리다. 실학파로서 서학을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수용을 본격적으로 주장한 성호 이익은 천주교에 대한 유교의 우월성을 믿고, 과학에서는 서양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동도서기론의 초보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당대의 실학자들은 편차는 있다손 치더라도 대개 동도서기론 입장에 서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한 생존경쟁, 우승열패, 적자생존 등 약육강식의 논리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으로 수렴되었고,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19세기의 사회진화론은 사회의 현상유지와 함께 제국주의와 자유방임적 경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진화론의 자연도태라는 개념이 인간 행동에 적용되었을 경우, 공격성은 선천적이면서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이는 인류로 하여금 누가 더 강하고 생존에 적합한 인종, 혹은 사회인가를 결정하는 투쟁에 몰두하게 하였으며, 그 덕분에 문명은 더욱더 진보하는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심어주었다.

제국의 시대에 우리의 민중이 선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최선의 선택’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당대 민중이 선택한 ‘차선의 선택’인 동학과 항쟁의 길이 유일한 ‘최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시대에 처한 민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개화파건 위정척사파이건 간에 당대 지식인들은 대개 우리문화를 미개하고 낙후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물론 당대 우리문화는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했고 전근대적인 풍습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 민중들은 이미 수많은 항쟁을 통하여 유학자 일반의 논리와는 다른 민중의 힘을 확인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민중의 힘은 우리문화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녹아 있었다.

두레는 조선 후기 이앙법의 확산과 더불어 새롭게 정착된 조직이었다. 두레는 풍물굿을 변화 발전시켰으며, 풍물굿은 20세기 말까지도 우리문화의 가장 힘 있는 축이 되고 있으니, 풍물굿에는 조선 후기 두레의 힘찬 역동성이 반영되어 있다.
당대 민중들의 대동놀이는 결코 고립 분산적 놀이가 아니라 각 자연 마을 상호간의 통일적 세계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삶의 약동을 발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약동을 억압하는 적대적인 세력과의 싸움에 이르는 여러 생산주체들의 대동문화였다.

4장 조선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

우리문화에 대하여 엄청난 편견을 가졌던 서양인 선교사, 특히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문화 파괴에 미친 영향을 밝힘으로써, 오늘날에까지 한국 기독교가 우리문화와 화합하지 못하는 여러 요소들의 뿌리가 바로 그들 미국계 선교사로부터, 더 나아가 그들로부터 ‘길들여져 온’ 사람들에 기인한다는 점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1893년에서 1983년까지 한국에 머물렀던 선교사는 1,952명으로 그 중 약 1,710명이 미국인이고, 미국인 가운데 637명이 해방 전에 입국하였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는 전체 외국인 선교사의 약 87.6%를 차지하였다.

우리는 과거의 한국이 미, 영, 일의 합의 아래 일본 식민지로 낙착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며,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가 제국주의 세력과 무관하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민중들 입장에서는 교회 입문이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는 대리 효과이기도 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내몰린 민중들은 교회문을 두드렸으나, 교회는 더욱 사회적인 무관심을 표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부흥운동은 이후 한국 교회의 성장과 교세확장에 매우 큰 힘으로 작용하였지만, 민족사적 견지에서는 교회가 보수성을 띠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01년의 정교분리 원칙과 더불어 대부흥운동은 세상사와는 무관하게 천당과 교회만을 강조하는 신앙형태를 조장하였고, 교회의 비정치화와 민족적 관심의 약화로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중시하는 신앙인들을 배출하는 역작용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일제 침략기에 한국 민족의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킨 몰역사적 성격이 분명히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군정시기에 영어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선교 초기부터 교육사업의 주요 내용 중에는 어학훈련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어에 능통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들은 바로 등용되었다.
그 대부분은 상당히 보수적인 지주나 상인으로서 일제 치하에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일본에 협력한 자들이었다.

선교초기에는 늘 오류가 있는 법이다. ‘문명개화꾼’으로 민족적 삶의 양식을 내던진 오류는 분명히 존재한다. ‘개화꾼’의 역할을 왜 한국 교회는 20세기 말까지도 완강히 고수하려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에서 민족의 삶에 기초한 장승제 따위가 ‘박해’를 받고 있으며, 단군 조각품의 목이 처참하게 잘리우고 있다. 나는 한국 기독교가 우리문화에 대한 ‘박해’를 가할 어떤 명분도, 권한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한국 기독교와 우리문화의 관계에서 우리들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21세기 우리문화와 한국 기독교의 ‘희망과 연대’를 위하여 함께 나아갈 수는 없을까.

5장 백인이 되고 싶은 제국

우리는 일제의 조선 병탄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조선을 병탄하기 이전에 풍부한 식민지 경영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북방의 토박이면서 소수민족이었던 아이누족의 자유로운 천지(아이누모시리) 홋카이도를 점령하였다. 홋카이도는 일본 식민주의의 첫 실험장이었다. ‘식민지’라는 말이 처음으로 홋카이도에 쓰여졌다. 높은 산과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껏 자유롭게 살던 아이누족은 야만의 족속으로 밀려나면서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서구를 닮고 싶어 안달이 난, 백인 콤플렉스에 걸린 황인종’,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으로 서구로 편입되기를 희망하였던 제국, 같은 아시아이면서도 아시아이기를 거부하고 동양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성을 부르짖고 싶었던 제국, 아시아를 거부하면서도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어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었던 제국, 탈아입구론을 주장하면서도 다시금 대동아공영권의 희망을 잊지 못하여 탈구입아론에 경도되는, 스스로 헷갈리는 제국, 그러면서도 자신이 속한 아시아 대륙에 발붙이지도 못하고 해양세력 미국에게 포섭된 제국……. 그러한 일본에도 오늘날 미력하나마 오키나와해방동맹이 있고, 아이누해방동맹도 있다.

조선사편수회가 1922년 12월 총독부 훈령 64호에 의거 설립됨으로써 이후 중추원은 민중의 생활과 풍습에 치중하게 된다. 편수회가 무려 16년에 걸쳐서 100만 엔의 거액을 들여 엮은 「조선사」는 전 35책 2만 4천 페이지에 이르며, 정체론적인 식민사관의 모태로 인정된다. 「조선사」의 한국사회 이해방식은 봉건사회 결여론, 정체론으로 집약된다.
이같은 정책은 일한일가(日韓一家)의식에서 비롯된다. 인종, 종교, 문자, 풍속, 언어 등의 동일성을 늘어놓고 양자의 일체화가 본래 자연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민족의 독자성 포기, 일본에의 흡수, 한민족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식민지하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를 몸으로 보여준 거인이 있었다. 그 거인은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갔다. 그 거인이 남긴 족적은 충분히 식민지하 우리문화 이해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 거인은 바로 단 하나의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벽초 홍명희다.
벽초의 우리문화 이해방식은 식민지하에서 거두어낸 최고의 성과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이되 식민지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식민지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 있되 좌경적 편향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

많은 자료들은 일본 제국주의 군사통치의 방편으로 대동굿뿐 아니라 민간의술, 민간언어 등 제반 민중생활 전체를 ‘미신’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나 원래 미신이라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일본의 개화파들이 구미의 ‘Superstition'을 번역하여 만든 일본식 조어였다. 그들은 바로 미신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갖고서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인 굿적 심성을 미신으로 공격하면서 미개민족이기 때문에 식민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국제화 시대, 더구나 이미 다양한 일본문화가 들어온 터에 한일 문화교류를 무조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계속돼온,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황인종’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본의 모색은 한갓 신기루 같은 실험에 불과했다고 본다. 일본이 상당 수준의 국제화를 이루었음은 인정하지만, 그 국제화는 지극히 ‘모조적인 서양화’이며, ‘서양병 환자’의 서구 콤플렉스다.

6장 왜 법고창신인가

우리문화 100년사는 ‘들어온 것’과 ‘전래의 것’의 전투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흰 천하무적의 외국군대가 신식 총알을 앞세우고 들어오면 화승총으로 맹렬하게 저항하다가 전사하거나, 아니면 지레 겁을 먹고 백기를 들거나 아예 적군의 간첩이 되어 포상을 받았다.
20세기 말 다시금 ‘세계화’라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자 이번에는 초전부터 전의를 상실한 나머지 아파트 창문에 거저 백기를 내걸었다. 그러다 ‘조국을 살립시다’라는 거리의 캠페인이라도 벌어지면 마음이 조금 동하여 구겨진 태극기를 백기 옆에 내걸며, ‘항복은 했지만 민족은 영원하지요’라는 식으로 자위한 뒤 창문을 닫고, 안락의자에 기대 앉아 할리우드 영화를 즐긴다. 우리 것이 들어온 것에 느닷없이 당한 결과였다.

전통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늘 변화한다. 단지 나쁘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에 따라 스스로 변화한다. 조선 후기에 두루 입었던 팔소매 넓은 옷이 거추장스럽자 구한말에 두루마기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당한 생활양식이었지만 구한말의 생활양식이 변화를 요구한 결과다. 문화에서 어떤 시기의 것이 다른 시기의 것보다 월등히 우월한 경우란 거의 없다.

나는 어느 날 문득 박연암이 던진 한마디에 전율하였고, 숨이 막혀서 어쩔 줄을 몰랐으며, 마침내 우리 시대 우리문화론의 사표를 발견하였다.
법고창신(法古刱新)!
법고창신이란 말은 그의 ‘창작’은 아니다. 당대의 모든 사대부들의 화두가 그랬듯이 일찍이 공자께서 갈파해 놓은 말. 그러나 그에게 이르러 새롭게 태어난 ‘법고창신’은 제철을 만난 물고기처럼 은빛 비늘을 번쩍거리면서 20세기의 마지막까지 충만하게 빛나고 있다.
100년, 200년이라는 시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근대라는 개념이 오직 20세기에 들어와서 성립되었다고 간주한다. 창업 70주년, 창립 60주년, 개교 50주년 식의 지칭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새로운’ 삶은 오로지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는 내재적으로 보아야 하며, 두말 할 것도 없이 조선 후기로 올려잡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 점에서 선인들의 가르침에서 21세기의 화두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근대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氣)는 20세기 전야까지도 우리문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사고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미신이 되었다. 그러나 서구과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기는 재조명될 수밖에 없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물질은 입자적인 성격과 파동적인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양자과학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아인슈타인에 의해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가 발표되었다. 1990년대에는 기를 찍는 카를리안 사진기까지 등장하였다. 카를리안 사진기로 질병을 진단하는 방법은 각 손가락 끝에 경락이 맺혀 있다는 한의학 이론에 의하여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강 같은 기철학의 완성자가 우리에게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망각에 파묻혀 있다.

물질적 문화, 속도전의 문화, 전격전의 문화에서 오히려 작은 문화, 느림의 문화, 진지전의 문화로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문화적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 다중복제, 다중합성의 문화의 시대라고 하여 우리문화의 ‘수공업성’이 평가절하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문화의 시대라는 담론 속에는 문화의 대량복제, 대량 확대재생산을 통한 문화자본의 증식이라는 본질이 담겨 있다.
우리문화의 어떤 부분들이 덜 자본주의적이고 대단히 비경쟁적이라 하여 포기를 권할 수 없다. 우리문화의 상당 부분이 국지적이고 세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천시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7장 21세기 우리 문화 파동 - 우리 문화 산업론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풍물굿을 가지고 세상을 ‘제패’했을 때, 그들의 신명나는 음악을 듣고서 크게 놀란 사람은 정작 우리 자신이었다. 늘상 ‘시끄러운 소리’로 치부하면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의 ‘우아한’소리에 경도되었던 사람들로서는 사물놀이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 의아스럽기까지 하였다. 빠른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심성이 고스란히 풍물과 만났다. 황토방이 유행하고, 곳곳에 난데없는 황토 찜질방, 황토 아파트 따위가 범람하고 있다. 무심히 보아넘겼던 숯조차 새롭게 재인식되고, 우리의 고유 문양이 새롭게 디자인화 되고…….

세계문화의 꽃밭은 빨강꽃, 파랑꽃, 노랑꽃 같은 백화가 만발한 꽃밭이어야 하며, 단일 빛깔로 이루어진 꽃밭은 평화의 꽃밭이 아니다. 미국을 위시한 ‘세계문화의 종주국’은 단일색의 꽃밭을 세계문화의 꽃밭이라고 어거지쓰고 있으며, 심지어 다른 빛깔의 꽃밭을 짓밟는 횡포를 부리기도 한다. 반드시 미국 영화만을 볼 이유가 없는데도 우리에게 미국 영화 보기를 강요하는 것도 그런 횡포의 일종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에스닉의 상품화라는 문제 때문에 고유 문화는 강력한 상품으로 부각되고 있다.

향토 지적 재산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전통문화와 고유 기술을 바탕으로 한 유무형의 창작물이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인 정의를 내리면, ‘우리 민족 또는 각 지방에서 전래된 문화, 기술, 토산품 등을 전승, 발전시켜 배타적으로 수익화가 가능한 유무형의 자산’을 말한다. 향토 지적 재산 중 전통 고유 기술로는 김치, 간장, 된장 등의 발효식품, 식혜, 수정과, 설록차 등의 민속음료, 문배주, 두견주 등의 민속주, 그리고 한방, 의료기기 등의 민간 치료요법, 온돌 난방 시스템, 천연 염료 등을 들 수 있다. 지역 특산물로는 한산모시, 안동포, 순창고추장, 금산인삼, 충무 나전칠기, 이천 도자기 등 한 지역을 중심으로 지리적 여건과 토양에 근거하여 발전시킨 그 지방 고유의 특산물이 있다. 관광상품으로는 그 지방의 독특한 전래동요, 민속놀이, 민요, 민속축제, 설화, 유적, 인물, 자연경관과 지역문화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일체의 유무형의 것들이 바로 향토 지적 재산의 대상이다.

잡종의 힘은 강하다. 나는 우리문화를 강하게 만드는 또하나의 길로 잡종화를 주목한다. 우리문화의 법고창신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되는 잡종은 사실은 잡종이 아니다. 새로운 문화창조다. 20세기 말의 우리문화가 지닌 허점 중의 하나는 역시 획일화다. 가뜩이나 좁은 국토가 획일화로 치닫고 있다. 그런 면에서도 잡종은 필요하다.
잡종과 혼성모방은 왕왕 혼동되거나 경계가 애매하기도 하나, 양자는 다르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있다면 잡종을 ‘새로운 융합’의 산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진정한 잡종은 대등한 관계로 만나야하며 유전인자를 이어받고는 있되 전혀 별개의 창조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며, 혼성모방은 아리랑 드레스처럼 혼재되어 참신한 창조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

강한 잡종은 전통과 공존한다. 전통이 온전하게 보존되면서 새롭게 법고창신하는 가운데 강한 잡종도 생겨난다. 지역문화가 살아 있는 가운데 중앙문화가 더불어 사는 것이며, 민족문화가 사는 가운데 세계문화의 백화가 만발한 꽃밭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문화도 역사적으로 볼 때 토박이문화와 들여온 문화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잡종이 수두룩하다. 유구한 세월 동안 변치 않는 단일 민족문화라는 개념은 틀리다. 정당한 문화적 충격은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며,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잡종은 이미 잡종이 아니다.

8장 유형에서 무형으로 - 무형문화론

무형문화는 기본적으로 민중의 자산이다. 그 점이 대부분의 유형문화와 구분되는 변별성이다. 물론 무형문화라고 하여 왕권과 귀족에 봉사하는 문화적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며, 많은 무형문화가 실제로 그들을 위하여 창작되고 제작되었다. 그러나 무형문화의 거대한 힘은 바로 민중성에 기초하며, 문화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민중문화의 요체가 무형문화에 잘 녹아있다.

전통적 무형문화를 이어나가는 민중의 문화 창조력은 사실상 고립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 문화환경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가 아닌 탓으로 농어민들은 그저 고립무원의 힘겨운 삶 속에서 무형의 자산을 이끌어나갈 뿐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대변할 만한 ‘문화적 이익집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개별 민중의 힘으로 무형문화가 이어져 나간다. 일반 문화예술과 달리 전통적인 무형문화는 시장 경쟁력도 약하다. 따라서 국가 무형문화 정책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문제는 정책의 목표가 정당한가에 있다.
판아메리카나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국가권력의 옹호가 없다면 무형의 문화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빠질 것이며, 자유방임은 전통의 문화를 발가벗겨서 내동댕이치는 결과를 빚는다. 따라서 국가권력은 끊임없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지원의 결과 법고창신으로 나아갈 토양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무형문화의 대표격인 축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축제 속에는 신명이 있으며, 집단적 신명은 반드시 건강한 싸움을 전제로 한다.
사물의 모든 대상 및 현상에는 내적 모순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는 데서 놀이는 그 자체로서 싸움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 및 현상 모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갖고, 과거와 미래를 갖고, 생명을 끝내가는 것과 발전하여 가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의 대립물 사이의 투쟁, 낡은 것과 새로운 것과의 투쟁, 사멸하여 가는 것과 생겨나는 것 사이의 투쟁이 발전과정의 내적 내용, 곧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환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와 관련하여 일정한 생산력의 고양을 전제로 한 공동체와 공동체, 공동체 성원 간의 싸움적 놀이, 놀이적 싸움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놀이는 결코 고립, 분산적인 고정체가 아니라 내부의 모순을 지양하고 통일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변증적 세계관 위에 놓여 있다. 즉 무형의 문화로서의 놀이는 자체의 ‘해방력’이 있다.

21세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세계로 나아가야 하며, 무형문화의 존재가치는 더욱 소중해지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역동적인 세계화로 나아갈 사고의 틀, 조직의 틀이 필요하다. 시대정신과 과감한 전환으로 21세기 우리문화를 창출하는 데서 무형문화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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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주년 광복절을 코앞에 두고 읽게 된 이 책은 무척 새삼스럽다.
1895년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아 오던 조선은 일본에 의해 1910년 8월 29일 합방되고 말았다. 이후 36년간의 굴욕적이고 비참했던 시간들과의 만남은 여전히 아프기만 하다. 과연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이루었는가.

저자의 ‘내부 고발’격인 슬픈 고백은 차라리 고맙다.
‘우리문화를 연구하는 민속학계의 친일 경도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식민지 1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 민속학 2세대는 대부분 일본에서 학위를 받는다. 일본 유학이 죄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나, 다분히 일본 민속학의 ‘수입 오퍼상’ 노릇을 하는 이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교수를 한다는 것은 세계화란 관점에서 매우 권장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일본에 복속된 채 식민성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제3세대 젊은 연구자들도 다수가 일본에서 학위를 받고 온다. 지난 100년간에 걸친 한일간의 굴절의 역사를 그들 자신이 앞장서서 상호 평등한 선린관계로 발전시켜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저자는 ‘우리문화가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사연’으로, 루쉰(魯迅)의 소설 「阿Q正傳」에서 따온 아큐(阿Q)라 이름붙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아큐'라는 용어는, 밖에서 실컷 얻어맞고 패했으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나는 패하지 않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승리했다’고 믿는 정신상태를 의미하며, 루쉰이 노린 것은 외세에 노상 패하면서도 정신적 승리를 주장하는 중국인에 대한 비판이다.)
아큐가 되어버린 대중들의 우리문화에 관한 체험 인식과 지적 능력은 그야말로 기호찾기 수준으로 쇠락하였으나 이를 이유로 아큐들만을 나무랄 수 없다고 한다.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일면 고맙기도 하지만 지금도 과연 그렇기만 한가를 되묻고 싶다. 아니, 내 자신이 아큐는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학교, 군대, 교회, 기업, 길거리와 광장, 마을과 도시, 길 가는 사람의 복장과 말투, 몸짓 등 온통 ‘국적 불명’으로 뒤덮여 있는 공간 속에서 우리 것은 무엇인지, 광복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읽어주는 저자가 고맙고, 우리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글이 반갑다.

하루에 두 번 떠오르는 금성의 본디 우리말은 해질 무렵에는 ‘개밥바라기’, 새벽녘에는 ‘샛별’이라고 한다. 우주마저 서구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우리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다시 읽는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 눈물겹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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