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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12일 10시 37분 등록
금빛 기쁨의 기억- 한국인의 미의식
: 강영희 저 / 일빛 /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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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와 나의 대화: 소고
이 책을 읽으며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멋을 모른다’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여러 그림과 글씨, 사진과 풍경, 자기와 탑에서 나는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알려는 시도나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안목이 없는 것이다. 바로 얼마 전, 유홍준의 ‘완당평전’을 읽었기에 그나마 이것이라도 느낀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지적 무식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미적 무식조차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자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빈 멋’이다.

저자 강영희는 ‘아름다움은 취향’이고 ‘취향은 제 마음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옷을 입어도 어떤 이는 잘 어울리고 다른 이는 별로인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모델이 시원찮아서 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간혹 보면 내 눈에 확 들어오는 옷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 마음에 착 들어왔기 때문에 눈에도 띠었을 것이다. 대개 그런 옷은 나한테 잘 어울린다. 편하고 자연스럽다.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옷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소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어떤 곳에 있으면 그 곳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과 그 곳이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 없을 때 그곳은 그저 하나의 공간이었고 심심한 풍경이었다. 그가 그 안에 있음으로써 그곳은 하나의 의미가 되고 이야기가 되고 울림이 된다. 장소와 사람이 어울리면 보는 사람도 즐겁다. 내 책상에는 구본형 사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책상과 사부와 찍은 사진, 그리고 나는 한데 잘 어울린다.

멋모르는 나지만, 종종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실용한복을 입고 싶다. 그것에 내가 좋아하는 배낭을 매고 편한 신발을 신고 회사에 가고 싶다.’ 어릴 적부터 한복을 좋아했다. 한복을 보는 것, 입고 있는 것은 좋아했지만 입는 과정은 좋아하지 않았다. 한복은 이쁘고 편하지만, 입을 때는 귀찮았다. 하지만 실용한복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입기 편하다면 나머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 이제까지는 생각에 그쳤지만, 조만 간에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어떨까? 내 상상으로는 꽤 괜찮을 것 같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한복을 그냥 좋아했고 종종 한복에 대해 생각했으며 한복 입은 새로운 나를 상상해왔다. 별거 아니겠지만, 그래도 실용 한복을 입고 운동화 신고 배낭 매고 회사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쓰고 보니 괜찮고 실천해보려고 하니 설레인다.


책을 읽으면서 크게 공감한 부분이 있다.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49]

옳다. 기억 없이는 성찰도 없다. 이는 재료가 없으면 요리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기억 없이 성찰이 가능하려면 성찰의 연금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찰의 연금술은 없다. 친일파를 잊자고? 독재의 기억을 털어버리자고? 미래를 위해 과거는 잊자고? 미래를 준비하기도 바쁜데 과거의 기억은 묻자고? 웃기지 마라! 성찰하지 않은 과거, 그것으로부터 배우지 못한 과거는 ‘오래된 미래’가 된다. 그것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그리하여 과거의 그 때보다 더 큰 어려움과 치욕을 안겨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잊은 결과를 기억하자.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기억하자. 윌 듀랜트는 ‘역사는 예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이고 ‘역사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날짜는 바뀌어도 사건은 언제나 똑같다’고 말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이라는 신영복의 말도 같은 의미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가 보이고, 미래가 보이면 현재의 길에 충실해질 수 있다. 그 반대가 아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다. 당신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15]

나는 머뭇거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했는가? 없다. 그저 나 스스로 그런 선택에 편협함에 익숙했을 따름이다. 이런 나의 편협함을 저자는 나를 대신하여 합리화시켜준다.

“우리는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제로섬(zero-sum) 게임과도 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세계인의 파이가 커질수록 한국인의 파이는 줄어든다.”[15]

과연 그럴까? 나는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과 자랑스러운 한국인은 제로섬(zero-sum) 게임과도 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는 명제를 의심한다. 다행스럽게도 저자 역시 이 명제를 의심한다. 나의 의심의 눈초리를 확인한 그녀는 한결 수월하게 이 의심을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책의 끝에서 다시 묻는다.

“흔히 두 개의 길이 있다고들 한다. 毬ご?한국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279]

그녀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의 물음은 애당초 잘못된 것이라고. ...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을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으로 여겼으며, 이같은 회통적인 사고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고.”[279]

그녀는 결론을 내린다.

“...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279]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과 자랑스러운 한국인은 제로섬(zero-sum) 게임과도 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는 명제가 왜, 어떻게,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으로 변환(變換)되었을까?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문장들에 있다. 어디? ‘그들’, ‘회통적 사고’, 그리고 ‘...’에 있다. 내가 ‘그들’이라는 모호한 표현과 ‘...’로 생략한 것은 그대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혹시라도 호기심이 짜증으로 변환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회통적 사고’라는 보다 분명한 실마리도 함께 걸어놓았다(아! 이 세심한 배려와 멋!).

부족한가? 그럼, 마지막 유혹!

한국인의 미의식, 정체성, 세계인과 한국인, 흥미로운 주제다. 호기심이 절로 난다. 하지만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호기심만으로는 안 된다. 강영희는 대학에서는 동양사학을, 대학원에서는 국문학과 영화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에는 연극 평론에서 시작하여 문화 평론으로 확장했고 인물 인터뷰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책 쓴다는 핑계로 6년 이상 전국과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녀는 스스로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雜事)에 대한 잡문(雜文)을 써’왔으며 ‘세상의 모든 잡학(雜學)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있다고 말한다. 눈치 챘는가? 회통적 사고를. 사고가 회통(會通)하니 책도 회통(會通)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읽어 보라.



■ 저자의 목소리: 인용
- ‘[]’ 안의 숫자는 page를 지칭한다.
- ‘인용’에서 별다른 표기가 없을 경우, 저자의 말이다.
- ‘*’ 표시는 간단한 설명과 나의 느낌이다.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15]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다. 당신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15] 우리는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제로섬(zero-sum) 게임과도 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세계인의 파이가 커질수록 한국인의 파이는 줄어든다.

[13]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김용옥, ‘도올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 ‘석도화론’)
* 김용옥이 백남준에 대해 한 말이다.

[25] 그 같은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의 열매다.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이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28]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2. 기차가 있는 풍경

[38] 기억은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이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 시간은 모든 것을 잊게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한다. 사랑은 기억이고 추억이다. 추억은 힘이 없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42]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49]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61] 서양은 어디까지나 행위자(actor)이고 동양은 수동적인 반응자(reactor)이다. 서양은 동양의 행동의 모든 측면에 관하여 관찰자이고, 재판관이며, 배심원이다.(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27] 아름다움에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愎?

[127-128]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화두를 짐지고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취향을 손에 쥐고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누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저마다의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남의 취향이 아닌 나의 취향을 통해 그곳에 도달한다. 서구인은 서구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황금비라는 취향을 만들어냈고, 한국인은 한국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다른 이름의 취향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움의 취향을 달리 말하면 미의식이 된다. ...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9]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언인 ‘아다옴’의 본뜻이 사호(私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130] 그러면, 아름답다는 말 그 자체는 무슨 뜻인가. 이 어원을 캐 보는 것은 한국적 미의식의 구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아름다움이란 말의 고어원형(古語原形)은 ‘아다옴’이다. ... 이 아다옴의 아은 ‘사(私)’의 고훈(古訓)이다. .... 아다옴의 다옴은 답(如)이니 꽃답다, 사나이답다 등의 현행어에 그대로 살아 있는 말로서 같다는 뜻의 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원의는 ‘私好’의 뜻으로 제 마음과 같다.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 된다.(조지훈, ‘멋의 연구’

[131] 진 · 선 · 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정신미(精神美)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165]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169] 인과율(因果律)과 목적률(目的律)
* 과학은 인과율을 따르고, 인문학은 목적률을 따른다.

6. 고지도와 명당론

[185]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한영우, ‘우리 옛 지도와 그 아름다움’)

[197] 한국인에게 풍경이란 자연적인 것인 동시에 인문적인 것이다. 인문적인 예찬(禮讚)이 덧붙고 나서야 비로소 자연과 인간은 하나가 되어, ‘풍경’으로 완성된다.

[198]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만의 경관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경관의 일부가 되어 이루어지는 경관체험이 보다 인상적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공간취향 또는 공간적인 자의식을 얻는다.

7. 백의와 색동

[210] 여백(餘白)은 빈공간으로 나타나지만, 동양화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양화에 있어서 공간은 문자 그대로 빈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그들은 그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빈틈없이 그려 넣는다. 그러나 동양화에 있어서 공간은 그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비가시적인 풍요로움으로부터 실체인 모든 것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기도 한다. ... 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박용숙, ‘한국미술의 해학정신’)

[219]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처럼 일면적이며 배제적인 성격을 지닌 이데올로기의 한 자락을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일부로 삼아서는 안 된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231]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231-232]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 개성 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232] 취향은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문저인 지혜의 산물이다. 취향은 인간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룩한 인문적인 가치의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제멋대로의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

4.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262]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 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도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271] ‘남의 유행’을 참고로 해서 ‘토속적인 자기’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이랄까. 아니면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본’ 것이랄까. 이것이 바로 김정희의 창작방법론으로 거론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올바른 해석이다.
* 많은 기업들이 벤치마킹을 도입하고 있다. 벤치마킹이나 선진기업의 베스트 프랙티스를 배우려는 기업은, 무엇보다 법고창신의 뜻을 곰곰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277]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78] 흔히 두 개의 길이 있다고들 한다.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의 물음은 애당초 잘못된 것이라고. 백남준과 겸재가 그랬으며 추사도 그랬듯이,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을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으로 여겼으며, 이같은 회통(會通)적인 사고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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